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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의 역사

  • 작성일 2007-09-28
  • 조회수 7,764

 

서재의 역사

―백석의 「힌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있어서의 세계와 문학



김수림




1. 藏書家 윤동주


1999년 민음사에서 출간된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이하 『자필』)에는 유족이 보관하고 있던 자필 원고를 비롯해서 시인 생전의 스크랩 자료, 밑줄이 그어지고 메모가 된 장서들의 사진 이미지, 그리고 그 책들의 목록, 직접 옮긴 백석의 시집 『사슴』의 필사본 노트 등이 사진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지내 왔던 개인 전집에 관한 통념과는 다른 형태로서 한 시인을 책 속에 담아 보여 준다. 즉 한 작가의 삶과 시대를 작품들로 생략?집약하면서 또한 그 작가의 작품 전체를 집대성하는 하나의 작은 세계―기념비적인 문학의 소우주를 구축하여 제시한다는 통념과는 다른 무엇으로서. 요컨대 『자필』에서 독자들이 보게 되는 것은 죽은 자가 남기고 간 역사적 유품―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품들의 목록과 그 이미지들의 적나라한 더미 속에서 스며 나오는 유품 그 자체의 이미지이다.

물론 자필로 단 3부만이 작성된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유일하게 동료였던 정병욱에 의해 보관되어 1948년 정식으로 출간된 이후, 윤동주의 시와 시집 전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유품으로서의 운명을 지닌 신화적인 기록이 되었고 한국근대문학사에 있어서 서정시의 뚜렷한 전범이 되었다. ‘모든 책은 제각기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발터 벤야민은 책 일반에 관한 이 라틴어 속담을 모든 낱권의 책은 자신만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말로 바꾸었던 적이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경우, 그야말로 유일무이했던 낱권의 운명은 1948년 이후 무수히 인쇄된 윤동주 시집 혹은 전집 일반이 되는 것이었고, 시인으로서의 윤동주의 운명과 신화를 쌓아 그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필』 전집 역시 이러한 신화의 연장선 위에서 작가의 육필(肉筆)이라는 가장 신화적인 관념에 기대어 우리 앞에 놓인 책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적나라한 유품이란, 한 때 그 주인이었던 육체에 대해 언제나 좀 더 많은 것을 혹은 다른 것을 말해 주는 법이다. 예컨대 윤동주의 원고지로부터 그가 소유한 책들이 꽂힌 서가로 돌아서면 장서가 윤동주, 실내의 고독한 주인이었던 문학청년의 모습에 대해서 넉넉하지 못한 유품들의 목록이 말하기 시작한다.

불과 50권이 채 되지 않는 윤동주의 장서 목록에는 미요시 타쯔지(三好達治)가 번역한 프란시스 쟘(フランシス·ジャ?)의 『夜の歌』가 포함되어 있다. 구입 시기는 1940년 1월 31일. 윤동주와 백석의 독자들 모두에게 익숙한 프랑스의 목가적 성향의 시인의 이름은 식민지 시기에 걸쳐 그다지 활발히 소개된 편은 아니었다. 그러한 중에서도 두 시인의 어휘 선택과 관련된 공명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만큼 시간적으로 가까웠던 것은 1939년 말 무렵 두 차례 있었던 손우성의 번역 정도였다. “쟈므의 一週忌를 當하야” 동아일보 학예면에 실린 “哀戀訟”(동아일보, 1939. 11. 5.)와 “歸燕”(동아일보, 1939. 9. 30)의 시인의 이름―“프란씨스 쟘므”에는 이미 이때에 지상에서 소멸한 것의 이미지가 덧붙여져 있었다. 백석과 윤동주가 이 이름에서 시적인 것을 보고 자신들의 시에 적어 넣은 것은 1941년이었다. 백석은 「힌 바람벽이 있어」(《文章》, 1941. 4.)에서 윤동주는 「별 헤는 밤」(1941. 11. 5. 미발표)에서.

