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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 수렁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

  • 작성일 2008-07-07
  • 조회수 4,660


[조경란이 만난 사람⑪],평론가― 김병익



文學, 수렁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




6월 마지막 주 금요일. 나는 장충동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그안’ 창가 자리에 앉아 김병익 선생을 기다리고 있다.


‘그안’이 처음 생겼을 때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을 자주 그곳에서 만났고 그곳의 음식에 찬사를 보냈고 거기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 무렵, 한 오륙 년 전이었는데 유난히 약속 같은 것들이 많은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는 훨씬 젊고 생동감이 있었고 소설에 대한 의욕이랄까, 열정 같은 것도 더 있었던 같고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외출이 잦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책 읽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원하는 사람,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안’에서 저녁을 먹고 저녁을 먹은 후엔 내가 좋아하는 부드럽고 차가운 티라미수 케이크와 커피로 후식을 먹는 시간을 만끽했다. 그러다가 식당 주인이 바뀌고, 본격적으로 20세기 초가 시작되고 오른쪽 눈썹뼈 부분을 열일곱 바늘 꿰매야 하는 사고가 생기고 글이 너무나 안 써지는 시간이 시작되면서 다시 예전처럼 집에만 틀어박히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 외출할 일도 줄어들게 되고 만나던 사람과도 작별이란 걸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후의 일이다. 아직 ‘그안’을 자주 드나들던 시절, 그때 스쳐갔던 시간들은 오롯이 즐거움과 평화, 순간적이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생의 즐거움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해준 것은 사실이다. 그때 거기서 B도 만났고 경숙 선배도 만났고 김화영 선생 내외, 그리고 김병익 선생도 만났다. 그때는 선생이 25년간 살던 단독주택을 떠나 일산으로 내려간 바로 그 무렵이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선생은 장충동으로, 나도 교대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그안’으로 왔다.

 


지금도 나는 선생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잘 모르지만 이것 한 가지는 안다. 선생은 약속시간에 늦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 그래도 내가 먼저 도착해 선생을 기다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거의 모든 약속에 늦는 편인 나는 선생과 약속을 하면 일단 긴장하고 약속시간부터 늦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늦기도 하고 또 늦지 않아도 언제나 선생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는 하였다. 한 번은 아버지가 자동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하기에 차를 얻어 탄 적이 있었다. 집에서부터 장충동까지 가자면 남산2호터널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차를 휙 돌려 남산3호터널로 진입했다. 약속 시간에 늦은 내가 당황하여 지적하자 아버지는 에, 하며 또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아버지와 숱하게 지나다닌 길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도 나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땐 아버지가 술을 너무나 자주, 너무나 많이 마셔 아버지와 집안의 큰딸인 내가 서로 얼굴만 맞대면 밥상을 집어던지며 싸우기 일쑤였다. 나는 한 15분쯤 약속시간에 늦었고 아버지는 그 후로 약 한달 동안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선생님께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울먹거린, 그런 일도 있었다.   


이렇게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는 금요일 저녁, 촛불이 켜진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앉아 선생을 기다리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난다. 선생이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13년 전, 선생을 처음 만나러 가던 날이었다. 13년 전이라면 내 첫 책 『식빵 굽는 시간』이 나온 때이다. 그것을 읽은 선생이 나의 은사인 김혜순 시인에게 셋이 점심 한번 먹자고 연락을 한 것이다. 김혜순 선생과 나는 사당역에서 만났다. 그때도 나는 약간 늦었는데, 선생은 그 어느 때보다 초조한 모습이었다. 택시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일초도 안 망설이고 선생은 ‘안전한 지하철’을 타자고 하였다.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선생과 나는 문학과지성사가 있는 ‘무원빌딩’까지, 뛰었다. 학교를 다닌 2년 간 그 누구보다 자주 만난 김혜순 선생이 뛰는 것도 처음 봤고 아예 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평소엔 달팽이처럼 걷는 내가 어딜 막 뛰어 가는 것도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가까스로 우리는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그래도 오래 김병익 선생을 알고 지낸 김혜순 선생이 보기에 그건 이미 꽤 늦은 거나 다름없었다.

