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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취미를 강권하지 말라

  • 작성일 2008-06-02
  • 조회수 2,742

 

내게 취미를 강권하지 말라




강정




내 취미 있다면/ 땅이나 돌에 대한 것뿐/ 나는 언제나 공기나/ 바위나 석탄과 철을 먹는다

―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철」 중에서


열일곱 살 무렵, 위 시구를 처음 읽은 나는 열광했고, 곤혹스러웠다. 무슨 의미인지 도통 알 수 없었기에 읽던 책을 집어던졌고, 그럼에도 자꾸 뇌리에 떠올라 팽개친 시집을 도로 집어 들었다. 처음엔 곤혹스러움이 컸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가중되는 건 열광의 강도였다. ‘땅이나 돌에 대한’ 취미 따위 그 당시 내게는 없었지만 ‘땅’이나 ‘돌’ 같은 것으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모종의 열망 같은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었을 테다. 그러니 자연 ‘공기’나 ‘바위’나 ‘석탄’ 등은 단어로 지시된 것 이상을 가리키는 열망의 구체적 현물(現物)로 이해됐었다. 그러면서 공연한 고양감을 느꼈다. 당시의 고양감을 요약하자면 ‘나는 공기나 바위나 석탄을 먹는 별개의 인종이다’ 정도? 그 무렵 나는 내가 고작 지구인 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심한 수치심을 느끼던 참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내게는 취미나 특기 따위가 지금도 없다. 취미는 대개 일상의 잉여를 메우는 데 투여되는 여분의 노동이나 장기를 뜻한다. 한편, 취미는 일상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특정한 심정적 요소를 위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요컨대 취미는 노동에서 결락된 것을 메우기 위한 감정적 사치이자 욕구 충족을 위해 자발적으로 수행되는 욕망의 대리물인 셈이다. 평생 취미생활만 누리며 사는 인간은 내가 아는 한, 없다. 거꾸로 타인이나 사회의 요구에 의해 노동해야 하는 많은 인간들에게 취미 생활은 정기적으로 섭취해야하는 포도당이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취미를 통해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스스로에게 증명한다. 그런 맥락에서 취미도 특기도 없는 나는 대단히 행복하거나 대단히 불행한 사람, 둘 중 하나다. 정말 나의 취미는 뭘까?


지인들은 혹여 음악을 얘기할 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고 나이 먹으면서도 그 언저리에서 늘 배회하면서 어찌어찌 흉내라도 내는 모습이 공개된 판이니 딴에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 스스로 가끔 자문해 볼 때, 음악은 취미라고 하기엔 심정적 친연성이 너무 강하다. 주변 사람들을 살펴봤을 때 취미에 대한 애정은 굉장히 특수한 면이 있다. 공들여 화초를 키우거나 액션 피규어를 모으거나 주말 마다 낚시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취미는 ‘마음의 안식처’ 역할을 한다. 주 5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힘을 잃지 않게 하는 데 취미는 많은 도움을 준다, 고들 말한다. 그러면서 일상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 다람쥐 쳇바퀴 속이다. 취미는 어느 정도의 신비감과 ‘정복불가능성(?)’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가벼운 놀이이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생활과 한 몸이 되어버린 여흥은 더 이상 여흥이 아니다. 내가 음악이 취미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그런 이유다.

 


나는 음악을 듣거나, 그와 연관된 ‘짓거리’들을 하면서 마음의 위안 따위를 느낀 적이 별로 없다. 음악은 그저 배고플 때 밥 찾아 먹듯이 일상적으로 해치워야하는 삶의 본론 중 하나일 뿐이다. 대단한 프로 뮤지션이라서가 아니라 얼추 20여 년 동안 그런 생활이 관성화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음악에 관해서라면 나는 때로 삐치고 때로 반갑고 때로 결별했다 재회하는 지긋지긋한 인생 그 자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안에서 가끔 즐겁고 가끔 괴롭고 가끔 울적할 뿐이다. 마치 오래전 어느 날 길 가다가 우연히 커피 한잔 같이 마셨다가 얼결에 부부가 된 심정이랄까. 내가 아는 범위에서 마누라를 취미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인간은 전무하다. 게다가 이 몹쓸 마누라는 한 시절 내 열망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이유로 한번 잡은 기득권을 놓지 않는다. 나는 만날 음악 앞에서 기죽는다. 그래서 음악이란 게 요즘 너무 무섭다. 취미거리 앞에서 벌벌 떠는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일상에 대해 불만이 그리 많지 않은 인간이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니 그 어떤 일에도 맹렬한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밥 벌어 먹기 위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일상이 늘 못마땅하지만 시쳇말로 ‘이래 살다 죽어도 별 여한 없다’는 생각도 종종 하게 된다.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뭔가에 도전해 본 기억도 별로 없다. 케이블 TV의 유럽 축구리그 중계를 넋 놓고 보면서 내가 응원하는 팀이 패하면 잠깐 기분이 상했다가 다른 채널로 돌려 예전에 좋게 봤던 영화가 방영되면 다시 입 닦고 신나게 들여다보는 게 나름 여흥이라면 여흥이다. 그럴 때 감정은 마치 브라운관 속의 그것 마냥 아무런 실제성도 없이 허공에서 분주하게 그래프를 그리다가 TV를 끄는 순간, 순식간에 소멸한다. 세상 자체가 어쩌면 거대한 가상의 브라운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한다. 그런데 그게 내게 굉장히 유혹적이다.


이른바 ‘본론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생경한 호기심이랄까. 몇몇 서양의 사회학자들이 통찰한 ‘원본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의고적인 비판 심리마저 이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세상은 가상의 주재자를 설정해 놓고 그 안에서 각자의 허구를 기록하며 피아를 나누고 달리는 종마를 감상하는 거대한 스크린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다. 그 안에서 나의 취미란 아직도 ‘땅’이나 ‘돌’에 대한 관심으로 ‘공기’나 ‘바위’나 ‘석탄’과 ‘철’을 먹는 일뿐이다. 이런 취미를 ‘증명과 성찰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불가지론적인 탐닉’이라 명명하는 건 어떨까. 물론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이보다 더 심한 말장난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고 어느 날 갑자기 허공중에 그야말로 ‘공기’가 되어 아무렇지 않게 떠도는 일들을 이미 익히 보고 듣지 않았던가. 장난 같은 세상엔 장난으로 응수하는 게 처세의 기본전략이다.


아무튼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망 외에는 그 어떤 취미도 즐겁지 않다. 내가 실천 가능한 것들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매혹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랭보의 시를 처음 읽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멍청하고도 무모한 말장난이 내 삶의 중심에 하다만 숙제노트처럼 버려져 있는 걸 난 축복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노트를 죽을 때까지 다 채우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그게 나의 유일한 취미이고,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견디는 나만의 ‘모순의 비책’이다. 그러니 더 이상 내게 취미 따위 묻지 말라. 롯데 자이언츠가 4연패 하던 날 밤 그런 질문을 들었다면 성질 나쁜 내가 버럭 고함이라도 질렀을 지도 모르니까.《문장 웹진/200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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