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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로망스

  • 작성일 2008-04-30
  • 조회수 3,153

 

마라도 로망스




김서령




“베트남에 몇 달 가려고 하는데 말이야, 생각보다 돈이 드네.”

나는 심드렁하게 끄덕였다. 가야지. 어디로건 가야지. 또 다른 세상을 보고 와야지. 이 어지러운 서울 바닥을 잠시 떠나 정말 글만 쓰다 와야지. 그렇게 큰맘 먹고 가방을 챙기다보면 달랑달랑한 예금통장이 뒷덜미를 잡기 마련이었다. 류외향 시인도 다를 바 없어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니는 우예 그렇게 잘 돌아댕기노? 난 어디 한 번 갈라니까, 온갖 게 다 붙잡는다.”

“일 년 벌고 일 년 논다 생각하면 돼요. 별 거 아니에요.”

혼자 키우는 강아지 두 마리를 한동안 돌봐줄 후배도 구해 놨건만 결국 류외향 시인은 베트남을 접었다. 그리고는 돈이 덜 든다는 마라도로 떠났다. 한국 최남단의 작은 섬,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에서나 보았던 그 섬 말이다. 지중해나 남미의 어느 섬으로 떠났다는 말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그곳에서 사랑에 빠졌단다.

두문불출 시를 쓰겠다고 떠나간 섬에서, 횟집을 하는 남자를 만났단다.


“말도 안돼! 정말 결혼을 한대요? 외향 언니가요?”

작가들과의 술자리에서 그 소식을 처음 들은 나는, 처음에는 사람들의 실없는 농담 정도로 여겼다. 설마.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 삼겹살집을 채우고 앉았던 대부분의 작가들이 나와 비슷한 강도로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류시인을 대학 때 처음 만났다. 그녀는 그때도 이미 시인이었고 나는 낯을 가려서, 아무에게나 말을 잘 못 붙이는 후배였다. 안 그래도 그녀의 딱딱하고 메마른 표정, 그리고 툭툭 내뱉는 서늘한 말투에 지레 겁을 먹을 정도인데, 내가 겨우 얼굴을 익힐 무렵에는 또 머리를 박박 밀고 나타났다. 맨들맨들 한 올도 남기지 않고 파랗게 깎은 머리에 모자 하나 푹 눌러쓴 그녀를 술자리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이야기 한 번 나누지 못한 채 졸업을 했다.

유기견을 두 마리나 키우고 있는, 게다가 그 유기견을 서울 어느 동네 좁은 자취방에서 키우는 것이 가슴 아파 집값 싼 평택으로 이사를 간, 그런 면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아, 얼마 전엔 버려진 강아지를 한 마리 더 데려왔다는 소식도 들은 것 같다.

나는 그녀와 보름 간의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아시아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한 심포지엄이 태국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그렇게 4개국에서 열렸던 것이다. 연극배우, 영화제작자, 작가들, 그리고 신문사 기자들이 몇 동행했다. 보름 동안 나는 그녀와 호텔방을 함께 썼다. 동네 큰 개에게 물려 몸이 두 동강날 뻔한 유기견을 치료하느라 두어 달치 생활비를 고스란히 날렸다는 이야기도 아마 그 여행의 어느 밤에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투박하기 그지없는 경상도 사투리에, 긴 말 싫어하고 말대꾸하는 것 싫어하고 간지러운 말도 싫어하고 강압적인 말도 싫어한다. 그러니 류 시인 앞에서는 잘 모르고 떠드느니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인데, 그걸 미처 몰랐던 모 신문사 기자 하나가 문학이 어쩌고, 시가 어쩌고 하다가 숙소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밤새 그녀에게 욕을 먹었다. 필리핀의 바닷가였다. 기자는 그날 마신 술이 다 깰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만 물론 그녀는 술 때문에 그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나를 포함한 몇몇 작가들이 상처받은 기자를 달래느라 그날 밤 애를 좀 먹었다. 후에 그 기자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그날의 수모를 구구절절 고백했고(물론 일촌 공개용 글이었다), 류 시인은 기자의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일촌신청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하루 꼬박 고민한 기자는 그녀에 대한 글을 지우고 일촌신청을 수락했다. 물론 지금은 두 사람, 더없이 돈독한 관계다.

 

 


무표정과 투박한 말투, 그리고 또 그녀를 설명하는 한 가지 코드가 있긴 하다. 바로 주먹. 물론 나는 목격한 바가 없다. 무용담처럼 전해 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술자리에서 난동을 피우는 문단 남자 선배를 주먹으로 제압했다는, 그래서 유치장 신세를 잠시 졌다는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낭창낭창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학교 때부터도 그런 비슷한 사건이야 종종 들어왔으니까. 추저분하게 구는 몇몇들을 류 시인이 팼다는 소문들은 나에게 그리 낯설 일이 아니다.

