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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신성한 시간이 그립다

  • 작성일 2012-01-17
  • 조회수 1,560

 

[철학, 삶을 탐하다_제3회]

 

 

신성한 시간이 그립다

 

조광제(철학아카데미)

 

 

 

 

  가 바뀌니 지인들로부터 새해 인사가 오고 간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가장 일반적인 인사다. 개중에는 ‘올해에는 더욱 힘내어 잘살아 봅시다.’라는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특히 연세가 많이 드신 분들에게는 “새해에 더욱 건강하시고.”라는 인사말을 곁들인다. 비교적 다른 사람들에 비해 죽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있는 그분들에게 ‘더욱 건강하시고’라는 말을 곁들이고자 하면 왠지 쑥스럽기까지 하다. 연세가 많이 들다 보면 건강할 리 만무한데도, ‘더욱 건강하시고’라고 하니 일종의 거짓부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인사를 받는 쪽에서는 ‘고마워요’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새해라고 하는 시간이 그렇듯 서로 의례적으로 말을 건넬 수밖에 없도록 하고, 또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으며, 심지어 그렇게 의례적으로 말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강압하기조차 한다. 그런데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과 더불어 인간 삶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가 밀려든다.

  종교학자인 엘리아데가 쓴 『영원회귀의 신화』에는 고대인들이 어떻게 새해를 맞이하는가를 잘 기술하고 있다. 특히 바빌로니아 고대인들은 새해가 시작되기 전 한 해가 마무리될 시점에 현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행사를 치른다. 그들에게 연말은 세속의 시간이 끝나고 신성한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성한 시간은 신들의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를 만든 우주 창조 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고대인들은 이때 신들을 흉내 냄으로써 신적인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연말의 일정 기간 동안 모든 일상적인 일들을 중지하고 일상을 지배하는 모든 관습과 윤리 및 법과 제도를 무시한 채 카오스 속으로 들어간다. 이른바 오르지(orgy)라고 하는 통음난무의 무질서 속으로 모두가 몸을 드리우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제사장이 등장해 다시 코스모스적인 질서를 선포하고 새로운 한 해의 일상을 시작한다. 이러한 행사를 치름으로써 고대인들은 1년 동안 세속의 시간에서 오염된 모든 죄와 오류로부터 깨끗하게 정화된다고 믿었다. 그렇게 정화된 몸으로 다시 주어진 1년이라는 세속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한 해가 마무리되는 12월 31일 24시 정각은 또한 새해가 시작되는 1월 1일 0시 정각이다. 폭죽을 터뜨리고 거대한 종을 울리고 축배를 들긴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신성한 시간은 단 1초도 되지 않는다. 아니, 아예 없다. 바빌로니아 고대인들에게 주어진 신성한 시간인 며칠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단 1초도 주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무화되어 버린 것이다. 그저 물리적인 수평적 시간의 어느 순간 갑자기 새해가 주어지니 사실상 새해라고 할 것조차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하면서 의례적인 인사를 한다. 고대인들이 강렬한 ‘오르지’라고 하는 의례를 통해 서로의 깊은 욕망과 본능 그리고 충동 속으로 한껏 잠입해 들어가 아예 서로의 몸이 되어버리는 ‘살의 인사’를 나누는 것과 너무나 날카롭게 대비된다.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할 때, ‘복’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이른바 신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바빌로니아 고대인들이 신적인 창조를 반복한 것과 비교해 보면, 대단히 수동적이다. 현대인들의 종교적인 무의식적인 습속에 이 같은 수동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에게는 비록 실현할 수 없지만 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론적인 욕망이 있다고 역설했다. 이 욕망을 분석하고 풀어내고자 한 것이 그의 주저 『존재와 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한편으로 신성한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쫓겨나 버린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아예 망각하고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에서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을 원죄로 규정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생각이 현대인들에게서 신성한 시간을 앗아가 버린 주범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 신성한 시간이 인간 존재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극단적인 유일신으로 바뀌었을 때, 이미 인간은 신성한 시간으로 잠입해 들어갈 수 있는 위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외쳤을 때, 그는 우리 인간에게서 신성한 시간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신이 죽었음을 선언한 것이고, 이제 우리 인간이 신성한 시간을 신으로부터 되찾아올 때가 되었음을 고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의 탄생과 도래란 결국 자신의 존재 자체에 신성한 시간을 풀어 놓은 인간의 탄생과 도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죽었다고 선언한 그 신은 죽지 않았다. 다만 변신했을 뿐이다. 죽은 신은 이제 자본으로 되살아나 오히려 일상 속에 완전히 뿌리를 내려 세속의 시간을 송두리째 지배한다. 니체 이전에 정치경제 철학자인 마르크스는 화폐의 물신화를 제시했다. 화폐는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추앙받고 따라서 화폐를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리라는 완전한 착각이 자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현대인들의 의식을 철저하게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라는 것은 “신은 자본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라는 말로 변환해서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젊은 시절에 쓴,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을 보여준 『경제학?철학 수고』에는 화폐의 물신화에 사로잡힌 나머지 갖게 되는 소유 감각이 어떻게 인간 존재를 근본에서부터 빈곤하게 만드는가를 역설하고 있다. 그는 본래 인간 존재는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갖춘 존재라야 한다고 말한다. 폭과 깊이에 있어서 더할 수 없이 풍부한 감각을 갖추고서 인간이 형성해 온 온갖 가치와 의미는 물론이고, 우주적인 자연이 주는 신성한 감각들을 한껏 향유할 수 있는 인간 존재를 제시한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그 연원을 추적해 보면, 마르크스가 말하는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은 결국 엘리아데가 소개하고 있는 고대인들이 신성한 시간을 불러올린 ‘전신적인 통음난무의 감각’에 가닿을 것이다.

