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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post)의 운명·2

  • 작성일 2011-03-01
  • 조회수 1,483

 

[기획특집] 2011년 경향진단·

 

 

포스트(post)의 운명?2

 

- 이은규?김상혁?유희경?심지아의 시들

 

고봉준

 

 

 

 

 

1. ‘이후(post)’를 위한 모노그라피(monography) 1)

 

문학사를 10년 단위로 분절하는 비평적 관행은 하나의 문학적 아비투스(habitus)다. 인위적이면서도 부당한 이 단절은 ‘관행’이나 ‘습관’이라는 단어의 느낌처럼 이제 기원의 인위성을 탈각하고 자연적이고 발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10년 단위의 문학사는 왜곡된 단절을 자연스러운 결과로 사고하게 만든다. 관행이 되어버린 인위성은 더 이상 인위적인 것으로 지각되지 않고, 그것이 자연적인 것으로 사고되는 한 우리는 10년 단위의 분절이라는 관행을 비판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90년대와 2000년대 문학의 단절은 그런 점에서 다분히 외부적인 강제의 결과인데, 최근 이 단절의 의지는 한층 가속화되어 ‘미래파’ 이후의 시단을 조망하려는 비평적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래파’라는 비평적 수사는 2000년대 시의 특이성(singularity), 90년대의 시와 뉴밀레니엄 시대의 시를 분할하는 경계로 인식되었고, 이러한 감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미래파’ 논쟁이 잦아든 2008년 이후에 등단한 시인들의 시는 소위 ‘미래파’에 속하는 시인들의 그것과도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차이는 ‘미래파 이후’를 조망해야 한다는 또 다른 과제를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논쟁의 과정에서 ‘미래파’의 목록이 급증하여 ‘미래파’와 ‘미래파 이후’를 양단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되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등단한 시인들의 시가 형식적인 실험과 파괴보다는 자신의 문학적 다이어그램을 완성하는 것에 충실하고, 상징 질서에 대한 공격성을 한층 내면화하는 방향으로 드러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적 단절이란 대개 역사적 시간의 문턱이 아니라 개별 시인들 간의 차이에 대한 비평적 명명이며, 그런 까닭에 ‘사건’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접근되기보다는 공통적인 시간의 스펙트럼이라는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 특히 이것은 ‘미래파 이후’의 시단을 조망할 때에 유념해야 할 태도인데, 왜냐하면 ‘미래파 이후’의 시인들의 시가 기존의 상황 속에서 현시되지 않았던 공백의 드러남이라는 사건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인지, 다시 말해서 기존 시스템(상황이나 질서)과 무관하거나, 심지어 그것에 어떤 중단과 단절을 도입하는 상태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최근 등단한 시인들의 시세계가 ‘미래파 이후’라는 방식으로 논의되는 것에도 일정한 딜레마가 있는 셈이다. ‘미래파 이후’에서 ‘~이후’는 ‘미래파’라는 기표로 인해 단순한 시간적 선후관계만 의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호명(interpellation)에는 신인 시인들의 시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려는 비평적 경쟁이 은폐되어 있으며, 이 글 또한 이러한 해석적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글은 ‘경쟁’의 시각에서 작성된 한 편의 모노그라피(monography)다.

 

 

2. 동경과 오독 : 이은규의 시

 

