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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누웠던 자리

  • 작성일 2007-06-05
  • 조회수 4,350

 

그가 누웠던 자리

윤동주의 「병원」과 서정시의 윤리학



신형철




슬픔과 아픔


1939년 9월 1일에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2차대전의 시작이었다. 윤동주는 그 해 9월부터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그의 절필이 2차대전과 그 무슨 관련이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1939년부터 조선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0월에는 친일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발족되었고 11월에는 ‘창씨개명령’이 공포되었다. 물론 윤동주는 문학 제도 바깥에 있는 문청(文靑)에 불과했다. 친일문학단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창씨개명 또한 하지 않았다.〔그가 창씨개명을 단행한 것은 2년 뒤였다. 도항증(渡航證)을 얻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 이때의 소회가 시 「참회록」을 쓰게 했다.〕그리고 1940년이 되었다. 윤동주의 나이 스물넷이었고 연희전문학교 3학년으로 진급했다. 바야흐로 시절은 악화일로였다. 그 해 8월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었고, 9월에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 조약을 맺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었다. 자발적 절필은 일 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 그 해 12월에, 그는 가까스로 몇 줄 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팔복(八福) : 마태복음 5장 3-12」전문


이것은 시인가? 일단은 그렇다. 시를 만드는 것은 정념에 질서를 부여하여 그것을 대상화?형식화하려는 의지다. 이 시는 슬픔이라는 정념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시는 좋은 시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시가 터하고 있는 질서는 내부에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특정한 정념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야가 확보될 때 질서가 내부에서 창안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시는 더러 이야기를 탑재하기도 하고, 정념은 분출되기보다는 ‘인식’된다. 그러나 정념이 완강하게 주체를 압도할 경우 질서가 외부에서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가 그렇다. ‘산상수훈’(마태복음)이라는 언술 질서를 외부에서 도입하여 이를 패러디한다. 이 질서는 정념을 인식하는 데 기여하는 질서가 아니라 질서 그 자체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 도입된 질서다. 슬픔은 가망 없이 절대화되고 구원의 가능성은 단호히 기각된다. 이것은 일종의 자해이거나 섬약한 야유에 가깝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적어나간 이의 영혼은 날카로운 칼끝으로 자신의 팔목을 여덟 번 긋는 자의 영혼을 닮아 있었을 것이다. 그 여덟 번의 자해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에 도달할 때 이 시는 기어이 피 흘리면서 복음을 야유한다. 여기에는 성숙된 구조적 시각이 동참한 흔적이 없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다른 시에서 이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병원」전문


‘슬픔’이 영원할 것이라고 말하던 이가 이번에는 ‘아픔’을 진단하기 위해 병원에 갔다. ‘슬픔’이 ‘아픔’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슬픔이 구조적 통찰 이전의 즉각적 반응이라면 아픔은 어떤 구조적 통찰 이후의 반성적 반응이다. 이 아름다운 시를 경계로 윤동주는 비로소 습작기의 어설픔과 작별한다. 그래서 ?병원?은 무엇보다 윤동주 자신에게 각별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는 1941년 12월에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자필 시집을 제작한다. 정병욱의 회고에 따르면 자필 시집의 표제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이었다. 당시 윤동주는 세계는 거대한 병원이고 사람들은 모두 환자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병원’이라는 단어는 그가 포착한 세계의 그 ‘구조’를 압축하는 말이었다. 성실한 시인이라면 지난한 암중모색의 와중에 세계를 인식하는 어떤 구조적 틀을 얻게 된다. (그 구조는 문학사에서 반복된다. 예컨대 30년대 이상의 ‘유곽’이 70년대 후반 이성복의 첫 시집에서 반복되었던 것처럼.) 말하자면 이 시는 일종의 개안(開眼)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당시 윤동주 자신에게 문제작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문제작이다.   



