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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배웠다

  • 작성일 2009-04-29
  • 조회수 3,833

[조경란이 만난 사람⑬]- ‘유진 목공소’, 윤대오 목수

 

 

 

많이 배웠다

 

 

 

 

얼굴보다 손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다. 밤새 원고를 쓰고 난 후에는 내 손으로 내 손을 쓰다듬으며 수고했다, 말하기도 하고 핸드로션 같은 것도 자주 바르고 손톱 소제도 열심히 한다. 이런 말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내 육체 중에서 눈과 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읽을 수 없게 되거나 쓸 수 없게 된다는 상상은, 그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하고 가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면 맨 먼저 보게 되는 것도 눈,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손이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 턱을 괸 손, 술잔을 잡는 손, 제스처를 하는 손, 벌린 손, 오므린 손, 뭔가를 자꾸 가리키려고 하는 손, 그리고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 손, 숨는 손. 그 손들을 통해서 어떤 이는 일종의 몸짓의 언어 같은 것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저 그 손들에게서 풍기는 아우라를 본다. 그게 그건가. 아무려나 내게는 손의 이미지가 그 사람의 이미지이기도 한 것이다. 혹여 누가 나를 같은 눈으로 볼까 싶어 친밀하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때는 내 손 역시 더욱 긴장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주로 왼손은 방심한 듯 자연스럽게 펼쳐놓고 오른손은 찻잔을 잡거나 연필을 쥔다. 오른손이 왼손보다 굵고 짧고 게다가 흉터들도 많다. 최근에 손에 관한 불쾌한 일이 있었다.

 

도쿄의 네기시마로 떠나기 전날, Y라는 기자를 만나게 되었다. 초면인 데다가 무슨 일인가 내 쪽에서 거절하는 자리여서 여느 때보다 긴장해 있었던 것 같다. 저녁을 먹다 말고 갑자기 Y가 손금을 좀 보자고 했다. 무슨 엉터리 같이.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싫습니다, 하곤 뾰족한 포크를 무기처럼 집어 들며 밥 먹는 시늉을 했다. 그가 물끄러미 내 손, 그것도 오른손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불편했다. 아무 말도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윽고 그 Y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도시처녀인 척 하고 싶어 하는 시골 여자 손이군요. 되묻지 않아도 알아들을 말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쾌했지만 다시 안 만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국수를 먹는 사이에 잠깐 방심해 있었던 것 같다. Y가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뒤집어보았다. 그러고는 잠깐 와본 손님처럼 내 손바닥 안에서 많은 것을 본 것 같다. 이어 하는 말. 타고난 작가는 아니로군요, 인생선이 이렇게 희미할 수가! 혀까지 쯧쯔 차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타고난 작가라고 생각해본 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또박또박 말했다. 집에 와서 스탠드를 켜놓고 유심히 오른손 손바닥을 들여다보니 정말로 인생선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희미해서 단박에 기가 죽고 말았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더 투박하고 거칠게 느껴지는 오른손. 영락없이 아버지의 손을 축소해놓은 손이다. 태생은 속일 수가 없다.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The Buhl Collection: Speaking with Hands>展을 흥미롭게 보았다. 미국의 유명한 컬렉터이자 자선사업가인 헨리M.불이 그동안 모아온 ‘손’을 주제로 한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찍은 ‘골무를 낀 손’, 두아노의 ‘피카소의 빵’, 벌린 손을 새의 날개로 형상화한 에두아르도의 브론즈 작품 등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 많았다. 저마다의 이야기와 역사를 갖고 있는 손. 나는 손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한때 내가 잡았던 손들과 내가 놓친 손들과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손들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책상

 

작업실과 책상이 동시에 생긴 날, 나는 아마 누군가에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라고. 2007년 12월의 일이다.

 

‘책상’에 관해서는 여러 번 산문으로 쓴 적이 있다. 그만큼 갖고 싶었으나 쉽게 갖지 못한 것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작업실이 생긴 후 지금은 거의 잠만 자다시피 하는 내 옥탑방에는 책상 대신 사인용 하이그로시 식탁이 놓여 있다. 그 식탁이 나의 첫 번째 개인 책상이고 지금껏 펴낸 거의 모든 책들을 그 책상에서 썼다. 웬만한 책상은 크기 때문에 방에 들어가질 않아 조립도 쉽고 폭도 책상보다는 좁은 하이그로시 식탁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불편한 줄 몰랐다. 나중에 작업실을 갖게 되면 크고 널찍한 그런 꿈의 책상을 하나 짜야지,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그때도 책상을 ‘사야지’가 아니라 책상을 ‘짜야지’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책상’을 갖기 전까지 내가 어디 남의 집에 가서 보았던 책상들, 멋진 카페나 갤러리에서 보았던 책상들, 다른 예술가들의 작업실에서 훔쳐보았던 책상들, 그 책상들에 부렸던 욕심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맹렬했다. 그래도 내 방에 돌아오면 다 잊고 책상 유리 밑에 끼워놓은 강운구 선생의 사진 ‘경주시 월성군’이나 등단하던 해 김병익 선생의 책에서 베껴 적어놓은 문학인의 자세에 관한 메모 같은 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타닥타닥 글을 쓰고는 하였다.