‘서정’이라는 단어가 낡은 구호처럼 퇴색해 버린 시대에 서정의 운명을 부여잡고 있는 시인이 있다. 이은규가 그렇다. 그녀의 시에서는 전위(前衛)라는 포탄을 온몸으로 견디는 치욕의 힘이 느껴진다. 지금, ‘서정’은 유통기한을 한참 넘겨버린 낭만주의의 잔재이거나, 기껏해야 근대적인 주체상의 내면에 기대어 세계를 자의적으로 재단하려는 동일시의 폭력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서정’을 시인 개인의 내면적 주관성과 동일시할 때, 세계와 사물을 주체화하는 동일화의 작용으로 이해할 때, ‘서정’은 언어의 본질인 폭력성의 분유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서정’이 특정한 개인의 느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통념은 낡은 것이다. 예술적 경험은,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한 사람의 경험인 동시에 다수의 경험이며, ‘서정’의 힘은 오직 이 다수의 맥락에서만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서정시의 핵심은 독백이라는 발화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서정적 주체의 태도, 즉 평가에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서정시는 유의미한 것, 인간의 이상과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서정’이 주관성과 동일시되고 세계에 대한 동일화라는 인식적 폭력처럼 느껴지는 것은, ‘서정’이 서정적 자아가 지닌 가치와 이상으로 일종의 소우주를 형상화하려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며, 이 가치의 동일성이 언어가 지닌 시적인 자질의 독특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서정’이라는 단어는 비평적 시선의 시차(視差)를 떠오르게 한다. 비평가는 두 개의 표정을 소유하고 있으며, 실제적인 비평 행위의 대부분은 그 표정들의 간극 사이에서 발화된다. 비평가는 역사가의 포즈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노력하다가도 종종 미학주의의 유혹에 무릎을 꿇는다. 비평가들은 개별 시인들의 시적 성취와 그것의 문학사적 의미를 동시에 파악하려고 노력하는데, 개별 작품의 시적 성취에 집중하는 비평은 역사적인 맥락을 간과하기 쉽고, 역사적인 맥락만 고집할 때 비평은 개별 작품의 성취를 비가시의 차원으로 몰아가기 쉽다. 오늘날 많은 비평가가 공유하고 있는 ‘전위’라는 비평적 수사는 미학주의에 대한 굴복을 역사주의의 자세라고 오해하는 데서 비롯되는 측면이 크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평적 평가가 시대적인 판단의 저편에 존재하는 서정시의 다양한 양상을 무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것인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오늘날 서정에 대한 적실한 평가는 비평이 역사가의 시선을 거두고 오직 미학주의, 즉 한 시인의 시적 성취나 개별 작품들의 미학적 성과에 집중할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오해되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마르크스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두고 말했듯이, 진정한 문제는 하나의 문학적 형식을 그것의 발생적 기원과 연결시켜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고대 그리스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역사적 맥락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왜 역사적 기원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에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는가를 해명하는 일이다. 서정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서정시가 낭만주의와 맺는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왜 낭만주의 이후 오늘날까지 서정시가 대중에게 읽히고 널리 창작되고 있는가 해명하는 일일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비평가는 역사가의 시선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서정’의 문제에 관한 한, 이은규의 시편들은 ‘갱신’이라는 이름에 충분한 대답을 들려 주고 있다. 이은규의 시에는 공통적으로 ‘감각’ 너머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깃들어 있다. 그의 등단작에서 이것은 바람을 동경하는 유목의 피로 언어화되고 있는데, 사물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존을 위협당하는 모든 것과, 시간의 심연인 과거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들에 도달하려는 시적인 의지야말로 이 그리움의 정체일 것이다. 그것이 ‘감각’의 저편인 까닭은 그리움의 대상이 비가시적이며, 심지어 언어로 재현(포착)할 수 없는 부재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부재는 이은규의 서정이 부재하는 대상으로 재현전화하고, 재현할 수 없는 것을 비재현적인 방식으로 가시화하는 언어에서 기원함을 보여준다. 등단작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에서 시인은 ‘형상’을 거부하는 ‘바람’을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이라고 명명한다. 일정한 형상을 갖지 않는 바람의 유목성은 이후의 시편들에서 ‘구름’과 ‘별’ 같은 자연적 사물들로 변주되고 있는데, 그 모든 유목의 형식을 동경과 그리움의 정서와 연결시키는 것이 이은규 시의 특징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떠돎의 유목성은 그녀의 시에서 상반되는 효과를 낳는데, 우선 “피가 흐른다는 것은/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처럼 세계를 유동성의 형식으로 인식하는 특유의 인식론적 효과를 끌어들이면서도, 동시에 동경과 그리움의 정서를 한층 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떠가는 구름

 

오늘의 문장은 흐르는 정물들에 관한 이야기

 

…(중략)…

 

두 손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떠가는 구름을 가둬 본다

 

보이다와 안 보이다 사이를 흐르는 정물

 

