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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하게, 강렬하게, 시인 이근화

  • 작성일 2011-12-06
  • 조회수 2,820

 

[고봉준의 젊은 작가 인터뷰_03]

 

 

간결하게, 강렬하게, 시인 이근화

 

고봉준

 

 

 

 

*

 

  인은 좀체 투시되지 않는 존재다. ‘문단’이라는 곳에서 시인들을 많이 만나 본 것도 아니고, 그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눠 본 적도 별로 없지만, ‘시(글)’와 ‘시인’은 묘하게 일치되지 않았다. 물론, 글과 사람이 일치되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하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지만, 그리고 글과 사람의 일치가 문학의 당위적인 가치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소설가와 비교하면 ‘시’와 ‘시인’의 불일치는 놀라울 정도로 빈번하다. 어쩌면 이 불일치가 시인과 만나기를 주저하는 이유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시’를 매개로 ‘시인’을 만난 뒤,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시에 대한 이미지나 판단이 조금씩 바뀌는 경우가 많다. 이 멀어짐을 방지하려면 차라리 시인과 직접 대면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낭만주의자는 아니지만, 굳이 시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을 깨뜨려 가며 확인해야 할 무엇인가가 없다면 말이다.


  인 이근화는 2004년 월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현재까지『칸트의 동물원』(2006)과 『우리들의 진화』(2009), 두 권의 시집을 출간한 젊은 시인이다. 그녀의 시세계를 한 마디로 단정하기는 무척 어렵지만, 희언과 산문화 경향이 지배적인 현대시의 맥락에 견주어 보면, 그녀의 시는 무척이나 간결하고, 간결한 만큼이나 강렬하다. 그녀의 시는 일정한 이야기의 구조를 갖는 산문화 경향과는 거리가 멀고, 대신 이미지에 집중함으로써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의 거리가 꽤 넓은 편이다. 그녀의 시는 쉽게 읽히지 않지만, 같은 이유에서 쉽게 소비되지도 않는다. 그녀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 견고한 시세계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그 목적이 제대로 달성되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다만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서 ‘시’와 ‘시인’의 불일치라는 기존의 통념이 깨졌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의 시는 그녀 자신을 꼭 닮았다는 것, 낮고 느린, 그러나 또렷한 그녀의 음성은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느낌을 주었다. 쉽게 해독되지 않는 불가해한 느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점점 그 이야기의 세계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이 느낌의 세계, 그것이 이근화 시의 특징이 아닐까.

 

 

*

 


  고봉준 : 어떻게 시인이 되셨나요? 문학수업과 등단과정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이근화 : 문창반 동아리 활동 같은 것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진지하고 심각해 보여서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잘하는 것이 별로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그나마 혼자 앉아 책 보는 걸 즐겼던 것 같아요. 그것 말고 뭔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새로운 것을 찾아서 할 만큼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었죠. 학과 선택도, 대학원 진학도 그저 그런 가운데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시를 전공하면서 처음 시를 써봤는데 재미있었고, 사람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어요.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무엇인가에 빠져서 끌려가듯 계속 썼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하는 데도 서툴렀습니다만, 함께 시를 읽고 썼던 대학원 사람들과의 시간이 저를 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작품86, 축배, 잔비어스 같은 데서 죽치고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극적인’ 시간이었어요. 그들 덕분에 다른 세계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들 바빠서 잘 만나지 못해요. 그렇게 시를 써가면서 여기저기 투고했는데, 《현대문학》에서 연락이 왔어요. 등단했을 때, 민음사에서 첫 시집이 나왔을 때 기뻤습니다.

 

  고봉준 : 첫 번째 시집 『칸트의 동물원』을 읽으면서 이미지의 배열이 매우 압축적이어서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감각과 이미지의 연쇄를 중심으로 시를 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어떤 평론가는 이 시집을 ‘칸트의 동물원’, 그러니까 ‘칸트’라는 형이상학적인 요소와 ‘동물원’이라는 감각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고 읽기도 하더군요. 등단에서 첫 시집을 출간하기까지 시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어떤 것일까요?

 

