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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란지교를 꿈꾸며

  • 작성일 2007-07-31
  • 조회수 6,387

 

[조경란이 만난 사람 7] 소설가, 조성기




지란지교를 꿈꾸며




드디어 칠 년 동안 미루고 있던 장편소설을 쓰기로 굳게 결심하고 이른바 ‘잠수’라는 걸 타기 시작한 지 한 삼개월쯤 지난 것 같다.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가깝게 지내는 모 방송사의 한 PD를 집 앞에서 만난 적이 있다. 원고를 시작하기 전엔 늘 어딘가 끌려가는 듯한 심정이 되어 우울하고 잔뜩 긴장하고 있기 마련인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위로하느라 그랬는지 어쨌는지 언제쯤 끝날 예정이냐고 묻더니 그 PD가 이젠 너무 체력을 믿지 마세요, 했다. 그게 꼭 더 이상 예전처럼 젊지도 않고 나이 들었다는 말처럼 들려 괜히 발끈해서는 체력을 믿진 않아도 집중력만큼은 믿어요, 라고 나름대로 쌀쌀맞게 되받아쳤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슬슬 시작되려는 요즘에 와선 집중력이라는 것도 체력이 없으면 믿을 수도 기댈 수도 의지할 수도 없다는 절실한 깨달음이 든다.

한 소설가 선배한테 왜 이렇게 원고가 잘 안 써지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투덜거렸을 때 그 선배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얘, 원고가 잘 써지는 게 차라리 이상한 일 아니니? 아, 가만히 듣고 보니 그럴듯한 데가 있다. 그 뒤부터는 원래 원고는 잘 안 써지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기게 됐고 어쩌다 뜻밖에 잘 써지기라도 할 때면 어어 이거 엉터리 아냐? 하고 신중하게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니까 내 말은 원고도 잘 안 써지는 데다 체력도 바닥이 난 상태로 요즘은 책상 앞에서 집중력을 자존심처럼 꼭 붙들고 앉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밖으로 한번 외출을 하거나 누군가와 사적으로 만나 밥 먹고 영화 보고 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원고를 쓰지 않을 때, 내가 할 일도 없이 광화문에 나가 노는 것을 아무리 좋아해도 지금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바쁠 때라도 새로 생긴 레스토랑으로 밥 먹으러 가자는 전화엔 앞뒤 생각 없이 뛰쳐나가곤 하지만 요즘은 누가 그런 연락을 해와도 고맙지만 노 땡큐다. 다른 사람들한텐 전화도 꺼놓고 시내도 안 나간다고 잔뜩 엄살을 부린다. 이번 원고를 기다리고 있는 에디터는 내가 오직 집에만 틀어박혀 글 쓰고 있는 줄 알고 내심 흐뭇해하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예 아무데도 안 나가는 것은 아니다. 밥 먹고 기운 좀 차리고 나면 슬리퍼 끌고 슬슬 동네는 나간다.

지난 6월 초쯤, 대문 앞에서 그냥 맥없이 넘어지는 바람에 왼쪽 발목에 인대가 늘어나버렸다. 그 아찔한 순간에도 곧 다칠 데가 손목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며 웃어 넘겼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발목이 시꺼멓게 멍들어 권투 글로브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난생 처음 한의원으로 침을 맞으러 다니기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이번에는 조카를 안고 있다가 두 계단을 헛딛는 바람에 다친 발목을 또 다치고 조카는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는 일이 생겼다. 결국 반 기브스를 하고 넘어지면서 함께 다친 양쪽 손목에도 침을 맞게 되었다. 그러니 구태여 산책을 나가는 게 아니더라도 오후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침 맞으러 동네 한의원에 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기껏 세수하고 나갔는데 침만 맞고 돌아오는 게 아쉬워서 절룩거리며 사거리까지 걸어가 스타벅스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씩 마시고 오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한의사가 나를 쳐다볼 때마다 안 그럴 것 같은데 참 치료 열심히 받으러 오네, 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요즘은 딱히 나갈 데도 없고 어차피 오후엔 산책을 나갈 거니까 가는 김에 한의원에 들리는 거다. 치료도 받고 산책도 하고 찻집 창가에 앉아 이런 저런 생각도 하고 어제 쓴 원고도 읽고 수정하고 올 수 있으니 나로서는 오후 시간을 이래저래 유용하게 보내는 셈이다.

