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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 54년, 큰 문학―이호철의 문학 세계

  • 작성일 2009-01-29
  • 조회수 2,610

필경 54년, 큰 문학―이호철의 문학 세계

 

 

 

정호웅

 

 

 

1. 큰 산맥과도 같은 문학

 

1955년에 등단했으니 어언 54년, 작가 이호철의 붓으로 밭 갈기(필경 筆耕)는 반세기를 넘은 지금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장편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의 연재가 얼마 전에 끝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여든이 가까워 옴에도 줄지 않는 작가의 문학일로(文學一路), 뜨거운 열정과 붓힘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같은 열정과 붓힘이 저처럼 큰 문학을 일구었으리라. 작가 ‘이호철’을 생각하면 등단작인 단편 ?탈향?(1955)에서 시작하여 최근작인 장편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2008)에 이르는 이호철 문학이 큰 산맥과도 같이 벌판 저쪽으로 아득히 뻗어 나간 것이 떠오른다. 한국 현대 문학사 100년의 장관 가운데 하나이다.

 

 

2. ‘큰 산’에 대한 그리움

 

이호철 문학의 중심에는 모두가 잃어버려 이제는 볼 수 없는 ‘큰 산’(「큰 산」)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큰 산’은 청빛이었다. 서쪽 하늘에 늘 덩더릇이 웅장하게 퍼져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혹은 네 철을 따라 표정은 늘 달랐지만, 근원은 뿌리 깊게 일관해 있었다.”라고 묘사되어 있는 그 산을 다시 볼 수 없게 된 현실을 단편 「큰 산」의 서술자는 깊이 한탄한다. 그 아래 가로놓인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깊고 큰 상실감이다. 그렇다면 ‘큰 산’은 무엇일까. 고향 마을 뒤에 높이 솟은 실제 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절의 농촌 공동체이거나 그 속에 엄연했던, 사람다운 삶을 가꾸고 지키는 질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월남민인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때는 가졌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그 무엇인 것이다. ‘큰 산’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그것을 잃어버린 것을 크게 아쉬워하는 마음이 타락한 세계를 헤치고 진정한 가치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는 이호철 소설 속 인물들의 행로를 앞서 이끌었다. 이호철 문학의 한복판을 세차게 흐르는 맑은 물줄기는 이 ‘큰 산’에서 발원한 것이다.

이호철 소설은 작가가 직접 경험하며 통과해 온 해방 직후의 북한 사회와 전쟁기 이래의 남한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격동하는 현실의 다방면을 깊이 탐사하여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우리는 작가의 안내를 따라 이호철 문학이 거쳐 가는 ‘그때 그곳’을 바로 눈앞에 보듯, 생생하게 실감한다. 장편 『소시민』을 통해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소시민』(1965)은 한국 전쟁기 부산을 무대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이 작품에 그려진 전환기적 변동상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지만, 전락과 상승이라 개괄할 수 있다. 옛것에 매여 새롭게 형성되는 질서의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여지없이 전락의 내리막길로 굴러 내리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는 황당할 정도로 빠르게 상승하게 된다. ‘전면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회적 무정부' 상태로 격심하게 흔들리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 옛 질서가 무너져 내리고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는 현실의 변화는 급속도로 진행된다.

이 같은 현실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주인공의 내면 또한 마찬가지로 ‘전면적 소용돌이’ 상태에 놓여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운 내면을 지닌 인물의 눈을 통해 혼란스러운 현실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것인데, 당연하게도 그 관찰과 해석은 많은 경우 유보적이며 상대적으로 탈주관적이다. 자기 확신에 갇힌 주인공에 의한 관찰과 해석이 가 닿게 마련인 주관적 단정의 세계와 저만치 떨어진 객관성의 세계가 이에 떠오를 수 있었다.

『소시민』이 대표하는 이 같은 객관성의 세계는 낭만적 관념에 이끌려 주관성 과잉의 병적 차원으로 넘어서 버린 소설들과 맞서며 우리 소설사의 한 축을 이룬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대단히 크다.

