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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오래된 미래’

  • 작성일 2007-04-02
  • 조회수 3,829

 

한국문학의 ‘오래된 미래’

―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이선우




1. 

젊은 작가들의 ‘전복적 상상력’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작품의 세계가 뚜렷이 다른 작가들조차도 ‘전복적 상상력’이라는 코드 하나로 뭉뚱그려 논의되기 일쑤다. 문학잡지의 특집에도, 문학상 수상작품들의 광고 문구에도, ‘전복적 상상력’이라는 표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최근 시단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미래파’라는 용어가 그러하듯이, ‘전복적 상상력’이란 말은 이제 그 실체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리고 고스란히, 문학의 상업화를 추동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렇다면 ‘전복적 상상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최근 평자들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고전적 서사 문법의 파괴와 정통 리얼리즘의 폐기’ 정도로 거칠게나마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전복적 상상력’이 겨우 이런 것이라면, 이는 그다지 ‘전복적’이지 않다. 이상을 비롯하여 최인훈, 서정인, 박상륭, 이청준, 이제하, 이인성, 최수철, 성석제 등 우리 소설사에는 꾸준히, 서사 문법을 새롭게 개척하면서 소설의 영역을 확장해 온 작가들이 존재했다. 특히 이인성은, 리얼리즘이 시대적 당위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80년대 초엽에 리얼리즘의 원칙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낯선 시간 속으로』1)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적잖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알다시피 당시의 억압적 사회 현실은 문학으로 하여금 사회 현실에 대한 실천을 중시하게 했고, 이에 따라 리얼리즘은 오랫동안 시대적 당위가 되었다. 그러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와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타자’로서의 소설이, 현실논리와 마찬가지로 지배적 문법과 세계관을 ‘시대적 당위’로 삼은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인성 소설의 형식실험이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은, 문학 규범에 대한 그의 도전이, 70―80년대를 가로지른 이 이중의 폭압적 현실 한가운데서 행해졌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최근의 젊은 작가들은 이에서 얼마나 더 멀리까지 나아간 것일까. 내가 다시 이인성의 소설을 읽은 것은 이러한 의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인성의 형식실험이 나름의 미학을 달성하지 못했다면,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그의 소설을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해하기로 소문난 이인성의 소설이 이룩한 성과는 무엇일까. 『낯선 시간 속으로』를 중심으로 그의 형식실험이 갖는 의의와 한계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자. 2000년대 젊은 작가들의 ‘전복적 상상력’에 대한 논의는, 그 다음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예상과는 달리 꽤 높은 출판부수를 기록했다고는 하지만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를 끝까지 다 읽은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하더라도 한 번에 그의 소설을 이해한 독자 또한 별로 없을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가 하면, 현실과 환상, 꿈과 실재가 아무런 설명 없이 뒤섞이고, 서로 다른 화자의 진술이 단락의 구분도 없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뿐인가. 인물은 이름이 없고 주체는 분열되어 있으며, 일관된 사건의 전개보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의식의 흐름이 지배적이다. 사물에 대한 강박적인 묘사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이미지는 서사의 흐름을 차단하며 변주되면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과 공간들 역시 독자를 쉽게 혼동에 빠뜨린다.

그럼 우선 정리를 좀 해보자. 『낯선 시간 속으로』의 사건은 시간의 단위에 따라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1973년 겨울 : 아버지가 죽자 군 복무중이던 ‘나/그’는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되어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강원도 산골에 있는 ‘풀무배움집’에 들른다.

②1974년 봄 : ‘나/그’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불참하고, 창경원에서 망우리 ‘순교자 기념관’까지 돌아다니며 하루 종일 방황한다. 야학에도 전화를 걸어 앞으로는 나갈 수 없다고 통보한다.

③1974년 여름 : 아침에 일어난 ‘나/그’가 학교에 들렀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나’는 무덤에 가서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나’의 과거인 ‘그’를 장사지낸다.

④1974년 가을 : ‘나’는, ‘그’가 자신의 심정과 주변 상황을 변형해서 쓴 희곡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것을 관객석에서 지켜보며 혼란과 깨달음을 얻는다.

⑤1974년 겨울 : ‘너’와 함께 미구시에 가서 며칠을 보내면서 ‘나’는 마침내 자살충동을 극복하고 삶의 의욕을 회복한다.

 

물론 이 시간대에 포섭되지 않는 이야기도 있다. 이를테면 「낯선 시간 속으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병정의 시간. 「그 세월의 무덤」에서 ‘그’가 골목길에서 만난 아이가 골목의 끝에 이르러 ‘그’의 현재가 되듯이, 「낯선 시간 속으로」에서 ‘나-너’가 만난 병정은 ‘나-너’가 미구에 머무르는 닷새 동안 ‘나’의 과거를 연대기 순으로 보여준다(처음에는 해안 경계를 서고 있는 병정이, 나중에는 서울을 그리워하는 병정이, 좀더 지나면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병정이, 마지막에는 제대병이 등장한다).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보면 소설에 등장하는 병정들은 모두 다른 인물들이 될 수밖에 없으나(실제로 ‘나’와 병정은 만날 때마다 서로 처음 만난 것처럼 행동한다), 서울 출신이라는 점, 대학을 다니다 시위 전력 때문에 군대로 쫓겨 왔고 애인의 변심 때문에 손목에 칼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 경력이 있다는 점,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되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병정들은 모두 ‘나’의 과거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천연덕스럽게도 ‘1974년 겨울의 나’와 ‘1973년 겨울 이전의 나’는 한 공간에서 만나 모르는 사람인 듯 대화를 나눈다.

「낯선 시간 속으로」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나-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 또한 때로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나는 길 건너편 양장점 쇼 윈도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발견했다. 여자가 남자의 어깨 위에 살짝 고개를 대었다가 떼어내며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다정스레 여자를 마주보았다. 나는 입김을 내뿜으며 추위에 눈을 찡그렸다.


