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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영역으로부터 죽음을 몰아내는 천야일화(千夜一話), 박상륭 소설 읽기

  • 작성일 2008-09-30
  • 조회수 5,271

 

존재의 영역으로부터 죽음을 몰아내는 천야일화(千夜一話),

박상륭 소설 읽기




신성환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를 이끄는 가장 큰 동력은 ‘죽음’이다. 그것은 수많은, 그리고 기나긴 밤에 존재의 영역으로부터 죽음을 몰아내기 위한 노력을 담고 있다. 세헤라자데는 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이야기한다. 침묵이 드리우는 순간 죽음이 닥쳐올 것이다. 그렇게 1천 1밤 동안 이야기가 쌓여 ‘천일야화(千一夜話)’이다. 박상륭 소설의 주인공들 역시 죽음에 대한 투철한 자의식에 사로잡힌 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그들의 현란한 자아도취적인 발화는 삶과 죽음이 갈아드는 지점, 바르도(Bardo)에서 들려오는 전언이다. 『죽음의 한 연구』의 후반부 유리(?里)에서의 제22일, 육조가 스스로 혀를 끊어 내고 침묵을 선택하자 곧 죽음이 들이닥친다. 샤푸리 야르 왕의 어두운 침실 역시 세헤라자데의 생사가 교차하는 또 하나의 ‘유리’이다. 그런 면에서 세헤라자데나 박상륭 소설 주인공들은 다 같은 언어의 샤먼들이다. 그들의 언어는 죽음의 현기증에서 벗어나려는 주술성으로 점철된다. 언어 자체가 죽음과 삶의 비밀을 품은 숨은 그림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모두 승리한다. 세헤라자데는 왕비가 되고, 박상륭의 주인공들은 인신(人神)으로서의 위대한 죽음을 성취한다.

개인적으로 처음 접한 박상륭 소설은 『죽음의 한 연구』였다. 강렬하고도 기묘한 에너지로 들끓는 경악스러운 소설이었다. 한때 『죽음의 한 연구』는 반드시 제목이 보이도록 들고 다녀야 한다는, 그런 멋쩍은 밀약(密約)이 서린 책이기도 했다. 『죽음의 한 연구』를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강력한 정신적 자장(磁場)을 공유하는 밀교 집단에 소속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63년 「아겔다마」에서부터 2008년 『잡설품』까지, 박상륭 소설의 광대한 사유 궤적을 따라가는 일은 지난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새로 우주를 한 벌 지을1)” 작정으로 소설을 쓴다는 말대로, 박상륭 소설의 난해성은 단순한 악명 차원을 넘어선다. 대부분의 연구들의 경우, 독자적인 미학 구조를 꼼꼼히 해명하는 일 대신, 소설이 원용하는 종교?철학?설화 등의 해독에만 치중하는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소설 자체가 아니라, 소설에 주석을 달기 위한 독서가 횡행한다. 일단 박상륭 소설을 잘 읽기 위해서는, 박상륭이 40여 년이 넘도록 오직 “한 작품만을 쓰고 있다2)”는 지적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천일야화』를 패러디한 그의 단편 제목처럼, 박상륭은 ‘千夜一話’를 쓰는 중이다. 천 하루 동안 천 한 개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천일야화’가 아니라, 천 일 동안에도 이야기는 하나뿐이라는 ‘천야일화’이다. 1973년까지 쓴 31편의 중단편들은 낱낱의 분산태였다가, 1975년 『죽음의 한 연구』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태로 집약 되는가 했더니, 1994년 『칠조어론』에서는 완성태를 넘어서는 초월태의 경지를 보이고, 1999년 『평심』에서 2008년 『잡설품』까지는 지난 작품들을 주해?부연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하나의 일관된 주제 의식을 견지하면서 유사한 방법론으로 창작을 계속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작품들은 각각 일정한 미학적인 개성을 창출하는 괴력을 발산한다. 따라서 박상륭 소설들은 초기작에서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연속해서 차근차근 읽는 것이 그 사유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적절하다.