 


점심으로 일인분씩 따로 나오는 샤브샤브를 먹으며 김병익 선생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는 참이었다. 어쩌면 평론가 김현 선생이 저렇게 생기지는 않았을까, 하는. 이상한 말같이 들리겠지만 내가 ‘한국문학’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은 어떤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품 때문이 아니라 평론가 김현의 산문집과 평론집 때문이었다. 대학도 못 가고 취직도 못 하고 오로지 집안에만 틀어박혀 호마이카 밥상을 껴안은 채 하루 종일 책만 읽던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살. 책이라고 생긴 거면 닥치는 대로 읽던 시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차츰 보는 눈이 생기기는 했다. 그러다가 읽게 된 것이 김현 선생의 책들이었고 거기서 그가 경외심을 보내는, 숭배와 찬사를 보내는 위대한 한국 작가들의 이름들을 알게 되었고 한 작품씩 찾아서 읽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그 작가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찾아 읽는 독서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시절 누구보다 많은 ‘문지시인선’들을 갖게 되었다. 김현의 책을 통해 알게 된 작가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시인들, 소설가들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내가 문학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선택을 하게 했으니. 써먹을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문학이라는 것은 억압하지 않는 것,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인 힘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문학은 ‘불가능성에 대한 싸움’이라는 것을 알려준 생의 스승들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김병익’이라는 평론가에 대해서도 알게 되어 역시 그의 책들을 찾아서 한 권 한 권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詩人이 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김혜순 시인이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그 후 졸업을 앞두고 시인이 아닌 소설가로 덜컥 등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병익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시절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생전 처음 아주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해 선생을 기다리며, 선생을 추억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장편소설 『혀』를 우편으로 선생께 보냈다. 며칠 후 이런 이메일이 왔다. 몇 주 전에 앞으로 정통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과 다리가 상해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뼈는 거의 다 나았지만 아내의 권고대로 스틱은 그대로 짚고 다니기로 하였다. 한 시대에 댄디들이 단장을 짚고 다니며 멋을 부렸는데 나도 늦은 나이에 그 흉내를 내고 싶은가 보다……, 하는 내용의.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선생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답장도 쓰는 것도 잊어버렸다. 며칠 그대로 우울하고 슬픈 마음이 계속 되었다. 나는 몇 년 전 선생이 쓰러지셨다는 말을 듣고도 병문안을 가지도 엽서를 쓰지도 않았다. 그보다 몇 년 전, 2002년 5월, 내 소설집 『코끼리를 찾아서』의 해설을 써주신 턱으로, 그 책을 같이 만든 편집자와 셋이 홍대 앞 ‘나무와 벽돌’에서 점심을 먹을 때 에스프레소 잔을 잡는 선생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나는 보고도 못 본척 했다. 잃고 싶지 않으려면 보고도 못 본척 해야 하는 건 어떤 한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만은 아니다. 선생을 한 이삼 년 못 만나고, 아니 안 만나고 지낸 적도 있다. 선생이 ‘예술위원회’ 예술위원장 직을 맡고 있던 기간이다. 어렸을 적에도 나는 매일같이 놀던 친구가 갑자기 반장이나 회장 같은 것이 되면 가능한 그 가까이 안 가고, 커서도 친구가 너무 부자 남편이나 유명한 사람의 와이프가 되거나 어떤 직의 ‘장’ 같은 자리를 맡게 되면 하던 전화도 안 하고는 한다. 그게 콤플렉스 때문인지 말도 안 되는 결벽증 같은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나는 그게 옳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식대로다. 선생이 예술위원장 직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한 생각은 아 당분간은 같이 식사도 못 하겠네, 였다. 그리고 선생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 생각은 물론 아 이젠 예전처럼 같이 식사하자고 할 수 있겠네, 였다.