너는, 내 팔을 잡고, 피로한 듯 잠시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쇼 윈도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너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중략) 우리가 쇼 윈도로부터 돌아섰을 때, 길 거너편에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남자를 시야에서 떨쳐냈다. (194?­195쪽)


혼자 여행 온 ‘나’와, ‘너’와 함께 여행 온 ‘나’가 동일한 시공간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듯한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같은 공간에서 만나거나 서로 교차되고 있는 ‘나-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으로 인해 「낯선 시간 속으로」는 「길, 한 이십 년」2)에 못지않게 혼란스럽다. 서사의 기본축에 해당하는 ‘나-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에 대해 평자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1974년 겨울은 ‘나의 시간’이고 ‘나-너의 시간’은 1973년 겨울 이전3)이라고 보는 평자도 있고, ‘나-너의 시간’ 역시 1974년 겨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젠가도 한 번 온 적이 있었던 숲속의 여관촌”(183쪽)이라는 ‘나’의 진술은 ‘나-너의 여행’이 과거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나-너의 여행’이 과거라면, ‘내’가 또다시 자살에의 충동을 느끼며 미구시로 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너의 여행’을 통해 ‘나’는 이미 삶의 의지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너의 시간’ 속에서도 ‘나’는 예전에 미구시에 온 적이 있음을 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너의 여행’ 역시 현재진행형인 것은 아닐까? 혹은 ‘나’의 상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 미래에나 가능한 여행이거나. 홀로 여행하고 있는 ‘나’와, ‘너’와 함께 여행하는 ‘내’가 ‘나’의 분열된 두 자아일 수도 있다(‘너’와 함께 여행하는 ‘나’와 ‘나-너’를 지켜보는 ‘나’). 물론 ‘나’와 함께 여행하는 ‘네’가 ‘나’의 분신이라는 가정도 가능하다. 무엇이 ‘사실’인지 「낯선 시간 속으로」를 자세히 한번 들여다보자.


3.

아래는 「낯선 시간 속으로」를 시간 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첫째 날>

(A) 나-너 :야간에 바다에 나갔다가 병정에게 검문 당함.

(A′) 너 : 저녁 무렵 미구시에 도착. 오랫동안 거리를 서성이다가 버스를 타고 바다로 와 송파여관에 짐을 풀고 미구관광호텔에 가서 식사함. ⓐ′야간에 바다에 나갔다가 병정에게 검문 당함. 여관에 돌아와 잠.

<둘째 날>

(B) 나 : 바다로 나갔다가,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성심약국 옆 술집에서 소주와 회를 먹으며 우체통을 바라봄. 술집을 나와 시내로 나감. 가죽점퍼를 입은 남자를 피해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전봇대에서 연극 포스터를 봄. ⓑ거리를 지나다가 길 건너편 양장점 쇼윈도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발견함.

(B′) 나-너 : ⓑ′쇼윈도에 비친 ‘나-너’의 모습을 봄. 길 건너편에서 한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함. 다방 ‘탈’로 들어감. ‘그날’을 떠올리고 ‘그날’에 대해 이야기함. ‘탈’을 나와 우체통을 바라봄. 점을 보러감.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대천 강둑으로 감. ‘나’ 혼자 강둑을 되돌아 뛰어나옴.

(B″) 나 : 강둑 어귀의 포장술집에서 잔술을 마시다가 옆자리 여자로부터 크리스마스 파티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음. 그녀와 데이트를 하다가 그녀의 입술을 심하게 깨물고 여관으로 돌아옴. 미로를 헤매며 ‘너’에게로 가는 꿈을 꿈. ⓑ″꿈을 깬 뒤 주위를 손으로 더듬어 ‘네’가 옆에 없다는 것을 확인함. 머리가 뜨거워 어둠 속에서 방문을 열어놓음.

<셋째 날>

(C) 나-너 : ⓒ‘내’ 잠자리에서 한 팔 거리쯤 떨어진 곳에 ‘네’가 옷을 입은 채 옆에서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함. 방문을 열어놓고 자는 바람에 ‘너’는 감기에 걸림. 바닷가로 나갔다가 식당에 들어감. 식당을 나와 도깨비집으로 들어감. 거울의 방에서 혼란과 두려움을 느낌. 도깨비집을 나와 철길을 걷다가 호숫가로 내려감. 예전과 달리 갑갑함을 느낌. 약을 사러 버스정류장 근처의 약국으로 감. 병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림.

(C′) 나 : 버스정류장으로 나가 근처 우체통에 편지를 집어넣음. 버스정류장 근처에 가득한 사람들로 인해 감정이 뒤틀림. 우체통이 일그러져가고 POST 글자가 해체되는 것을 느낌. 성심약국 근처의 술집에 들어가 우체통을 보며 편지라는 형식에 대해 의심함. 사내와 여자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나감. ⓒ′사내가 다시 돌아와 ‘나’와 함께 술을 마심. 사내의 2차 제안을 거절하고 바다로 향하면서 사내와 함께 ‘그들’이 되는 상상에 빠짐. 바다를 향해 달리다가 병정을 스쳐 지나침.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감.

(C″) 나-너 : (넷째 날 아침 ‘너’의 진술과 ‘나’의 회상) 약국 옆의 조그만 주점을 나와 암림산에 있는 법한사로 올라감. 금령계곡의 얼어붙은 폭포를 보고 두려움을 느낌. 법당 앞의 안내판을 읽고 간단히 절을 둘러본 뒤 절벽 아래 死通岩을 보러 내려감. 하산하다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맴. 도중에 사람을 만나 겨우 산을 내려옴. 여관에 도착한 뒤 ‘나’는 바로 쓰러져 잠이 듦. ‘너’는 어지러움을 느껴 잠을 자지 못하고 환각에 빠짐. 한밤중에 일어나 ‘나’는 ‘너’와 성관계를 가짐.

<넷째 날>

(D) 나-너 :‘나’는 바다 속으로 추락하는 꿈을 꾸다 잠을 깸. 전날의 등반과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 일어나 씻고 식사를 함. ‘너’는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나’를 떠남. ‘나’는, 열아홉시 오십 분 발 서울행 기차표를 사고 긴 여분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 근처를 헤매게 될 ‘너’를 상상함.

(D′) 나 : 다시 잠들고 싶지만 잠들지 못함. 눈 내리는 바닷가로 나감. 손목에 상처가 나 있는 병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눔. 여관으로 돌아와 옷을 벗고 자신의 몸을 봄. (자살을 결행하기 위해) 깨끗한 옷을 입고 짐을 정리함. ⓓ′술집에서 만났던 사내와 여자가 술을 들고 여관으로 찾아옴. 술에 취해 사내가 쓰러지자 여자가 먼저 돌아감. 여자를 배웅해 주고 돌아와 거울을 보다가 자신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함. 사내가 시간의 첩자라는 것을 깨닫고 바다로 데리고 나감. 병정으로 하여금 사내를 죽이게 유도함.