박상륭 소설이 지속적으로 성찰해 온 주제는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삶과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다. 박상륭의 우주는 삶과 죽음으로 대표되는 상극성을 그 질서 체계로 삼는다. 신/인간, 정신/육체, 창조/파괴, 성욕/살욕, 운동/정지, 색(色)/공(空), 음(陰)/양(陽), 차안(此岸)/피안(彼岸)의 이분법은 철저히 부정되고 극복된다. 연금술에서 자기의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아우로보로스(ouroboros) 상징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면서 서로를 추동하는 바르도, 즉 자정(子正)의 의지와 결합한다. 자정은 오늘의 끝인 동시에 내일의 시작으로 넘어가는 순간적인 경계이다. 자정은 “묘혈(墓穴)이며 산실(産室)3)”이다. 연금술사의 용광로 속에서 납은 불 속에 던져져 자신의 물질이 사라져야 비로소 금이 될 수 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상륭 소설에서 시체실은 죽음과 결혼하는 신방(新房)이고, 모자와 부녀?남매간의 성교를 통해 생명력이 회복되고, 무덤이나 화장장 속에서야 주검은 소롯이 심기고 생명이 조용히 발아되며, 죽음은 새롭게 돌아오기 위해 푹 쉬러 가는 기쁜 여정이다. 창조와 파괴가 우주의 본질적 질서라면, 인간이야말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창조에 기여하는 당사자이다. 삶은 죽음으로 이어져 있으며, 죽음은 삶의 표징이자 무한에로의 열림이다. 죽기 위해 살며, 살기 위해 죽는다. 예수가 일단 죽은 후에야 죽음을 번복하여 신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박상륭 소설의 주인공들도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죽는다.

초기 작품들에서 이러한 죽음 인식은 주로 서구 기독교 문화의 결실인 이원론과 합리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집중된다. 박상륭은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 신화의 메타 구조를 차용하면서도 이를 내부적으로 전복시킨다. 사실 기독교 교리 자체가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예수의 역설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이미 신과 인간의 이원론을 초월한 것이기도 하다. 박상륭은 기독교를 다양한 종교적 사유로 재해석하여, 이른바 “종교간 경계 허물기4)”를 시도한다. 그가 표방하는 ‘경외전(經外典)’은 “면죄부까지 팔고 청동탑 안에 유폐된 신5)” “시대에 따라 자기를 화장(化粧)해 온 신6)”을 조롱하며 새로운 바벨탑을 세우려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신의 소명을 거부하고 지상적인 구원을 부르짖는 「아겔다마」의 유다와 「2월 30일」의 Z씨, 새로운 말씀을 찾아 항해에 나서는 「뙤약볕」의 섬 주민들, 화룡(火龍)의 원리를 찾아 헤매다 미쳐 가는 「열명길」의 왕과 의사는 ‘산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를 쫓듯이 신을 사냥하는’ 프로메테우스들이다. 나아가 『죽음의 한 연구』와 『칠조어론』의 주인공들은 아예 스스로 인신이 되기 위한 구도(求道)에 돌입한다.

