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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고통으로부터 상호관계 속의 일상으로- 최근 소설에 나타난 다문화적 현실의 새로운 층위

  • 작성일 2010-05-03
  • 조회수 3,074

현장의 고통으로부터 상호관계 속의 일상으로

- 최근 소설에 나타난 다문화적 현실의 새로운 층위


손정수
1.

1990년대 초부터 노동과 결혼을 매개로 해서 시작된 외국인의 본격적인 국내 유입은 그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07년에 이미 100만, 전체 인구의 2%를 넘어서기에 이르렀다.1)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점점 강화되리라 예상되는데, 국내 체류 외국인의 비율이 2020년에는 5%, 2050년 무렵에는 이민사회의 기준으로 말해지는 10%에 가까워지리라는 관측도 나와 있다.2) 
이러한 흐름에 따라 국가 통합이라는 차원에서 정부 주도의 다문화 정책이 시행되어 왔고, 그 차원에서 포괄되지 못하고 있는 인권과 교육의 범위는 민간의 시민단체들이 보완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현실의 요구에 부합하는 제도가 갖추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3)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역시 그러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다. 단일 민족이라는 공동 환상은 상당히 약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태도는 아직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적 한계는 무엇보다도 다문화사회를 경험한 역사가 짧기 때문일 것이다. 다문화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여러 학문 분야나 예술 영역에서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제도와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빚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소설의 영역에서 다문화주의의 현황과 문제를 분석하기 위해 씌어지는 이 글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소설과 비평의 영역에서 다문화주의의 문제가 다루어져 온 그 동안의 과정을 살피면서 그 특징과 문제점을 제시하고(2장), 다문화주의와 연관된 최근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특징을 분석한 후(3장),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간략한 의견을 덧붙이는(4장) 순서로 진행된다. 

2.

국민국가 경계 바깥의 존재, 그러니까 디아스포라를 형상화하는 것과 다문화주의를 주제화하는 것은 여러 모로 유사한 면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디아스포라적 존재를 그리는 경우에는 개인들이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는 과정에서 혹은 그 이후에 발생하는 삶과 의식의 문제에 초점을 둔다. 말하자면 국민국가의 경계 위의 존재들을 통해 국민국가 체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문화주의라고 했을 때에는 그 탈경계의 과정에서 발생한 개인들의 문제들을 공동체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그 초점이 이동한다. 요컨대 다문화주의라고 했을 때는 디아스포라들을 받아들이는 입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국민국가는 단순한 경계일 뿐만 아니라 실체적 공동체이다.
우리의 경우 2000년대 이후 디아스포라를 소재로 한 소설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다. 이주와 이산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이기에 디아스포라를 그린 이야기가 풍부한 것은 자연스럽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디아스포라라는 존재는 우리의 굴곡 많은 역사와 그 속에서의 우리의 삶을 환기시키는 한편 외부 세계를 향해 열리기 시작한 호기심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매력적인 탐구 대상일 수 있었고, 그러한 방향에서 한동안 유행적인 현상을 이루기도 했다. 그에 비해 다문화의 문제는 그리 폭넓게 다뤄져 온 편이 아니다. 우리 역시 자신들의 국민국가로부터 벗어나 이곳으로 이주해온 디아스포라들을 우리 내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지금까지 가지지 못한 자의 입장에서 세계를 그리는 데 익숙했던 우리 소설은 이러한 새로운 입장에 아직 충분히 적응이 되지 못한 듯하다. 대체로 한국문학은 문제 제기에는 민첩했지만 그 대안의 모색에는 그에 합당한 관심과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다문화주의는 디아스포라라는 소재에 비해 한국소설이 다루기에 그리 편한 대상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흑인 이주 노동자 아지드가 등장하는 김소진의 「달개비꽃」(1995) 같은 예외적인 작품도 있기는 하지만, 다문화주의에 대한 문제가 소설에서 비교적 전면화된 것은 2000년대 중반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넓게 잡아도 이 주제와 관련된 이 시기의 작품으로 이명랑의 『나의 이복형제들』(실천문학사, 2004), 박범신의 『나마스테』(한겨레신문사,2005), 전성태의 『여자 이발사』(창해, 2005), 천운영의 『잘 가라, 서커스』(문학동네, 2005) 등의 장편과 역시 그 무렵에 산발적으로 나온 몇 편의 단편들, 대표적으로 이혜경의 「물 한 모금」(『문학과사회』, 2003. 봄), 고종석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파라21』, 2004. 봄), 강영숙의 「갈색 눈물방울」(『문학과사회』, 2004. 겨울), 김재영의 「코끼리」(『창작과비평』, 2004. 가을)와 「아홉 개의 푸른 쏘냐」(『내일을 여는 작가』, 2005. 겨울), 손홍규의 「이무기 사냥꾼」(『문학동네』, 2005. 여름),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내일을 여는 작가』, 2005. 겨울), 정도상의 「소소, 눈사람이 되다」(『창작과비평』, 2006. 봄) 등을 들 수 있을 정도여서, 다문화 현상을 다룬 이 시기 소설의 폭이 그렇게 넓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 작품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한 비평적 논의들이 이루어져 있다. 그와 같은 경향이 출현하던 당시에는 그 새로운 현상의 의미에 주목하는 글들이 씌어졌고,4) 그 뒤에는 데리다, 레비나스, 바디우 등의 논의를 바탕으로 ‘타자’ ‘윤리’ ‘환대’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좀더 복잡하고 심층적인 비평의 맥락이 형성되었다.5) 대체로 이 논의들은 그와 같은 경향의 소설들이 한국에서의 이주 노동자들의 삶의 현실과 그 문제점을 일깨우고 타자를 대하는 윤리적 태도를 환기시킨다는 점을 의미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를 통해 타자와 윤리 개념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인식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 논의들 가운데에는 소설에 나타난 다문화주의의 양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고,6) 최근에는 다문화주의 자체의 한계를 밝히는 지젝(『까다로운 주체』), 웬디 브라운(『관용』) 등의 저작이 번역 소개되면서 원론적인 차원에서 다문화주의에 내포된 제국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속에서 보면 다문화주의의 한계에 대한 경고가 다문화주의에 대한 접근 자체를 봉쇄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민 사회의 역사적 경험이 오래 되고 그래서 다문화주의적 관용이 일상적으로 강조되는 서구의 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한계에 대한 지적이 현실 정합성을 갖겠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가 매우 부분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오히려 조금씩 관점을 갱신하면서 지속적으로 그 문제에 대한 탐색과 모색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최근 비평에서 유행처럼 등장하는 타자성을 강조하는 관점에 대해 “이러한 논의는 결국 실천적 무기력함을 이론적 수사로 은폐하려는 비평의 비윤리성을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7)는 비판도 있거니와, 다문화주의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있는 최근의 비평들 또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루어지고 있다기보다 서구의 담론을 바라보면서 전개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다문화주의를 탐구하고 있는 소설들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의미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주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탐구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도 그에 못지않게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3.