(D″) 너 : (5일째 아침 너의 진술) 대합실에서 쪼그려 앉아 자다가 악몽(연극이 끝난 뒤,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가려다가 ‘내’가 붙잡는 바람에 망설임. 계단에서 넘어진 ‘너’를 ‘그들’이 놀려대자 ‘그들’로부터 도망침. 여자의 도움을 받아 숨었으나 여자가 더 깊은 함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버스에 밀어 넣음. ‘그녀’가 또 다른 ‘너’였다는 것을 깨달음)을 꿈. 악몽에서 깨어나 눈 내리는 거리를 쏘다님. 자정이 넘어서 여관방 문 앞에 되돌아 옴. 누구냐는 ‘나’의 물음에 정체성의 혼란을 느낌. 꿈속에서 ‘그녀’를 죽일 때 자신의 이름(과거의 자신)도 죽었다는 것을 알고 희열의 눈물을 흘림. 

<다섯째 날>

(E) 나-너 : ‘네’가 돌아와 ‘내’ 손목의 상처를 어루만짐. 바다로 나감. ‘나’는 흰 눈으로 쌓인 세상을 보며 온 세상이 다 파도며 우리의 문이라고 말함. 식당으로 들어가 ‘너’는 어제 느꼈던 희열과 삶에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함. 식당을 나와 도깨비집 거울의 방으로 들어감. 분열과 혼돈을 극복하고 도깨비집을 나와 철길을 따라 걸음. 호수로 내려가 지금껏 가보지 않은 좁은 산책로를 걸음. 울고 있는 제대병을 만남. 제대병과 헤어진 뒤, ‘나’는 제대병(‘나/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함. 상처를 간직하고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먹음.

(E′) 나 : 상처를 간직한 삶에 대해 생각함. ⓔ′미구역 광장에서 여행 가방을 들고 역 건물을 막 나선 한 쌍의 남녀를 바라봄. 그들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감.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받아내겠다는 각오를 다짐.


미구시에서의 닷새 동안, ‘나의 시간’과 ‘나-너의 시간’은, 몇몇 장면(ⓐ-ⓐ′, ⓑ-ⓑ′, ⓒ′-C″, ⓔ′)만 제외하면 서로 교묘히 교차된다. 이 교차는, B′→B″, C→C′와 같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런 공간 이동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나의 시간’과 ‘나-너의 시간’은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 연속적 시간의 선후관계에 있다는 가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1974년 겨울에 ‘나’와 ‘너’는 미구시로 함께 여행을 왔지만, 가끔은 따로 행동한 경우도 있다’ 정도의 독해가 가능해진다. B″에서 ‘너’는 정말 혼자 왔냐는 ‘그녀’의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뿐 아니라 “나는 어둠의 바닥을 내려다보며 손을 더듬었다. 네가 없었다. 너는 나와 동행하지 않았다.”(226쪽)고까지 이야기하고 있지만, ⓒ에 의하면 그것은 어둠 속에서 일어난 ‘나’의 실수고 착각이다. ‘‘나’는 ‘너’와 함께 강둑에 나갔다가 혼자 되돌아 나와 ‘그녀’와 시간을 보낸 뒤 여관에 먼저 들어와 잤고, ‘너’는 ‘내’가 자고 있을 때 들어왔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B″와 C 역시 연속적 시간의 흐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C″와 배치되는 ⓒ′의 경우, ⓓ′에 근거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것부터 꿈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전체가 꿈인지 그 중 일부가 꿈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4) ‘주점→바다’가 아니라 ‘주점→암림산’으로만 수정해도, ‘나의 시간’과 ‘나-너의 시간’은 충돌하지 않는다.

ⓑ와 ⓑ′의 경우는, ‘쇼윈도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한 쌍의 남녀’와 ‘나-너’를, ‘길 건너편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한 남자’와 ‘나’를 별개의 인물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소설은 교묘히 이들이 같은 인물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쇼윈도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남녀가 ‘나-너’만 있으란 법은 없다. 이들이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면서 한 공간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미구역을 떠나는 ‘나’가 막 미구역에서 나온 ‘나-너’를 바라보고 있는 ⓔ′의 경우는 소설의 전후맥락상 일종의 플래시백(Flash-back)임이 명백하다.

문제는 ⓐ와 ⓐ′의 충돌인데, 이것도 C′를 통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C′에서 ‘나’는 마치 혼자 있는 것처럼 ‘너’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C와 C″를 종합해 보면 C′에서도 ‘나’는 ‘너’와 함께 있어야 한다. 이는 물론 C와 C′, C″가 연속된 시간이라는 전제 하에 가능한 추리이므로 역으로 C와 C′, C″가 각기 단절된 시간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C′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도 ‘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A′에서도 ‘나’는 ‘너’와 함께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 역시 가능할 수 있다. 이는 야간에 해변에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두 번 다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로도 지지받을 수 있다.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었다면, A와 A′ 중 무엇이 과거의 사건이든 간에 병정의 검문을 받고서야 “그렇겠군”(186쪽) 하고 깨달을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와 ⓐ′는 동일한 시간의 동일한 사건이며, 따라서 A′는 A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A′에서 ‘나’는 ‘너’와 함께 있으면서도 ‘너’에 대해 진술하지 않는가. 왜 마치 혼자인 것처럼 ‘우리’라는 주어를 버리고 ‘나’라는 주어를 채택했는가. 더구나 이미 한 번 진술한 사건을, 왜 새로 겪은 사건인 듯 변주하며 다시 진술하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은 그 안에 이미 부동(不動)의 ‘객관적 실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주관적 현실 역시 우리가 실재로 경험하는 ‘현실’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까지 나갈 것도 없이, 과연 객관적 실재라는 것이, 모두가 똑같이 기억하는 부동의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비판만으로도 앞선 문제제기들은 모두 그 실효성을 잃는다.

많은 지면을 할애해 「낯선 시간 속으로」의 조각난 ‘나-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을 퍼즐 맞추듯 맞춰 보았지만,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상상인가, 무엇이 먼저 일어난 일이고 무엇이 나중에 일어난 일인가 따위를 굳이 밝혀내려고 한 나의 노력 역시, 그러므로 무의미해진다. 교묘하게 짜 맞추면 뭔가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듯도 하지만, 여기에는 아직 무수히 많은 빈틈들이 존재한다. 언제든 이 퍼즐의 모양을 전혀 다르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없음으로 있는’ 빈틈들.


4.