『칠조어론』까지의 박상륭 소설 세계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과 함께 천상에 대한 지상의 우위를 설파한 니체 철학과 일정한 맥락을 같이 한다. 모성으로서의 대지에 대한 긍정, 영웅적 구도자 형상, 양극을 갖는 타원형으로 인식하는 우주의 질서 등은 니체의 대지주의, 초인, 영겁 회귀 등의 개념과 대동소이해 보인다. 하지만 이후 『산해기』와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에서 작가는 니체와의 뚜렷한 변별성을 명시한다. 두 작품은 노골적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패러디한다. 그리고 박상륭의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의 정신적 상징이라 할 독수리와 뱀을 제 손으로 죽이고 하산하여 처절한 파멸을 맞는다. 니체가 예찬한 초인의 장엄한 추락은 이제 진정으로 슬프고 쓸쓸한 몰락이 된다. 박상륭은 그저 니체와 동일한 대상을 비판했을 따름이지, 니체의 비판 모두에 전적으로 동조하지는 않는다. 신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는 니체의 철학은 오히려 비판 대상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박상륭은 연금술의 사상적 기반이 된, 그노시스교의 교리에 주목한다. 중세 기독교 이단 종파인 그노시스교는 신과 인간 사이의 심연을 부정하고, 자신을 깨닫는 것이 신을 깨닫는 일이며, 인간의 자아와 신의 신성은 동일하다고 믿는다. 신은 결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심원에 숨어 있는 신성을 발견하고 표출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본 것이다. 특히 기독교 신약의 신은 자연적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문화적 신으로서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처음부터 인간의 내부에 깃들어 있는 존재이다. 예수 역시 항상 인자(人子)를 자청하였으며, 한 번도 신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적이 없었다. 결국 니체는 죽일 수 없는 신을 죽이는 오류를 저질렀으며,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 스스로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니체 비판은 우회적으로 『죽음의 한 연구』와 『칠조어론』의 인신되기를 긍정한다. 니체의 영겁 회귀론을 허무주의적 운명론으로 간주하는 박상륭은 자이나교의 진화론적 관점을 차용한다. 자이나교에서는 생명에서 해탈에 이르기까지 9종의 진화 단계가 하나의 가능태로 제시되는데, 이는 박상륭이 주장하는 “뫎”의 원리와 유사하다. 그것은 ‘몸의 우주(에켄드리야, 축생도/자연 세계/전근대)’에서 출발하여, ‘말씀의 우주(판켄드리야, 로고스/문화적 세계/근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마음의 우주(해탈, 영혼/영적 세계/탈근대)’에 이르는 도정이다. 각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추동하는 힘은 고통과 고뇌, 번민과 자기 갱신의 의지이다. 삶과 죽음의 팽팽한 긴장에서 발생하는 육신적 고통과 저주야말로 영성을 끊임없이 자극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재생과 부활을 위한 환희와 축복을 낳는 것이다. 최근 소설에서 특징적으로 형상화하는 대중문화와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도 진화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숙주」에서 난쟁이 광대가 지배하는 국가나 『산해기』에서 하산한 차라투스트라를 아연실색케 한 얼굴 없는 “뚤파”와 “좀비”들, 「로이가 산 한 삶」에서 비대증 환자의 몸,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의 결말부 곡마단 공연 장면 등은 한 개의 감각 기관만을 가진 에켄드리야에게 경배를 바치는 흥행주의 사회를 암시한다. 신이 죽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더욱 끔찍한 물신(物神)이다. 「아으, 누가 저 독룡(毒龍)을 퇴치하고 공주를 구할 것이냐」나 「영합(迎合)이냐 순제(殉祭)냐」는 개탄은 독룡으로 상징되는 천박한 대중주의에 영합할 것인지, 아니면 이에 맞서서 장렬히 순제할 것인지에 대한 예술가와 독자의 결단을 촉구한다.

『죽음의 한 연구』와 『칠조어론』의 육조와 칠조는 극심한 내적 구도를 통해서 마음의 우주로 해탈한 인신들이다. 박상륭 소설의 구도자들에게 유리는 성배를 찾아 떠나는 영적 순례지이며, 죽음은 최종적으로 겨루어야 할 근본악이다. ‘마른 늪에서 고기 낚기’로 요약되는 순례는 실제 지도상의 이동이라기보다는 영혼의 여행, 정신의 탐색 여행이다. 초기 작품인 ‘각설이 연작’에서 각설이가 이동하는 각종 장(場)들은 순례 과정에서 거치는 영적 깨달음의 한 고비 고비이다.