다문화주의의 현상과 연관된 소설들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2000년대 중반에 유행처럼 등장했다가 그 이후 소강상태에 접어든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8)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 주로 신진작가들의 단편에서 그와 같은 문제가 간헐적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신진작가들의 단편에서 다문화주의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앞선 시기의 특징과 성격에 이어져 있고 획기적인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정한아의 「천막에서」(『한국문학』, 2008. 겨울), 김애란의 「그곳의 밤, 여기의 노래」(『문학과사회』, 2009. 봄), 김미월의 「중국어 수업」(『한국문학』, 2009. 겨울), 한지수의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문학사상』, 2010. 4) 등을 대상으로 그 차이의 내용과 그것의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다문화 현상을 소재로 한 최근의 소설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점은 우선 다른 문화에 대한 동정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인물들 사이의 대등성, 수평성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특징이 앞선 시기의 소설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네이션을 가로질러 이루어지는 하층민들 사이의 연대는 다문화주의와 연관된 소설에서 항상 등장하는 장면이다. 가령 손홍규의 「이무기 사냥꾼」에서 용태와 조선족 장이 나누는 다음과 같은 대목. “술에 취해 서로 주먹질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며 그가 눈살을 찌푸리자 장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용태 아우, 쟤들 너무 미워하지 말라우. 외국인이란 것만 빼면, 고향 떠나 밥 빌어먹고 사는 이주 노동자인 건 아우나 나나 쟤들이나 한가지 아니갔어.”(p. 330) 그럼에도 최근 신진작가들의 소설은 노동이라는 가장 전형적인 고리에 한정되지 않고, 또 가정 폭력, 몰이해, 경제적 착취 등의 관습적인 코드에만 의존하지 않는 일상의 관계들 속에서 다문화주의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방수포 생산 업체의 본사가 있는 중국이 배경인 「천막에서」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일반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있다. 회장과 현지인 팀장 로미오가 자본주의적 이윤을 앞세우며 사이클론으로 피해를 입은 동남아 지역을 향하는 구호 단체를 상대로 폭리를 취하려 하는 반면, 한국인인 ‘나’나 중국인 아내와 가정을 꾸린 동료직원 박은 그 메커니즘에 의해 억압을 받고 있는 무력한 대상으로 등장한다. 다혈질적인 회장의 야만적인 행태에 아무 소리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간부들 역시 권력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이렇듯 이 소설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고정된 틀을 벗어나 있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근원에 대한 인식은 분명하다. 미국의 W마트에 의해 한편으로 휘둘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동남아 지역을 상대로는 횡포를 서슴지 않는 회사는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의 수직적 관계 속에 놓인 한국의 지위와 위상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족 처녀 명화와 결혼한 택시기사 용대가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그곳의 밤, 여기의 노래」에서는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볼 수 있다. “조선족이라 해서 다 가난한 건 아니었다. 조선족 중에도 유학을 가고, 사업을 하고, 명품을 사는 이들이 있었다. 아울러 밀항을 하고, 날품을 팔고, 결혼 시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명화는 그 중 후자에 속할 뿐이었다.”(p. 125) 여기에는 조선족=가난이라는 선입견을 답습하지 않는, 이주의 현실적 근거에 대해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인식이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성립시킨다. 지금껏 그다지 순탄치 못했던 삶을 살았던 용대와 명화는 결혼 이후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누린다. “용대에겐 그 한 달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명화는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쉬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가족이나 고용주나 고객을 위한 시간이 아닌 온전히 자기만을 위한 순간을 누렸다.”(p. 132) 이런 순간에 대한 기술은 이주민들의 불행을 상투적으로 반복하는 것에 의해서는 드러낼 수 없었던 또 다른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위암으로 죽은 명화가 용대에게 직접 녹음해서 남긴 중국어 회화 테이프는 순수의 화신도 가련한 존재도 아닌, 용대와의 현실적인 상호 관계를 이루고 있는 명화의 존재를 표상하는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어 수업이 등장하는 또 하나의 텍스트 「중국어 수업」에서 인천 어느 전문대학의 부설 한국어학원 강사로 일하는 수는 그가 가르치는 중국인 학생들(이들은 명목상으로는 수강생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불법취업자나 다름없다)과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음 분기 강사직 재계약 심사가 나흘 뒤로 다가와 있다. 그러니 제적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중국인 학생들만이 아니다.”(p. 66) 여기에서는 공장이라는 전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국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있는 강의실을 다문화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문화 현실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준다. 