어떻게든 이 빈틈들을 메워 서사구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나면, 그제야 빈틈의 존재와 그 의미에 생각이 가 미친다. 과연, 시간이나 인과관계에 따라 매끈하게 정리된 『낯선 시간 속으로』는 그 순간 이미 『낯선 시간 속으로』가 아니다. 모든 소설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낯선 시간 속으로』는 형식과 내용을 분리해 읽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인성은, 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빈틈들을 만들어 이토록 독자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일까. 서사중심주의의 해체나 의식중심주의의 해체 등을 그 이유로 들 수도 있겠지만, 이는 무엇보다 인습화된 언어과정에 의한 사고의 자동화를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뭐? 우편 마크? 문득, 야릇한 의혹이 든다. 그래, 나는 그것이 우편 마크라는 것을 짐작으로 확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까 그것이 우편 마크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중략) 내 시선은 그것이 내보이는 형태를 그냥 지나친 채 어떤 추상만을 바라보았을 것이다.(188쪽)


‘내’가 “그것이 우편 마크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편 마크는 이미 굳어진 ‘형식’이기 때문이다. 기호는 의미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의 대표적인 도구지만, 대부분의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조작일 뿐이다. 따라서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기호를 관습화함으로써 사람들의 지각작용과 인식작용을 은연중에 조정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호의 관습화는 창조적인 의미작용에는 방해가 된다. 관습화된 기호와 그 의미작용에 익숙해지면 언어에 바탕한 인간의 사고 역시 자동화되기 때문이다. 형식과 규율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관습화된 사고는 외부의 어떤 통제에 대해서도 저항할 수 없으며,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의 부조리를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관습화된 언어를 통한 우리의 소통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그래, 나는 안다. 그것은 ‘우편’ ‘POST'라는 글자들과 우편 마크다. 그 형체와 색과 글자들과 마크―그것은 어떤 고유한 형식 또는 이름의 규율이다. 이제, 비로소, 나는, 똑같은 (중략) 우체통들을 생각한다. 또, 나는 그것들을 그곳에 존재하게 만든 어떤 ‘그들’을 생각한다. (중략) 지금 저 단단한 쇳덩어리 속에 굳게 갇혀 ‘우리’가 공유하는 어떤 예정된 과정을 기다리고 있는 편지라는 형식을, 그 형식을 통해서 안심하고 있는 모든 ‘’들 혹은 ‘’들을,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를. 그런데도 나는 그들과 다른 나 혼자만의 무엇을 감히 누구에겐가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단 말인가… (중략) 그 견고하지도 못한 말을 가지고,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헛된 말들을 적어가지고.”(246­?247쪽)


우체통이나 편지는 원래 소통의 도구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어떤 고유한 형식 또는 이름의 규율”이라고 인식한다. 대부분의 형식과 규율이 그렇듯이, 그것들은 더구나 ‘그들’의 형식이다. ‘우리’를 가두고 기만하는 ‘그들’의 형식과 규율로 인해 ‘나’와 ‘너’들의 진정한 소통은 차단되거나 번번이 잘못 전달된다. 언어와 이 세계의 질서에 대해 ‘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낯선 시간 속으로』에 나타난 해체된 언어와 서사 구조, 파편화된 시공간과 분열된 자아들은 모두 이 관습화된 언어와 사회에 대한 의심과 저항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로써, 이른 바 젊은 날의 ‘혼돈에 어울리는 형식’5)이 창출된다.

『낯선 시간 속으로』를 혼돈스럽게 만든 대표적 장치는 자아의 분열이거니와, 이는 이 소설이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라 ‘반성의 소설’(황지우, 「문학의 순교자이자 도박군」『우리시대의 한국문학』 제21권, 계몽사, 1986)이라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나’는 외형적으로는 오직 ‘나’ 한 사람이지만, 23년의 생을 회의하고 반성하기 위해서는 ‘나’의 과거를 ‘내’가 해부해야만 하는 것이고, 이 때 ‘반성하는 나’와 ‘반성되는 나’가 분리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나’의 분열된 자아는 주로 ‘그’로 지칭되지만, ‘나’의 분열된 자아가 ‘그’뿐인 것만은 아니다. 자아를 분열시켜 스스로를 객관화하면서 ‘나’는 ‘내’ 속에 있는 부정적 자아로서의 타자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그들과의 단절을 시도한다. 일테면 ‘그림자’로 명명되는 사내 역시 나의 또 다른 자아(초자아)이다. 그림자처럼 늘 ‘나/그’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사내를 보며 ‘나/그’는 “저 그림자가 바로 그 자신의 한 부분이 아니었느냐”(89쪽)고 속삭인다. “그의 깊은 곳에 숨겨두고 ‘저들’의 단위법으로 자기 자신을 재어보는 자막대기, 제 마음이 그림자, 그림자의 수렁”(90쪽)이라는 것이다. ‘나/그’가 오랫동안 부정해온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나/그’가 극복해야 할 ‘나’의 또 다른 자아이다.


이제 나는 과거야. 나는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할아버지처럼 행동했어. 나는 당신들에 대한 반항을 통해서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사실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아버지의 책을 베고 잠자며 할아버지와 같은 믿을 꿈꾸고, 그 핏줄의 밥을 먹은 거야. 나에겐 변명의 여지가 없어. 그는 단숨에 잔을 비운다. 내가 그 잔을 채운다. 하지만 그것만이 내가 무덤으로 가려는 이유는 아니지. 문제는 내 삶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밀고 나갈 수 없다는 데 있다고나 할까. (중략) 나는 내 믿음을 살아가지 못했다는 데 대해, 그리고도 내가 살아 있다는 데 대해,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 이제는 지금의 나만으로는 안 돼.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해. (112?­113쪽)


‘지금의 나만으로는 안 된다’는 이 부정의 의식은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할아버지처럼 행동했던” 과거의 ‘그’를 죽이고 현재의 ‘나’를 새롭게 탄생시킨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 태어난 ‘나’조차 끊임없이 자살의 욕망에 시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상징적 죽음에는 부정의 의식만 있지 생성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내 앞에서」에 이르면 “주어진 것으로 주어진 것을 벗어나는 해방감”(160쪽)에 대해 깨닫고 있는 듯하지만, 이 깨달음조차 아직은 의심과 회의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주어진 것으로 주어진 것을 벗어나야 하는 끊임없는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는 없을까? 아마도 그럴 수 없겠지. 그럴 수 없다면, 주어지는 것을 받아낼 수밖에 없다면?…”(161­162쪽) ‘나’는 주어진 것을 받아낼 수밖에 없는 현실과, 그 끊임없는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있을 뿐이다. “주어진 것으로 주어진 것을 벗어나는” 이 역설이 어떻게 ‘해방의 동력’이 되는지, 나는 아직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자아를 죽이고도 ‘나’는 ‘그들’에게 돌아가고, ‘그들’에게 돌아가고도 ‘우리’라는 일체감을 느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그’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과거의 자아와 단호한 단절을 선언하긴 했으나, ‘나’는 ‘그’를 넘어설 어떤 논리도, 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를 부정하고 ‘그들’을 부정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세상을 부정한 ‘나’에게 남은 것은 오히려 ‘절망’과 ‘치욕’과 ‘서러움’ 뿐이다. 살아 있는 것이나 살아가는 것 그 전부를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너무 벅찬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죽었지만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 아닌가, 혹은 ‘나’는 여전히 ‘그’인 것은 아닌가.