다시 기다릴 수 없는 것들만 기다리게 될까



- 이은규, 「구름의 프레임」 부분 -

 

 

평균 수명과 사라지는 시점은 일치하지 않는다

 

한 구름이 다른 구름이 되는 동안

 

보이는 그가 보이지 않는 그가 되는 시간

 



- 이은규, 「구름을 데리고 집으로 가기」 부분 -

 

시인이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쪽으로 흐르고 그쪽으로 떠돈다”라고 말할 때, ‘동경’이라는 단어는 시인의 정서적 이끌림을 낭만주의적 그리움으로 환치한 기호를 의미한다. 이러한 정서적 이끌림과 ‘감각’ 너머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는 「구름의 프레임」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름을 집으로 데리고 가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가 되는 시간”으로 각각 변주된다. 전자에서 ‘구름’은 ‘흐르는 정물’의 유동성, 즉 “보이다와 안 보이다 사이를 흐르는 정물”이고, 후자에서 ‘구름’은 “한 구름이 다른 구름이 되는 동안”처럼 수명과 사라지는 시점이 일치하지 않는 시차성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이은규의 시가 이러한 시차성을 고스란히 긍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현존은 가시적인 세계, 감각의 차원에서 머물고 있으나, 그의 지향은 그 너머의 세계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은규의 시에서 ‘그리움’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거리에서 발생한다. “오고 있는 시간들의 이본인 미병”(「미병(未病)」)은, 그러므로 극복할 수 없는 이 그리움의 병리학적 표현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은규의 시에서 이 비가시적인 세계는, ‘경전’이라는 종교적 언표가 환기하는 분위기와 달리, 초월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본질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 지나간 시간과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이전’의 세계에 해당한다. 이 세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구름의 프레임」에서는 “다시 기다릴 수 없는 것들만 기다리게 될까”라는 의문으로, 「구름을 데리고 집으로 가기」에서는 “해거름 후 일 분이라도 더, 이리저리 흩어지는 구름을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고 하지”라는 간접화법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저 별이 보입니까

 

저기 붉은 별 말입니까

 

 

 

조용한 물음과 되물음의

 

시차 아래

 

점점 수축되어 핵으로만 반짝이던

 

한 점 별이 하얗게 사라지는 중이다

 

 

 

어둠을 찢느라 지쳐버린 별빛은

 

우리의 눈꺼풀 위로

 

불시착한 소식들

 

뒤늦게 도착한 전언처럼

 

우리는 별의 지금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 뿐

 



- 이은규, 「별들의 시차」 부분 -

 

“인간은 원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상상한다.” 시인이 인용하고 있는 이 구절은 그리스의 정치가 데모스테네스의 말이다. ‘상상’이란 사실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현실을 자기합리화의 방향으로 전유하려는 심리 기제의 일종인데, 시인은 이 ‘상상’의 견고한 동일시를 헤집고 ‘시차’라는 존재론적 시간의 개념을 외삽한다. 일반적으로 ‘별’과 관련하여 쓰이는 시차(parallax) 개념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천체의 위치가 다르게 경험되는 현상을 의미하는 천문학 용어다. 천문학자와 수학자들은 시차를 발생시키는 두 시선의 각도 차를 이용하여 멀리 떨어진 천체들의 거리를 측정한다. 이러한 자연과학적 ‘종합’에의 의지는 상이한 시선의 차이에 공통의 지반을 제공하고, 그 지반 위에서 차이를 화해시키려는 동일성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진리 담론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은 시차(Parallax)라는 천문학적 용어를 시차(視差)가 아니라 시차(時差)로 전유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공간의 문제가 존재론적 시간의 문제로 재전유되고 있는 것이 시인이 굳이 ‘별’이라는 천문학의 대상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시차’라는 단어에 한자(漢字)를 병기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시에서 ‘시차’는 우선, “저 별이 보입니까”라는 질문과 “저기 붉은 별 말입니까”라는 응답, 즉 ‘물음과 되물음’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에서 이러한 시차 개념은 “우리는 별의 지금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 뿐”처럼 빛의 속도로 우리의 시선을 향해 날아드는 별빛이 실제로는 빛의 현존이 아니라 과거의 한순간을 마주하고 있음을 환기하기 위한 서곡에 불과하다. 시인은 별의 현재와 과거, 현존과 소멸 사이의 시차에서 “이력을 지우면서 완성되”는 죽음을 본다.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현존과 소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사라지는 별들의 꼬리가 증명하듯이 시차에 담겨 있는 ‘질문’을 되새기는 일일 것이다. “불가능하게 무거운 저 별, 별들”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그러므로 현존과 소멸이라는 존재론적 사고보다 이력을 지우면서 완성되는 별의 죽음에서 삶의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며, 바로 이 순간 ‘별’은 또 하나의 흐르는 정물이 되어 비가시적 세계로 시인의 사유를 끌어들이게 된다.