 “그리고 나 각설이는 누구인가. 나는 대지로부터는 언제나 멀리 떠나서 대지 위를 망령처럼 지나며, 그 위에서 꽃 피었다 늙은 것의 즙을 내먹고, 열매에게는 내 정액을 입히며, 늘 떠나는 사내이지만, 내 바랑엔 앙금이 쌓이며, 도대체 되돌아 거슬러 올라가질 못하고, 언제나 근심스러운 다음 장을 지나가야 되는 사내 ……(중략)…… 왜냐하면 아직은 나는, 존재와 색을 사랑하며, 그것들에 탐닉되어 있으므로 갓 서른 살이란 무섭게 흔들린다. 참 무섭게 흔들린다.”7)


이 아름다운 묘사처럼, 일단 한 번 영적 순례를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것이 구도자의 운명이다. 영적 도약은 결코 그 이전의 미숙한 상태로는 후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두 집 사이」 연작의 인물들이 더 이상 순례의 길을 떠나지 않고 아파트나 방 등의 고립된 세계로 침잠하는 경향도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물리적 공간은 중요하지 않다. 원래부터 그들의 순례는 외적 현실에서가 아니라 추상화된 내적 체험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선적 수행이기 때문이다. 알레고리로 가득한 가공의 시공간에서는 행위보다는 행위가 상징하는 의미가 더 중요해진다. 결국 박상륭 소설에서 분열된 자아가 자주 등장한다든지, 구체적인 시공간이 배제된다든지, 방화?살해?강간?근친상간 등의 충격적인 사건이 남발된다든지 하는 설정은 모두 이 같은 형이상학적인 내적 무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해해야 한다.

박상륭 소설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소설이 의도하는 것, ‘알고자 하는 것’이나 ‘규명해야 할 진실’의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 그것은 철저히 ‘모름’의 영역에 속해 있다. 신이나 죽음은 아예 처음부터 ‘모름’을 전제하고 다가가야 할 주제이다. 흔히 그것들은 철학이나 종교의 범주 안으로 은신하며 문학으로부터는 격리된다. 전통적으로 문학이 담당하는 몫은 그것들의 반사물(反射物) 정도를 좇는 일이었다. 그래서 문학은 죽음이나 신에 대한 인물의 정서적 반응이나 태도만을 주목하여 다루었을 뿐이다. 그러나 박상륭 소설은 과감하게 신과 죽음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천착을 시도한다. 결국 박상륭 소설의 복잡하고 난해한 구조와 형식을 독해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일은, 왜 작품이 그러한 구조와 형식을 갖출 수밖에 없었느냐를 해명하는 것이다. 다층적이고, 인식의 차원이 다른 초월적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혁신적인 형식을 사용해야만 우주적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있다. 작품의 난해함이 곧바로 작품의 탁월함을 증명하지는 않지만, 익숙한 소설 관습과 동떨어진 작품이 무조건 폄하되어서도 안 된다. “형식의 불협화음8)”이라는 말처럼, 원래 소설은 규칙이나 구속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유기체이다. 우리는 항상 “소설을 상상하면서도 실제로는 소설이 아닌 다른 무엇을 읽고 있는 것9)”이다. 박상륭 소설은 ‘말하는 대로 실현된다’는 주술력에 바탕을 두고, 단일한 언어로는 규명하기 어려운 초월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연금술사의 용광로처럼 거의 모든 형태의 질료(언어 양식)들을 제련하여 빛나는 정수를 얻고자 한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문학이 고도의 복합적인 미학 형식을 탐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스스로의 존재를 통해서 증명한다.