반미니 뭐니 해서 어쩐지 눈치를 보게 되는 느낌이라 그동안 한번도 말한 적 없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스타벅스’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에게 혼자 생각하고 책 읽고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원한다면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고 아무리 오래 눌러 앉아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그런 사적인 ‘공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스타벅스에서는 그 모든 것을 충족할 수 있다. 사실 나는 거의 날마다 스타벅스에 간다. 물론 커피는 ‘커피 빈’ 커피를 더 좋아하고 레어 치즈 케이크는 ‘파스쿠치’에서 파는 것을 더 좋아하지만 우리 동네엔 스타벅스밖에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우리 동네(예전엔 ‘산동네’라고 불렸던)에 요즘 재개발 붐, 건축 붐이 불어 자고나면 진짜 우후죽순처럼 옛 건물이 헐리고 삐죽삐죽 높은 상가들, 오피스텔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잃는 것도 많고 아쉬운 것도 많지만 그 건물들 중엔 내가 좋아하는 상점들도 더러 생기곤 한다. 최근 들어 스타벅스 옆 건물에 ‘카페 파리 바게트’가 생겨서 더 이상 스타벅스에서 파는 맛없는 크로와상이나 베이글을 어거지로 사먹지 않아도 된다. 책 읽거나 원고를 수정해야 할 시간이 길어지면 문을 밀고 나가 바로 옆 집 ‘카페 파리 바게트’에 가서 크로와상을 사와 다시 자리에 앉아 맛있게 먹고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된다. 우리 동네 스타벅스 점원들은 이제 모두 나를 알아 으레 그러거니 여긴다. 눈치 볼 일 없다. 게다가 난 거기서 약속도 없이 친구를 만나는 우연을 종종 경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소설집 『국자 이야기』를 펴낸 후 내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들 중 하나는 “정말 봉천동에 사세요?”였다. 『국자 이야기』에 실린 자전 소설 「나는 봉천동에 산다」 때문이겠지만 그 질문은 좀 묘한 데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심지어 어떤 인터뷰에서는 대놓고 왜 좀 더 좋은 데로 안 가시고, 하며 말끝을 흐린 적도 있다. 그 책을 낸 게 벌써 삼 년 전이니 이젠 시간이 제법 흐른 것 같다. 그러자 그 질문은 이제 이렇게 바뀌게 되었다. “아직도 봉천동에 사세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봉천동에 살고 봉천동을 떠나서 살 마음도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내 생에 가장 좋은 일과 가장 나쁜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며(나는 그것이 결국 지금의 나를 이루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친구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내년이면 진짜로 마흔 살이 되는데 ‘내 가족’을 만들 생각 같은 건 한번도 진지하게 해본 적 없으면서도 부모와 동생들과 그리고 이젠 조카들까지 합세해 살고 있는 가족을 떠날 마음이 아직까진 들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난 참 ‘가족적인’ 사람일까? 아무려나 이번 원고를 쓰기 위해서 작업실을 얻겠다고 결심했을 때도 그 첫 번째 조건은 집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래야 오고가며 엄마가 해준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너무 오래 고독하지 않으면 불안에 떤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고독하면 그걸 견디는 일도 무척이나 어렵게 느껴진다. 나는 하루에 삼만 마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는 통계도 신봉한다. 필요할 땐 잔소리나 반찬 투정이라도 내뱉을 수 있는 가족이 있고 또 필요할 땐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들어앉을 수 있는 내 옥탑방이 있는 집이 나에겐 필요하다. 물론 좋은 작업실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게 이 나이 되도록 집을 못 떠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 가족들과 사는 것이 크게 불편하진 않다. 석 달 동안 쓸 작업실을, 집에서부터 마을버스로 여섯 정거장 떨어진 거리에 얻게 되었다.

    

이 년 전, 2005년 가을에 신촌의 모 대학에서 ‘소설쓰기’라는 수업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매 수업시간마다 내가 좋아하는 외국단편소설, 국내단편소설, 이렇게 두 편씩 학생들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전화를 한 사람이 아, 저는 소설 쓰는 조성기라고 합니다, 라고 말했을 때 깜짝 놀랐다. 그 전 주 수업시간에 바로 소설가 조성기의 중편소설 「우리 시대의 소설가」를 읽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에 와서 특강을 좀 해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러겠다고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끊고 보니 웃음이 났다. 선생이 근무하는 대학이 바로 우리 동네에 있기 때문이었다(참고로, 내가 생각하는 ‘우리 동네’는 내가 살고 있는 봉천동을 가운데 놓고 봤을 때 지리상으로 위 아래 상도동, 신림동까지 그 바운더리가 비교적 넓은 편이다). 그렇게 선생을 처음 만났다. 한번 만난 후론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우연히, 우리 동네에서.