 

 

3. 인간 원형의 탐구

 

이호철은 이 같은 객관 현실의 탐구와 함께 인간 원형의 탐구에 큰 관심을 기울여 온 작가이다. 시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인간 원형을 탐구한다는 이 힘겨운 과제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사실이야말로 이호철이 범상한 작가가 아님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터이다. 『남녘 사람 북녘 사람』(1996)을 그 대표적인 경우로 들 수 있다.

작가의 인물 통찰은 ‘원천적이고 생득적’인 곳으로 향한다. 학력이나 지위, 현재의 처지 등과 같은 외적인 조건을 넘어서서 근본을 날카롭게 찍어 올리는 것이다. 급속한 변혁의 물결에 휩쓸려 기존의 가치들이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형성되던 해방 직후의 북한 사회, 조국 통일에 대한 낙관적 기대로 힘차게 나아가는 길이든 아니면 죽음의 공포에 갇혀 걷는 길이든 죽음과 동행해야만 하는 전장의 한복판이니 숨겨진, 또는 가려진 본질이 속속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대상의 근본을 문제 삼는 작가의 태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휘황하게 빛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증언이 아니라 특유의 방법론에 근거한 깊은 인간 통찰의 보고서이다. 작가의 날카로운 눈은 몇 개의 인간 유형들을 포착하였다. 1. 석조형: 근원적인 단호함, 자기 확신의 소유자 2. 서경형; 순수한 열정의 표상 3. 승환형: 시류를 정확하게 읽고 그것에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일치시키는 인물 4. 광석형: 무해 무익의 유쾌한 광대. 이 유형들은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원형’으로서의 일반성을 지닌 것들이니 이 점이야말로 이 연작이 거둔 가장 큰 문학적 성과일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 같은 원형의 제시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지금 여기의 인간들과 현실 내 여러 국면들을 이해하고 진단하는 실마리로 삼는다. 현재 시점의 직접적 개입인 것인데, 현재에 대한 진단을 통해 새로운 역사 단계(그 핵심은 물론 통일이다)를 여는 데 참여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실천 의지의 개진일 것이다.

인간 원형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생득적인 것’, 말하자면 타고 나는 본성이 보다 근본적인 요소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호철 문학이 인간의 의식과 삶이 외적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는 생각에 캄캄하게 갇혀 있는 속류 사회학주의의 문학과는 다른 차원에 놓이는 문학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4. 단성의 세계 비판과 자기반성의 정신

 

이호철 문학의 중심인물은 대체로 주변인이다. 그들은 지배 질서를 거부하고 중심 아닌 주변에 섬으로써 스스로 이단자가 되었다. 작가는 ‘이단자’를 작품 제목(?이단자? 연작, 1971―1974)으로 삼은 바 있는데, 이는 자신의 문학이 주변인의 문학이고 이단자의 문학이라는 작가적 자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중심에서 소외된 주변인의 국외자적 현실과 비판적 작가 의식이 결합하여 강렬한 현실 비판의 세계를 이루는데, 주목되는 것은 이들이 자기반성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시민』 분석을 통해 살폈듯, 이호철 문학의 한 특성은 주관적 단정과 멀리 떨어진 객관성의 세계라는 점인데, 이호철 문학의 이 같은 탈주관적 객관성은 자기반성의 정신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장편 『문』(1988), 단편 ?부시장 부임지로 안 가다?(1965) 두 편을 통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

『문』은 단편으로 발표(1976)했다가 장편화한 작품이다. 작가에 의하면 1974년의 이른바 <문인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한 실제 체험을 담아낸 것이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실제 이름과는 조금 달라져 있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는 유명인들로서 작가와 그 시절 고난을 함께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을 가두고 억압했던 세계는 단성(單聲)의 세계이다. 언로가 봉쇄되고 한쪽의 말만이 일방적으로 울리는 단성의 세계는 대상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스스로 용납하지 않으니 진실의 드러냄과는 먼 거리에 놓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법의 이름으로 사회 질서의 수호란 명분 아래 공인된 권력 위에 서 있으니 더욱더 폭력적으로 작용한다. 주인공은 그 같은 단성 세계의 폭력성에 의해 벙어리처럼 갇혀 있다.