베를린인가 어딘가 두서너 달 공허하게 떠돌다 돌아온 해였다. 문화 프로그램에 출연하다 알게 된 이PD가 그동안 이런 것을 만들었다며 CD몇 장을 주었다. 그 중 한편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목수, 그 삶의 예술을 찾아서]. ……다큐멘터리 맨 마지막에는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목수들의 손들이 각각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나무를 다듬고 만져온 굵고 두툼하고 새카만 손들이었다. 내게는 익숙한 손이었지만 멀어진 손이기도 했다. 다음날 이PD에게 전화를 걸어 공연히 친한 척을 좀 해보았다. 물론 내심 딴 생각이 있었던 게다. 그 뒤에 한 번 더 전화했을 땐 이렇게 말해버렸다.

 

그러니까, 그 목수 좀 만나게 해주세요.

어떤 목수요?

그러니까, 그, 왜, 마음의 일부를 넣는다는.

네?

자신이 만든 물건에.

아, 정성이요?

마음이 아니라 정성인가?

그게 그거죠.

네 네, 그렇게 말했던 분.

 

작업실을 계약해놓고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보다 책상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 해, 그 계절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나를 들뜨게 한 일이기도 했다. 윤목수라는 사람이 책상을 짜준다고 할지 거절할지도 모른 채 내가 갖고 싶어 했던 책상을 디자인해 도면을 만들었다. 우선 크기가 일반 책상, 지금껏 내가 써왔던 책상보다는 훨씬 커야 했고 길었으면 좋겠고 꼭 서랍이 있어야 했다. 내가 만약 하이그로시 식탁을 쓰다가 불편을 느꼈다면 그건 서랍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만든 후 자신도 그 목수에게서 책상을 하나 부탁해 가졌다는 이PD의 도움이 컸다. 책상 다리 사이에 가로로 긴 받침대가 있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줘 그렇게 했다. 완성된 도면을 가방에 넣고는 이PD의 자동차를 얻어 타고 홍은동 목공거리로 갔다.

불과 채 이년도 안 된 일이지만 내 기억은 상당 부분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면을 준비한 게 윤목수를 만나고 난 후의 일인지, 아니면 자신은 ‘문짝’ 전문이라 ‘책상’은 만들어주기 어렵다, 내가 쓴 책을 한번 읽어보고 난 후에 책상을 짤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겠다, 라고 그날 윤목수가 말한 게 사실인지 아닌지. 자신이 만든 물건에 언제나 이름을 새기듯 ‘정성’을 심어 놓는다는 말을 프로그램에서 들었는지 아니면 그날 책상을 짜주기로 하고나서 나에게 그 말을 했는지. 아무튼 그 일들은 서로 시간차를 거의 두지 않고 동시에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아주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날, 그러니까 윤목수를 처음 만난 날 그가 나를 그의 창고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무를 한번 골라보시겠어요?

……!

가공의 숲처럼, 가지와 껍질이 벗겨진 나무들이 길고 어두운 창고 안에 빽빽하게 서로 기대듯 서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냄새를 맡았다. 역시 익숙하고 어딘가 나를 잘 아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 듯한 냄새. 내가 어렸을 적부터 맡아왔던 냄새. 아버지에게 풍겨나곤 하던 냄새.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나무들을 만져보고 냄새 맡고 두드려보고 쓰다듬곤 해보다가 나는 이것요, 하고 한 나무를 골랐다. 내 책상을 만들었으면 하는 나무. 윤목수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어 나무를 고르실 줄 아네요? 했다. 나는 내가 목수의 딸이었다고 말했다. ‘목수의 딸’이라고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해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날 내가 고른 나무는 몹시 추운 땅에서만 자라는 붉은 소나무, ‘홍송(紅松)'이었다. 무엇을 만들어도 튼튼하고 모양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나이테 하나가 채 0.05mm도 안 돼 보이는, 우람하고 아주 오래 살았던 그런 나무였다. 그게 홍송이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그 향기에 취해 있었다. 그 날 이후, 내 인생에 ‘목수’를 한 사람 더 알게 되었다. 아버지, 그리고 홍은동 윤목수.