아마도 100부 한정으로 인쇄된 까닭에 구하기 어려웠던 탓이었겠으나, 윤동주가 유일하게 노트에 필사하였던 시집은 백석의 『사슴』(1933)이었다. 자신이 가진 목록에 빠진 부분을 체크해 가며 《문장》과 《인문평론》을 꼬박꼬박 사 읽던 ‘문학청년’이 「힌 바람벽이 있어」에서 읽은 “프랑시쓰 쨈”의 기억과 영향으로부터 “푸랑시쓰 쨤”과 “라이넬·마리아·릴케”를 떠올렸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가 남긴 소장 목록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서로 다른 두 시인의, 서로 다른 두 작품에서 반복되는 이름―어쩌면 단지 동시대적이며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에 불과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이름은, 그러나 분명한 공통점을 지녔다는 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의 알레고리로 취급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 알레고리, 백과사전, 아케이드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힌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힌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중략…)


이 힌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하며 주먹질을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

  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쨈」과 陶淵明과 「라이넬·마리아·릴케」가 그러하듯이


―白石, 「힌 바람벽이 있어」 일부



별하나에 追憶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憧憬과

별하나에 詩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에 게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러워


이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우에

내 일홈자를 써보고,

흙으로 덥허 버리였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

부끄러운 일홈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一九四一. 十一. 五.)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내일홈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 할게외다.


―윤동주, ?별 헤는 밤? 일부


사르트르는 에드가 앨런 포우에 대한 보들레르의 유대감을 플로베르 식의 문인들로 구성된 비밀결사, 예술가들의 공동체와 비교한 적이 있었다. 서로에 대해 어떠한 의무도 없으나 각자가 영위하는 고독한 작가로서의 생을 하나의 사회적 집단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신화적이고 신비로운, 그리고 기계적인 연대감과 질서로 휘감는 이름들의 목록. 이 명단에 의해 하나의 공동체를 불러내고 그곳에 자신의 주소지를 마련함으로써 “작가들 중의 대다수는 하나의 상징적인 계급 이탈의 실현을 시도했다.”1) ‘나’는 이 이름들을 나열하고, 집대성된 이름들은 그 전체 속에서 ‘나’를 분류한다. 백석과 윤동주에게 있어서도 프랑시스 잠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은 도시에서 먼 고독한 공간의 삶을 환기시키기 위해, 그것에 대한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호명된 알레고리일 것이라는 소박한 추측은 가능하다. 이 작은 공동체, 이 작은 세계를 환기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로 시적인 것인 이름―알레고리들의 나열만으로 충분하지만, 그것을 설명하거나 해석하기 위해서는 산문이 필요하다.

아마도 ‘백과사전’이야말로 그러한 작은 세계를 환기하고 이야기하기 위한 가장 탁월한 형식일 것이다. ‘문인 인명 사전’이건 식물도감이건 고유한 이름들의 명단이란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신화적인 측면과 기계적인 측면으로 상반되게 이루어진다. 그것은 동시에 백과사전의 구성이 보여 주는 속성이기도 하다. 백과사전이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항목명―고유한 차이의 단위로서의 고유명들이 늘어선 목차와 그것들을 풀어서 말하는 산문의 두 부분이 결합된 것이다. 백과사전은 시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이 시적인 부분과 산문적인 부분을 알파벳 순서와 같이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것, 서로 상관없는 것들을 공허한 질서 속에 살아갈 주소를 주는 ‘서사-시’가 백과사전이다.

「힌 바람벽이 있어」나 「별 헤는 밤」에는 그 항목들의 이름만이 있고 그것을 설명하는 담론―산문의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그 이름들은 호명되어야 할 어떤 내적 필연성들의 암시(다름 아닌 산문적인 서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글 안에서 더 이상 다른 술어들로 환원될 수도, 분할될 수도 없는 기호의 물질성으로 나타난다. “프랑시스·쨈”은 “프랑시스·쨈”이다. 고유명에 있어서 쪼개어지지 않고 투과되지 않는 물질성이야말로 시적인 것을 출현시키는 마술적 근원의 하나라고 할 때, 여기에서 주관의 외부에 존재하는 시적인 것과 ‘전시 가치’는 불가분한 것이 된다.

