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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 작성일 2010-07-30
  • 조회수 1,832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1 분노의 시절>, <2 잭슨빌의 사람들>, <3 단 하나의 사람>, <4 마스크>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마스크>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젖어들기로 하자.


2


먼저 표제 시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시는 서효인 시를 읽어 가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무거운 가방에 매달려 참고서를 완주하던 당신, 바로 당신, 붉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만국의 소년이여, 분열하세요. 배운 대로, 그렇게.

생뚱한 바람이 거대한 치마를 들어 올려 아이스크림 한 입 베어먹기 전까지 우리의 항전은 끝나지 않아요. 근엄한 얼굴로 인생의 진리를 논하는 정규군의 향연에 더 이상 뒤를 댓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요. 부릉부릉 분열하는 파르티잔들이 습격을 거듭하는 이상한 트랙에서, 소년들이여, 등에 누운 참고서 아래에서 붉고 뜨거운 바람의 계곡을 기억해요. 그리고 궐기해요. 배운 대로, 그렇게, 뿡.


―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중



파르티잔은 지극히 정치적인 단어다. 흔히 알려져 있듯이 우리식으로 빨치산으로 음차되며, 비합법적인 비정규군을 지칭한다. 파르티잔의 조건은 태생적으로 익힌 지정학적 정보를 지닌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 몸으로 체득한 정보의 완전한 우위를 토대로 그들은 뜻밖의 시간, 뜻밖의 장소에 출몰한다. 이 우연성과 지정학적 우위를 토대로 그들은 존재감만으로 두려움을 주는 자들이 된다. 서효인의 시도 그렇다. 뒤통수를 후려맞은 듯 감정을 증폭시키거나 예상밖의 쾌감을 제안한다. 물론 시의 수사는 직절적이고 명령적이다. 이것은 행동 지침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극히 일상화된 삶에 내리는 사소한 행위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대단한 항전이라도 된다는 듯 화자는 심각하게 도발한다. 그 도발에 따른 마지막 “뿡”의 경쾌한 리듬을 따라 시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된다. 정규군이 주도하는 세계, 엄숙한 진리를 설파하는 세상 속 주류를 위한 세상에 섞이지 않겠다는 비주류의 대항마는 이렇게 경쾌하고 도발적인 태도로 진행된다. 진지함이나 진리의 역겨운 설파 따위는 상대하지 않는 무심함은 세계가 흘러가는 흐름을 가르는 분열의 행위로 격상된다.


손바닥이 대걸레가 되는 오늘, 작성된 시나리오에 따라 오른손을 귀 옆에 붙여 들고 발표를 하는 친구 옆에서 깔깔깔, 공부 잘하는 친구 뒤에서 깔깔깔, 온종일 네발짐승처럼 궁둥이를 들고 빛나게 닦은 복도, 장학사가 무심히 지나갈 복도, 우리의 타액이 깔깔깔, 부서지는 아밀라아제, 젖은 눈동자를 그득 채운 물풍선이 깔깔깔, 던져 맞추기에 알맞은 둥그런 표적, 장학사의 완강하고 깔끔한 뒤통수가 깔깔깔깔깔,