내가 소설가로 등단하던 1996년에 계간지 《작가세계》여름호 특집 작가가 바로 조성기 선생이었다. 지금 그 잡지를 다시 꺼내 보니 선생의 사진이 낯설도록 젊게 느껴진다. 아마 10년 전의 내 사진을 보면 나 또한 그렇겠지. 그 당시 읽었던 선생의 문학적 연대기 중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건 다름 아니라 바로 아버지에 관한 부분이었다. ‘진짜 생년월일과 호적의 생년월일의 차이보다 그에게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 것은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술만 잡수시지 않으면 그렇게 선량할 수 없고 지성적일 수 없는 아버지가 술의 세력에 휘말리기만 하면 전혀 다른 인격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는 아버지를 일관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난관에 봉착한다. 넓게 말해 그는 아버지를 통해 인간내면에 도사린 흉흉한 어둠과 이중성을 일찌감치 감지하게 된다.’ 오늘은 그동안 안 한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실은 나도 진짜 생년월일과 호적의 생년월일이 다르다. 하지만 변함없이 내 생일은 날짜도 기억하기 좋은 12월 31일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끙끙거리며 앓아 온 치유할 수 없는 병과도 같았기 때문에 그 부분이 유독 가슴이 남았던 것 같다.

 



 

공부 잘 하고 모범생이었던 선생이 차츰 달라지기 시작한 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집의 다락에 보관되어 있던 문예지 《현대문학》을 탐독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내가 갖고 있던 한 가지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다. 선생을 만나면서 그동안 느낀 건 선생이 왜 유독 월간지 《현대문학》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난번 산문도 그렇고. 하지만 이런 개인적이 인연이 있었구나.) 그 뒤, 그가 ‘문학병’을 앓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17세에 쓴 소설 「나의 가난한 별」이 심사를 본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경기고등학교에서 시행했던 문학상에 당선하게 된다. 양진오 평론가가 쓴 선생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그때 다른 사람도 아닌 김동리 선생의 심사를 통과했다는 자부심에 고무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곤 까뮈의 실존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삶이 ‘문학하는 삶’이 될 것이라는 예감에 빠진다. 그러나 10년 이상 사법고시에 고배를 마신 아버지의 강한 권유로 가고 싶었던 국문학과나 독문학과를 선택하는 대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우리 동네 스타벅스에서 내 지정석은 단연 창가 자리다. 거기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연히 쳐다보거나 옆 사람들 이야기를 엿듣기만 해도 두서너 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책도 읽고 원고도 다듬고 전화도 몇 통 주고 받으면 반나절은 족히 지나간다. 창가 자리 바로 앞 인도엔 언제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데 모두 신림동으로 가는 5515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다. 언젠가 나도 그 줄에 끼어 5515를 타고 신림동으로 가게 될 줄 아직 모르고 있던 지지난 해 가을 어느 날, 역시 그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문득 누가 톡톡 어깨를 쳤다. ……누구? 목사처럼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을 한(이런 표현을 선생은 싫어하겠지만) 조성기 선생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늘 그러던 것처럼 봉천사거리에서 신림동으로 가는 5515 버스를 기다리느라 저 밖에서 줄을 서 있다가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나를 발견하신 모양이었다. 아무튼, 몹시 반가웠다. 한 한 시간쯤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몇 주 후, 책을 다 읽고 막 스타벅스를 나오는 길에 또 누가 어이 조경란씨! 하고 불러 고개를 들어보니 선생이었다. 그때는 그날 밤 얼른 집에 들어가 잠깐 눈을 붙인 뒤 새벽에 일어나 단편 원고를 시작해야 하는 날이라 꾸벅 인사만 하곤 헤어졌다. 그리고 한 번 더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선생이 맞은편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해서 만난 적이 있다. 그렇게 서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지만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는 약속은 내가 파리니 베를린이니 암스테르담이니 하고 떠돌아다니는 통에 그 일년 후에나 이루어지게 된다.  