 

 

3. 기억의 시차(視差) : 김상혁의 시

 

정신분석의 진실 가운데 하나는 물리적 시간의 선후관계가 무의식의 기원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결과물이다. 이러한 무의식의 가역적 시간법칙은 한 시인의 등단작을 문학적 기원과 등치할 수 없다는 문학의 법칙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김상혁은 등단 이후 줄곧 ‘소년’ 주체의 유년 기억과 성장과정을 중요한 시적 대상으로 삼아 왔는데, 이러한 시적 여정은 표면적으로 유년의 기억과 가족사라는 나르시즘적 세계를 첫 시집의 중핵으로 설정하는 기존의 문학적 관습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가족사 중심의 나르시즘적 세계는 이미 ‘미래파’의 첫 시집을 통해 극복되었다는 점에서 김상혁의 시세계는 어느 정도 퇴행적인 요소를 내장하고 있다. 특히 등단 수상 소감에서 그가 밝힌 가족의 이력은 그의 시를 나르시즘적 세계에 대한 언어적 재현이라는 관점에서, 즉 성장과정에서 시인이 체험한 결핍의 경험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시적 특징은 결핍의 경험을 언어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수반하는 왜곡현상, 상이한 기억과 시간경험들의 공모가 생산하는 시차(Parallax)의 효과를 시화(詩化)하는 것이다.

이은규의 시에서 ‘시차’가 비동시성을 의미하는 시간적 장치였다면, 김상혁의 시에서 ‘시차’는 회상의 방식을 통해 재현(re-presentation)되는 기억과, 기억의 왜곡현상을 더욱 풍요로운 문학적 장치로 만드는 시점들의 공모관계다. 가령 기억이 과거의 특정한 시간을 왜곡 없이 재현하려는 의식의 산물이라면 - 보르헤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기억의 왕 푸네스와 같은 예외가 존재할 수 있지만 - ‘재현되는 기억’과 ‘재현된 기억’ 사이에는 왜곡이라는 일탈적 관계만 가능하다. 그러나 회상-기억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아니 기억하는 ‘나’와 그 기억에 참여하는 또 다른 인물의 기억이 비종합적 방식으로 합쳐지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나’와 ‘그들’의 시선이 평행적이거나 시차적 관계를 구성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 경우 기억-회상에 참여하는 ‘나’는 단순하게 말해 주체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등단작에서 “내가 죽도록 훔쳐보고 싶은 건 바로 나예요 자기 표정은 자신에게 가장 은밀해요”(「정체」)라고 말할 때, ‘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로서 이 기억이라는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김상혁의 시적 대상은 (가족처럼 보이지만) 가족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나’다.

 

 