문제작으로서의 「병원」 


문제작이란 무엇인가. 당대에 분란(problem)을 일으켰거나 후대에 계속 질문(question)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 시는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대에 분란을 일으킬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질문을 제 안에 품고 있다. 이 시는 서정적이다. (우리는 ‘서정적인 것’을 ‘시적인 것’의 하위범주로 규정한다. 서정적인 것은 규정될 수 있고 또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서정적인 것’의 상위범주인 ‘시적인 것’은 앞으로도 완전히 규정될 수 없을 것이다. 미지의 ‘시적인 것’들을 향해 시인들이 계속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모든 서정적인 것이 아름다움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질문은 여기서 발생한다. 특정한 서정은 어떻게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가. 이것은 얼핏 너무 빤해서 무의미한 질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질문들이 빤해 보이는 것은 빤한 해답이 이미 있어서가 아니라 해답 없는 질문이 숱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정색하고 다시 물어야 한다. 어떤 서정이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오늘날 이 질문은 특히 중요해 보인다. 시적인 것의 하위범주로서의 서정적인 것은 여전히 한국시의 우세종이다. 소수의 변종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인들이 서정시의 보편적 문법을 충실히 고수하는 시들을 써내고 있다. 그러던 와중에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다소 변칙적인 시들을 쓰기 시작했다. 서정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타매하는 목소리들이 더불어 높아졌다. 그 결과 서정시의 자기 갱신을 권유하는 작은 목소리는 서정시의 가치 사수를 주장하는 큰 목소리들에 묻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어떤 서정시가 좋은 시인가. 우리에게는 윤동주의 이 시가 바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시로, 그러니까 시(인)에 관한 시로 읽힌다. 이 시는 세 토막으로 되어 있고 각 연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째, 시인은 무엇을/어떻게 보는가(보아야 하는가). 둘째, 시인은 무엇을/어떻게 느끼는가(느껴야 하는가). 셋째, 시인은 무엇을/어떻게 행하는가(행해야 하는가).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시인은 무엇을 보는가. 병원에 입원 중인 한 여성 환자가 있다. 이 “젊은 여자”는 “가슴을 앓는다”고 했다. 그녀는 혹시 결핵을 앓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수잔 손택이 지적한 대로 결핵이라는 질병은 낭만적인 내포를 거느리는 일종의 은유다. (더럽고 번잡스러운 것으로 간주된 암과 달리) 결핵은 깨끗하고 고독한 병이다. 1연의 풍경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흰색이다.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있는 그녀는 깨끗해서 고결해 보인다. 말하자면 결핵은 ‘하얀 병’이다(이재선, 『현대소설의 서사주제학』 참조). 게다가 그녀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기도 하다. 누구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는다. “나비 한 마리”도 없고 “바람조차” 없다. 이 고립은 앓는 자의 고독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결핵이라는 은유를 은연중 활용하면서 1연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앓고 있지만 순결한 세계, 고립되어 있지만 무죄한 세계’의 어떤 풍경이다. 정병욱의 회고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이 풍경에서 당대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읽어내는 일은 자연스럽다. 말하자면 1연의 병원과 질병은 ‘정치적 은유’로 읽힐 수 있다.


이 정치적 은유를 ‘윤리적 은유’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언급한 대로 이 시는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1939년 9월 1일)과 일본의 진주만 침공(1941년 12월 8일) 사이에 씌어졌다. 공교롭게도 2차대전 발발 이후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간 윤동주가 1년 3개월여 만에 쓴 작품이다. 『계몽의 변증법』(1947)의 저자들이 지적한 대로 그 전쟁은 인간을 신화와 마법의 세계에서 구출한 ‘계몽’의 과정이 ‘자연 지배’를 거쳐 마침내 ‘인간 지배’에 이르게 된 일련의 타락의 한 종착점이었다. 그 전쟁은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도구적 이성’의 전횡이 낳은 필연적 비극이었고, 잇달아 벌어진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동일자(동일성)의 폭력 속에서 특수자(특수성)가 질식사한 참극이었다. 이는 실로 이성의 자살이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식민지 조선의 한 청년은 병원 뒤뜰에서 병들고 고립된 한 환자의 오후를 목격하였다. 이 ‘병원의 뒤뜰’은 이를테면 ‘계몽(이성)의 뒤뜰’일 지도 모른다. 특히 눈에 밟히는 것은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라는 무심한 언급이다. 화자는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관찰하고 있다. 이 ‘거리’는 윤리적이다. 그녀를 나에게로 동일화하는 서정적 시선이 긴장감 있게 견제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2연에서 이 시는 1연 이전으로 돌아간다(과거형으로 된 첫 문장이 그렇게 읽게 한다). ‘나’도 아프다. 그는 “나도 모를 아픔”이라고 적었다. 이 아픔은 ‘젊은 여자’의 ‘가슴앓이’를 반향하면서 다른 종류의 아픔(병)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늙음’과 ‘젊음’의 대립구도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의사’와 ‘시인’의 대립구도로 바꿔 읽고 싶다. 혹은 합리적 인식과 시적 감응의 대립구도라고 해도 좋다. 아도르노의 말이다. “합리적 인식은 고통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을 총괄하여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체험으로써 나타낼 수는 없다. 합리적 인식이 볼 때 고통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고통이 개념화되면 그것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일관성도 없어질 것이다.”(『미학이론』) 요컨대 합리적 인식은 고통을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은 있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의사의 매뉴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에 있다. 아도르노는 고통의 이해와 표현이 오로지 예술에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축적된 고통의 기억”(같은 책)이다. 그는 예술이 고통을 잊어버릴 것이라면 차라리 예술 자체가 없어져버리는 편이 낫다고까지 했다. 이 단언은 매력적이다. 그것은 시인의 “나도 모를 아픔”을 윤리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시인은 병 없이 앓는 자다. 윤동주의 “나도 모를 아픔”은 훗날 이성복에 의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다”(『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표지 글)라는 인식론으로 변주된 그 아픔이고, 황지우에 의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황지우, 「산경」, 『게 눈 속의 연꽃』)라는 윤리학으로 확산된 그 아픔이다. 윤동주의 마지막 선택은 무엇인가. 1연에서 그는 앓는 세계를 발견했고, 2연에서는 세계의 고통 속에서 더불어 아픈 시인의 자리를 인식했다. 아직까지 그는 그저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라고만 적었을 뿐이다. 이 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다시 병원 뒤뜰이다. ‘그녀’의 아픔과 ‘나’의 고통이 한 자리에 모인다. 모종의 서정적 동일화가 도모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러나 여자는 금잔화 한 포기를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지고 시인은 그녀가 누웠던 자리로 가서 누울 뿐이다. 이 무언의 행위들은 감동적이다. 그들이 끝내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금잔화를 꽂는 행위는 매우 상징적이지만 그러나 그 상징이 해석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었다. 시인은 그 행위에 어떠한 의미도 섣불리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엇갈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헤어지면서 비로소 만난다.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누우면서 시인은 “그의 건강이― 아니 나의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란다. 저 ‘아니’의 미묘한 머뭇거림이 이 시를 한층 겸허하게 만든다. 주체가 객체를 서정적으로 동일화하지 않으면서도 기어이 하나가 되는 이 기술이 바로 뛰어난 서정의 마력이다. 이 태도는 환자의 고통을 진단하(지 못하)는 의사의 지극히 합리적인 행위와 대비되면서 더욱 아름다워진다. 이 윤리적 태도에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하나.