한 편의 시 안에서 이러한 명단의 활용이란, 시적인 담론을 어떻게 구조화할 것인가, 어떻게 깊이를 창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부터 어떻게 시적인 어휘의 ‘문맥’과 ‘배치’를 진열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문제의 자리를 옮겨 놓는다. 말하자면 시를 쓰는 일은 이 명단과 더불어 주어와 서술어로 된 담론(~이다)으로부터 접속사의 배치(그리고~ 그리고~)로 이동한다. 시인은 문득 문학적 알레고리―고유명이라는 상품을 진열하는 점원의 자리, 혹은 고유한 상품명을 음미하는 산책자의 자리에 서 있게 된다. 고유명들의 아케이드. 내용을, 주변을 이야기하는 산문이 생략된 고유명들의 연쇄 속에 있는 하나의 고유명은, 단지 겉으로만 볼 수 있는 진열된 상태로부터 해방되지 않은 상품과도 같다. 파리의 호적부와 경쟁하겠다고 호언했다는 발자크는 자신의 납품업자들의 이름을 작품 구석구석에 배열하는 식으로 간접 광고를 하고는 했다.2) 그 가게와 제조업자들의 이름이야말로 19세기의 수도의 시에 해당하는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것이 가속화될 때 오늘날 어디서나 볼 수 있듯이 광고의 언어와 시적인 언어 사이의 간격은 사라지게 된다.



3. 고유명과 세계―문학


문인들의 이름은 이런 식으로 분할 불가능한 차이의 불투명한 물질성으로, 알레고리로, 상품의 시적인 향기로 몇 겹인가 중첩된 채 나타난다. 이렇게 여러 겹으로 된 의미는 어느 한 쪽으로 쉽게 결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으로 고유명에 매혹된다는 것은 세계가 품고 있는 다채로운 특이성, 알레고리, 그리고 상품의 아우라가 뒤얽힌 미로에서 ‘기꺼이’ 길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에서 얘기하고 있는 두 편의 시는 이러한 길 잃음의 방편이다. 문학은 고유명이라는 물질적인 언어들을 통해 언어 안에서 감각적인 세계, 이미 주어진 것과는 다른 세계를 환기시켜 그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작가와 독자의 위치를 결정하는 수단이 된다.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 “좁다란 방의” 세계, “희미한 십오촉 전등”과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와 같은 사물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 “그리고 또 「프랑시쓰·쨈」과 陶淵明과 「라이넬·마리아·릴케」”와 같이 하나하나가 멀리 떨어진 것들이 문득 한 곳에 존재하는 세계로 그것들이 “그러하듯이” 고유명의 수집가는 이동할 수 있게 된다(백석). 가을밤이라는 시간만 존재하고 구체적인 공간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감각이 없는 세계,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憧憬”이 대응하는―즉 천상의 형이상학적인 성좌가 ‘나’의 주관적인 상념에 단조롭게 대응하는 세계에서 구체적인 이름들의 연쇄들 사이, 자신이 소유한 (이름들의) 기억들로 이루어진 세계로 이주하는 것(윤동주) 역시 이름들의 질서를 재구성하는 ‘문학’이라는 방법에 의해 가능해진다.

이 고유명, 이 알레고리, 이 상품명, 이 문인 인터내셔널의 회원 명부를 배치하는 일은  그런 점에서 무엇보다도 객관적인(주관 외적인) 세계의 질서와 관계를 맺는 방식―아니, 그 관계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관계의 관계 맺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주어진 세계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분류하는 방법’(레비-스트로스)일 뿐만 아니라, 분류표가 환기하는 작은 세계 속에 자신의 고유함을 등록하는 방법이며, 또한 다채로운 이름들―알레고리이자, 순수한 차이이며 상품인 이름들을 소유하는 방법이다. 요컨대 실내와 같은 외딴 공간에서 세계를 누리는 방식, 수집가의 방식이다.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자는 그 속에 빠져 들어간다. 그는 이 예술 작품 속으로, 마치 중국 전설에 전하듯이 완성된 자기 그림을 쳐다보는 화가가 이내 그림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들어간다.”3) “이러한 수집가에 있어서는 사물이 그의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그 사물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4)

