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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값’에 대한 보고서

  • 작성일 2008-05-30
  • 조회수 2,142

 

‘이름값’에 대한 보고서




 기 정




<낭독의 발견>이란 프로그램인데요?


“ <남극의 발견>이요? 네? 아, <남북의 발견>이라구요?”

“아니……시를 낭독하다, 할 때  <낭독의 발견>이란 프로그램입니다”

“아~ <낭.독.의……발.견>! 이라구요?”

 


불과 1, 2년 전만 해도 섭외전화 한 통에 긴 설명이 필요했다. 제목을 제대로 알아차린 후에도 전화기 너머에선 몇 초 동안의 침묵이 흐르곤 했다. 텔레비전에서 낭독을 한다구? 도대체 정체가 뭐지? 낭독으로 뭘 발견한다는 거야? 현란한 볼거리로 넘쳐나는 텔레비전에서 정적인 낭독을 통해 뭔가를 발견하라니…….  분명 시작부터 낯설고 무모한 도전이었다. 게다가 방송 시간은 점점 밀려나 밤 12시를 훌쩍 넘겨 자릴 잡았으니 태생적인 불리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우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낭독의 발견>은 100회 고지를 넘어 마침내 200회를 맞이했다. 노래와 춤과 영혼의 문장이 어우러진 축제 한마당에 수백 명의 관객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2003년 가을, 첫 전파를 탄 이후 4년 반을 쉼 없이 달려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 자릿수를 넘지 못하는 시청률 사각지대에 머물면서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감성파 제작진이 모여 앉으면 과연 우리가 100회 고지를 달성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느림의 미학에 마음을 기대는 조용한 움직임은 제작진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인터넷엔 ‘낭독의 발견’이란 팬 카페가 생겨나고, 녹화가 있는 날엔 불원천리 멀리서 찾아온 관객들로 북적인다. 좋아하는 소설가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휴가까지 내고 달려온 광주의 119대원이 있는가 하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초로의 신사는 종종 메모지와 펜을 들고 나타나 낭독 무대를 빠짐없이 기록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수백 편의 시를 줄줄 암송하는 오십대 아주머니는 녹화 전 막간을 이용한 즉석 낭독회로 박수 갈채를 받기도 한다. 재밌는 토크쇼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껏 풀어져 즐길 수 있는 음악회도 아닌 오붓한 낭독 무대에 이렇듯 마음으로 이끌리는 건 아마도 ‘진정성’의 발견이란 찬 우물 같은 매력 때문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공들여 만든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일회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방송의 한계는 늘 아쉬움으로 남는 법. 제작진도 감회가 새로운, 200회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다시 음미해 볼 수는 없을까? 이런저런 궁리 끝에 얼마 전 『인생낭독』이란 제목의 책을 한 권 펴냈다. 말하자면, 4년 반 동안 낭독 무대를 채웠던 잊지 못할 구절들과  뒷얘기를 기록한 것이다. 낭독의 울림을 입체적으로 만들었던 무대 사진과 함께 육성으로 마음의 무늬를 전했던 주인공들의 에필로그도 함께. 준비하는 동안, 긴 여운을 남겼던 각계각층의 주인공들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출판 동의를 구하는 절차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기대치를 넘어 깊은 울림을 전했던 그들의 일상이 여전할까? 하는 궁금증도 컸다.

 


 

거절의 미학(美學)


“ 아? 네 벌써 200회나 됐나요? 축하합니다.”

“ 제 글을요?  아유……많은 사람들에게 낭독할 기회를 주는 건데  승낙하고 말고가 어딨습니까? 책 나오면 꼭 한 권 보내주세요!”

특별했던 낭독 무대의 추억을 되살리며 대부분 흔쾌히 출판에 동의를 해 주었고, 더러는 10년 20년 장수하라는 부담스런(?) 격려 인사까지 곁들여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예기치 못한 데서 발생했다. ‘추천사’를 써 주십사 요청한 세 분 명사 중의 한 사람, 명쾌하고 빠른 말씨로 알려진 그녀가 단호하게 ‘노(no)!' 거절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추천사를 쓰려면 반드시 원고를 읽고 나서 써야 하는데,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직접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사람이니 어떤 내용인지……읽지 않아도 짐작이 가지만, 그렇다고 읽지 않고 쓴다는 건 <낭독의 발견>에도 심각한 결례이며, 혹여 자기 이름의 추천사를 보고 책을 사는 이가 있다면 그들에게도 심히 미안한 일이라는 거였다. 빠른 속사포식 말투를 애써 느릿느릿 늘려가면서 거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동안 0.001초 동안의 배신감(?)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느닷없이 ‘감사합니다’라니. 하지만, 지구촌 재난 현장에서 구호의 손길을 펴는 그녀의 숨 가쁜 일상을 들여다 본 나는 어쩔 수 없이 즐거운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출연자 선정을 할 때마다 가장 엄격한(!) 잣대로 가늠해 보는 ‘진정성’. 역시……우리는 그녀를 제대로 보았던 거다.