― 「장난치기 좋은 날」 중


아이들은 배면에 숨겨진 자본의 논리를 인식하기 이전의 존재다. 다만 찧고 까부는 행위는 세상의 체계에 물들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세계가 규정해 놓은 자신의 위치나 타자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기성의 규율은 결손을 감추기 위해, 자신들이 정리 정돈해 놓은 질서 이면의 불안함을 들키지 않으려는 엄격함으로 무장되어 있으나 미숙함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틈이다. 그 틈 사이로 터져 나오는 깔깔깔이라는 유쾌한 의성어 앞에서 정규군의 무기는 먹히지 않고 무력화되기 십상이다. 
서효인 시는 어찌 보면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게릴라전을 위한 지침서와 다르지 않다. 전복이라는 단어조차 거북하게 들릴 정도로 비정치적인 행위의 정치성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시집이 전하고자 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대로 의미를 종결하고 결론을 내려도 될 것인가? 물론 서효인은 그렇게 낙관적 태도를 보일 만큼 순진하지 않다. 학원 땡땡이치기, 장학사 뒤통수를 가격하는 물풍선 공격 따위의 도발이 기성의 기율을 부수리라는 기대 따윈 애초부터 없을지도 모른다. 시의 도발이 경쾌할수록 묘하게 우리의 아픈 통점을 자극하는 패러독스를 동반하는 것은 그러한 연유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선생은 그들을 향해 벌레 같은 놈들아 기어라 기어, 했지만 그들은 좀 더 섬세하고 세련된 은유를 거친 날벌레였다 천장에 매달리고 기둥을 오르고 더러운 창에 머릴 박았다 …선생이 무차별로 구타하던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 3인치의 틈에서 하이얀 도포 같은 날개가 돋았다 이제 검은 우주의 날렵한 품 안을 날을 수 있는 것이다 선생은 거룩한 음모 속 파리지옥에서 고독한 날들을 보낸다 분노를 되씹으며 한국 놈들은 맞아야 정신 차린다고 이를 부드득 갈며 이를 잡아 죽이며 이글이글한 분노의 원심력을 당구 큐대나 야구방망이나 담양대뿌리 등에 부착해 허공에 휘두른다 그렇게 지나간 시절에 입술을 내민다 날벌레들은 도대체 한 번을 맞지 않고, 우주를 날아다닌다 분노의 시절이 가고 있다


― 「분노의 시절 ― 분노 조절법 중급반」 중


 

<분노 조절법 초, 중, 급>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거리의 싸움꾼」, 「분노의 시절」, 「밀레니엄 송가」 연작들은 악동이 사회의 패배자로 변해 가는 과정에 대한 보고라 할 수 있다. 이전 시에서 날것의 존재였던 아이들은 어떻게 되어 가는가에 대한 일종의 후일담 같은 느낌을 준다. 이들 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이 타자임을 예감하는 아이들의 내면에 패배의식이 어떻게 각인되는지를 펼쳐 보인다. 가령 인용 시에서 아이들은 날벌레로 은유된다. 하필이면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 솟구친 날개는 비상해도 비상할 수 없는 불구성을 암시한다. 날벌레의 효용이란 기껏해야 그 역시 타자에 불과한 선생을 향해 윙윙거리는 응전을 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3


도발적 소년기에 대한 추억담을 거쳐 2장과 3장 사이 서사는 비주류 인생에 완전히 젖어든 청년이 바라본 세계에 대한 목격담으로 흐른다. 교통사고를 당한 다방 레지를 쟁반이라는 사물과 동일한 가치로 바라보는 세계의 무심한 시선(「한없이 시끄러운 쟁반」),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장기 매매 광고를 보며 자신의 몸을 돈의 수치로 환산해 보는 사나이의 모습(「내려가는 사람」), 바코드가 찍힌 회전초밥이 되도록 꼬마에게 질서를 강요하는 녹색어머니회의 모습(「녹색어머니회에서 알림」)에는 무기력이 미만(彌滿)해 있다. 시에서 포착하는 세계의 군상들은 이미 자본이 주도하는 절차와 가치에 뼛속까지 젖어들어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날벌레의 윙윙거림이라는 사소한 도발과 반항은 사라져 흔적도 없다. 시의 페르소나는 비극의 원인을 자기 능력의 불완전성과 존재의 불구성에서 찾는다. 견실한 노동을 할 수 없는 뚱뚱한 몸을 탓할지언정 가난의 근본적 원인을 체제 내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다음 시의 페르소나는 돈키호테처럼 돌진하는 캐릭터를 형상화한다. 인물의 적극성만큼이나 실패의 가능성이 커져 가는 실패와 대응 사이의 간극이 만들어내는 낙차는 비극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싸움의 근본적 방향부터 틀어져 있는 인물이 벌이는 한판 블랙코미디를 살펴보자.


