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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전하는 말 외 1편

  • 작성일 2009-04-27
  • 조회수 2,129


 

 

한창훈  

 단편 <밤눈> 중에서

 단편 <바람이 전하는 말> 중에서

 

 

 

 바람이 전하는 말

 

 

작가의 말

 

“바다는 생이별의 현장. 느닷없는 죽음이 소식으로만 전해 온다. 시신이라도 만져 보고 싶지만 그 증거마저도 유실되고 만다. 풍랑에 친구를 보내고 혼자 살아온 노인은 한 세월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친구의 제사에 참석한다. 원망이 사라져 버린 것은 시간의 힘인가. 들창을 흔드는 강풍 아래 노파는 젊은 남편의 사진을 바라본다. 혹독한 현실과 결핍의 일상. 내가 살고 있는 섬에서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장면들이다.”

 

 

바람은 시시각각 세를 부풀리고 있다. 이 정도 바람이면 방파제에도 파도가 하얗게 넘어올 것이다. 섬이 흔들릴 지경이다. 파도 부서지는 갯바위 동백나무들도 일제히 땅을 향해 몸을 낮추며 숨을 멈출 것이다. 친구 죽은 곳에서 불어오는 것이니 혼령이라도 여행을 하려면 뭔가를 얻어 타는 것이 편하기도 할 것이다.

노파는 잔 들어 반 정도 입에 넣고는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바람이 몸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하긴 바다가 이렇지 않은 때는 없었다.

지금 취직 공부가 한참이라는 큰 손자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유치원 다니던 외손녀가 교통사고 나서 다리가 부러졌을 때에도, 큰애가 결혼을 하겠다고 섬에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에도, 둘째 애가 가출을 했을 때에도, 남편이 바다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배 떠나기 전 부부 마지막 잠자리를 가졌을 때에도, 남편이 중신을 보내 청혼을 할 때에도, 샘에서 우연히 만나 물동이 이어 줄 때에도, 초경을 했던 때에도, 심지어 노파가 태어났을 때에도 이렇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쳤다.

어쩌면 섬사람들은 배경이 삶의 양식이 되는, 물고기와 같은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창공의 삶을 꿈꿔 하늘로 솟구치기를 좋아하는 날치라 하더라도 갑판에 누우면 푸른 하늘 아래 질식사하고 말지 않던가. 대대로 바다에 입과 손을 대고, 늘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가 시키는 대로, 바다를 받들어 모시며 살아 왔건만 멸치 아가미만 한 것 하나도 만들어 내지 못하여, 글쎄 남편은 수장(水葬) 당하고 만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하나의 정지된 형태이어서, 서른다섯의 팔팔한 사내의 모습에서 남편은 한 치도 더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살았다는 것은 늙어 간다는 것의 다름 아니라는 것을 노파는 사진 속의 남편 모습과 사진틀 유리에 언뜻 반사되는, 자신의 얼굴을 동시에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밤눈

 

 

작가의 말

 

“이번 소설집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편이다. 주변에서 나오는 소설이고 영화고 불륜 소재가 너무 잦아 ‘그렇다면 이런 불륜은 어떤가’ 하는 심사로 쓴 것이다. 역시 사랑보다 더 빡센 것은 없나 보다. 이 단편의 모티브가 되었던 여인네는 지금쯤 어떤 손님을 앉혀 두고 있을까. 아직도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까. 며칠 전 모 영화사 피디가 찾아와 이것을 모노드라마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연극이 올라가면 그 여인네 뫼시고 한번 가 볼까 생각중이다.”

 

 

나는 벽에 기대어 사람들 떠난 입구를 바라보았다. 담을 넘어온 이웃의 측백나무 가지 끝을 수놓으며 눈은 거듭 내렸다. 허전하면서도 푸근했는데, 담소 나누던 여인을 다른 사내에게 빼앗기기는 했지만 글쎄 주인이란 어쨌든 자기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내가 먹은 것에 대한 계산도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졸지에, 아까부터 부엌에서 주방일 돕던 아주머니도 퇴근한 듯하여, 텅 빈 식당을 지키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눈은 내리고 또 내렸다. 하염없이 가라앉는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한 잔 마셨다. 언제 오마도 알리지 않고 대문을 나섰으니 금방이라도 눈을 털고 나타날 것 같은데 사람 빠져나간 곳은 적막하기만 했다. 말을 다정다감하게도 했다는 사내가 떠난 것처럼 여인네가 나를 떠난 듯했다.

눈 내리는 빈 가게에 이렇게 앉아 있자니 가난과 병마에 지친 사람이 소원 들어 주는 여의주를 우연히 얻었는데, 신출기묘 조화 덕에 부자가 되었는데, 오래 가지고 있을 것은 못되었던 것이, 가난했을 때의 자신보다 더 피폐하고 곤란한 사람에게 건네주지 않으면 몸이 자꾸 오그라 붙는 증세가 심해져서, 막대한 재산을 지니고도 지독하게 가난한 이들의 세상 속으로 자꾸 찾아 들어가야 하는, 옛날 어느 곳에선가 있었다는 그 저주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인네는 지나가는 과객 하나 앉혀 두고 속에 쌓인 것을 씨월거리고는 지금쯤 저 대문 밖으로 훨훨 길 떠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좀 중얼거렸는데, 중얼거리다 보니 아들을 낳기 위한 발라드나 사리마다 운운하던 모습이 나그네 홀리는 암뱀의 교태 같기도 하고 만담(漫談)으로 사람들 배를 잡게 하고는 저는 술 한 병 쌀 반 홉 사 들고 어두운 골목길 사이로 집 찾아가는 가난한 희극배우의 모습 같기도 했다.

그들 떠난 발자국을 눈이 또 한 번 매장하고 나자 그는 돌아왔다. 역시나 어딘가 갔다가 돌아온 여인은 아름다웠다. 그는 마침내 돌아왔다는 안도감보다는 적잖은 시간 동안 자신의 가게에 나를 잡아 두어서 미안해했다. 그 사이 반듯하게 걷지 못하는 중년의 사내 둘이 들어와 찾다가 훗날을 기약하고는 되돌아 나갔노라고, 집 지켰던 과정을 간단하게 말했다.

 

  

소설·낭송 : 한창훈

출전: 한창훈 소설집 『나는 여기가 좋다』, 《문학동네》, 2009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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