세계라는 오늘날의 어휘에 어원적으로 대응하는 라틴어 Mundus는 신적인 질서를 포함하는 영역이라는 뜻과 인간적 생활이 영위되는 장소로서의 세속적 공간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수집은, 말하자면 낡은 사물들로 새로운 세계―수집가가 거주하는 장소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개인이 사물을 소유하고, 소유한 사물과 사물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리하여 역으로 선택된 세계가 개인을 소유하는 삶의 방식이다. 백석과 윤동주의 시에서 문학이 이름들의 질서를 재결정하는 방식이라고 할 때, 그때의 문학은 이런 맥락에서 말 그대로 삶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학’, ‘시작(詩作)의 방법론으로서의 고유명의 수집 편찬’을 통해서 백석과 윤동주는 식민지인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 세계와 세계문학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근대 이후로 근대성의 기원인 제국 혹은 서구의 시선을 경유해서 조선적인 것을 구상하고 세계를 하나의 평면이 아닌 위계(位階)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유력한 방식으로서, 서구와 동양이 뒤얽힌 백과사전과 모든 것을 평면으로 만드는 인명부와 고유명의 아케이드의 시적이고 또 기계적인 질서에 대한 관심을 이 작품들은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관심 속에서 세계를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변천(變遷)하는 것으로서 다루려는 시도를 읽어낼 수는 없을까? 김우창은 2001년에 이렇게 적었던 적이 있다. “아직도 우리는 세계라는 사실이 문학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삶의 테두리로서의 세계가 아직 외부에 있는 타자로서가 아니라 내부의 원리로서 상상력의 자연스러운 준거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되는 것은 한국이라는 사회가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중심부에 들어가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일는지도 모른다.”5) 「힌 바람벽이 있어」와 「별 헤는 밤」이 문제작으로서 다시 읽혀져야 할 필요가 있다면 이런 이유에서이다.



4. 묵시록적인 서재와 세계


물론 백석과 윤동주가 (세계)문학 속에 사는 것, 세계(문학)에 참가하는 것으로서 ‘세계―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대하는 태도의 방식이었던 것이고, 그러한 한에서 역사적인 것이다. 하지만 두 시인에 의해 그것이 실현된 양상은 닮았으되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예컨대, 방언과 다양한 외국의 고유명들은 백석에게 언제나 외부로부터 전달받는 언어, 기억하는 것(내면에서 솟아나는 기억)이 아니라 떠오르는 것(외부로부터 침범하는 기억)인 반면에, 「별 헤는 밤」에서 윤동주의 목록은 내성(內省)으로부터 개시되는 것, 시적 주체의 발화에서 시작하는 것으로서 문면에 나타난다. 고유명들을 통해서 상이한 것들이 기계적으로, 평면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시적으로 연결되는 세계가 도래한다고 할 때, 그 이름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해 서구의 사유는 언어를 순수한 명명의 차원과 담론(discours)의 차원으로 나누는 이론으로 응답했던 바 있다. 담론의 차원에서 언어는 공시적인 구조와 문법으로서 취급되며 한 낱말은 다른 술어들의 기술(記述)로 대체 가능한 것으로서 취급된다. 반면에 순수한 명명의 차원에서 “이름은 상속 속에서 인간에게 닿는데, 이 상속은 역사적 전달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름은 오직 주어질 수 있는 것이고,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6)