그 같은 단성의 세계가 떠받들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남한 사회에 가득 찬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이다. 흉악 살인범으로 사형이 확정된 서복철이란 인물이 내뱉는, “사각형이든 삼각형이든 빨간 딱지는 모두 죽여야 한다구. 난 비록 목은 달리겠지만, 파란 딱지다 이거야. 너처럼 숭악한 빨갱이는 아니란 말이다. 따라서 너 같은 빨갱이보다는 백배 나아, 알겠어?”라는 섬뜩한 적의와 단단한 자기 확신의 말이 단적으로 드러내는 그것 앞에서는 어떤 언어도 설 자리가 없다. 단성의 세계가 떠받들고 있는 이분법이니 그것은 절대적 성격의 것이다.

이 같은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을 비롯한 여러 겹의 문 속에 남쪽의 주민인 주인공은 갇혀 고통스럽다. 그렇다면 북쪽 주민은 어떠한가. “어느 좁디좁은 교조(敎條)의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고, 사람 사는 자연스러움에서 일탈되고 있음을 가슴 답답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소위 서적취(書籍臭), 이론 체계, 사람 사는 총체적 실체와 괴리되어, 어느 한쪽만이 치우치게 부풀려서 덮어씌우는 듯함을 느낍니다.” 남파되었다 붙잡혀 감옥에 갇혀 있는 인물의 말대로 그들 또한 문 안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남북 모두 여러 겹의 닫힌 문 안에 갇혀 있는 것인데, 남의 주민인 작품의 주인공이 ‘닫힌 문’의 현실 안팎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은 곧 그 닫힌 문을 열어젖힐 길을 찾고자 하는 모색이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주인공의 진지한 반성 정신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앞서 이끌어 왔지만 그 안에는 기분 내기, 한 건 올리기, 우쭐해 하는 선민의식 등의 요소들도 함께 들어 있었음을 주인공은 뒤돌아 살피고 있는 것인데, 이 같은 자기반성의 정신에 근거해 있기에 이 작품은 여러 겹의 문에 내재한 무반성성을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만을 욱대기듯 내세울 뿐 타자의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우리 문학의 일반적 병폐를 근본 비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자기반성은 곧 자기 부정이다. 자신의 안쪽에 숨어 있는 부정적인 면을 인식하고 그것을 부정할 때 인간은 새로운 존재가 된다. 자기반성은 새로운 존재로 신생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자기반성을 통해 신생하는 이호철 소설의 인물들은 자기 부정을 감행함으로써 그들의 안쪽에 부정성의 씨를 뿌리고 키운 대상의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그 근본을 비판한다. 군사 쿠데타 직후 한국 사회를 지배한 정치권력, 이데올로기 등의 근본을 비판하는 ?부시장 부임지로 안 가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이 같은 자기반성의 정신이다.

 

 

5. 역사 탐구의 새로운 형식

 

이호철은 역사 탐구의 새로운 형식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 60년대의 「1기 졸업생」 연작(1964―1969), 장편 『개화와 척사』와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에서 시도한 가상의 역사 재구성의 형식이 그것이다. 이 같은 형식이 조선조 이래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널리 존재했던 몽유록 형식에 이어져 있음은 두루 아는 대로이다. 파행적으로 전개된 지난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바람직한 출구를 찾으려는 시도일 것인데 문제는 주관화의 유혹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통어하고 객관적 진실을 드러냄에 나아가는가일 것이다. 신채호의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 이래 단절되었던 이 형식을 되살림으로써 작가는 우리 소설계에 중요한 과제 하나를 제시한 것이다.

이 같은 형식 실험이 보여 주듯 이호철은 끊임없이 새로운 차원을 모색하며 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 문학 외길을 걸어왔다. 자기 갱신의 그 행로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스스로를 새롭게 일구며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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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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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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