내가 죽도록 훔쳐보고 싶은 건 바로 나예요 자기 표정은 자신에게 가장 은밀해요 원치 않는 시점부터 나는 순차적으로 홀홀히 눌러붙어 있네요 아버지가 만삭 어머니 배를 차고 떠났을 때 난 그녀 뱃속에서 나도 모를 표정을 나도 몰래 지었을 거예요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 코를 닮은 내 매부리코를 매일 들어 올려 돼지코를 만들 때도 그러다가 후레자식은 어쩔 수 없다며 왼손으로 내 머릴 후려칠 때도 나는 징그럽게 투명한 표정을 지었을 거예요 여자에게 술을 먹이고 나를 그녀 안으로 들이밀었을 때도 다음 날 그 왼손잡이 여자에게 뺨을 맞았을 때도 내가 궁금해한 건 그 순간을 겪는 나의 표정이었어요 은밀하고 신비해요 모든 나를 아무리 잘게 잘라도 단면마다 다른 표정이 보일 테니 나를 훔쳐볼 수만 있다면 눈이 먼 피핑 톰(Peeping Tom)이 소돔 기둥이 돼도 좋아요 거기, 거울을 들이밀지 마세요 표정은 보려는 순간 간섭이 생겨요 맑게 훔쳐보지 않는 한

 



- 김상혁, 「정체」 전문 -

 

김상혁의 등단작 「이사」에는 “집을 바꾸고 학교를 아빠를 바꾸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것임을 고백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가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가족 사이에 발생하는 다양한 결핍, 즉 ‘일’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다. “다락방에는 가족들이 꺼리는 사진과 내가 있습니다”. 인용시 「정체」는 이러한 ‘나’를 시각의 대상으로 설정하려는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욕망은 한 가지 심각한 문제로 인해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는데, ‘나’가 ‘피핑 톰’처럼 응시되는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시각의 주체이면서 대상이고, 엄밀하게 말하면 “자기 표정은 자신에게 가장 은밀해요”처럼 주체의 시선으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 대상이다. ‘나’를 순전한 시선의 대상으로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나’가 시선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나’의 살아 있는 표정, 그러니까 ‘나’는 훔쳐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는 있으나, 동시에 그 표정을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일찍이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는 재현하는 손을 재현함으로써 대상과 주체의 동시성을 구현한 바 있지만, 김상혁의 시에서 ‘나’의 시선은 그렇게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빛을 비추는 순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오직 이론적으로만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물리적 입자들과 같다. 이 입자들의 불가해한 존재방식이 김상혁의 시에서 ‘표정’인 것이다. “거기, 거울을 들이밀지 마세요 표정은 보려는 순간 간섭이 생겨요 맑게 훔쳐보지 않는 한”. 이 표정을 포착하기 위해 ‘거울’이라는 타자의 시선을 동원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 ‘나’의 표정은 거울에 의해 간섭을 받기 마련이고, 그 순간 ‘나’의 표정은 ‘주체-나’가 훔쳐보고 싶었던 ‘대상-나’의 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상혁의 시에서는 회상-기억이 타자의 기억을 끌어들이고 있듯이, 표정을 읽으려는 시선 또한 불가피하게 또 다른 나, 즉 ‘주체-나’와는 다른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하고 있다. 김상혁의 시에서 이 지점의 존재는 근본적으로 그의 시가 타자의 출몰을 요구하고 있으며, 타자를 향해 개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4. 타자성의 시적 현현(顯現) : 유희경의 시

 

어떤 시편들은 전체보다도 부분이 빛을 발하고, 또 어떤 시편들은 전체적인 유기적 조화보다 대상을 재조립하는 감각이 한층 극적이다. 부분의 강렬함이 전체의 안정감을 초과할 때, 시는 더 이상 짧은 산문으로 오해될 수 없다. 등단작과 등단 직후에 발표된 유희경의 시편들은 이 부분의 강렬함에 충실한 느낌인데, 가령 등단작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는 매우 일상적인 사건을 재조립하는 감각의 섬세함,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이 난다”처럼 스스로를 새로운 주체로 가공하려는 시인의 태도가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티셔츠에 목을 넣는 일상적 행위에서 시인은 ‘안’이라는 새롭고 낯선 세계를 발견하며, 이 발견이 “나는 당신을 모른다”라는 직설적인 부정문을 만들어낸다. 이 낯선 세계와의 조우, 그것은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라는 진술이 환기하듯이 스스로를 타자로 경험하는 순간인데, 유희경의 시는 언어에 대한 자의식에 근거하여 이러한 경험의 순간들을 적극적으로 시화(詩化)하고 있는 듯하다. 김상혁의 시편들이 ‘나’를 주체와 대상의 이중체로 설정하고 있다면, 유희경의 시편들에서 ‘나’는 다분히 타자성의 존재로 가시화되고 있다.

