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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의 접도(蜨道)를 따라서, 이생(異生)의 접도(接道)를 위하여

  • 작성일 2008-05-30
  • 조회수 1,915

 

이 생의 접도(?道)를 따라서, 이생(異生)의 접도(接道)를 위하여 

- 윤후명 소설에 대한 단상들




양윤의




윤후명의 소설은 펜이라는 오래된 주구(呪具)로 받아 적은 창세기이다. 윤후명은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삶의 전 여로(旅路)를 존재의 영점(零點)으로 삼는다. 길과 길이 맞붙어 있듯이 이생과 저생은 맞닿아 있다. 현재 속에 겹쳐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경이로운 순간’은 근작 『새의 말을 듣다』(문학과지성사, 2007 - 인용 시 면수만 표시)에 수록된 소설들 속에서도 생략된 적이 없다. 여기서 인물이 느끼는 ‘교감’의 순간이나 ‘빙의’의 체험은 윤후명의 소설 문법으로 종합될 수 있는 구성 요소들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윤후명의 소설 ‘자체’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다. “나는 신비주의자라도 된 양 신비한 교감(交感)을 누려 보려고 노력하곤 했었다.”(「處容나무를 향하여」,『원숭이는 없다』, 민음사, 1988) 이러한 작가의 고백은 소설 속에서 중단된 적 없는 미적 체험을 세속 도시에서 되살려야 할 존재론적 요청으로 삼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금 당겨 말하자면, 신앙처럼 품고 있는 소설적 ‘믿음’을 작가는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부른다. 

표제작인 「새의 말을 듣다」와 「나비의 소녀」(2001년 발표당시 원제는 「나비의 전설」)는 인물이 ‘교감’의 순간을 통해 다른 세계(異界)와 만나는 각성의 계기를 소설화 한 ‘발견’ 서사의 골격을 갖추고 있다. 특히 두 작품은 ‘새’의 말을, ‘나비 떼’가 내준 길을, 세계 속에 ‘숨은’ 의미를 깨닫는 서사의 급전(急轉)이 ‘여행’이라는 여로 구조 속에서 완성된다는 점에서 윤후명‘식’ 레퍼토리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다.

「새의 말을 듣다」의 주인공은 독도에서 알타이어를 전공하고 있다는 한 언어학도를 만나게 된다. 그 언어학도는 “모든 사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괘액괘액’ 소리를 내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알타이어”로 들린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 청년학도가 예의 지적 자의식이나 인식욕으로 세계를 진단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일종의 감동을 받는다. 세계와 공명하는 자는 분석적 이성을 넘어서는 ‘충일’의 상태 속에 있다. 그가 믿는 세계의 질서는, 듣고 보고 만지는 동시적인 감관과 더불어 서로 느낄 줄 아는 감정적인 감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멸종한다는 말은 내게 다가붙은 빙의 같았다.”(26면)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영혼의 진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언어학도의 얼굴에서 “알타이 샤먼”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것은 접신 욕망에 사로잡힌 세속화 된 영매의 얼굴이 아니라 “진정한 영매(靈媒)”의 눈빛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이 경험한 내밀한 ‘일체감’은 결국 자신의 모국어인 ‘한국어’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것은 소설 속에서 공들여 서술하고 있듯이 광신도적 열광으로부터 전염된 일시적 동요가 아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진동하는 그 에너지는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적 ‘전율’의 재확인일 터이다. 자신의 근거를 확인하는 존재론적 울림을 확인하는 지점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에 속한다.

마르틴 부버의 말처럼 사람들이 상상하는 3인칭의 ‘그것’은 한 사람이 진정으로 ‘너’라고 부르는 생생한 인간성과는 별개의 것이다.(『나와 너』) 그렇다면 윤후명의 소설은 3인칭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2인칭인 ‘그대’가 되는 위상학적 전환을 통해 ‘나’를 재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삶이 만남이 되고 그것이 문학이 된다. ‘새의 말을 듣’는 능력이 영매가 내림받은 영특한 청력이라면, 그것은 소멸하는 것들을 불러낸 ‘사랑’의 능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이는 합리적 해명이나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서 유지되는 관계가 아니다. “나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책 없는 요동 속에 거하는 것이 사랑의 증상일 터이다. 사랑은 어쩔 수 없는 ‘내맡김’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 점에서 윤후명의 소설 속에 마련된 또 하나의 통로인 ‘환(幻)’의 길은 사랑의 도상(途上)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세계와 인간 사이의 본래적 관계가 다름 아닌 연인 관계라고 한다면 소설 속에서 인물이 경험하는 환상이나 환청은 예외적인 체험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비의 소녀」에서 주인공 ‘나’는 교외를 지나는 길에 눈앞을 가득 메운 검은 ‘나비 떼’를 보고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 근처 한 음식점에서 ‘나빌레라’라는 이름의 소녀를 보게 된다. ‘나비 같은’ 몸짓을 가진 소녀는 ‘나’가 일생 동안 만났던 소녀들의 이미지로 변하다가 결국에는 몽골의 초원을 뛰노는 소녀의 뒷모습으로 화한다. 소녀의 이미지가 다시 만날 수 없는 순수한 존재의 표상이라면 그것은 ‘나’의 내면에 자리 잡은 그리움이 만든 화신일 것이다. ‘나’는  몽골의 광활한 산야에서 맛보았던 일체감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신과 소녀와 초원의 풍경이 한 덩어리가 되는 듯한 충만감, 그것은 세속 도시의 일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신성한 충만감이다.

