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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울고 있네

  • 작성일 2007-04-30
  • 조회수 2,544

 

한 소녀가 울고 있네

?어떤 나라의 미디어 스타

 


 


이광록

그림 임태규




#1. 서랍 속에서 그녀를 만나다.


나는 모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PD이다. 언제부턴가 난 책상을 잘 정리하지 않는다. 지금도 내 책상 위의 반은 잡동사니 쓰레기요, 반은 쓰다버린 기획서로 어지럽다. 촬영과 편집 같은 대다수 제작시간을 빼고 책상 앞에서 하는 일이라곤 언제 채택될지 모를 기획서를 끼적이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내 별명은 텍스트의 아트화를 꿈꾸는 기획서의 달인 ‘기달이’, 혹은 ‘귀달이’이다. 물론 현실은 정반대이지만. 웹2.0, DMB, WCDMA 등 방송과 통신이 헤쳐 모이고, UCC니 컨버전스니, 프로슈머처럼 급변하는 매체 환경과 더불어 불안한 공중파 사무실엔 언제나 위기감이 맴돈다. 봄 개편과 가을 개편, 특별 편성을 따라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부서를 옮겨야 하는 유목민의 심리도 작용한다. 이렇듯 프로그램 기획서가 실현되는 일은 정말 가물에 콩 나는 격이다. 그러니 언제 쓰일지 모르는 기획서는 항상 계절과 분위기에 따라 책상머리로 떠올랐다 책상 아래로 사라지곤 한다.


근래에 들어 대중미디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오늘날 확산되고 있는 인터미디어 문화의 정체는 익명의 대상이었던 평균대중이 아니라, 분명한 문화 의지를 지닌 더욱 뜨거워진 다수를 찾아 ‘디지털 시대의 일상’을 발 빠르게 맞이하고 있다. 나아가 상품가치가 된다면 개인의 일상사를 포장하고 문화산업의 차원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이 현대의 트렌드이다. 따라서 기성 예술계는 축소지향으로, 대중문화산업과 매체 활동과 같은 변방의 예술들은 오히려 그 영역의 확장일로에 있다. 

 





어느 날 나는 너저분한 서랍 사이에서 빛바랜 기획서를 하나 발견하였다. 오년 전, 어떤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인으로부터 전해들은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행자는 자신이 직접 찍었다는 사진과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전했을 뿐인데 나는 형용하기 힘든 소녀의 이미지에 폭 빠져서 그녀와 그 나라에 관한 문화 다큐멘터리를 기획했었다. 그러나 몇 장의 사진과 사실 확인이 모호한 이야기에 근거해서 어떤 나라를 취재하는 일은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좀체 제작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특히 우리 시청자들이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불굴의 의지로 한계를 극복한 휴먼 스토리나 쇼비니즘과 황색 저널리즘으로 가득한 대의명분과 허장성세의 정치적 잡담과는 거리가 먼 사안이라 아직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욱 분명한 것은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어디까지가 상상력의 산물인지 이젠 가물가물해졌다는 것이다. 본 글은 언제 방송될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언젠가 꼭 제작하고 싶었던 그 기획안 중의 일부이다.



#2. 그녀는 예뻤다.


요샛말로 그녀는 ‘새끈하다.’ 그녀는 ‘뽀다구’나며, 착한 것은 물론이고 짱이다. 어릴 때부터 동네의 스타였다. 가는 곳마다 탄성이 터졌다. 슈퍼마켓에서 그랬고, 유치원에서 그랬으며,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며, 싸움을 그치고, 홀린 듯 고혹에 사로잡히곤 한다. 걸음걸이, 몸짓, 심지어 고갯짓조차 슬로우 모션의 상대적 시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프랙털 이미지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가녀린 손을 살포시 들어올려, 작고 앙증맞은 두상을 떠받치듯 턱을 괴고, 상념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보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심장이 멈추는 요란한 소리를 들었을 게다. 온 나라가 이 작은 소녀 때문에 이렇게 떠들썩하게 시끄러운 적은 유사 이래 없었다. 작은 키에도 8등신을 넘나드는 완벽한 비례, 약간 도톰한 입술, 살짝 처진 눈꼬리, 부드럽게 빛나는 살결, 정돈되지 않은 짧은 머리, 헤픈 듯한 웃음이 발산하는 백치미는 누구에게도 경계선을 긋지 않는다. 딱 잘라 말하자면, 그녀는 그 어떤 종교적, 철학적, 법률적 신념보다 우리를 진실하게 만든다.