5.

‘그’의 불완전한 죽음은, 필연적으로 ‘나’의 죽음을 요청한다. 하여 ‘나’는 ‘너’와 함께 미구시로 여행을 온다. “거리에는, 보이지 않는 회색 안개가 서려 있는 듯싶”(205쪽)고 여전히 “몸 속에 가득한 어둠이 무거운”(226쪽) ‘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180쪽)과 “극심한 짜증 혹은 대상 없는 증오”(180쪽)에 시달린다. 그러나 ‘내’가 끊임없이 자살에의 충동을 느끼는 것과 달리 ‘너’는 자신이 허깨비 같다는 느낌에서 벗어나 “존재한다는 실감”(207쪽)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것이 ‘네’가 ‘이름’을 규명하고자 하는 이유이며 ‘관계’의 근원을 알려고 하는 이유이다. ‘그’를 자신이 의도한 ‘그’로만 만들어 무대에 올리고자 했던 ‘나’와 달리, ‘너’는 “그의 연극을 완전히 너의 것으로 소유”(159쪽)함으로써 ‘주어진 것으로 주어진 것을 벗어나는’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서 현실극복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거니와, ‘네’가 ‘나’의 또 다른 자아라는 것6), 자살이란 결국 현실의 삶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취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너’에게 충만한 생의 충동이야말로, 죽음 충동 뒤에 감추어진 ‘나’의 진정한 욕망일 것이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과 지향이 결국 ‘나’에 대한 긍정에 다름 아니듯이.  

‘네’가 지향하는 에로스(“그럼, 당신이 원하는 연극이 뭔지 말해보세요.” “사랑이에요.”(159쪽))와 ‘내’가 집착하는 타나토스는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미구로의 여행에 ‘내’가 ‘너’와 동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소설은 타나토스를 그 배면으로 깔고 있지만 끊임없이 생의 충동을 이야기한다. 허위를 정당화시키는 ‘무대/세상’을 박차고 나와 진정한 ‘연극/삶’을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갈망, “큰 하늘 밑 밝은 마당으로 나서는 한판 놀이”가 되고 “맹목적으로 남의 이름을 부르며 얼싸안는, 전율과 황홀의 커다란 불”이 되고 싶다는 소망……. ‘나-너’가 꿈꾸는 연극은 ‘저들’ 게임의 규칙을 무너뜨리는 자유로운 ‘파격’이며 모두 ‘하나’가 되어 무대 밖으로 넘쳐흐르는 ‘축제’이다. ‘나/그’가 그토록 세계를 부정하고 자아에 침잠했던 것은, 결국 자유로운 공동체로서의 ‘우리’7)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외로움이라는 함정에 빠져, 거짓 연극이 난무하는 무대인 ‘그들’에게 돌아갈 수는 없다.


만일 네가 지금 그들에게 돌아간다면, 넌 그 거짓 연극의 숙명을 되풀이하는 게 아닐까? 물론 알아, 그들과 우리가 그 동안 그 테두리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걸. 그러나 중요한 건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진실한 관계가 아니야. 관계인 척하는 관계의 틀, 고통스런 진실의 핵심을 슬쩍 비켜가기 위한 도피처일 뿐이야. 혼자가 아니니까 서로 위안이 될 수는 있겠지. 가혹한 고통을 유보시킬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넌 그 유보를 단호히 끊고, 또 고통의 끝까지 가보기 위해 이곳으로 떠나왔잖아? 지금까지의 ‘우리’ 자신 역시 우리 외부의 모든 조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수고 싸워야 할 대상이니까. 너는 응답하지 않았다. 뒤에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거짓 연극을 파괴하지 못한 무력감 때문에, 넌 외로워진 거야. 네가 그들에게 가려는 건 그 외로움 때문이야. 외로움, 그건 함정이지.(299쪽)


외로움이라는 함정을 이겨내고 고통의 극까지 가보는 것, 그것은 진정한 ‘연극/삶’을 ‘연기/살기’ 위한 일종의 통과제의이다. 이제 싸움의 대상은 ‘아버지’나 ‘저들’로 표상되는 외부 세계의 억압뿐만이 아니라 그 억압에 길들여져 거짓 연극을 되풀이해왔던 ‘우리’, 그리고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소설이 폭로하고 저항해야 하는 대상은 억압적인 사회와 지배 권력만이 아니라, 제도화된 문학 그 자체이기도 하다. 문학이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은, 어떤 영토에도 포섭되지 않으려는 탈주의 정신에 있다. 날을 세운 그 정신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해체의 칼날을 들이대야 한다. 물론 그것이 언제나 시퍼런 칼날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때로, 경직된 사회를 풀어헤치는 능청스런 유머일 수도, 놀이일 수도, 노래나 춤이나 잠꼬대나 환상이나 통곡이나 한판 넋굿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이든 스스로로부터 탈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나 똑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용과 형식, 양자를 모두 의심하고 반성하는 탈주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낯선 시간 속으로』는 분명 한국문학의 ‘오래된 미래’다.


6.