이 소설에서 소녀와 몽골에서 만난 소녀, 이들 두 소녀에 대한 기억은 나비의 이미지로 반복되면서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주인공이 ‘나비 떼’의 장경(場景)을 떠올리면서 “그 골짜기의 나비는 단순히 그냥 나비가 아니라 뭔가 내 삶에 의미를 던지는 나비로서 받아”들인 것은 결국 “여기어 어디이며,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나’ 스스로 그것을 “몹쓸 상징”이고 “몹쓸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듯, 그가 두 소녀의 이미지를 나비의 이미지와 겹쳐 읽고, 자신의 삶을 허공에 길을 내는 ‘나비’에 빗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풍경의 비밀은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과 상통하는 삶의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는 세계는 결국 어디에도 없는지 몰랐다. 세계는, 즉 우리의 삶은 그렇게 궁극적이지 못하다는 게 옳은 판단일 것이었다.”(89면) 요컨대 “나도 뭔지 모를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입몽(入夢)의 관문을 통과하고 다시 환의 뒷문을 걸어 나오는 각몽(覺夢)을 통해서 현재적 삶의 의미를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비가 낸 길(?道)은 현실과 꿈의 위계를 허물어서 통념적 가치를 의문에 부치는 소설적 장치라기보다는 세계의 문턱을 허무는 ‘열림’의 순간을 보여 주는 시적 계기라고 말하는 편이 온당할 듯하다. 그것은 목적을 수행하는 소설적 전략보다는 운명적으로 귀납되는 시적 효과에 가깝다. 하여 소녀-나비를 만나는 환상적 순간들은 “곳곳에서 모세혈관처럼 인연이 이어져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각성의 연속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이 ‘한몸’이었던 순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점에서 회고적 뉘앙스를 갖는다.

소설 속 세계는 <만남-헤어짐>이 교차하는 세밀한 접도(接道)이다. 또한 그 매듭의 다발들이 모여 거대한 ‘상징’을 완성하는 서정적 우주이다. 윤후명이 말하는 ‘환멸(幻滅)’의 형이상학은 현실 속에 미만해 있는 외로움을 껴안고 사는 구도자의 마음가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이별한 존재(離生), 소멸하는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중하게 여기는 도저한 예술가적 자의식이기도 할 것이다.

알베르 베갱은 ‘인격(personne)’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를 내는 연극적 인물의 이미지로 한정하는 데 반대한 바 있다. 알베르 베갱에 따르면,  ‘인격’은 ‘~를 통해서 울려 나온다(per-sonare)’는 어원이 보여주듯이 ‘내부의 신성한 목소리’가 투명한 관념을 통해 표현되는 개인의 정신을 의미한다.(『낭만적 영혼과 꿈』) 윤후명의 소설 속의 서술자가 유독 1인칭에 한정된다는 점과 인물이 여행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심오한 목소리를 듣는다는 점에서 소설 속 무수한 1인칭들을 작가의 예술가적 인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단적 자아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유기성 속에 있되 “대화를 나누는 길은 결국 자기 언어”로 가능할 것이라는 작가적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태평양의 끝」에서 주인공이 떠올린 한 구절처럼, “우리 만남의 울음소리”(282면)로 압축될 수도 있다.

끝으로 윤후명의 ‘여행하는 인간’은 소위 탈 국가적 상상력이 강조하는 무차별적 다양성이나  극단적 상대주의적 관점을 경계한 의식적 소산이라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삶은 매끈한 지구본(global)의 퍼즐 조각처럼 완전한 하나(one)를 이루는 부분들이 아니다. ‘나’의 삶은 완전하게 닫히지 않는 세계(world) 속에 거하지만, 동시에 그 삶의 단 한 장면이 세계 전체를 능가하기 때문이다. 지구적 자본주의와 세속적 지구화(globalization)가 묻지 않는 것은 인간의 덧없는 기억(「나비의 소녀」)이고 소멸하는 것들의 행방(「새의 말을 듣다」)이다. ‘고도성장’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소설 속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런 소박한 고백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멸종하지요.” 그리고 그 고백을 향해 “자신을 숨김없이 깡그리 맡기고 싶”은 작가적 욕망이다.   

윤후명은 “우리의 삶이란 만남과 헤어짐을 나란히 놓는 과정”(273면)이라고 말한다. 만남의 시작과 헤어짐의 귀결이 한데 모여 있다는 것은 초연한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생의 아이러니에 가깝다. 소설 속 1인칭‘들’이 경험한 환각의 세계 역시 쓸쓸한 회고담과 맞물려 있다. 작가의 근원적 그리움은 나비가 허공에 낸 길(?道)을 따라 “서글픈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면서  ‘나’의 삶 속에 접혀 들어가 있는 ‘그대’의 궤적을 발견하는 길(接道)이기도 하다. “내 목숨이 몇 천만 년, 몇 억만 년을 환생을 거듭하며 이어온 것”으로서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범부(凡夫,異生)가 “이 이승을 하루하루 늘 새로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울부짖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길을 걷는 것은 현실을 초월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노력임이 분명해 보인다.《문장 웹진/200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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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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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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