사실 그녀의 말솜씨나 지적 능력에 대해선 우리 모두 안중에도 없다. 그녀의 모습만 쳐다보고 있어도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단숨에 잊을 수 있다. 술집에도 카페에도 심지어 미술관에도, 일상의 곳곳에 숨어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봄 망울을 터뜨리는 꽃잎처럼 화사하게 빛나는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모든 미디어는 그녀의 신드롬을 전하는 것으로 지면과 화면을 가득 메웠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모델로 하는 사업계획서를 들고 나타났다. 급기야 도시의 버스와 지하철 안은 물론이고 거실과 모든 방안에 그녀가 있다. 그녀는 화장실의 화장지에도 부엌의 커튼에도 심지어 커피잔 속에도 숨어 있다. 그녀는 실제로 없어서는 안 될, 국민의 일상이 되었다. 한 사회의 생활신조와 정치적 욕망까지 뒤흔들어 놓고, 심지어 국민생산과 소비활동의 약 8~90%는 모두 그녀와 무관하지 않다. 어쩌다 그녀의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 시공간에 잠시라도 있게 된다면 모두들 왜 그녀의 이미지가 없어야 하는지 의아해 할 정도이다. 사실 우린 모두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중독되었다.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 크레마가 그득한 커피를 마시고, 슬림한 휴대폰에 둥근 털북숭이 고리를 달랑달랑 매달고, 엉덩이가 찰싹 달라붙는 스키니 진을 입는다. 심지어 늙은 남자들조차 그녀를 따라 비니 모자를 쓰고 눈화장을 하며 나아가 성형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하루 종일 그녀가 궁금하고 온통 그녀에 대한 루머와 잡담이 오고 갔으며 매일 그녀를 꿈꾸며 잠이 든다.

 




#3. 아름다운 것은 진실한가?


우리 사회에서 문화적 진실은 무엇일까? 문화는 무엇으로 만들어지고 어떻게 우리에게 관여하는 것일까? 타자와 우리 사이의 가치는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더 이상 현실보다 충격적이고 환상적인 것은 없다. 거대한 담론들은 시시해졌으며 우리의 일상은 새로운 욕망의 소비시대를 맞이했다.

현대의 문화는 몸을 구축한다. 몸은 현대의 문화적 지향점이다. 몸은 갈수록 비대해지고 몸은 갈수록 나태해진다. 그러나 현대 문화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또한 누구인가. 어떤 나라에서 문화예술계의 판을 이끄는 사람들은 아직도 행정 관료나 정치적 인물들이 분명하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기준에 따라 삶의 평수를 정하고, 그들이 만든 도시에서 그들의 입맛대로 살기를 바란다. 어느 날엔 강을 하수구로 만들었다가 다시 하수구를 인공의 강으로 만든다. 오랫동안 유원지였던 곳을 이상한 나라로부터 들여온 인공 조형물이 가득한 공원으로 싹 갈아치우며, 낮은 지붕들로 가득했던 판자촌 산덩어리를 깎아 국적 불명의 신주거지로 삶의 유형과 일상의 역사를 바꾼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정치적 의지이다.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문화와 예술이 스스로 자리잡을 여유와 버티고 있어야 할 자리는 더 이상 없다. 엄청난 돈과 권력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국제 규모의 행사들이 도시마다 생기고 영화제는 셀 수 없을 정도이며 문화라는 이름으로 그 역량을 재단한다. 무슨 엑스포니, 박람회, 아트 페어, 비엔날레 하는 것들이 문화권력에 의해 판을 벌였다 접었다 하는 것만 봐도 문화의 자생력이라는 말은 참 유치하고 순진한 욕망에 해당한다. 혹자는 문화는 곧 자본과 산업의 결과이며 산출된 액수만큼 분명해진 목표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의 문화는 보이지 않으면 곧 문화가 아니다. 우리의 문화는 이처럼 자신의 얼굴을 갈아치우는 몸이다. 또한 우리는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 채 모두 간절히 아름다운 몸을 원한다.