그런 그녀였으니, 평택 대추리의 미군기지 건설 반대현장에서 목소리를 세우며 뛰어다녔을 류 시인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오랜 시간 평택의 투쟁 현장, 그 한 가운데에 있었다. 어떤 소설가는 머리가 깨지고 어떤 시인은 목을 졸렸단다. 그녀는 그곳에서 벽시를 썼다. 대추리 주민들의 초상화가 그려진 어느 초등학교의 담벼락에 그녀는 시를 썼다. 그 시는 그녀의 주먹만큼이나 강했겠지만, 결국 학교가 파괴되면서 주민들의 초상화와 함께 땅에 묻혔다. 학교가 무너지던 날, 그녀는 바락바락 악을 썼을까, 아니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소주를 마셨을까.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보아야겠다. 별 걸 다 묻는다고 또 서늘하게 목소리를 낮출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대구에서 치러진 그녀의 결혼식, 어느 시인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층을 헤맸다. 또 어느 시인은 기념 촬영 때 신부의 드레스 자락을 밟았다고 욕을 먹었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그녀는 그 날, 더없이 우아하고 조용했기에 우리의 원성을 우우우, 듣기도 했다. 원래 결혼식장 풍경이라는 것이 조금만 지루하다 싶으면 식당으로 슬쩍 빠져나가 뷔페 챙겨먹는 것이 예삿일이지만 그날은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지금 비디오 찍고 있는 것 같아. 나중에 돌려보면서 없는 사람 체크할지도 모른다고.”

“다들 조용히 해. 신부가 지금 이쪽 보고 있단 말야.”

“아. 축가 부르는 후배 목소리가 너무 작지 않아? 나중에 맞는 거 아냐?”

“서령! 너는 꼭 서울에서 결혼식 해! 이번엔 신부가 무서워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네가 지방에서 하면 안 올 거야!”

무슨 말을 하건 웃음이 터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류 시인과, 머리를 한껏 틀어올리고 인조 속눈썹을 붙인 신부의 모습이 좀처럼 오버랩 되지 않아 우리는 자꾸만 킬킬거렸다.


그녀는 지금 마라도에 산다. 인물 훤칠한 낚시꾼 신랑과 무뚝뚝한 시인 신부는 요즘 짜장면 집을 열었단다. ‘자장면’이 아니다. ‘짜장면’, 그것도 해물을 넣은 ‘톳짜장’이란다. 맞춤법 표기가 틀렸다는 것은 알지만, 된소리를 쓰지 않으면 언어순화가 되고, 언어순화가 되면 국민들의 성정이 부드러워진다는 국립국어원의 의견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 미니홈피를 관리하는 대신 새 블로그를 열었다. ‘시인과 낚시꾼이 요리하는 마라도 짜장면’이라는 이름이다. 시인이 운영하는 블로그라면 방명록에 익숙한 이름 하나쯤 나타날 법도 한데, 온통 마라도 관광객들뿐이다. 맛있었다고, 꼭 다시 들르겠다는 글들이 많은 것을 보니 그녀 솜씨가 괜찮긴 한가 보았다. 바쁠 때 설거지만 좀 도와주면 먹여주고 또 재워준다고 류 시인이 약속을 했는데, 서울 생활에 심사가 꼬일 때쯤 주섬주섬 가방 싸들고 한 번 마라도엘 가야겠다.

 

 


거문도에 사시는 소설가 한창훈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오셨다.

“요즘 뭐하고 지내냐?”

“그냥 글도 쓰고…… 일도 하구요.”

“어딜 출근하고 있다는 말이냐?”

“네.”

“못 그만두냐?”

“음……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만두기는 좀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여기 거문도에 말이야, 배 타는 총각이 하나 있는데, 성격도 좋고…….”

“선생님. 지금 저보고 시집가란 말씀이세요? 선 보라구요?”

와락 웃음이 터졌다. 시인 하나는 마라도로, 소설가 하나는 거문도로. 이슈는 되겠지만 이건 명백히 류외향 시인의 아류다. 거문도 바닷가 항구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아 한창훈 선생님과 싱싱한 회 한 접시 떠놓고 소주를 마시며, 배 타고 돌아올 신랑을 기다리는 것도 제법 운치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류다. 해서 한창훈 선생님께는 그저 다음에 거문도로 여행이나 한 번 가겠다 말씀을 드리고 말았다.《문장 웹진/200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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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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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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