다시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려와서 이것을 ‘미메시스’의 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 미메시스는 모방과 다르다. “전통적인 예술이론에서 미메시스가 ‘객체의 모방’이라면 아도르노적인 의미에서의 미메시스는 ‘객체에의 동화(同化)’라고 할 수 있다.”(김유동, 『아도르노 사상』) 이것은 투사(投射)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미메시스가 주변 세계와 유사해지려고 한다면 잘못된 투사는 주변 세계를 자기와 유사하게 만들려고 한다.”(『계몽의 변증법』) 이런 말들은 꽤 모호하게 들린다. 대상을 객체화하는 근대적 합리성의 지배 속에서 서서히 망실되어버린 인간의 능력을 다시 복원하려는 안간힘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서정시에는 그 미메시스의 계기가 보존되어 있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가 눕는 이 소박하면서도 숭고한 행위는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을 섣불리 확증함으로써 결국 객체를 주체로 종속시키고 마는 서정의 위험을 사려 깊게 피해간다. 그러면서 표명되는 희망이기에 이 시가 껴안고 있는 희망은 거북하지가 않다. 스탕달은 예술을 “행복에의 약속”이라 했다. 행복이 지금-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예술은 허위다. 언젠가 그들은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라고 이 시는 말한다.



서정적으로 올바른


아우슈비츠 이후 씌어지는 서정시는 다음 세 가지 계기를 내포해야만 한다. 동일성(동일자)의 폭력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특수성(특수자)의 현실을 ‘발견’하고, 그 특수자의 아픔을 나의 고통으로 ‘감응’하고, 고통 없는 세계의 비전 혹은 진실한 화해의 비전을 강렬하게 ‘환기’하기. 이를 발견, 감응, 환기의 3단 구조로 정식화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규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시 「병원」이 알려준다. 첫째, 동일성의 폭력에서 특수자를 구제하기 위한 발견이 외려 동일화의 메커니즘을 채택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이미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는 눈앞에서 특수자는 더러 제 뜻과 무관하게 아름다워지고 만다. 둘째, 특수자의 아픔에 감응하는 일은 그 감응이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주의와 끝내 함께 가는 작업이어야 한다. 타자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임을 아름답게 고백하는 사이비 유마힐(維摩詰)이 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셋째, 고통 없는 세계 혹은 진실한 화해의 세계는 어떠한 경우에도 긍정적인 방식으로(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시되어서는 안 되며 다만 부정적인 방식으로(그것은 여기에 없다) 환기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자연 혹은 여행지)에서 유유자적하는 저 수많은 시들은 ‘행복에의 약속’이 아니라 행복의 단언이어서 허위적이다.


세 토막으로 이루어진 시 「병원」은 발견, 감응, 환기의 모범적인 사례를 그 순서 그대로 예시한다. 병원과 환자로 은유되는 세계의 실상의 발견, 타자들의 아픔에 감응하면서 이뤄지는 나의 고통의 인식, 미메시스의 윤리와 행복에의 약속을 통해 환기되는 유토피아,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배려가 저 소품 안에 있다. 이 시가 그런 서정시의 최고 수준을 ‘구현’하고 있다기보다는 서정시의 윤리학에 대해 섬세하게 ‘성찰’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걸작이라는 말보다는 문제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이제 글의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던진다. 서정은 언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인식론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겸허할 때다. 타자를 안다고 말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하지 않는 시가 그렇지 않은 시보다 아름다움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정시는 가장 왜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 우리는 그럴 때 ‘서정적으로 올바른’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서정적으로 올바른 시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그곳은 ‘그가 누웠던 자리’다. 《문장 웹진/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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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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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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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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