중국인 며느리와의 소통을 위해 지하철 안에서 화교 가족으로부터 중국어를 배우는 노인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이 맺고 있는 수평적인 관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태국 출신의 이주민여성 사이란(사이룽)이 초점인물로 등장하는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 역시 그러한 대등한 관계를 의식적으로 염두에 두고 씌어진 것 같다. 고향에서 회계사였던 사이란은 재석과 결혼하여 한국으로 이주해온 뒤 다른 이주민 임산부들을 대상으로 산후 도우미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인 남성 재석이 농촌 총각이 아니라 악단 출신이고 지금은 가구업을 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한 설정이다. 처음에는 실연 때문에 사이란과의 결혼을 선택한 재석이 마침내 진심으로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에서의 사이란의 생각이 다음처럼 나타나 있다. “그런데 재석이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 사이란 또한 재석의 깊은 눈에서 갈증에 시달리는 짐승의 애처로운 호소를 보았다는 걸.”(p. 177) 「그곳의 밤, 여기의 노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한국인 남성과 이주민 여성 사이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앞선 시기 다문화주의 소설들이 이주민들의 불행을 부각시켰다면, 이 신진작가들의 소설에서는 그들의 일상과 삶이 담담하게 펼쳐져 있다. 그 속에서 서로 다른 국적인 인물들은 상호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이 소설들이 여성 작가들의 시선에 포착된 다문화의 현실을 담고 있다는 점과도 어느 정도 상관 관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문화주의와 관련된 최근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갈등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성급하게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의 방향으로 이끌고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그들은 그와 같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일상을 견딤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삶에 대해 뚜렷이 인식하게 되고 더욱 긍정적인 의지를 품는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전망을 간접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천막에서」는 결국 W마트와의 계약 파기와 재계약의 와중에서 실제로는 가장 책임이 적은 ‘나’가 회사에서 밀려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결말로 마무리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실질적으로는 그 이기적인 욕망의 진창에서 스스로를 건져내고자 하는 ‘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빗속에서 방수포 조각을 둘러쓴 ‘나’에게 찾아온 환상, 동남아 사이클론 수해의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있는 환상이 ‘나’의 행로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되는 거야”(p. 124)라는 이 소설의 핵심적 전언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읽힌다.
「그곳의 밤, 여기의 노래」는 명화의 죽음 이후 다시 찾아온 용대의 막막한 일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결말을 맺고 있는데, ‘다 듣고 내리지 못한 노래’처럼 안타깝게도 일찍 끝나버린 그들의 관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명화의 목소리를 용대가 따라 하는 ‘대화’를 통해 지속되고 있다. 다음의 대목은 그 ‘중국어 수업’의 용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용대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 여자 나라 말을 외면서, 자신이 차츰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것을.”(p. 143)
「중국어 수업」에서 수의 수강생 중 한 명인 쓰엉은 한국인과 결혼한 나멍의 집을 찾아가 난동을 부리다가 불법체류 신분이 노출되어 결국 본국으로 송환된다. 나멍의 시아버지는 지하철 안에서 화교 가족으로부터 중국어 수업을 받던 바로 그 노인이다. 노인은 추운 날씨에 본국으로 송환되어 가는 쓰엉에게 전해달라면서 수에게 점퍼가 든 쇼핑백을 건넨다. 쇼핑백은 전해지지 못했고 쓰엉은 다시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났지만, 지하철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인과 화교 가족의 중국어 수업은 계속된다.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에서 자신을 배신하고 떠났다가 다시 찾아온 악단의 여인 대신 사이란을 선택한 재석은 그녀에게 결혼기념일 선물을 묻는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그녀의 솔직한 욕망은 말할 것도 없이 재석과의 관계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문화사회의 새로운 현실을 소설 속에 도입하고 있는 최근 소설의 특징들을 성급하고 비현실적인 화해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겹겹이 문제들이 쌓여 있는 현실적 상황 속에서 날카롭기만 한 비판은 대책 없는 허무주의로 귀착될 공산이 크다. 지금의 조건을 고려하면, 소설에서의 그와 같은 관습적 비판은 미디어의 시사적 비판을 재방송하는 것과 실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노동 현장에서는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착취가 사라지지 않고 있고 이런 현실이 결코 외면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결의 전망을 담고 있는 장면들은 화해의 제스추어라기보다 관심과 의지를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실현을 기대하는 바람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아가 그와 같은 바람은 문학의 기능이 현실의 고발과 비판에 한정될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 확대될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4.