 

 

창가에 서 있던 사람은 K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물러서거나 시선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창 밖에는 바람이 앞에서 뒤로, 쓰러질 것처럼 불고 있었다.

 

 

쏟아지는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나는 백발의 K가 부러웠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 시간이 아득했기 때문이다. 지난 햇빛이 타오른다. 불 타버린 것은 두 번 다시 나타날 수 없다. 그래서 K의 회색 눈빛을 훔치고 싶어 했다고 치자. 나는 그 때를 떠올릴 수 없고, 상상해 내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건 창문 같은 것이고 잘 닦아 놓은 하얀 창틀 같은 것이다.

 

 

그 때는 갈색 종이봉투의 질감과 구겨지는 소리. 그 안에서 풍겨 나오던 싸구려 음식의 냄새. 나는 그 종이봉투를 들고, 가는눈을 뜨고, 어둠이 짙어 오고, 탄내가 날 것 같은 자정이. 호객꾼들 거리를 뒤덮고 간판들이 가장 환해지는 그 때. K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든다.

 

 

K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고 그건 내가 K를 생각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반응의 바깥에 서 있는 것. 나를 데려간, 가장 가벼운 무게의, 자리. 그는 수천의 나비가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날개다. 날개들 쌓여 달아오르는 열이다. K가 사라진 자리에 온도만 남아, 타오른다. 그 때 불 타버린 K는 다시, 그 자리에 설 수 없이. 흔들리는 K는 K가 아닌 바로 그 K가

 



- 유희경, 「K」전문 -

 

유희경의 「K」는 연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 연극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은 ‘K’와 K를 지켜보는 ‘나’, 두 사람이다. 시의 전편에는 K에 관한 정보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데, 우선 그는 창가에 서 있으며, 머리는 백발이고, 궁극적으로 그는 “수천의 나비가 만들어낸 사람”이다. ‘창문’이라는 시적 장치를 고려하지 않아도 이 시에서 K가 ‘나’의 내면을 분유하고 있는 존재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나’와 ‘K’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우선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물러서거나 피할 기색이 없으며, 도리어 ‘나’가 백발의 K를 부러워한다. 더군다나 시에서 ‘나’는 모종의 고통을 앓고 있는데, 그것은 “K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든다”라는 진술처럼 ‘나’가 ‘K’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유래한다. 유희경의 시편들은 어렴풋하게나마 ‘시간’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데, 이 시에서 ‘시간’은 “백발의 K”처럼 미래적인 것으로 등장한다. 김상혁의 시에서 시간이 과거-기억과 연관되는 반면, 유희경의 시에서 시간은 다분히 미래적이다. 그러므로 만일 “백발의 K”가 나의 내면을 분유하고 있는 미래적 존재라면, K를 바라보는 ‘나’는 현재적 존재로서의 젊은이일 것이다. 이 미래와 현재 사이의 시간적 단절이 「K」에서는 감각적인 거리로 진술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자취를 좇는 ‘나’의 감각은 “K가 사라진 자리에 온도만 남아, 타오른다”처럼 항상 뒤늦은 것이 되고 만다. 4연에서 시인은 이러한 존재론적 거리감을 장자의 호접몽에 비유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이 시의 결말은 자신의 타자성이라 할 수 있는 K를 동일화하지 않고 “그 때 불 타버린 K는 다시, 그 자리에 설 수 없이. 흔들리는 K는 K가 아닌 바로 그 K가”처럼 ‘나’와 ‘K’를 평행상태로 놓아 둔다. 유희경 시의 연극적 특징은 「악수-어느 여행 중의 대화」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두 사람의 부조리한 대화로 이어지는 이 시에서 ‘악수’라는 표제는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시적 기호지만, 이 시는 ‘대화’라는 부제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침묵’에 관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마치 대사와 지문이 반복되는 느낌으로 배열된 「악수」에서 시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대사가 아니라 지문이다. 이 지문들은 ‘침묵’이라는 대화의 부재 상태를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소리가 없는 침묵 상태는 역설적으로 어떤 소리를 듣게 만드는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침묵은 단순하게 소리의 부재 상태가 아니라 ‘대화’라는 발성 행위 속에서는 포착할 수 없었던 소리(아닌 소리)를 감각할 수 있는 경계의 안쪽으로 가져오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 지나가는 듯한 소리 열쇠를 흔들고 걸음을 끌면서”이고, “그늘이 빛 사이로 내려앉는 소리”이며, “무언가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 마치 무거운 가방처럼”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대화’는 대화 행위에 참여한 사람들만 지각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고, ‘침묵’이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소리를 감각할 수 없게 만드는 관계로 형상화되고 있다.