다시 스타벅스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심각하게 우울에 빠진 상태였다. 모처럼 굳게 마음먹고 곧 장편소설을 시작해야 할 참인데, 집에는 막내동생의 첫 번째 조카 말고도 며칠 후에는 새로 태어난 두 번째 신생아 조카까지 산후조리원에서 퇴실 해 들어올 예정인데가 뭐 여러 가지 이유들로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작업실’이 필요한 때였다. 그러나 이 나이 되도록 저축도 없고 세상물정 잘 모르는 나로서는 깜짝 놀랄 만큼의 액수를 지불하고도 내 옥탑방보다 별반 나아 보일 것 없는 좁고 불편하기까지 한 방에 들어가야 한다는 걸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원하는 방은 도무지 내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방이었으며 신림동 고시촌, 노량진 입시촌의 고시원, 독서실까지 기웃거려보다가 지칠 대로 지치고 의기소침해진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세 달 동안만 쓸 작고 조용한 방 하나를 얻는 일이 그때로서는 아주 까마득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선생과 긴 시간 동안 긴 이야기를 별로 나누어본 적이 별로 없으면서도 선생을 만나게 되면 있는 말 없는 말 다 술술 하게 된다. 그러니 역시 이 말도 선생은 참 싫어하겠지만 선생은 목사가 되었어도 신자들에게 틀림없이 아주 좋은 목사가 되었을 것 같다. 나의 ‘작업실 고군분투기’를 듣던 선생은 고개를 잠시 끄덕거리더니 밑도 끝도 없이 ‘그런 방이 있을 것 같은데’ 하셨다. 진짜요? 나는 귀가 솔깃해져 배가 고프다는 핑계를 대곤 근처 콩나물국밥 집으로 선생을 모시고 갔다.   



 

1971년, 선생은 대학교 1학년 때 쓴 「만화경」을 개작하여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하고 그 단편소설로 등단하게 된다. 그때 심사를 맡았던 황순원 선생으로부터 ‘육감적이리만큼 생생한 묘사가 매우 주의를 이끄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작가의 모든 첫 번째 소설이 그런 경우가 많듯 「만화경」은 선생의 문학적 원형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종교적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조성기 문학의 근본적인 화두를 이루기 시작하며 결국 사법고시니 문학이니 하는 삶은 다 포기하고 오직 신앙의 길로 들어가겠노라고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아들에게 법복을 입혀보는 것이 평생 꿈이었던 아버지의 분노와 슬픔은 뒤로하고 그는 갈등과 혼란 속에서 거의 10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며 당시 그가 참가하고 있던 선교단체에서 만난, 서독으로 선교를 나간 간호원 허유강과 결혼하게 된다. 이년 후 그들은 신림동 지역에서 서울대를 중심으로 선교단체 지부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 부친의 죽음 이후 신앙을 어떻게 사회화, 문화화시킬 수 있을까 갈등하고 고민하던 그는 마침내 오 년 후 장편소설 『라하트 하헤렙』으로 민음사에서 주관하는 제9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으로 돌아온다. 그 다음해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에 매진하게 된다. 기독교 세계 외에 그의 관심의 폭은 동양사상, 특히 중국의 전국시대, 사마천의 『사기』『맹자』『삼국지』『삼국유사』로 확대된다. 1991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우리시대의 소설가」로 그는 ‘전환기적 현실 속에서 야기되고 있는 가치의 혼란을 풍자적인 언어로 묘파해낸 작품’, ‘말의 자유와 그 진실된 가치를 위해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신화적인 세계와 현실의 삶 속에서 함께 끌어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1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드디어 신림동 고시촌에 세 달 동안 쓸 작은 오피스텔 하나를 얻게 되었다. 선생 덕분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는 이웃사촌이 된 셈이다. 작업실을 얻으러 간 날 사모도 처음 뵙게 되었고 선생의 작업실도 구경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여러 작가의 여러 작업실을 구경해봤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꽤 여러 곳을 보긴 했다. 선생의 작업실은 그 중 가장 소박하고 가장 단출하며 가장 필요한 것만 놓여 있는 그런 방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의 작업실을 들여다봤을 때 이렇게 작업실 구하려고 고군분투할 시간에 차라리 그냥 내 옥탑방에서 글 쓸 걸, 하는 뒤늦은 반성을 하게 됐으며 절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작업실 없이도 탈 없이 글 잘 써왔고 작업실이 없어서 오랫동안 글 못 쓰고 있었던 건 결코 아니었으니까.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생전 처음 갖게 된 작업실에서 나는 새 원고를 시작하고 선생은 일 년 넘게 붙들고 있던 칼 융의 자서전 번역을 끝낸 무렵, 우리는 정식으로 이웃사촌이 된 기념 식사를 하기로 했다. 발목을 다치기 전엔 내가 걸어서 산책을 다니곤 했던 서울대학교 교정 안에, 샌드위치와 케이크가 맛있어서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A TWO SOME PLACE’가 생겼다기에 신림동 녹두거리에서 선생을 만나 택시를 타고 거기 갔다. 선생은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신다. 나도 담배는 안 피우지만 술은 제법 마신다. 하지만 원고를 쓸 땐 술 안 마신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채식주의자들처럼 신선한 야채가 듬뿍 든 샌드위치를 마시며 바람과 햇빛 속에서 초록색 나뭇잎이 찰랑찰랑 흔들리는 걸 보고 담소를 나누었다. 선생은 또 《현대문학》이야기를 했다. 7월호 특집이 ‘내 문학의 적敵’인데 큰 비밀을 털어놓는 것 같아 망설이다가 원고를 넘겼고 원고를 넘기고서도 역시 발표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편집자에게 원고를 되돌려 달라고 했다가 설득당해 포기하고 말았다는 그런 이야기를. 그래서 나는 어머 선생님, 저는 그런 비밀 털어놓기 싫어서 요런저런 핑계 대곤 결국 펑크내버렸는걸요, 선생님도 참, 싣기 싫으셨으면 어떻게든 그렇게 하셨어야죠(현대문학 윤희영씨 미안합니다!), 오지랖 넓게 한마디 덧붙이기까지 했다. 선생은 현대문학에 어떻게 펑크를, 하는 얼굴로 허허 웃었고, 잡지가 나오자마자 나는 선생이 그렇게나 발표하기 망설였던 산문을 찾아 읽었다. 「문학이 내 인생의 적인데」라는 제목의 그 글, 일부를 여기다 옮기면 선생이 정말 질색하시겠지?