다문화주의의 문제는 담론의 층위에서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물론 담론의 차원에서 모색되는 문제 해결의 방향은 실천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예비적 과정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지만, 앎의 문제가 곧바로 실천으로 직접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역시 경험이 말해주는 바이지만, 비윤리적 행위의 대부분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앎의 차원과는 별도로 행위의 차원에서 지속적인 윤리적 훈련이 요구된다.9)
다문화주의가 기업의 이미지를 위한 상업 광고에서 전략적으로 활용되는 상황 속에서, 또 대중들이 드라마나 광고 등을 통해 왜곡된 다문화주의에 전면적으로 노출되는 상황 속에서, 그것의 진정한 해결을 위한 노력들은 좀처럼 표면으로 드러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더욱 요청되는 것은 다문화주의를 본격적으로 주제로 설정한 예술성 높은 기념비적인 한 편의 작품이라기보다, 구성원들이 다문화주의와 관련한 윤리적 태도를 정립하기 위한 다양하고 항상적인 경험과 사유의 계기들일 것이다. 그리고 문학에서 생산된 그와 같은 계기들이 다른 학문과 예술 분야, 그리고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과 운동 영역에서의 문제의식과 교류될 필요도 있다. 다문화주의, 나아가 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공공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바야흐로 텍스트뿐만 아니라 그것이 수용될 수 있는 컨텍스트의 생산에 대해서도 고민할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문장웹진 5월호》