사람의 키가 작아진 왕국에서 태어난 그는
어둠의 성채에서 버섯처럼 차분한 살을 가진 여자와
깊은 구멍을 파기 시작했어
구멍의 끝에서 불꽃을 터뜨리고 최후의 버섯을 캤단다
마리슈퍼, 구멍 뚫린 마리오의 버섯
주인공이 변신하는 동안의 불문율을 지키러
사람들은 천장이 높은 마트로마트로간다간다간다간다
왕국 사람들의 키는 자꾸만 낡아 간단다


하이퍼바이오닉크리스탈에너지
그것을 감싸는 일수 대금과 명함판 대출 광고의
방어력증강붐붐매트릭스파워업
히어로를 향한 마리오의 변신은
사라진 단골과 마트의 대물을 넘고 넘어
날짜 지난 우유처럼 느리고 치명적이지
속에 품은 독버섯 심장을 꺼내 던지면
오래된 슬픔으로 연금한 마법 수류탄이
분노의 파편을 퍼킹, 퍼킹, 퍽, 퍽, 퍽
사람들을 구할 테니 두고 봐라

                        ― 「슈퍼 마氏」 중


이 시는 투쟁에 대한 것이다. 동네의 작은 슈퍼가 거대 자본의 대형마트를 상대로 벌이는 한판 결전에 대한 투지로 시는 가득 차 있다. 어린 시절 지하로 파고들어가 왕국을 구해 냈던 슈퍼마리오 게임의 캐릭터처럼 왕국 사람들의 삶을 비루하게 만드는 마트라는 적을 상대로 우리의 주인공 슈퍼 마씨는 결전의 힘을 기른다. 하이퍼바이오닉크리스탈에너지를 득템하며 능력을 확장시킨다. 그러나 그 득템의 실체란 일수와 대출금이다. 그의 가난은 투쟁으로 인해 더욱 심화될 것이다. 슈퍼마리오와 슈퍼 마씨는 글자 하나의 차이에 불구하지만 슈퍼마리오가 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주인공 캐릭터는 모른다. 단조로운 의지적 문장들, 퍼킹 퍼킹 퍽 퍽 퍽과 같은 파열음의 폭발이 몰입의 공허를 극대화한다.
이 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캐릭터가 몰입하고 있는 환상 그 자체다. 환상은 사회적 장이 구축될 때 중심이 되는 적대관계, 근본적인 분열을 은폐하는 상상적인 시나리오가 된다고 지젝이 말하지 않았는가. 서효인의 시는 환상에 사로잡힌 우리 인식이 기만이며 착각이라는 사실을 꼬집는다.


높은 천장과 깨끗한 조도를 가진 우주.
건담은 평화를 사랑한다. 거대한 서사의 시작은 늘 명징한 평화.


휴먼은 우주의 항로를 돈다. 조화롭게 진열된 별들을 우주선에 담는다. 무수한 별들의 쓰임을 모두 알 수는 없는 일. 그들은 혼돈을 즐긴다. 휴먼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숱한 은하들의 노선이 입맛대로 흐트러진다. 별들의 질서를 바로잡는 건담.

광활하고 신비한 우주에서 봉지에 별을 담는 정도는 스스로 해야 할 일. 썩지 않는 물질이 허공을 떠돈다. 봉지가 무겁다. 건담은 거대한 평화에 눌려 종아리가 붓고 발바닥이 딱딱하다. 어쨌든,


우주의 서사에서
건담은 늘
서 있으니까.
 