물론 이인성의 이러한 형식실험은 그의 소설을 매우 난해하게 만들었다. 일반 독자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자폐적 미학’이라거나 “지적 중산층만이 읽기 가능한 일종의 계몽주의”(황국명, 「물신, 근친상간, 유토피아」《문학정신》, 1989.7)라는 비판이 나올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인성 소설의 난해성을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잘 읽히는 소설만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이 소설의 목적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과리는 일찍이 “보다 생산적인 질문은, 난해함이 진정 우리의 내재적 소통 방식을 적절히 파괴하여 우리로 하여금 세계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가, 그리하여 그것은 새로운 소통 방식을 즉 새로운 쉬움을 지향하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고 물어보는 것”(「문학의 주체와 형태」, 『존재의 변증법2』, 청하, 1986, 34쪽)이라고 적절하게 지적했는데, 그 점에 있어서 『낯선 시간 속으로』는 분명 어느 정도 성과를 달성하고 있기도 하다. 문제는 난해성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와 세계의 화해가 너무 성급하게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전번에 난, 이곳이 이름붙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현실이 아닌 것 같고,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는데, 하지만 이젠 어느 틈에 그 반대가 된 거야. 이제 난, 아직 이름은 없지만 엄연히 우리 앞에 놓인 이 확실한 현실들을 살아낼 수 있다고…, 또, 이런 표현이 어울릴까, 그 현실과 마주서는 고뇌를 가지고 춤출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한다면. 문 창호지에 비쳤던 네 몸짓같이 말이야. 그리고, 이건 보다 중요한 말일지도 모르는데, 앞으로 헤쳐나갈 앞날이 참담하고 어렵게 느껴지긴 하지만, 어쨌든 이제야 난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내 식으로, 모든 것과. 삶, 관계, 또 모든 것, 정치나 사회 같은 것들과도… 난 존재하기 시작한 거야.(304쪽)


서울로 올라가려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온 ‘너’는 자신이 더 이상 ‘허깨비’가 아니라 실체로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단 하루 만에 ‘너’는 저 “모든 것과” 싸울 용기를 얻은 것인가? 잔뜩 기대를 하고 되짚어 읽어봐도, 사건이라고는 ‘내’가 꿈속에서 사내를 죽였듯이 ‘너’도 꿈속에서 ‘너’의 그림자, 곧 ‘너’의 또 다른 자아를 죽인 것뿐이다. 꿈이란 어떤 식으로든 의식의 편린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의식에는 주체의 경험과 의지가 개입되게 마련이므로 꿈도 현실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갈등의 해결이 꿈이나 환상, 관념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자아의 분열 자체가 무의식의 산물이므로 부정적 자아와의 단절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그 단절을 추동하는 현실적 계기는 존재해야 한다. 현실을 동력으로 삼지 못한, 꿈을 통한 의식의 각성과 이로 인한 갈등의 해소는 자칫, 소설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안이한 결말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나-너’의 혼돈과 방황의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이러한 혐의는 더욱 짙어진다. 더구나 부정적 자아와의 단절이 곧바로 새로운 자아의 탄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세월의 무덤」을 통해 이미 확인한 사실이 아닌가.8) 어머니의 젖가슴을 닮은 할아버지-아버지 무덤 아래 ‘그’의 무덤을 팠다거나 동해 바다를 죽음의 장소로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나’의 탄생은, ‘그’의 죽음이 그러했듯이 상징적 의미밖에 획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관념’을 그대로 살지 못한다. 그것이 ‘내’가 「그 세월의 무덤」을 거쳐 「지금 그가 내 앞에서」에 이르고도 「낯선 시간 속으로」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닌가.


그렇다면,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만드는 넋굿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상처란 그 넋굿의 자리로서 그것을 현재 속에 간직하는 흔적이라고나 할까. 다시 볼 때마다, 그 아픔의 과거가 ‘여기’에 살아나고 미래인 다른 하늘이 ‘지금’ 속에 가득 펼쳐지는 곳. 시간의 직선적인 흐름이 무너져 솟구치며 소용돌이치는 곳. 상처를 통해, 마침내 우리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312쪽)


‘새로운 나’의 탄생을 위해 작가는 ‘상처를 간직한 시작’에 대한 ‘나’의 깨달음을 제시하고 있지만, ‘내’가 어떻게 이 ‘부정을 뛰어넘는 긍정의 힘’을 획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따라서 독자는, 전날까지만 해도 파도의 흰 파열을 바다-저 공간-죽음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인식하던 ‘내’가 왜 이제 “온 세상이 다 파도”며 “우리의 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소설 전체를 통해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했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내’가 어떻게 별안간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313쪽)는 아포리즘을 자기화할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꿈속에서 사내-여자를 죽인 것으로는 역시 부족하다.) 그러므로 ‘나-너’는 ‘하지만 이젠 반대가 되었다’거나, ‘이제는 싸울 수 있다’ ‘이제 또 하나의 시작이다’라는 말 앞에 “어느 틈에”(304쪽)라거나 “어쨌든”(304쪽, 311쪽)이라는 토를 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와 ‘나’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는 것도 소설의 긴장을 약화시키는 데 이바지한다. ‘너’의 꿈속에서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인용문 299쪽)은, ‘네’가 혼자 서울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내’가 ‘너’에게 하고 싶었던, 그러나 현실에서는 침묵을 통해 할 수밖에 없었던 말이다. “나는 그 침묵의 말들이 너에게 전달되고 무엇인가 너를 흔들게 하리라고 예감하지 않았다.”(271쪽) 하지만 ‘나’를 떠난 뒤 ‘너’는 꿈속에서 “그 침묵의 말들”을 전해 듣는다.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망설이게 된 것도, 그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여자를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침묵의 말” 덕분이다. 하지만 “침묵의 말”이란 그 자체가 이미 모순형용이다. 오해하지 마라. 이심전심이 가능한 것은 상대방의 생각과 같은 생각이 자기 속에 이미 들어 있을 때뿐이다. 그렇다면 ‘네’ 꿈속의 ‘내’ 말도 실은 ‘네’ 말에 다름 아니지 않겠는가.(혹은 ‘너’의 꿈 자체가 ‘내’ 의식의 반영일 수도 있다.) ‘나’와 ‘너’의 닮음과 다름의 긴장관계는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렇게 느슨해져 버린다. ‘네’가 ‘나’의 분신이라는 점은 앞서 밝혔지만, 분신관계에는 닮음뿐 아니라 다름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만약 ‘나’와 ‘너’에게 다름의 요소가 없고 닮음의 요소만 있다면 굳이 ‘너’를 ‘나’에서 분리시켜 독립된 존재로 설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면 ‘너’는 ‘나’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진다. 미구를 떠나 ‘그들’에게 돌아가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나’와의 변별점을 드러내던 ‘너’는, 결국 ‘나’와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방법으로 내면의 갈등을 극복하고(갈등의 내용 역시 ‘나’의 그것과 너무 유사하다), 과거의 자아를 죽이고 다시 태어난 ‘나-너’는 분열되었던 정신과 육체를 서로 껴안는다.