  이근화 :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시를 계속 썼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쓰는 과정에도, 쓰고 나서도 좀처럼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무엇이 없어서 곤혹스러울 때가 많아요. 특히 이건 무슨 의미지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질문을 받으면 더 그렇습니다. 저는 대체로 이 세계를 관찰하는 무모하고 편협한 사람입니다. 논리적이고 엄정한 사람이 못 됩니다. 제게 시 쓰기는 사고와 판단 이전의 상태에서 나옵니다. 언어의 선택과 결합이라는 점에서 메시지나 그 효과에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이미지를 충돌시키고 의미를 미끄러뜨리는 데 더 재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첫 시집의 단출한 이미지는 저의 화법을 말해 주는 부분이 많습니다. 말수가 적어서, 말을 잘 하지 못해서 힘들 때가 많아요. 칸트나 동물원이나 그것의 결합(우연성에 기댄)까지 어떤 면에서는 고공비행의 느낌이 있습니다. 직관에 기대어 쓴 면도 있고요. 첫 시집 이후 좀 더 낮은 자세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고봉준 : 감각에 의한 사물과 세계의 인식은 이근화 시인과 비슷한 시기에 등단하고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에게도 드물지 않게 목격할 수 있는 공통점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특히 감각적인 지각은 시집 도처에서 확인되듯이 세계와 사물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즉 고정성이 없는 유동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만듭니다. 왜 이러한 감각적 지각이 강조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이근화 : 확고한 세계에 대한 의심과 불안, 정형적 틀에 대한 실증 같은 것이 우리 세대들에게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면입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이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유동성 자체를 사유하고 흐르는 것의 자세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그것 역시 하나의 역사적 태도로 보입니다. 그걸 꼭 서양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와 연결시켜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취했던 많은 태도들이 거부당하고 억압당했던 경험은 피해의식 혹은 콤플렉스로 남는 것 같습니다. 저는 확실히 실패의 경험으로부터 내면을 구성하는 편입니다.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면이 많습니다만, 그것도 원래 그랬다기보다는 글을 읽고, 시를 쓰면서 더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분명하고 확고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무섭고 친해지기 싫습니다.

 


  고봉준 : 혹시 자신의 시 한 편을 대상으로 해서 창작의 동기나 과정에 대해서 조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창작방법론도 좋고 계기나 과정 등 배경에 관한 이야기도 좋습니다.

 

  이근화 : 실제 경험이나 구체적인 사건은 모두 시를 쓰면서 각색되기 때문에 작품이 다 씌어지고 나면 앙상하고 초라하게 그 흔적만을 남깁니다. 그래도 비교적 연애 감정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아이 라이크 쇼팽」이나 「칠레라는 이름의 긴 나라」 등이 그렇습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시간들이 들이닥쳤던 것이지요. 횡단보도 신호등 앞에서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리는 내 자신을 지켜봐야 했고, 내가 가보지 못한 지도 속의 나라들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면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을 상상한 적이 있습니다. 갈가리 찢겨지는 기분이었는데, 그저 평범한 청춘 일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고봉준 : 이근화 시인의 시에서 ‘감각’의 문제가 ‘공통감각’의 보편성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면, 그것은 결국 공통감각에 대한 의심/부정과 ‘나’의 감각적 자명성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될 듯합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데, 하나는 그렇다면 시에서 ‘독자’라는 존재는 어디까지 인식, 가정될 수 있는가(적어도 젊은 시인들의 상당수가 독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근화 : 대화 중에도 상대방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편인데 혼자 시 쓰면서 독자를 상상하는 일이란 제게 너무 어려운 과제인 것 같네요. 그렇다고 미학적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고독한 작업이라고 포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고봉준 선생님께서도 잠깐 말씀하셨듯이) 소통이란 것이 원래 단절로부터 새로운 고리를 찾아내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의 독자적 공간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마주할 때, 통로를 상상할 수 있고 그제야 저는 문을 달 생각을 해볼 겁니다. 외롭고 고통 받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쉽게 이해했다면 시 쓰기 말고 다른 작업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이해하기도 벅차고, 추스르며 살기 힘들어 하는 편입니다. 저 역시 저를 독자로 상정하지 않는 작가들의 충실한 독자가 되는 걸 즐기는 편인데 그들이 제게 기쁨과 용기를 줍니다. 살맛이 안 날 때 소설을 읽습니다.

 


  고봉준 : 또 하나의 문제는 그런 감각의 자명성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시집에서 ‘우리’라는 대명사가 전면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집을 읽다 보면 이것이 ‘나’에서 ‘우리’로의 단순한 이동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이인칭의 변화가 야기하는 시집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이근화 : 여러 인칭대명사 중에 골라 쓴 것은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선호했던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인칭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어떤 필연성 때문이었는데 그걸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네요. 각 작품의 맥락마다 ‘우리’가 지칭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내 안에 여러 사람이 들어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고유성이 어디 있을까 싶은 것이지요. 철학적으로 사유된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알아낸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변하고 불안정하게 떨리는 존재임을 매순간 실감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거울을 들여다보면서도, 목욕을 하면서도, 서류를 작성하면서도 나는 내 자신인 것이 낯섭니다. 내 경험과 사유가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까지 ‘나’라는 진폭과 파장이 무한히 확대되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과대망상일까요. 시에서도 그런 것 같아요. ‘나’에게 들러붙어 떼어낼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승인이 ‘우리’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싶네요. 대상일 수도 사태일 수도 있겠지요. 이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불가능한 탈주를 꿈꿀 때조차 나는 오로지 내가 아닌 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감각과 정념을 우리에게 되돌려주고 싶다고 해야 할까요. 상호 침투된 존재들로서 고유성이 사라지면서 동시에 그 밖의 것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조건이 표현되었다고 할까요. 결국 잘 모르겠습니다. 인칭이 사라진 자리, 죽음이나 공황 상태 같은 걸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언어가 없는 공간, 외계나 우주 같은 걸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들이 두 번째 시집에서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끝까지 이 생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잖아요. 삼십대는 그 책임감을 배울 나이라는 점에서 시 쓰기에 부적절한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시를 쓸 수 있는 조건이 이제야 마련된 것 같기도 합니다.