지난 봄, 딸이 프랑스에서 사 보냈다는 은제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를 짚고 선생이 식당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이층에서 내려다보인다. 그 얼마쯤 뒤로, 흰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한 분 천천히 뒤따라오고 있는 것도. 저 분이 선생이 간간이 글에서 ‘아내’라고 지칭하는 ‘정지영’이라는 분이겠지? 평론집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 맨 앞에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아픔을 채뜨려 자신의 것으로 삼아, 대신 앓는 지영에게’, 또 『두 열림을 향하여』에서는 ‘이 책을 은가락지 삼아 지영에게 준다. 그는 이 모자라는 글들을 써온 가난한 나에게 밝고 따뜻한 자리를 늘 사랑으로 마련해 주었다.’ 그 글들 속의 ‘지영’이라는 분.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그토록 오랜 세월 가난과 어려움을 함께 겪고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여전히 놀랍고 믿기지 않고,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선생께 종종 ‘아내’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아, 그런 사랑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두 분이 식당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웃음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난달 나온 새 소설집 『풍선을 샀어』를 선생께 보내드리고, ‘참 좋은 작품’이라는, 과분한 제목의 이메일을 받고는 나름대로 의기양양해져서 정말 몇 년 만에 식사를 하자는 말씀을 드렸을 때, 며칠 후 선생은 이런 이메일을 보내왔다. ‘기왕이면, 우리는 두 사람에, 조경란 씨의 좋은 친구 있으면 합석하도록.’ 내가 이번에는 사모님도 함께 뵈었으면 좋겠다는 청을 넣은 직후였다. 선생 내외와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나의 좋은 친구라. 며칠 고민했다. 광화문이었던 약속장소를 장충동으로 옮기는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 선생은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내가 조경란 씨 친구 한 분을 데려오라고 할 때의 그 친구는 남자친구를 염두에 둔 건데, 지금쯤은 그런 분 옆에 있지 않나요?’

선생 내외분은 이제 식당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고 내 친구 Y에게선 30분쯤 늦겠다는 문자메시지가 온다.


선생의 연보를, 『두 열림을 향하여』(1991년, 솔)를 바탕으로, 내가 갖고 있는 여러 책들을 참조하여 재구성해본다.


193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성장했고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다녔다. 실존주의적 감상에 젖었고 그래서 전공보다는 문학책을 더 많이 보았다. 이미 기성 시인이 되어 있는 영문과의 황동규와 사귀어 자주 어울렸다. 대학 4학년 때 4.19가 일어났다. 5.16이 일어난 서울 거리를 보고는 공부를 때려치우기도 했다. 1962년 7월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제대를 앞두고 동아일보 견습 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주로 문학, 출판, 학술 등을 담당했다. 그 덕으로 홍성원, 김현, 김치수, 김주연들과 친구이면서 문학적 동료로 사귀게 되었다. 1975년, 《문학과지성》 편집 동인들과 고교동창 황인철 변호사의 발의와 출자로 문학과지성사의 운영을 맡았다. 술은 안 마시고 못 마시며 대신 하루에 커피를 다섯 잔, 담배를 두 갑 정도 마시고 피운다(이제 선생은 담배는 끊었다). 운동은 전혀 안 하고 바둑을 둔다. 초등학교 5학년 말에 처음 얼굴을 보아 찍어두었고, 고등학교 때 학교를 오가며 훔쳐보았으며, 대학생 때 같은 캠퍼스에서 스치며 도전했다가 실패했고, 그래서 포기하고 잊어버렸다가, 기자 생활 초기에 우연히 다시 만났던 정지영과 연애를 하여 1966년 11월 마지막 토요일에 결혼했다.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2000년, 문학과 지성사를 퇴임한 후, 현재 상임고문으로 있다. 저서로는 『상황과 상상력』 『전망을 위한 성찰』 『열림과 일굼』 『숨은 진실과 문학』 『새로운 글쓰기와 문학의 진정성』 『21세기를 받아들이기 위하여』등의 비평집과, 『한국문단사』 『지식인됨의 괴로움』 『페루에는 페루 사람들이 산다』 『무서운, 멋진 신세계』등의 산문집, 그리고 『현대 프랑스 지성사』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등의 역서가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문화상, 팔봉비평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내 동행이 누구일까 궁금해 하던 선생과 사모님은 막상 Y가 나타나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지만(Y는 선생이 오래 일했던 문학과지성사 편집부 직원이었고, 그 무렵 내 책을 세권이나 함께 만들면서 이젠 친구가 된 사람이다.) 자리는 더 화기애애해졌다. 아무래도 그게 Y가 가진 힘이겠지 싶어 그녀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선생은, 2005년 12월 설치작가 양주혜 선생 전시회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건강하고 혈색도 좋아 보인다. 체중 조절을 하느라 최근에는 저녁을 소식하거나 드시지 않는데, 어제부터는 저녁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투덜거리시는 데 진짜 웃음이 터질 뻔해서 혼났다. 처음 만났지만 사모님은 책 속의 그 밝고 따뜻한 ‘지영’이다. 책으로만 느꼈을 때는 내가 차갑고 잘 웃지도 않고 냉소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익숙한 말이다. 그런데 너무 잘 웃고 밝아서 깜짝 놀랐다고. 그 말도 익숙하다. 그러나 나는 사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차갑고 잘 웃지도 않고 냉소적인 사람인지, 아니면 잘 웃고 말도 잘하고 밝고 긍정적인 사람인지. 그 모두를 섞어놓은 게 나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갑자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얼른 Y가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하고 재치 있게 화제를 돌린다. 메인 요리로 시킨 납작국수가 나오고 식당의 조명은 조금 더 어두워진다.