(후주)


1) 2009년 12월 현재 국내 체류 외국인은 모두 1,168,477명으로 늘어났다. 그 가운데 근로자는 565,898명으로 48.4%, 결혼이민자는 125,087명으로 10.7%, 유학생은 80,985명으로 6.9%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2010년 1월 8일 발표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정책통계 참조)

2) 국토연구원 보고서에 의거한 연합뉴스 2009년 9월 3일 보도내용 참조.

3) 한국에서의 국가주도 다문화주의와 시민주도 다문화주의 각각의 성격과 특징,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윤인진, 「국가주도 다문화주의와 시민주도 다문화주의」, 한국사회학회 동북아시대위원회 용역과제 07-7, 2007. 8, pp. 251~291 참조.

4) 『문학동네』 2006년 겨울호 ‘길 위의 인생-이동, 탈출, 유목’ 특집, 『내일을 여는 작가』 2006년 겨울호의 ‘이주노동자와 한국문학’ 특집, 『문학들』 2007년 봄호 ‘아시아 문학, 한국문학 안으로 들어온 아시아’ 특집, 『너머』 2007년 겨울호 ‘한국 속의 외국/외국인’ 특집, 『세계의문학』 2008년 가을호 ‘외국인이란 무엇인가?’ 특집 등 이 시기 여러 문예지에서 다문화주의를 주제로 한 특집을 기획했다.

5) 레비나스와 바디우, 아감벤 등의 논의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전개된 일련의 논쟁을 촉발시킨 출발점 역시 소설 속에 도입되기 시작한 우리 내부의 타자들의 존재였다. 서동욱의 「사도 바울, 메시아, 이방인:익명적 주체 또는 보편주의」(『세계의문학』, 2008. 가을), 김형중의 「사건으로서의 이방인」(『문학들』, 2008. 겨울) 등을 황정아가 비판(「묻혀버린 질문-‘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 『창작과비평』, 2009. 여름)하면서 시작된 이 논쟁은 이후 김형중의 반론(「문학과 정치 2009」, 『문학과사회』, 2009. 가을)과 황정아의 재반론(「이방인, 법, 보편주의에 관한 물음」, 『창작과비평』, 2009. 겨울), 그리고 그에 대한 서동욱의 비판(「예외 상태와 환대에 대한 오해」, 『세계의문학』, 2010. 봄)으로 이어졌다.

6) 가령 지젝의 논의에 기대어 소수자 담론과 다문화주의에 담긴 ‘부드러운 인종주의’에 대한 서동진의 비판(「차이의 윤리라는 몽매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문학판』, 2005. 가을)이나 소외된 자들 사이의 연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그들을 소외시킨 자들에 대한 적대는 제대로 서사화되지 못했다는 서영인의 지적(「외국인 노동자: 우리 안의 타자들, 타자 안의 우리들」, 『문학들』, 2005. 겨울), 이주민에 대한 연민의 태도를 경계하고 있는 오창은의 주장(「연민을 넘어선 윤리」, 『내일을 여는 작가』, 2006. 겨울) 등을 대표적 경우로 들 수 있다.

7) 장성규, 「누가 말할 수 없다 하는가?」, 『작가세계』, 2010. 봄, p. 302.

8) 돌이켜 보면, 2000년대 중반은 소설뿐만 아니라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다문화 현상에 대한 관심이 유행처럼 일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들 문화 영역에 다문화의 현상은 새로운 소재를 제공했지만, 그 경우에도 그 효과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북경 내 사랑」(2004), 「 내 이름은 김삼순」(2005), 「하노이 신부」(2005), 「봄의 왈츠」(2006), 「마녀유희」(2007), 「황금신부」(2007), 「도쿄 여우비」(2008) 등의 드라마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김예린 외, 「인종, 젠더, 계급의 다문화적 역학-TV ‘다문화적 드라마’의 초국적 내러티브와 자본주의 담론을 중심으로」(『언론과 사회』, 2009. 봄) 참조. TV 광고에서의 다문화 현상의 상업적 활용에 대한 비판은 이희은 외, 「TV 광고에 나타난 전략적 다문화주의와 인종주의」(『한국언론정보학보』, 2007. 가을) 참조. 「파이란」(2001),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2003), 「처음 만난 사람들」(2007) 등의 영화에 대한 분석은 황영미, 「한국 속 이방인 순례기」(『너머』, 2007. 겨울), 그리고 「망종」(2006), 「경계」(2007), 「반두비」(2009) 등의 영화에 대한 분석은 김소영, 「다인종, 다문화사회: 얼굴, 클로즈업, 괴물성」(『작가세계』, 2010. 봄) 참조.

9) 프란시스코 바렐라, 『윤리적 노하우』, 유권종?박충식 옮김, 갈무리, 20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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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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