 



 

종종 신문사 기자가 나에 관한 기사를 실을 때 ‘목사이면서 소설인 조성기’라는 용어를 쓰는데, 나는 그 용어에 이상하게 심한 반발심이 생긴다. 물론 내가 목사가 아닌데도 기자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일차적으로 부아가 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목사’와 ‘소설가’ 사이에 어정쩡한 모습으로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착잡한 심정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목사가 되지 않으려고 얼마나 고심했는데,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기자가 잘못 쓴 그 용어 하나로 나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그렇다고 실제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 용어는 얄밉게도 ‘내 문학의 적’의 정체를 암시하려고 드는 것 같다.

그 적이 물러났을 때 그야말로 성과 종교를 함께 다루는 대작(명작?)이 나올지도 모른다. 아니, 성과 종교를 함께 다루는 작품을 써나감으로써 그 적을 물리칠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한 신문사 기자와 밥을 먹다가 무슨 이야기 끝엔가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오십대이거나 육십대이거나 심지어 팔십대도 있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추측컨대 40대 후반일 그 기자가 그건 별로 안 좋은 일인데요, 연하를 만나야지요 연하를, 이라고 퉁을 주었다. 왜요? 라고 묻고 싶었는데 너무나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회를 집어먹느라 그 즉시 못 물어보았고 나중에는 까먹어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조숙한 건 사실이었다. 생긴 것도 그래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동네 어른들이 중학교 몇 학년이냐? 물었고 중학생이 되었을 땐 감쪽같이 웨이터들을 속이곤 그때 우리동네에서 제일 잘 나가던 ‘뜨락’이라는 커피숍을 무람없이 드나들면서 서울대학교 언니 오빠들 틈에 끼어서 커피를 홀짝거리며 DJ가 틀어주던 디스코나 나나무스끄리 노래를 넋이 나간 표정으로 듣곤 했으니까. 이성에 눈을 뜬 후에도 당최 연하의 남자한테는 관심이 생기질 않는 걸 보면 좀 이상하긴 하다. 나는 적당히 나이도 좀 들고 적당히 배도 좀 나오고 적당히 두루뭉실하게 생기고 적당히 똑똑하고 문학도 좀 적당히 아는 그런 남자한테 끌린다. 그리고 성별에 관계없이 나이가 들었으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갖고 있는 예술가들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래서 올해 83세인 화가 권옥연 선생님, 역시 그 연세인 무대의상 디자이너 이병복 선생, 아버지보다 한 살 더 연상인 사진작가 강운구 선생 등 여러 선생님들과 식사하고 차를 마시는 시간들이 각별하다.     