물음표를 마침표로 바꿔 주세요!


마지막 교정을 보고 출판사로 원고를 넘기기 직전, 각각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031로 시작되는 낯선 번호가 액정 화면에 뜨더니, 예의 조심스런 말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 왔다.

“저…… 기정 작가시죠? 저는 가수 아무갠데요…… 원고 잘 읽었어요, 그때 녹화 때 제가 너무 울어서 민폐를 끼쳤는데…… 이번에 무대 사진이 나간다는데 혹시……우는 장면이 나가나요? 그리고…… 문장 중에 몇 군데만 고쳐 주셨으면……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주저 없이 대답하긴 했지만, 내용에 문제가 있었나?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그러나, 그녀의 요청은 단 하나, 물음표를 마침표로 바꿔 달라는 주문이었다.

‘나는 너희들보다 상황이 더 나빴거든? 형편이 더 안 좋았거든? 그런데 이만큼 성공했거든? 나는 하는데 너는 왜 못해?’

말하자면, 이 인용문의 마지막을 물음표 대신 점(마침표)으로 바꿔 줄 수 있냐는 거였다. 책을 읽는 독자층은 다양할 테고, 문자로 정리된 어감이 자칫 건방져 보일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그녀는 전국 투어 공연으로 정신없이 바빴고, 밀려드는 출연 요청에 즐거운 비명을 지를 만큼 분주한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녀의 주문이 떨어지자마자 의문형 문장은 마침표로 명쾌히 정리되었다.




신(神)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출연한 지 얼마 안 된 낯익은 전화번호가 액정 화면에 떴다.

“감사합니다. 저희 생각을 너무 잘 정리해 주셔서…… 근데요, 단어가 좀 걸려서요, ‘신’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제가 믿는 신은 하나님이거든요. 물론 특정 종교라서 일부터 그렇게 표현하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제 얘기를 써 주신 거니까 제 믿음대로 ‘하나님’으로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정중한 신앙 고백처럼 나직하게 들려 온 남자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물론, 대답은 "오케이(ok!)" 본인이 쓴 원고를 고쳐 달라는데 좋아라 여길 사람 없겠지만, 예기치 못한 두 통의 전화는 <낭독의 발견>의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기 충분했다.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강조한 전화기 속의 남자는 아리따운 아내와 함께 낭독 무대를 장식했던 힙합가수였고, 녹화가 끝난 후, 객석을 돌며 빳빳한 만 원짜리를 살포한 느닷없는 이벤트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만 원짜리 한 장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도 있겠지만, 이 돈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큰 행복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겁니다”

나눔의 행복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그들 부부가 객석을 돌며 지폐를 나눠 주는 동안 중년의 관객은 뜨거운 포옹으로 답례했고, 누군가는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아들과 의논한 끝에 아프리카 난민 돕기 계좌에 이름을 올렸다는 후기가 날아오기도 했다. 역시, 그의 주문대로 ‘하나님’이란 단어가 추가됐고, 며칠 후 『인생낭독』은 화사한 나비 모양이 내걸린 무대 사진과 함께 출간됐다. 책을 만드는 동안, 정중하면서도 까칠한, 그러면서도 결 고운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며 행복했다. 최소한 자기 이름을 걸고 행하는 모든 일들에게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 반향에 대해서도 미리 배려하고 책임지려 하는 삶에 대한 진정성. 그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체험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낭독의 발견>은 kbs 문화 예술팀에서 만들고 있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이제 5년차, 210회 녹화를 준비하고 있고, 또 다른 주인공의 목소리가 빚어낼 삶의 무늬에 주목하고 있다. 꾸며지지 않은 은밀한 속살의 살가움, 특별하지도 도드라질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인생의 울림을 나누고자 한다. 수요일 밤 12시 45분, 가끔은…… 단잠의 유혹을 뿌리치시라.《문장 웹진/200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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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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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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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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