 

 


#4. 그녀는 너무나 친절하다.


그녀는 우리 시대 삶의 지표이자, 매혹적인 존재의 표상이다. 그녀는 지루한 것을 싫어한다. 그녀는 주변의 작고 하찮은 것에서 재미를 발견한다. 약간은 퉁명스럽고 매사가 불분명하다. 어떤 날은 이것을 좋아했다가 어떤 날은 저것으로 흥미를 옮겨간다. 아무도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자신의 육체를 가다듬길 좋아하고 무엇엔가 탐닉하는 법을 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허약한 사람처럼 단순하다. 또한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당연한 현실의 조건들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열광과 주목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초연하게 살 수 있다는 면에서 매우 놀라운 인성을 지녔다. 혹자는 그녀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절세미인 서시(西施)는 가슴앓이를 앓았다. 그 때문에 늘 미간을 찡그렸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른 추녀들도 서시를 닮으려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고 한다. 서시빈목(西施?目)은 그녀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지겹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며 때론 당혹감을 넘어 황당한 일들이 벌어져도 오히려 그것이 정상으로 여겨졌다. 모든 여자들은 소녀를 조금이라도 닮는 것이 삶의 미덕이었고 남자들은 모두 소녀와 결혼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었다. 어린 아이들은 앙탈했고 늙은이들은 탄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자동응답기의 목소리처럼 따분하게 느껴질 때 그녀는 생각했다.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이 하고 싶어졌다. 붉고 촉촉하며, 금방이라도 먹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입술을 열고 ‘말’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대해 말이 많았다. 막상 그녀가 말하지 않았을 때와 실제로 말하는 것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생기게 되었다. 막상 그녀 스스로 각종 매스컴을 통해 말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 경제지표는 곤두박질을 치고 물가는 치솟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삶을 용두질하던 열정은 사그라지고 그녀는 썩은 방울토마토처럼 윤기를 잃고 자글자글 쪼그라들며 부드럽고 얇은 막이 찢어진 듯 자신의 아름다움을 잃어갔다. 드디어 두문불출 집안에 틀어박혀 울음을 터뜨렸다. 소녀의 눈물은 과육이 썩어 문드러지며 내는 불그레한 진물과 흡사했다.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가 세상에 대고 내뱉었다는 ‘말’은 이러했다.


“저는 예술가입니다.”

 

 



#5.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대는 문화예술의 시대이다. 아침에 일어나 문화를 먹고 문화를 입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의 문화와 예술은 기본적으로 ‘일상의 가치’를 추구한다. 모더니스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전문가의 영역인 무대 안의 문화예술 활동이 무대 밖으로, 보다 확대된 현대 일상의 영역으로 전개되고 있다. 나는 우리가 하는 것이 문화인지, 혹은 문화가 아닌지 잘 모른다.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아직도 우리는 그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힘 있는 자들의 논리에 따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잘못은 바로 잡힐 것이고 나쁜 것은 좋게 될 것이며 추한 것은 아름답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문화와 예술이 역사를 통틀어서 주력하고 있는?무엇인지 잘, 혹은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글쎄……, 혹 어떤 나라의 길에서 그 소녀를 만나더라도 놀라지 말기 바란다. 그녀는 이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예술가입니까?” 《문장 웹진/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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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 한국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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