선생들은 내가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을 살았으며 살고 있고 마치 좋은 책이란 게 남달리 키가 큰 사람이고 다가오는 세대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높여 외치는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때론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삶의 지혜와 위로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잘 늙은 얼굴과 태도 속에서 나는 살며시 나의 미래를 훔쳐보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늙어가면서 얻고 싶은 얼굴들, 예술에 대한 열정과 태도를. 그들에겐 그런 게 있다. 아직 나에겐 없는 것. 노력하면 가질 수도 있는 것. 더 젊었을 적에도 나는 아름다워지고 싶어서 노력한 적은 별로 없지만 좋은 얼굴로 늙어가기 위해선 정말로 노력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스타벅스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누가 슬쩍 옆에 와서 앉는 것이 느껴진다. 보나마나 조성기 선생님이시다. 그런데 아아 이런, 오늘은 완전 쌩얼이다. 게다가 발톱도 안 깎은 맨발에 슬리퍼, 집에서 뭉기적거리다 나온 목이 나달나달 해지고 늘어진 티셔츠 바람인데! 나는 그만 도망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제 우린 동네 친구잖아, 슬그머니 그런 마음이 들면서 샐쭉 웃음이 난다. 친구 Y가 여기 살았을 때도 처음엔 머리까진 안 감아도 얼굴에 뭘 좀 찍어바르곤 만나다가 나중엔 에라 모르겠다 맨얼굴로 만나곤 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될 만해질 무렵 그녀는 훌쩍 먼 데로 이사를 가버리고 말아 지금은 보고 싶어도 자주 못 보는 사이가 돼 버렸지만. 선생은 지친 내 몰골을 일별하시곤 맛있는 거 사줄 테니 힘내서 원고 마무리 하라고 하셨다. ……맛있는 거? 잠깐 고민하다가 나는 상냥하게 거절했다. 나한테도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선생이 힘들게 번역을 마친 융 자서전이 나오면 ‘A TWO SOME PLACE’에 가서 맛있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이번에는 내가 사드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선생은 모르겠지만 ‘잠수’를 탄 후 내가 가장 자주 만난 사람도 선생이다. 내 경험이지만 오래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너무 자주 만나거나 자주 밥을 먹는 건 좋지 않은 방법이다. 빵이 익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와인이 숙성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친구도 그렇게 천천히, 느리게 사귀는 게 나는 좋고 그게 내 방식이다. 나를 한번 본 그 신문사 기자가 보기보다 참 구식이네요, 한 말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나흘 전,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만난 조성기 선생님과는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래도 또 봉천동이나 신림동 고시촌 어디서쯤 서로 슬리퍼 끌고 어쩌면 어딘가 김치 국물 떨어졌을 그런 헐렁한 옷 입은 채 우연히 또 마주치게 되겠지. 얼핏 보면 정말 목사님처럼 보이는 선생은 여전히 ‘말의 자유와 그 진실된 가치를 위해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스타벅스 문을 밀고 나갔다. 그 등에 대고 나는 성과 종교를 함께 다루는 대작,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선생님? 하고 기대를 잔뜩 담은 큰소리로 묻는다.《문장 웹진/ 2007년 8월》 

 

 

 

 

 

* 조성기 소설가. 1951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소설집으로 『왕과 개』 『통도사 가는 길』 『안티고네의 밤』 『우리는 완전히 만나지 않았다』 『종희의 아름다운 시절』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 장편소설 『야훼의 밤』 『굴원의 노래』 『슬픈 듯이 조금 빠르게』 『바바의 나라』 『우리 시대의 사랑』 『에덴의 불칼』 『욕망의 오감도』 『너에게 닿고 싶다』 등이 있다. <오늘의 작가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현재 숭실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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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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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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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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