그러나 혼돈의 극복이 꼭 ‘단일한 주체’의 회복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란 허구에 불과하다. 모든 자아는 매순간 변하고 그가 맺는 다양한 관계에 따라 늘 새롭게 형성된다. 자아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모든 변화의 총합이자 그 합을 뛰어넘는 변화와 생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분열된 자아 역시 폐기하거나 통합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정하고 공존해야 하는 다성적 목소리가 아닐까.


이제, 나는 홀로 어떤 장면을 연기해본다. 입이 저절로 열리며 대사들이 흘러나온다. “제발 날 좀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나는 반항이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란 말인가?” 나는 번뇌하는 사랑이다. “가야 해요. 잡히면 끝장이에요.” 나는 도주다. 움직임과 음성 하나하나에 나는 행복을 느낀다. (286­?287쪽)


그렇다. ‘나’는 ‘반항’이고 ‘사랑’이고 ‘도주’다. ‘나’는 ‘너’이면서 ‘너’가 아니고, ‘그’이면서 ‘그’가 아니고, ‘그림자’이면서 ‘그림자’를 부정하는, 탈주하는 몸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나’를 일컬어 정신분열자라고 부른다. ‘나’ 역시 세상의 그런 명명법에 온전히 저항하지 못한다. 대신 ‘나-너’는 끊임없이 부정적 자아(그들이 과연 부정되어야만 하는 자아인가)를 죽이고, 마침내 ‘나-너’의 경계마저 지운다. ‘나’와 ‘너’의 차별점이 소멸됨으로써 소설은 결국 화해에 이르지만 지금까지 소설을 지탱해오던 긴장과 의심은 사라진다. 분열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고, ‘나-너’는 상처를 간직함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른’이 된다. 그렇다. 어쨌거나 『낯선 시간 속으로』는 ‘성장소설’인 것이다. 이 세계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던 ‘미숙한’ 자아들은 이제 ‘가보지 않아도 저 끝을 아는’ 노련한 아저씨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저 관념적 성장이 성공한다면 말이다.


7.

우리는 흔히 ‘새로움’을 겉으로 드러난 소설의 형식에서만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소설의 진정한 새로움이란, “문학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일정한 관념 혹은 일관된 신념을 근원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정과리, 「전통적 형이상학의 객관화」, 『쓰임과 짜임』, 문학과지성사, 1988. 286쪽)하는 것이다. 형식 실험은 이에 따른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언어가 과연 현실을 재현할 수 있는가, 언어의 투명성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타개해야 할 객관적 질서를 공고히 하거나 현실의 혼돈을 감추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나아가, 세계는 과연 객관적 실재로만 이루어져 있고 사건은 언제나 인과성을 띄면서 전개되는가 하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의심. 이는 필연적으로 관습화된 소설문법과 언어기호에 대한 해체와 실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가 현재적 의의를 갖는 것은, 그의 형식 실험이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근원적 의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 소설을 통해 우리의 자동화된 사고과정을 비판하고, 의심 없이 받아들이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 살펴보았듯이 『낯선 시간 속으로』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주체를 회복하고 세계와 화해하고자 하는 지난 세대의 강박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에 분열된 자아들의 다성적 목소리는 너무 쉽게 단일한 목소리로 바뀌고, 부정을 뛰어넘은 긍정은 관념에 갇혀 비약한다. 무엇보다, 이 젊은이들은 너무 진지하고 무겁다. 어쩌면 그것이, ‘나/그’가 그토록 발버둥을 쳤음에도 저 무거운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 유일한 이유일는지도 모른다. 박민규나 박형서, 김애란 등이 그러하듯이, 슬픔과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어쩌면 비극적 세계관으로 그것들과 맞대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농담과 구라와 끝을 알 수 없는 낙관적 의지로 은근슬쩍 그것들을 타넘어가는 방식일는지도 모른다. 세계가 변하지 않으니 내가 변한다고, 때로 그것은 현실 도피의 손쉬운 수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인성의 ‘나/그’가 ‘그들’이 만든 형식과 규율을 타파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동안, 박민규나 박형서, 김애란 등의 소설인물들은 재기발랄하게 농담하며 단숨에 ‘그들’의 금기를 깔아뭉개고 있으니 이들의 태도가 가볍다고 무조건 비판할 일만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박민규에게 이인성의 ‘전체에 대한 통찰’이나 진중한 아이러니스트의 태도를 강요할 수 없듯이, 이인성에게 박민규식 유머의 세계를 요구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유머리스트냐 아이러니스트냐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이들의 태도가 어떻게 이 고착화된 세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가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는가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유주는,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다는 점에서 그는 이인성을 잇는 작가라 할 수도 있는데, 박민규나 김애란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존 소설문법에 저항한다.


뻥 뚫린 하늘을 보면 숨이 막혔고 봄날 모래 바람이라도 불어올 때면 온몸과 정신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존재 자체가, 따가워 견딜 수 없었다. 도시와 뱀과 순환과 도시. 도시는 더러웠다. 그러나 가장 더러운 것은 자신이었다. 책을 펼치면 완벽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지닌 전무후무한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반짝이는 모래알처럼 쏟아져 나왔고, 인물들은 가장 더러운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았고, 나와 당신에게 말없이 읽으라, 강요했다. 나는 외면하는 척 가장했지만, 당신은 어떠했는지? (한유주, 「지옥은 어디일까」, 『달로』, 197쪽)


“완벽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지닌 전무후무한 이야기들”은 한때 우리가 소설의 전범으로 삼았던 것들이지만, 한유주는 기승전결은커녕 아예 서사 자체가 부재하는 소설을 통해 소설에 대한 우리의 상식에 도전한다. 한유주의 소설이 “매끈하게 정돈된 이야기에 틈을 만들고, 그 틈새에서 하나의 음악을 연주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소리로 들려”(박성창,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세계의 문학』, 2007년 봄호, 286쪽)주는, 80년대 이인성 소설의 창조적 계승인지, “블로그에 퍼 담기에 적합한 경구와 잠언의 퍼레이드”(심진경, 「새로운 거짓말과 진부한 거짓말」, 《실천문학》, 2006년 겨울호, 159­160쪽)에 불과한 ‘진부한 거짓말’인지는 그의 소설에 대한 보다 정밀한 독서 이후에 내려야 할 판단이겠지만, 나는 ‘다양성’의 관점에서 우선은 이 모든 시도들이 긍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이들의 다양한 시도가, 이들이 비판한 매스미디어와 거대자본에 의해 과대 포장되어, 오히려 문학의 상업화를 가속화하거나 이 시대 문학의 새로운 전범으로 고착화되는 것이다.9) 그 순간, 새로움은 그 빛을 잃고 만다. 소설의 새로움이란 겉으로 드러난 형식보다는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거니와, 끊임없는 자기부정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든 지배와 권력의 언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들의 ‘전복적 상상력’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보다 엄밀한 비평이 전제된 가운데 행해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문장 웹진/ 2007년 4월》



*주 1) 『낯선 시간 속으로』(문학과지성사, 1983)는 네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연작소설이다. 제일 먼저 발표한 소설은 「낯선 시간 속으로―1974년 겨울」(1980)이지만, 소설집에는 사건의 순서대로 「길, 한 이십 년―1974년 봄, 또는 1973년 겨울」, 「그 세월의 무덤―1974년 여름」, 「지금 그가 내 앞에서―1974년 가을」, 「낯선 시간 속으로―1974년 겨울」 순으로 실려 있다.