       ― 「일어서, 건담」 중


명징한 평화를 칭송하는 어조로 시는 어린 시절 우주를 지키는 최대의 영웅이었던 건담 서사와 쇼핑몰 마트의 직원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다. 쾌적한 삶을 보장해 주는 거대한 쇼핑센터의 안락한 기쁨에 젖어든 사람들의 시선에 비치는 건담은 그야말로 평화를 위한 영웅이다. 기껏해야 그들이 하는 일이야 흐트러진 과자를 재진열하고, 바코드를 긁어 계산을 효율화하는 일이지만 그야말로 가장 시급하고 필요한 일이다.
건담과 휴먼의 기계적 호칭, 슈퍼 마씨의 투쟁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아로새겨진 자발적 복종, 사회의 구조에 길들여진 습성을 은유한다. 기계적 몰입의 행위를 순전한 기쁨으로 알며, 고통의 원인을 사회적 성취에 도달하지 못하는 부족한 능력에서 찾는 것은 사회의 요구에 따라 재구조화된 인식, 현재의 삶의 방식을 따르며 성취하는 것이 진리이며 기쁨이라는 환상에 절어 있는 현대 우리의 자화상이다.


4


바깥의 구조가 내부의 인식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사고의 습성은 마치 안과 밖, 처음과 끝이 모호한 뫼비우스의 띠, 클라인 씨의 병처럼 모호하다. 세계의 비극은 시작과 끝이 맞물린 이야기로 재편되고, 끝이 끝이 아닌 것, 끝없이 회귀되는 비극과 관계된다. 세상의 모든 서사는 시작과 끝이 모호하고, 원인과 결과가 맞물려 있으며, 적과 아군의 구별이 없다.
이제 서효인 시집의 서사는 종국에 도달한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최후의 반전, 이것이 과연 반전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은 할 수 없으나 아무튼 가능성의 트임을 다시 한 번 서효인의 시는 열어 놓는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부정과 부정의 비속어들이 내 근육의 전부다 일그러진 얼굴을 마스크 속에 감추고 각본에 따라 반칙을 일삼는다 손가락으로 눈알을 찌른다 철제 의자를 등뒤에 꽂는다 나의 악행이 극렬해질수록 관객들은 호불호를 판별할 수 없는 환호성을 뱉는다 시원하게 세상에 나온 가래가 되어 점액질의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누가 악역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결국 나는 헐크로 변한 호건의 밑구멍에 깔려 카운터를 맞이할 뿐이다 헷갈리는 사이에 원 투 쓰리, 그는 손목을 뱅뱅 돌리며 자신의 귀에 환호를 담고 있다 순간, 내 안에서 모든 약물이 춤을 춘다 곧 사인이 없는 돌발적 상황이 생길 것이다


― 「마스크 1」 중



마스크 X는 처음부터 지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는 존재다. 악행을 일삼다 헐크 호건에 의해 제압당하는 룰은 기성의 규율이며, 세계의 확고부동한 법칙이다. 마스크 X의 소임은 마치 세계 내에서 실패자를 담당하는 소시민의 역할과 상동을 이룬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헐크의 중요 부위를 물어뜯는 돌발행위는 본인도 놀라게 한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온 반응이다. 이것은 기성의 규율을 위반하는 반칙이며 세계를 놀라게 한 위반의 행위다. 이때의 위반은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위협적 가능성을 지닌다. 그것은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과 동궤에서 경쾌한 트임의 놀라운 순간으로 비약될 가능성을 동반한다. 예측 가능한 행위로부터의 일탈은 분열을 가져오며, 끝없는 분열의 행위는 세계 내에 고정되는 것을 벗어날 수 있다. 이처럼 서효인의 시는 일탈과 돌발성을 세계가 부여한 소외, 타자의식을 벗어 버릴 유일한 가능성으로 감지한다. 하지만 사회적 제약과 주체가 정해 놓은 세계 내 역할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녹록지 않다. 「마스크 2」는 이 분열이 마스크라는 익명성을 뒤집어쓸 때만 나타나는 이중성을 제시한다.