가장 외국어로 번역이 불가능한 작품일 것이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게, 400여 자에까지 이르는 만연체 장문(長文), 단어와 허사(虛辭)의 반복, 무수한 말 뒤집기, 몽상적 옹알이, 쉼표의 빈번한 개입, 띄어쓰기의 파격, 비유적이고 우회적인 묘사와 신조어의 남발, 욕설과 비속어들의 노골적인 노출, 서술자의 빈번한 끼어들기 등의 요소들은 박상륭 소설을 난삽하게 보이게까지 한다. 그런데 문장들의 외형은 지루하게 늘어지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특이한 조화를 성취한다. 즉 장문은 규칙적인 쉼표에 의해서 호흡이 조절되며, 단어와 허사의 반복, 띄어쓰기의 무시는 음악적인 리듬과 분위기로 이어지고, 비유적인 묘사는 섬세함을 넘어서서 감각적 강렬함을 자아낸다. “남도 출신의 대무당이 엮어 내는 넋두리처럼 읽혀진다10)”는 「남도」 연작의 가슴 저리는, 독특한 교감의 문체는 이 같은 특성에서 비롯된다. 또한 온갖 요설과 잡담, 민담과 신화, 문답과 도해(圖解), 시와 낙서 등이 뒤범벅된 사유의 난장(亂場)을 접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끊임없이 소설 장르에 대한 상식과 관습을 의심하고 갱신할 수밖에 없다. “잡설”이라는 작가의 자인처럼, 그것은 소설 장르가 지니는 외연을 한껏 확장한다. 경전적 글쓰기, 문학 아닌 문학, 우주론적 소설, 시나 소설도 아닌 그냥 문학이라는 식의 지적들도 단순한 평가절하만은 아니다. 박상륭 소설은 소설을 정지태가 아니라 운동 과정에 있는 무엇으로 간주함으로써, ‘소설은 어떻게 탐구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 자체를 스스로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제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박상륭 소설을 읽는 일은 독자에게 하나의 지적 모험을 제공한다. 동시에 박상륭 소설이 지니는 다양한 철학적?문화인류학적?종교적 사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지적 무장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독자를 따라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끌어올리고 싶다11)”는 그의 생각은, 작가와 독자의 상호 기대 지평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제기하기도 한다.

박상륭 소설이 현실과 유리된 추상 세계에 집착하여, 역사의식이 결여되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재고할 여지가 있다. 어떤 시대에나 그 시대 나름으로는 말세가 가까웠다고 하는 의식이 지배한다. 그래서 말세란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죽음이란 필멸의 숙명이 상존하는 한 말세 의식도 영원한 윤회의 회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이 있기에, 지금 현재 여기의 삶은 가능해진다. 모든 것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시간인 현재를 인식하지 않고는 극대의 과거와 미래 역시 인식할 수 없다. 지옥의 모습은 무한정 상상할 수 있지만, 천국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죽음을 상상할 뿐, 삶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지혜는 죽음의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죽음을 모르고 사는 것보다는 한계 지어진 삶을 불행하게라도, 보다 절실하게 사는 일이 훨씬 낫다. 죽음과 늘 대면하며 사는 일은 참혹하지만, 그래도 삶은 이제 거기서부터 그 세부에까지 체험되는 것이다. 박상륭 소설의 가장 독특한 주제 의식은 죽음에 대한 집요한 천착을 통해, 오히려 죽음의 반대편에 있는 삶과 현실의 태도를 강조했다는 점에 있다. “소설하기의 앓음다음”이야말로 죽음을 ‘앓음’으로써 삶을 ‘아름답게’ 영위하려는 태도이다. 그는 우리에게 깊은 잠(죽음)에서 꿈(고통)을 앓음으로써 깨어나기(해탈)를 충고한다. 그것은 자기 안의 신적 본능을 발견하는 ‘인식’에 의한 해탈이며 구원이다. 샤푸리 야르 왕의 침실 속 어둠을 견디어 내야만 세헤라자데는 환한 빛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박상륭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천야일화’를 읊조리며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내는, 우리 시대의 현명한 세헤라자데이다.《문장 웹진/2008년 10월호》




※후주

1) 박상륭 인터뷰 〈누가 저 공주를 구할 것인가〉 《박상륭 깊이 읽기》, 문학과 지성사, 2001, p.24.

2) 김명신 〈말씀의 우주에서 마음의 우주로의 편력〉 《작가세계》, 1997. 가을

3) 「뙤약볕 3」

4) 박상륭/김윤식 대담 〈우리 소설을 지키는 프로메테우스〉 《문학동네》, 2003. 가을. p.392

5) 「강남견문록」

6) 「왕모전」

7) 「산남장」

8) Georg Lukacs, 반성완 역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85. p.92~93.

9)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박유하 역 〈장르의 소멸〉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민음사, 1997, p.226.

10) 임우기 〈죽음의 현실과 생명성에의 희원〉 《문예중앙》, 1987. 겨울. p.329

11) 박상륭/김윤식 대담, 같은 책.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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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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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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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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