 

 

사모님과 나는 연탄을 갈던 어려움, 그 연탄 두 장이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을 식칼로 탁 내려치던 순간에 대해서, 부모에 대해서, 여성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 영원히 혼자 사는 것에 대해서 무람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것도 이상한 말 같겠지만 나는 평생 연탄을 갈아보지 못한 사람, 연탄에 번개탄을 붙여본 적이 없는 사람, 연탄이 꺼졌을 때의 그 막막함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과는 마음을 터놓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연탄 한 장이 주는 위안에 대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반갑기부터 하다.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살까지 내가 한 일은 책을 읽는 일뿐만이 아니라 밤새 책을 읽으며 그 추위를 견디기 위해 연탄을 꺼뜨리지 않도록 망을 서는 일도 포함돼 있었다. 연탄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번은 그 불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처음 도둑 담배를 피우다가 질식할 뻔한 적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지만 슬며시 혼자 웃고는 말하지 않았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자식 넷을 키워야했던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가 선생이 잠을 줄여가며 번역 일에 매달린 때였나 보다. 선생은 겸손의 말로 ‘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책상 앞의 영어로’ 조지 오웰의 『1984년』과 『동물농장』, 휴즈의 『현대 프랑스 지성사』, 유진 런의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등을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 중 특히 선생은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대해 남다른 감회를 보인다. 선생의 이름으로 나온 첫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신 선포를 몇 해 앞두고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 권력으로 핍박당하리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예감 속에서 번역한 것이기에’ 그 절망감이 지금도 안타깝게 회상되고는 하는 것이다.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는데도, 선생 내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나도 가끔 내 얼굴이 저렇게 환하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있다. 글이라는 건 늘 뜻대로 되지 않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이따금, 아주 짧지만, ‘나’를 뛰어넘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렇게 밤 새워 글을 쓴 후,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때의 얼굴이 그렇다. 겨우 수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순간이기는 하지만.

 