 

책상이 왔다. 작업실 바닥에 신문지를 겹쳐 깔아놓고, 이제 더 이상 나무를 만지지 않는 늙은 아버지와 둘이 칠을 했다. 문득 칠을 하기 시작한 것을 후회했다. 나무 냄새가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랍 안은 칠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래서 지금도 서랍을 열 때마다 홍송의 묵직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풍긴다. 칠이 완전히 마르는 데 일주일쯤 걸린 것 같다. 그 일주일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 새 글이 쓰고 싶었고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지금도 저쪽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책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문득 그런 욕심이 든다. 작업실을 갖게 되었다고 하니 몇몇 가까운 이들이 뭔가를 하나씩 사주고 싶어 했다. 그중 가장 부자일 것 같은 사람에게 의자를 하나 사달라고 했다. 나답지 않게 이번에는 디자인이 아니라 오래 앉아 있어도 허리와 목에 무리가 안 가는 의자, 시커멓고 높은 그런 인체공학용 의자를 들여놨다.

 


 

목수(木手)

 

우리의 인연은 목공소 주인과 손님으로 단발에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럴 것 같진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도 궁금하다. 그냥 이렇게 말해야겠다. 돌아서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되는 사람이 있다. 책상을 잘 쓰고 있다고 전화를 한번 건 적도 있고 지난해 가을과 겨울, 먼 곳에 체류하고 있을 때는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느냐는 윤목수의 전화를 한번 받은 적도 있다. 그때 나는 주먹으로 한번만 내리치며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IKEA’의 조립식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이PD와 만날 약속을 하면서 슬그머니 그날 홍은동에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말을 넣었다. 윤목수와 이PD는 그동안 간간이 만나왔던 것 같은 눈치였다. 윤목수가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교통사고를 당한 일, 아내와 탱고를 배우러 다닌다는 소식 같은 것을 전해 듣기도 했다. 봄비가 주륵주륵 내리던 지난 금요일에 다시 홍은동 목공거리에 갔다. 겨우 두 번뿐인 걸음이었지만 크고 작은 30여개의 목공소들 중에서도 나는 이제 ‘유진 목공소’는 익숙하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도 가까운 친구의 집을 무람없이 찾아가듯 그렇게. 윤목수는 벌써 동네 단골 고기 집에 예약을 해두고 있었다. 어서 식당으로 가서 밥부터 먹자는 윤목수를 잠시 만류하고 나는 넓지 않은 목공소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실컷 나무 냄새를 맡았다. 왜 이런 냄새가 좋은지, 내가 뿌린 디올의 자도르 향수보다 익숙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냄새와 이런 나무들, 이런 톱밥 가루들에 둘러 싸여 있고 저렇게 조용한 비까지 내린다면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저녁을 먹고 난 후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상주 골짜기,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964년도에 잠결에 부모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가 집안이 가난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부모님은 십 남매 중 여섯째인 아들이 중학교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 표현에 의하면 ‘천도교에 빠져 생활은 나 몰라라’ 하던 사람이었다. 윤목수는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특히 수학을 잘 했던 윤목수가 시험을 포기하자 담임선생은 그를 붙들고 펑펑 울었다. 십 년 전, 사은회 때 만난 선생은 그 일을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 윤대오(尹大五)씨는 열네 살 때부터 목공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일을 해주다가 경북 교육장이라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큰맘을 먹고 그 교육장에게 ‘학교에 가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의 솜씨를 눈여겨보았던 교육장이 며칠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넨 지금 학교에 가는 것보단 그 기술을 익히는 것이 훗날 도움이 될 거네. 윤목수는 지금도 그 문장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지, 그렇게 나에게 말했다. 그때 섭섭하지 않았을까? 나는 물었다.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야 그때 교육장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고맙다고. 왜요? 나는 또 물었다. 지금 행복하니까요. 윤목수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방금 막 다방에서 시켜온 커피 잔을 들었다. 1967년도 부산에 적을 두고 있을 때는 전국 학교에 들어가는 걸상들을 만들었다. 열일곱 열여덟이 되던 해에는 공무원 월급이 8천원쯤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는 목공 일로 한 달에 이삼만 원씩 벌었다. 