2) ?길, 한 이십 년?은 1973년 겨울과 1974년 봄 두 시간대의 사건을, 단 한 번의 단락구분도 없이, 동일 구문이나 장면을 매개로 끊임없이 오버랩하고 있다.

3) ‘나-너의 시간’이 과거라 하더라도 1973년 겨울 이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너’는 ‘나/그’가 제대 후 사랑하게 된, ‘나/그’의 “옛사랑의 새 사랑의 옛사랑”(81쪽)이기 때문이다. 『낯선 시간 속으로』의 신판 해설을 쓴 김동식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평자들이 ‘너’를 ‘나/그’의 ‘옛사랑’으로 오인함으로써 ‘나-너의 시간’을 1973년 겨울 이전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나/그’는 ‘옛사랑’을 소설 어디에서도 ‘너’로 지칭하지 않는다. “얼굴 없는 얼굴”(41쪽), “옛사랑”(80쪽), “그녀”(80쪽), “사랑하던 혹은 그렇게 믿었던 여자 아이”(309쪽) 등으로 부를 뿐이다. “네가 내 손목의 상처를 어루만진다.”(296쪽)라는 진술을 통해서도 ‘너’는 ‘나/그’의 옛사랑이 아니라 73년 겨울 혹은 74년 봄 이후, 즉 ‘그날’ 이후의 ‘새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길, 한 이십 년」에서 “지금은 헤어져 없는 그것(옛사랑-인용자주)이 그때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리워하는 공간은 ‘미구시’가 아니라 ‘대성리’라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따라서 「낯선 시간 속으로」의 ‘나-너의 시간’이 만약 과거라면 그것은 1974년 봄에서 1974년 겨울 사이가 되어야 한다.

4) “내 잠속에서 사살당한 남자가 지나간다.”(312~313쪽)에 의해 ⓓ′는 일부 부정된다. ‘나’의 잠 속에서 일어난 일이 ⓓ′전부인지 일부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사내를 사살한 것만 꿈이라고 하면, ‘너’가 돌아왔을 때 왜 여관방에 사내가 없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너’가 돌아오기 전에 사내가 일어나 갔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따라서 ⓓ′전부를 꿈으로 볼 수도 있고, 이 경우 ⓒ′역시 모두 꿈이거나 상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5)  이인성의 석사논문 주제가 되었던 베케트의 용어.

6) ‘그들’을 의심하고 부정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너’ 역시 ‘나’의 또 다른 자아로 볼 수 있다. ‘네’가 ‘나’의 분신으로 기능한다는 암시는 소설의 도처에 깔려있다. “우리는, 그러나, 무엇인가에 의해, 음악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 무엇인가는 그때 나를 돌아보던 네 얼굴 속에 있었다. 또는 너를 쳐다보던 내 얼굴 속에 있었다. 또는 그 동시의 동작 속에 있었다. 우리의 감각과 함께 흐르던 음악이 저만치에서 저 혼자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마주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무슨 말을 하려다가 동시에 멈췄다.”(197쪽)는 구절은, 거울에 비친 ‘나’처럼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같은 동작을 취하는 ‘너’를 통해 ‘나’와 ‘너’가 서로의 변주임을 더욱 확증시켜준다.

7) 여기서 ‘우리’는 연극공동체 이상의 사회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고민이 너무 ‘개인’과 ‘문학’에만 침몰되어 있다는 일부의 비판은, 개인과 사회를 극단적으로 이분화하고 문학과 언어에 내재된 세계의 본질적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진다.

8) 이러한 한계는, 『낯선 시간 속으로』에 실려 있는 네 편의 소설들이 사실은 모두 서로의 변주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김현이 지적했듯이 『낯선 시간 속으로』에 실려 있는 네 편의 소설은 “단순하게 중편소설들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전체성 때문에 약간 어색”하지만 “장편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개별적인 완결성이 지나치게 강하다.” ‘개별적 완결성’이 반드시 ‘전체성’과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낯선 시간 속으로』의 ‘개별적 완결성’은 장편소설 특유의 ‘전체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1974년 봄, 또는 1973년 겨울로부터 1974년 겨울까지의 이야기는 유기적인 상호관련성을 보여주지만 전체가 하나의 기승전결로 구조화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소설의 시공간과 그 안에서 펼쳐지는 구체적 사건들은 모두 다르지만 네 편의 중편은 모두 동일한 문제 상황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있으며 비슷한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 혹은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장편소설이라면, 「그 세월의 무덤」에서 ‘나’는 이미 과거의 ‘그’를 죽였으므로 「낯선 시간 속으로」에 이르러 또다시 나의 분신인 사내나 병정을 등장시킬 필요도 없고, ‘그’를 죽였는데도 여전히 사내와 병정 등이 ‘나’를 맴돌고 있다면 꿈속에서 그들을 죽이는 것 정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을 리 없다. 하지만 맨 마지막 시간에 해당하는 「낯선 시간 속으로」에 이르러서도 ‘나’는 여전히 「길, 한 이십 년」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 세월의 무덤」과 동일한 방법으로 과거의 자아와 단절을 시도한다. 물론 변주는 심화·확대되기도 한다. ‘상처를 간직한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화해와 긍정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냄으로써, 「낯선 시간 속으로」는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은 소설의 흐름을 끊고 소설집 전체의 결론 역할을 해낸다. 그러나 비약을 통한 화해와 긍정은 오히려 소설의 완결성을 해칠 뿐이다.

9) 일례로 《세계의 문학》2007년 봄호에 발표된 소설들을 보면, 다른 젊은 작가들의 소설들 역시 박민규나 김애란 등의 소설과 매우 닮아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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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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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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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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