선생이 쓴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라는 글, 즉 선생의 말마따나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그 패배에 맞서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저 제목의 글을 읽고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문학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불가결한 덕성과 창조에의 열정을 내장하고 있으며 그 문학은 인간을 사물화하는 기능주의, 사람을 기계로 전락시키는 속도주의, 인류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획일주의에 대항하는 거의 유일한 휴머니즘으로서의 역할과 소명을 갖고 있다는 게 주된 내용의 글이다. 그러면서 선생은 이런 슬픈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21세기의 디지털 문명 속에서 이 진지한 문학을 추구하고 수행하는 장인적 예술가는 틀림없이 외롭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라고. 왜냐하면 문학이라는 것은 시장 경제의 논리로 보자면 교환 가치 체계가 전무한데다가 그의 작품에 진지하게 눈독 들이는 사람들의 숫자 또한 급격하게 줄어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다시 격려한다. ‘그처럼 고독하고 빈곤하고 고난스럽기에, 바로 그렇기에 그 길은 고상하고 명예롭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그 글을 읽는데 언젠가 선생이 쓴 ‘문학인이 가난해도 좋을 이유’라는 짧은 산문 생각이 난다. 작가가 가난해도 좋을 것은, ‘가난을 통해 문학적 진정성에 도달할 한 첩경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하였다.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지금보다 풍족했으면 하는 상상을 가끔 하고 지금보다 내 책을 사는 독자들이 더 많았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다. 그러다가 문득 깜짝깜짝 놀라고는 한다. 어쩔 수 없이 ‘문학의 진정성’ 혹은 ‘삶의 진정성’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계속 좋은 글을 쓰면서 풍족해지고 독자도 많이 생긴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사실 나는 내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가진 것을 잃게 되는 것도 두렵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생기게 될까 봐, 그래서 작가로서 한 예술가로서의 내 정신이 늙고 여유로워질까 봐 그것도 두렵다. 육체와 정신, 안팎으로 나는 살이 찌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사람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나는 그렇게 달라졌다. 만약 내가 가난을 모른다면,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다면 ‘가난이 깨우쳐줄 현실의 모순과 왜곡을 발견’하게 되기 어렵고 ‘그것을 비판할 근거를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건 작가로서 한 날카로운 모서리를 잃게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삶에 대한 무기력증이 생기는 것, 대면할 의지를 잃게 되는 것.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이다. 스무 살 때부터 읽어온 선생의 글과 만남은 나에게 문학은 어려움 속에서, 어려운 시간 속에서 ‘그러니까 수렁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 같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반(反)세계로서의, 작가의 운명에 대해서. 그래서 나는 지금도 문학이라는 말 앞에 ‘중심적인, 신성한, 영원한, 진실의…… 같은 힘 있고 아름다운 수식어’를 덧붙이고 싶은 것이다.

 


밤이 깊었다. 내가 9월 첫 주에 잠시 먼 데로 떠나게 되어 그 핑계로 8월 마지막 주쯤 다시 한 번 모여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선생도 선생이지만 사모님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좋다. 실제로는 안 그럴지 몰라도 혹시 나는 나를 잘 웃고 밝은 사람으로 봐주는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요즘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당당하고, 맑은 기색으로, 단아하고 기품 있게 나이 들어가는 여성을 만나는 일이 즐겁다. 아무래도 마흔 살이 되면서부터는 더욱 그렇게 된 것 같다. 집이 같은 방향인 Y가 선생 내외를 자동차에 오르게 하고, 오랜만에 밤새 이야기나 나누자고 했던 약속을 잊어버린 채 손을 흔들며 시동을 건다. 나는 다시 혼자 거리에 남겨졌다. 도시의 밤은 추운 날의 외투처럼 나에겐 익숙하고 안락한 느낌을 준다. 오늘 같은 밤은 특히 더 그렇다. ‘태극당’에 들러 아버지와 조카가 좋아하는 옛날식 모나카 두 박스를 사고 천천히 지하철 계단을 내려간다. 내가 각별히 신중해지는 때가 여러 번 있는데 계단을 내려갈 때가 그 중 하나다. 어렸을 적에 계단 모서리를 향해 앞으로 정통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입술에 가로로 긴 흉터가 남았다. 지난 여름에는 밤을 꼴딱 새운 채 공원에 갔다가 두 살짜리 조카를 안고 계단에서 굴러 떨러지는 바람에 조카는 머리를 다치고 나는 발목이 부러진 적이 있다. 그래서 특히 계단을 내려갈 때 나는 신중해지고 그 순간 깜짝 놀랄 만큼 내 일상에 대해, 내 자신에 대해 단호해지는 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런 결심을 했다. 당분간 외출도 하지 말고 말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오직 책읽기와 글쓰기만을 생각했던, 너무나 가난하고 너무나 고독하여 벽에게 말을 붙이곤 했던 그 때로, 13년 전의 나로 한 번 되돌아가보자고. 어렵고, 실제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단호하게. 게다가 나는 이제 ‘숨어 있기 좋은 방’도 하나 알고 있다. 정말 다행이다.《문장 웹진/ 2008년 7월》

 

   * 김병익 선생님 사진 대부분은 (주)문학과지성사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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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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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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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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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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