가난에 대한 개념은 있었으나 돈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었다. 자신을 목공소에 소개해준 친척에게 6만원이나 떼였다. 그래도 좋았다. 나무를 계속 만질 수는 있었으니까. 그는 특히 궁궐이나 사찰에 달던 한식 ‘살문(殺門)’이라는 귀한 문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는 아홉 살 때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훗날 봉천동으로 편입된 영등포 한쪽에 자리를 잡은 것은 내가 태어나기 몇 해 전의 일이다. 수십 가지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아버지는 나무를 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는 봉천동 일대가 거의 제재소였다고 한다. 세 딸들이 생기고 쑥쑥 크자 이제 아버지의 꿈은 ‘시인’이 아니라 ‘나의 집’을 갖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전국의 사찰에 윤목수가 만든 살문이 달리기 시작했고 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했다. 그 사이 아들 둘과 딸을 얻었다. 그의 부지런함과 남다른 솜씨는 일대에서도 유명하다. 다큐멘터리에서 그의 단골손님으로 출연했던 한 디자이너는 윤목수를 두고 ‘단골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목수’라고 말하기도 했다. [궁]이라는 현대식 사극 드라마에 나갈 ‘문’을 만드느라 한 달 만에 천 장쯤 되는 문을 만들기도 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트로트를 크게 틀어놓는다. 문은 항상 열어두고 잠그지 않는다. 돈을 넣어둔 서랍도 있지만 도둑 한번 맞아본 적 없다고 자신만만해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집과 목공소를 오간다. 그동안 죽을 뻔한 고비를 세 번이나 넘기기도 했다. 그 중 그의 첫 번째 일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열일곱 살 때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했다. 금지구역을, 일부러 넘었다.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고 그는 자신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이상한 것은 막상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자 전혀 슬프지도 않고 동요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파도가 몸을 수면 쪽으로 밀어주었을 때는 조금 더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발뒷꿈치를 최대한으로 세워보았다.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고 갑자기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혹시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문득 말을 멈추고 윤목수가 나에게 물었다. 연신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제 홍은동 목공거리는 인적이 드물 만큼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목공소 구석에 있는 오래된 난로에 나무토막 몇 개를 더 던져 넣었다. 타탁타탁, 불꽃이 확 일었다. 나는 그 슬프지도 동요도 되지 않는 상태, 그걸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걸 쓰고 있다고도. 그 사람이 윤목수였을까 이PD였을까, 누군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였을까. 어느 날 윤목수는 대패를 들고 목공소 밖을 내다보다가 43년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러기로 한 듯 이PD와 내가 잠시 침묵에 빠져 있자 그는 최근에 와서야 ‘단전’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고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새로 갖고 온 도면이 있으면 내놔보라고 윤목수가 채근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고 했다. 간밤에 망설이기는 했다. 등받이가 없는 벤치 같이 생긴 길고 단순한 나무의자와 작은 서랍장이 하나 갖고 싶긴 했다. 긴 의자를 포기한 것은 그런 것을 단지 좋아하고 갖고 싶어 할 뿐 지금 작업실에는 그걸 들여놓을만한 공간이 없어서였고 서랍장 같은 것은 윤목수에게 부탁하기에는 실례가 될 것 같아서였다. 책상을 부탁했을 때 윤목수는 자신은 ‘문짝’ 전문이라면서 처음에 사양했던 기억이 났다. 아닌 게 아니라 명함에는 ‘각종 문짝 전문’이라고 큼지막하게 씌어 있었다. 사실 스케치북에 서랍장 도면을 그리다 말았다. 그런 마음을 윤목수에게 들켜버렸다. 시간 날 때 틈틈이 만들 테니 필요한 것 있으면 한번 말해보라고 또 넌지시 내 마음을 떠본다. 그리고 며칠 전 새집으로 이사를 한 이PD에게도. 윤목수는 얼마 전에 운 좋게 헐값에 좋은 나무를 잔뜩 들여놓게 되었다고 우리를 또 창고로 이끈다. 보기만 해도 여전히 탐이 나는 홍송들이며 질 좋은 메타세콰이어, 한 번도 못 봤던 러시아산 표범무늬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다. 아무것도 더는 필요 없는 것 같아도 막상 나무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서로 멀뚱히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PD와 나는 멋쩍게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처음 목공소에 왔을 때부터 내가 눈독을 들였던, 윤목수가 만든 작은 서랍이 삼십 개나 달린 벽걸이용 서랍장 말고도 사실은 갖고 싶은 게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꼭 윤목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

 