 

 

5. 불협화의 현대성 : 심지아의 시

 

심지아의 시는 전형적인 ‘불협화음’의 언어다. “오, 나는 편애합니다. 더 많이 좋아하거나 더 많이 싫어하지 않고는 글쎄요 하루는 너무 길어요.”(「딱딱함과 부드러움」) ‘편애’는 그녀가 아는 유일한 사랑일 것이다. ‘공정’을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고, 그녀의 시는 어둠, 그 은밀한 죽음의 시간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그녀의 악취미는 포스트 미래파 가운데 그녀를 ‘미래파’에 가장 근접한 시인의 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근거가 되는데, 질서로부터 이탈하는 파열음이 돋보이는 그녀의 시편들은, 그러나 미래파의 시와 달리 매우 안정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불협화’는, 한 비평가의 말처럼, 불가해함과 매혹의 만남이다. 이 불협화는 역사가의 시선으로 보면 자유를 위한 탈선의 현대적 몸짓이며, 미학주의자의 시선으로 보면 “시란 이해되지 않고서도 전달될 수 있다”라는 시적 모호함의 고의성을 생산하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지구에 태어나 얻게 된 건 현기증이에요 수달 씨 둥근 이마로 포물선을 그으며 종종 졸도합니다 아름답게 쓰러지기 위해 물가에 살아요 물고기의 머리를 뜯으며 어린 무용수의 발끝처럼 포즈를 고심합니다 머리 뜯긴 물고기들은 지느러미를 파닥여요 열렬한 격렬함입니다 날마다 나는 더욱 날카롭게 안을 수 있어요 깨지 않는 악몽을 물고 물고기들 내게로 와요 병신들, 큭큭 웃는 우리는 병신입니다. 어두운 곳에 쉽게 매료됩니다 엄마가 남긴 유산은 악습이에요 구멍 속에 꼬리를 넣어야만 잠들던 엄마의 낮과 낯들, 낮과 낯은 같은 말이었을까요 어둠을 오래 바라보느라 내 눈은 검은 돌멩이처럼 반짝이는 줄도 몰라요 붉은 수초를 등에 감고 물방울을 높이 던집니다 내게 말을 걸 땐 물속으로 들어와요 기괴한 몸짓도 이 곳에서는 물의 동작이 됩니다 물결에 지문을 풀면 녹슨 안개가 피어나요



- 심지아, 「수달 씨, 램프를 끄며」전문 -

 

 

