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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의 나날

  • 작성일 2008-06-30
  • 조회수 3,006

 

신동옥

 

 

 사순절의 나날

 심금心琴

 악공, Anarchist Guitar

 요들링



사순절의 나날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늙은 신부가 종려나뭇단을 태우며 저녁 미사를 집전한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늦눈 사이로 구약처럼 떨기나무 재는 신부의 이마에 내려앉는다.


가시덤불과 엉겅퀴의 식탁 너머로 여자의 붉은 눈이 자꾸만 커간다. 엉덩이로 찬장서랍을 밀어 닫는 버릇은 불운을 가져와요 얼음으로 틀어막힌 부뚜막 틈새로 푸른 연기가 핀다.


실을 잣던 당신의 손은 천 마리의 벌레가 되어 배추 속을 헤집어 놓을 거예요 죽은 새를 든 사냥꾼은 찬 등으로 문을 닫는다. 늦은 밤 칼을 갈던 소리는 커단 폭풍을 몰아올 거예요


아이들은 썰매를 버리고 모두가 사육제의 가면을 벗고 팔을 걷고 경전에 손을 얹을 때, 광대는 찬물에 얼굴을 담금질한다. 불가에서 손잡고 춤추던 따뜻한 손은 찬물 속에서 깊은 우울에 잠긴다. 북구의 살얼음에 하얗고 붉게 분칠한 얼굴이 되비친다.




심금心琴




꽃을 보고, 저만치 혼자라고 적은 사람

아무래도 나는 조금 비껴서 있다고 적은 사람이 있지만

내 꽃잎에는 사자 한 마리가 먼저 가 앉는다 피를 흘린다.

꽃그늘 멍석에 앉아 술잔 띄울 만한 계곡을 베고 눕는 계절이면

가슴에 손을 얹는다. 국기에 대고도 맹세할 바 없는 나는

무제한으로 채워지는 꽃잎 사자 우리를 또 비워내는 거다.


내 꽃나무 아래는 언제나 불타는 겨자 소스 접시가 놓인다.

글 한 줄에 페이소스 한 접시 그게 삶이라고 말할 때

나를 읽고 가는 친구, 자네는 또 여리다고 타박을 하지만

자정의 판옵티콘 창살에 머리를 박고 엉덩이를 까뒤집던 베를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하필 내가 여자였지, 아니었을까?

어제의 꽃 속에도 총소리가 들렸다고 쓰면서 나 역시 아랫도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거다.

왜 하필 내가 남자였지!


입춘(立春) 지나고 대길(大吉) 지나고 건양다경(建陽多慶) 지나 앉아보는 뾰족한 마음의 자리 건너

옮아가는 꽃잎에 실어 보낸다 그것은 내가 자네에게 보내는 새떼.

이만치 혼자 있는 내게 친구, 술잔 들이미는 자네의 손뭉치는 차라리 따뜻한 빵이었다.

악수를 청하던 손은 금세 주먹으로 변하고 1월에서 4월로

움켜쥔 주먹 언덕을 오를 때면, 검지와 중지 사이는 언제나 허방이었다.

눈 비비고 보면 열심으로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틔워내는 꽃은 오간 데 없고

없는 묘혈(墓穴)에서 내가 마주하는 것은 바로 자네,

자네는 시퍼런 레몬처럼 씁쓸하게 웃는다.


꽃 진 자리마다 무성한 혓바닥

그 벼린 창 칼 아래 마주하는 것은 어제하고도 어제의 꽃그늘

술잔 비울 때마다 다른 격문 다른 사발통문.

내 사자는 벌써 건너 건너의 꽃나무로 뛰쳐나간다.

한없이 가벼워져 두 팔 벌리면 날 듯한데, 친구

자네의 눈빛은 내 등배를 훑고 내 두 다리는 지상에 비끄러매다오.


까칠한 멍석에 돌 틈 바위틈에 그늘 습지에 그 불립문자(不立文字) 위에

저만치 혼자 있는 거 이만치 저 혼자 갈앉는 거

술잔 띄울 때마다 듣는 꽃사태-파문은 총소리 아닌가? 어제의 꽃잎 속에도

꽃잎 하나에 불타는 사자우리

친구, 나는 그것을 겨눈다.




악공, Anarchist Guitar




당신의 기차는 내 창가에 묶여 있어요

창을 열면 낯선 구두가 이마를 꾹꾹 눌러요

하늘엔 새들이 오래도록 멈춰 서 있고요

여섯 가닥의 먹구름이 흘러가요 그 위로

한 줄기 번개가 소리 없이 디스토션을 걸어요

고압선을 따라 당국의 메시지가 전송되는 아침

소리 분리 수거법이 강화됐다는 전갈이에요

주부들이 소음을 가득 채운 쓰레기봉투를 던져요

기타줄은 소각됐고 당신의 기타는

기다란 손톱을 사랑하는 소리의 방주예요

레일을 잃은 기차예요


당신의 기타는 너무 오래 묶여 있어요

창을 닫으면 낯모를 신음이 벽을 두드려요

소녀들이 수화를 재잘거리며 지나가요

음반 가게에선 침묵을 구워 팔아요

아나키스트들은 복화술로 지령을 전달하고

사람들은 초음파로 대화하는데 익숙해져가요

그 많던 기타줄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역사가는 백가쟁명의 선사라 우기고

정치가는 반국가적 복화술 책동이라 우겨요

사람들은 몰라요

기타는 달리고 기차는 울고

소리 없이 뛰는 건 당신의 심장이에요

자궁 위로 초음파가 지나듯 해가 저물어요

빈 술독 틈에서 소리 없는 나날이 저물어요




요들링




처음 앵두를 씹었을 때의 씨와 과육

과육은 금세 혓바닥에 몸을 숨기고 씨앗은 다른 땅을

꿈꾼다. 느낌만으로 분리 불안이라고 되뇌는

어느새 한없이 솟아버린 옥탑


철제 빙돌이 계단에 걸터앉아 무릎을 까딱이며

요들링, 혀가 혀에 감기듯, 만일

내가 사막에 뿌리내렸다면 다른 노랠 꿈꿨을 테지.


요들링, 영혼의 각질은 서늘해 건조한 음악들

새벽을 건너는 로-파이

엷은 공기의 밀도를 헤아리다 보면

만취한 손마다 저도 모르게 쥐어진 반짝이는 칼날


어느 먼 곳을 꿈꾸었을까? 언제고 멀리 떠나기 전

이 집은 내 삶에 놓은 맨 처음의 공리

내가 부르면 내가 대답하는 돌림 노래들


천장의 모빌은 허공을 빙빙 돌며 홀로

요들링, 또 요들링

하늘 멀리서 바람에 불려온 머리칼은 금세 자라

모빌을 친친 동여매고 요들링을 더욱 높이 들어 올려


그 많은 노래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모두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처음 앵두를 씹었을 때의 씨와 과육처럼

툭 툭 틱 톡 그리고 요들링, 요들링뿐.




시?낭송 : 신동옥

출전 : 신동옥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랜덤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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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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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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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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