지난해 12월, 버클리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덴빌’이라는 마음에 있는 ‘유진 오닐’ 생가에 간 적이 있다. 도교(道敎)에 심취해 있었던 그의 세 번째 아내 클라라의 영향이 컸겠지만 그의 집필실이 있는 이층과 일층 사이에는 문 세 개가 있었다. 일층과 이층 계단 앞에 있는 첫 번째 문, 그의 간이 침실 앞에 있는 두 번째 문, 그리고 집필실 앞의 마지막 세 번째 문. 그 세 개의 문이 모두 닫혀 있을 때면 그가 스스로 그 문들을 밀고 걸어 내려올 때까지 그 누구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이따금 이층 계단으로 난 첫 번째 문 앞에서 클라라는 하루 종일 밥도 거른 채 책상 앞에 웅크리듯 앉아 있을 유진 오닐을 기다리고는 했다. 해가 기울고 글쓰기와 허기에 지친 그가 휘청휘청 계단을 내려올 때 클라라는 이따금 그의 야윈 뺨에 남아 있는 눈물의 흔적을 발견하곤 했다고 한다. 휘청거리며 세 개의 문을 밀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야윈 사람. 그것이 내가 유진 오닐에 대해 새로 갖게 된 이미지다. 그 세 개의 문. 그 후 나는 자주 머릿속에 ‘문’에 관한 것들을 떠올리고는 하였다. 이를테면 이런 ‘의미’가 다른 문들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집에서 밥을 먹고 글을 쓴다. 어쩌면 이렇게 늙어가는 부모와 그와 비슷한 속도로 큰이모가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서너 살짜리 조카들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지도 모른다. 글을 쓰다가도 나는 아이 울음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고 조바심치고 우는 아이와 그걸 달래지 못해 쩔쩔매는 엄마를 걱정한다. 옥탑방에 있든 작업실에 있든 마찬가지다. 나의 한쪽 신경은 언제나 ‘집’에 닿아 있다. 보지 않아도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글을 쓰는 시간에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밖의 모든 것을 차단한다. 그래도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도 있다. 이렇게 영원히 함께 살 거라면 커다랗고 육중한 문 하나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가족과 나, 일상과 나를 잠시 차단시킬 수 있는 문. 상징적이기도 하고 실제적이기도 한 그런 문(門). 옥탑방에 살 때는 작업실 하나 갖는 게 소원이었다. 작업실을 갖게 된 지금은 가족과 함께 살 수도 있고 집필을 할 수 있는 별도의 방도 있는 그런 공간, 지금보다는 넓은 집을 갖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그 방과 가족의 공간 사이에는 그 둘을 철저하게 차단시킬 수 있는 문 하나가 필요할 것이다. 언젠가 그 문을 윤목수에게 청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문은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문이다. 거기가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간 사람이 새로 살아야 할 장소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문학이란 그런 것이었다.

 

윤목수에게 ‘당신에게 나무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려다 말았다. 누가 나에게 글쓰기가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너무나 대답하기 싫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런 질문을 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나무를 만지고 쓰다듬는 그는 신나고 행복해 보였다. 곧 딸아이가 인도 남자와 결혼해 떠날 것이고 새 며느리도 보게 될 것이고 둘째 아들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는 그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내도 건강하고 집도 새로 옮겼다. 창고에 새 나무들도 넉넉하다. 바랄 것이 없다, 고 그는 말했다. 마치 내가 그가 만들어준 책상을 작업실에 들여온 날 혼자 중얼거렸듯이. 일을 해주고도 돈을 받지 못해 고군분투할 때는 무협지 같은 것을 읽으며 마음을 달랜다. 춤도 배우러 다니고 오토바이를 타고 여전히 도로를 쌩쌩 달리고 단골 다방에서 하루에 한번 커피를 배달시켜 마신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에서 뼛가루같이 희고 고운 톱밥들이 수수수 떨어진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인데 몸이 안 움직인다. 여느 때처럼 나는 딴 생각에 빠져 있다. 어쩌면 Y라는 기자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진 크고 작은 두려움 중에는 ‘사실을 지적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고 나도 그런 사람이 돼 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궁핍해 보이지만 우리를 만든 것들, 잃어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언젠가 내가 갖게 될, 가로 세로 살을 넣어 짠 ‘문’에 대해 상상한다. 무엇을 하든, 글을 쓸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딴 생각에 빠져 있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불충분했던 사랑들아, 불충분했던 의지들아 모두 가라. 나는 가방을 메고 목공소에서 일어났다. 잠깐 윤목수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놨다.

나를 광화문에 내려다주면서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라고 이PD가 물었다. 나는 씩 웃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 책상은 내가 어디에 있든 빨리 가서 거기 앉고 싶은 그런 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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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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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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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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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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