 

  고봉준 :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은 느낌도 그렇지만 시인이 그려 보이는 세계의 모습도 조금은 다른 듯합니다. 첫 번째 시집을 묶을 무렵과 두 번째 시집을 묶을 무렵을 뒤돌아본다면 무엇이 달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세 번째 시집과의 차이는 또 무엇일까요?

 

  이근화 : 세 번째 시집을 내년쯤 출간할 예정이지만, 시집 간의 차이와 거리를 실감하지는 못하는 편입니다. 사후적으로 재구성된 것이지, 제가 의도를 가지고 있거나 서로 다른 방향을 의식적으로 지향하고 있다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언제라도 저의 시 쓰기가 끝장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시를 쓰는 일이 즐겁지만 시를 쓰며 지내는 것은 언제나 아슬아슬합니다. 때때로 시가 실패를 기록하는 일처럼 느껴지고 앙갚음 하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고봉준 : 등단을 준비하면서, 또는 문학수업을 받으면서 어떤 시인, 작가들의 책을 읽었고, 영향을 받으셨나요?

 

  이근화 : 1993년 어느 여름엔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라는 구절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용운 시의 많은 구절들이 제게 그랬습니다. 정지용의 자기 단속보다 김기림의 무모함을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백석과 김수영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다 머리 굵어지고 배운 것입니다. 제 바로 윗세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의 ‘뜨거운’ 영향 아래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형도에게 매료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최승호, 박상순, 이수명의 시가 재미있었습니다. 김언, 신해욱의 시를 좋아합니다. 대체로 좋아하는 것을 경계할 때 좋은 시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게 어려운 일입니다.

 


  고봉준 : 현재 시단(詩壇)에서 자신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또 그곳에서 보면 최근의 시적 경향은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시단 전반에 관한 이야기나, 동료나 선배들의 시적 경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셔도 좋습니다.

 

  이근화 : 제 자신의 ‘위치’에 대체로 무관심한 편입니다. 그리 훌륭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고요. 시적 경향을 살피거나 시단 전반에 대한 평가는 평론가의 몫인데 그것이 시인에게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무관심이나 게으름 탓이기도 합니다만. 대체로, 문학작품이 괜찮은 상품이 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문학하는 사람이 시장주의 원리나 자본의 질서를 내면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새로움이나 아름다움은 더 먼 시간에 자기 언어를 정향시킬 때 나온다고 봅니다. 시민적 질서에 충실하면서 문학하는 것의 어려움을 실감하고 그 거리를 인지할 필요는 있겠지요. 그건 그렇고, 최근 조인호 시 가운데 “숭고한 곡괭이가 생각 속에서 녹슬고 있다”라는 표현을 읽은 적이 있는데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심보선 시 가운데 “너는 날아갈 것이다. 날아가지 마. 너는 날아갈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고서 한참 동안 슬펐습니다. 문예지나 시인들이 너무 많은 것이나 시집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지만,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작품을 읽으며 문학적 대화를 이어 가는 것이 저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고봉준 : 시인으로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이근화 : 대체로 계획이 없고, 생각대로 일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적당히 노동을 하면서 먹고 살고, 약간의 창조적 시간을 갖는 지금의 시간들이 나쁘지 않습니다. 애써 견디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방치하면서 지내는 것 이외에 다른 태도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건 마치 실패한 사랑을 끌어안고 그것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임을 무심한 태도로 증명해 내는 일 같습니다.

 

  고봉준 : 혹시 문단에서 꼭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이근화 : 서준환 소설가, 허수경 시인, 조효원 평론가를 만나 보고 싶습니다. 최근에 「다음 세기 그루브」라는 단편을 읽었는데 서준환 씨를 만나면 세상에 없는 음향을 찾으러 함께 길거리를 쏘다니고 싶습니다. 우주로 날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수경 시인과는 저물녘 백반집에 들어가 따뜻한 쌀밥을 먹고 싶습니다. 탁주를 곁들이면 더 좋겠지요. 몇 편의 평론을 읽었는데 조효원 씨의 글쓰기가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젊고 똑똑한 친구인 것 같습니다.

 

 

*

 

  터뷰를 끝내고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인터뷰 원고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그녀의 첫 시집을 펼쳐들었다.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 속에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슬픔’이라는 제목의 시가 인쇄되어 있었다. ‘사소’와 ‘개인’, 두 개의 단어가 그녀의 시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 ‘사소’하고 ‘개인’적인 세계가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크게 다가왔던가. 어쩌면 그녀의 시에서 거대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모든 시도는 끝내 실패할 운명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사소’하고 ‘개인’적인 세계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감각의 주파수를 겹쳐 놓는 일이 필연적이리라. 시란 이 주파수의 공명 속에서만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닐까.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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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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