백석에게 숱한 고유명으로 채워진 방언은 무엇보다도 ‘상속된 언어’ ‘전달된 언어’였다. “고유명은 언어의 일부이며 언어의 내부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에 대해 외부적이다. (……) 고유명은 외국어뿐만 아니라 모국어에서도 번역될 수 없다. 즉 그것은 하나의 차이 체계(랑그)로 흡수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고유명은 언어 속에서 외부성으로 존재한다.”7) 내부에 있으나 외적인 이 고유명은 전달에 의해 존재하기에 반드시 역사적이다. 백석에게 있어서 “바구지꽃”과 “짝새”와 “프랑시스 쨈” 그리고 “도연명”이 한 군데에 배치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조선어 속의 외부, 프랑스어 속의 외부였기 때문이었다. 과감하게 말해서, 그에게 세계란 ‘한 언어 내부에 있는 외부’ ‘한 국가와 민족 내부에 있는 외부’ ‘문학 내부에 있는 외부’ 들이 펼쳐지는 지평이었다. 백석에게 그러한 내부이면서 동시에 외부인 장소와 언어는 언제나 구체적으로 환기되는 것이었다. 그는 문학과 언어에 있어서 역사성(전승의 문제)과 세계(장소의 문제)를 함께 생각했던 매우 드문 시인이었고, 이러한 문제의 장소로서 문학의 역사성을 가장 첨예하게 만들었던 문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문학사는 아직까지도 그를 낱낱이 알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 이것은 ‘문학’의 역사성, ‘문학’의 세계성을 모색하고 사유할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고 문학이 문학 내에 갇혀 버리는 역사적 징후처럼 여겨진다. 비록 공교로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해도, 「별 헤는 밤」의 구절들이 「힌 바람벽이 있어」의 구절들에 대한 기억과 반복으로서 읽히게 된다는 것은 짐작하기 힘들 만큼 불행한 일이다. ‘문학’이 ‘문학’을 준거 삼아 반복하는 것으로서, 무언가를 기억하는 일이 문학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향에 불과하게 되고, 외부와의 연결―역사와 세계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별 헤는 밤」에서 연상을 통해 호출된 사물과 이름은 단조롭고 동어반복적이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는 그는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다고 얘기했던 바 있다. (「돌아와 보는 밤」, 1941. 6.) 어두운 세상은 어두운 방과 동일하기에 세상 같다. 이것은 지독하게 묵시록적인 이미지이다. 세계도 사라졌고, 세계가 사라짐으로써 개인이 돌아온 실내―서재의 좌표 또한 어둠―무(無)의 영역으로 집어삼켜졌다. 「終始」라는 수필의 말미에 “이제 나는 곧 終始를 바꿔야 한다. 하나 내 차에도 신경행, 북경행, 남경행을 달고 싶다. 세계일주행이라고 달고 싶다. 아니 그보다도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 고향행을 달겠다.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다”고 말했던 윤동주는 끝내 자신의 서재 밖에서 세계의 감촉을 실감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유품만을 전하고 있다.

김윤식은 윤동주의 「참회록」의 첫 구절(“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기에서의 거울은‘나의 거울’이며, (……) 그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며, 그 어느 왕조의 유물 자체가 바로 ‘나’이다. 그러니까 이 거울은 그 자체가 ‘나’이면서,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8) 나와 나의 자의식을 역사의 유물―전달받은 것으로 여겼던 윤동주의 역사의식은 역사와 세계에 대해서 순환과 반복을 뚫고 나가지 못하는 자신의 곤혹한 상황을 투명하게 응시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가 한국문학에 물려준 것은 그러한 자기응시―유품으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문학 내부에 안주하는 한, 서정시의 어떤 전범으로서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는 한, 우리는 아직도 역사와 세계는 물론, 윤동주의 불행이 문학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런 맥락에서 윤동주라는 이름의 불우한 유물―구리 거울은 지금 여기 문학 안에서 무언가를 회상하고 꿈꾸는 자들 모두가 물려받은 문제인 것이다.《문장 웹진/2007년 10월호》




※후주

1) 장 폴 사르트르, 『시인의 운명』, 박익재 譯, 문학과지성사, 1985, 148~156 면 참조.

2)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1권, 조형준 譯, 새물결, 2005, 178 면. 참조.

3)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현대사회와 예술』, 차봉희 譯, 문학과지성, 1980, 84면.

4)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譯, 민음사, 1983, 39 면.

5) 김우창, 「문학과 세계시장」, 『경계를 넘어 글쓰기』(김우창?피에르 부르디외 外 共著), 민음사, 2001, 302 면.

6) Giorgio Agamben, 『Potentialities』

7) 가라타니 코오진, 『탐구』 2, 권기돈 譯, 1998, 새물결, 39 면.

8) 김윤식, 「한국 근대시와 윤동주」, 《나라사랑》, 1976 여름. (이건청 편저, 『한국현대시인연구-윤동주』, 문학세계사, 2000, 재수록, 224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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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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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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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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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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