마스크 X를 쓰면 그는 마스크 X
반칙과 이빨에 대한 충성으로 아이들은 얼굴을 감추었다
인형 안은 컴컴하고 그의 얼굴은 점점 없어지고 숨이
카운트를 셌다 원, 투, 쓰리 반칙처럼 일정치 않았다

아저씬 대체 누구

                                    ― 「마스크 2」


마지막 아이들의 질문처럼 서효인의 시는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영화 <반칙왕>의 마지막처럼 가면을 벗어던지고 세상 속에 자신의 얼굴을 보일 것인가?, 가면 속으로 숨어들어 가면마저 또 다른 군중들의 유희로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인가?
누군가의 첫 시집을 읽는 일은 새로운 탄생을 지켜보는 것처럼 설레는 일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인격으로 발산되기 때문이다. 한 편 한 편으로 만났던 서효인의 분신들은 발랄했지만, 이들이 하나로 응집된 서효인의 시집은 생각보다 견고하고 탄탄한 세계를 구현하고 있었다. 확고한 시선을 가진 젊은 시인의 응전이 더욱 더 감각적으로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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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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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불타는 시편들

불타는 시편들 강경보 1 첫 시집을 묶기 전부터 내 머릿속을 꽉 채우던 생각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하루 빨리 묶어서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냥 불태워 버리면 될 것을 뭣하러 묶어서 버리느냐고 힐난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대단히 궁하여서 ‘불 지르기보다 묶어서 버리는 것이 더 쉽다’며 웃곤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길었던 습작기간 탓에 정말 불태웠던 많은 시들이 있었다. 젊었던 어느 날 동인 모임에 시무룩한 채로 나간 뒤(물론 빈손으로) ‘다 불태웠어’라고 했더니 또 반응이 두 가지였다. 그 아까운 것들을 보기 싫으면 나중에 찬찬히 들여다보면 되지 버릴 건 뭐냐는 반응과, 정말 불을 싸질렀는지 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돌아온 힐난이었다. ‘뭔 불씩이나..... 그냥 쓰레기통에 쑤셔 넣으면 될 걸.....’. 그 두 가지 반응에 대하여 생각해 본적이 있다. 첫 번째 반응은 내가 실제로 불을 질렀는지 보다는 그 동안의 작품을 정말로 버렸는가에 대한 사실 확인과 그에 따른 아쉬움의 토로가 대부분이었다. 두 번째 반응은, 글쎄 뭐랄까 좀 미묘하다고 해야겠다. 두 가지 반응에서는 확실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다. 공통점은 당연히 그들 모두 시에 대한 갈급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고, 차이점은 두 번째 반응을 보인 사람들 대다수가 평소 씨니컬한 성격이나 말투를 보여 오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두 부류가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았을 거라는 오해는 하지 말자. 실제에 있어서는 천차만별의 직업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꼭 그만큼의 삶을 살며 고민하고 외로워하고 상처받거나 위로받기도 하였으니.말하자면, 불타버린 시편들은 시를 쓰는 누구에게든지 아픈 상처이거나 위로였다는 것이다. 시를 버릴 만큼의 좌절감이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글쓰기는 끝났을 터이고, 불질러 버리든 쓰레기통에 쑤셔 넣든 이미 버려본 자들의 냉소는 짧지만 깊은 여운이 있어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그래, 너도 그렇구나, 나도 그렇지. 잘 쓰지도 못하면서 생의 반절을 붙잡고 있자니 때론 남우세스럽다. 그래서 버리는 거다. 버리기는 하되 좀 잘 버리고 싶다. 이것이 내 첫 시집에 주는 변명 아닌 변명이다. 2 드라이아이스 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 ‘불타는 얼음’이라고 하면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사실 드라이아이스는 형체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빙글 말리며 허공으로 사라지는 하얀 연기가 그 형체의 본질이라고 해야 할까?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없으면서 있는 말과 같은 존재다. 드라이아이스를 물속에 집어넣으면 나는 아주 즉각적으로 착각에 빠진다. 아, 말(言)이 불타는구나! 저 흐물흐물한 물뼉다귀를 끓이고 있구나! 그러나 아다시피 그것은 물이 끓는 것이 아니라 절멸을 꿈꾸는 드라이아이스의 맹렬한 산화이다. 허공으로의 사라짐. 그런데 거기서 나는 아름다움을 본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잠깐. 단 한 번의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지고

  • wikisoft
  • 2010-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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