불협화음의 시학에서 시는 ‘어두운 것’에 대한 이끌림에서 촉발된다. “나는 어두운 것에 쉽게 매료됩니다”(「수달 씨, 램프를 끄며」)에서 이 ‘어두운 것’은 ‘현기증’, ‘졸도’, ‘아름답게 쓰러짐’, ‘열렬한 격렬함’, ‘깨지 않는 악몽’, ‘악습’ ‘기괴한 몸짓’처럼 과잉되고, 분열적이며,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나는 어두운 힘의 다발로 무수히 분열되고 증식된다. 그러므로 이 시에는 독자들이 찾아야 할 시적 내러티브나 서정적 감성은 없다. 아니,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 시의 핵심이 아니다. 일찍이 고트프리드 벤은 “심정? 그런 것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미학적 선언은 심지아의 시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사랑이 ‘편애’이고, 삶이 ‘현기증’이거나 ‘졸도’이며, 욕망의 대상이 ‘열렬한 격렬함’일 때, 그 삶은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병신’의 삶인 것이다. ‘기괴한 몸짓’이 이 곳(시)에서는 ‘물의 동작’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듯이, 심지아의 시에선 정상이 아닌 ‘병신’의 상태가 본질적으로 시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외출 직전」에서 이러한 불협화의 비정상성은 타나토스적 충동으로 기호화되는데, 이 시의 화자는 ‘너’가 던지는 접시들을 피하기보다는 “나는 네가 겨냥하는 곳에 서서 깨지고 싶었어”처럼 자신의 해체를 욕망하고 있다. 심지아의 「외출 직전」에 등장하는 ‘은밀한 시간’이라는 시어는 ‘어두운 것’과 더불어 그녀의 시를 이해하는 키워드다. “우리는 가장 은밀한 시간에조차 공공연하지.” 사실 이 문장은 그 자체로 긍정되기보다는 재해석되어야 하는데, 가령 그것은 은밀함이 공공연하게 노출되는 상황에 대한 반성적 의식을 함축하고 있다. 「예배 시간」에서 ‘어두운 것’은 “영원히 자라나는 어둠 속 뿌리처럼” 부드럽고 긴 소년의 손가락으로, ‘은밀한 시간’은 “기도문은 몰라요/ 제발 은밀해지세요”로 각각 변주되어 반복된다. 그러므로 “내 목에는 여러 개의 닫힌 창문들/ 안으로 바람 소리를 내며/ 길어집니다// 소년의 손은 두 개의 혀/ 다른 말로 겹쳐지는 시간”(「예배 시간」)이라는 진술은 여러 겹으로 만들어진 ‘나’의 은밀한 내면과 소년이라는 존재의 비단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존재의 복수성(비단일성)과 유동하는 감각의 비정형성은 사춘기 주체와 소년을 등장시킨 김행숙의 시, 그리고 ‘아이’라는 불확정적 주체를 등장시켜 성장과 유동성을 시화(詩化)하려 했던 일군의 미래파 시인들의 특이성 가운데 하나였는데, “검은 글자로 쓴다 종이 위에서 어미 없는 얼룩말들이 태어난다…(중략)…숲에는 어린 아이의 목덜미에서 흐르는 선홍색 피가 있고 핏물에 비친 검은 글자들이 있다”(「검정 물감 팔레트」) 같은 진술들은 다분히 이 미래파 시인들과의 근친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심지아의 시에서 ‘어두운 것’과 ‘은밀한 것’은 종종 공간적인 방식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가령 “당신은 몇 개의 지하실을 가졌습니까…(중략)…너는 일인칭과 이인칭을 초과하여 검고 깊은 언어로 흐릅니다”(「네게 이야기해 줘」)라고 진술할 때 ‘지하실’은 단일한 시공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환칭이며, “밤의 옷장은 약병들로 가득하다”(「보석세공사의 스탠드」)라는 진술에서의 ‘옷장’ 또한 시간에 대한 메타포이고, “깨끗한 손수건과 마지막 치즈를 넣고 자물쇠를 채우면 발끝으로 귓속말하는 기분 엉뚱한 문장이 떠오른다”(「사물함의 습도」)라고 말할 때도 ‘사물함’은 ‘언어’와 관련이 있는 시적 대상이다. 심지아의 시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불협화의 특징은 결국 포스트 미래파의 시가 미래파와의 단절이 아니라 미래파가 실험하고자 했던 감각이 한층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그 감각이 형식에 대한 실험과 파괴가 아니라 뚜렷한 하나의 시적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장웹진 3월호》

 

 

 

 

 

 




1) 이 글은 계간 《시와 시》(2010년 겨울호)에 발표한 「‘포스트(post)’의 운명」의 후속편이다. 나는 미래파 논쟁 이후에 등단한 시인들 가운데 김상혁, 박성준, 김승일, 박준, 심지아, 이제니, 민구, 이은규, 주하림, 최정진, 유희경, 이이체 등을 주목하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의 시에 대한 해석은 이미 활자화되었고, 이 글에서는 이은규, 김상혁, 유희경, 심지아의 시만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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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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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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