  2008년 미국으로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이른바 파생 상품이라고 하는 괴물이 이제 전 세계를 내리누르면서 일상적인 인간의 삶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파국을 연출하고 있다. 신이 자본으로 변신하다 못해, 급기야 배타적인 금융자본으로 변신한 것이다. 파생금융상품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에도 십 수조 달러의 구매와 판매가 이루어지는 전 세계적인 ‘돈 놓고 돈 먹기’의 거대한 노름판이 인간의 삶을 내리누르고 있다. 순식간에 몇 백억 원, 아니 몇 십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이는 내 피니 이 잔을 마셔라.” 최후의 만찬에서 주어진 명령은 자본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신의 이름으로 이제 “이는 내 존재이니, 이 돈을 삼켜라.”라는 명령으로 바뀌어 있다. 돈을 먹고 마심으로써 돈신(神)이 될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죄를 씻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되고 말았다. 결국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새해 돈 많이 버세요.”라는 흉악하지만 ‘진실 된’ 인사로 바뀌기도 한 것이다.

  자본은 아무에게나 은총을 내리지 않는다. 철저하게 화폐를 숭상하고 절대적인 신으로 모시는 자에게만 그러한 은총을 내린다. 그들이 말하는 신적인 세계는 그 근처를 아무리 맴돌아도 출입구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세계다. 마치 카프카의 『성』을 맴도는 측량사처럼. 출입구가 어딘지 알 수 없으니, 입장권을 어디에서 파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전 세계의 인간들이 그 출입구를 찾고 입장권을 구매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 와중에 수십 억의 인구들이 퀭한 눈을 열고서 바싹 마른 몸으로 하루하루를 구걸하고 있다. 자연 환경이 죽었다고 외치는 동안, 실상 인간들이 먼저 죽어가고 있다.

  그 뿌리는 물론이고 그 정체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거대 금융자본들이 굴리는 ‘악마의 맷돌’ 아래, 그렇듯 인간들이 더 큰 금융자본을 만드는 데 갈아 뭉개지고 있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동원하여 쫓기듯 이를 부추기고, 이를 돕는 국제적인 조약을 맺느라 여념이 없다. 그 와중에 하루하루 긴장된 시간의 허리끈을 죄면서 생산을 통해 영리를 추구하는 제조업체의 기업가들은 우둔한 자들이 되고 만다. 그 우둔함을 벗어나기 위해 돈 자체를 좇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치닫는다. 2008년 당시만 해도 벌써 전 세계의 유동 금융자본이 실물경제를 통한 생산의 10배를 넘었다고 하는 사태가 이를 여지없이 일러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월가 점령’ 시위가 일어나 삽시간에 전 세계 80여 나라의 951개 도시로 퍼져 ‘99:1’이라는 의식의 전선(戰線)을 형성했다. 그러나 불행 중 불행으로 그리스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금융자본 주축의 정책이 지닌 강력한 부작용은 결국 1%의 노략질에 의해 가난한 만큼의 순서대로 99%의 일반인들이 삶이 어떻게 쉽게 붕괴되고 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인 혁명이 불가능한 한, 오히려 패배주의로 귀착되는 셈이다. 이탈리아가 크게 흔들리고 있고, 유럽 전체가 꽁꽁 얼어붙고 있다. 제법 그럴싸하다 싶어 함부로 입에 올리는 ‘지구촌’이니 ‘인류 공동체’니 하는 말들은 전반적인 재앙을 암시하는 말로 바뀌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의 파생금융상품 규모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점한다고 하니, 결코 강 건너 불구경에 불과할 수도 없다.

  이 모든 일들을 당하면서 ‘신이 죽어버린’ 시간이 얼마나 잔혹한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한낱 몽상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과연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자문은 ‘우리 인간은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물음에 앞설 수 없다. 너무나 세속적인 나머지 그 자체로 매 순간 죽음의 단말마를 연속할 수밖에 없는 시공간이 인류 전체의 삶을 휩쓸고 있다. 그 와중에 개인적인 이른바 내면적인 성찰은 그저 자폐적인 위로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권유할 것이 못 된다.

  화려하게 장식한 현대인들의 얼굴에서 철저하게 표백되어 버린 얼굴을 동시에 오버랩해서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 처연한 심정이라니, 차라리 신화적인 무의식으로 되돌아가 한 줄기 이는 바람결에서조차 시공간의 신성함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인간의 얼굴에서 신의 얼굴을 목격하는 일이 다반사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신적인 시간을 완전히 빼앗겨 버린 현대인들의 초상, 돈과 권력으로 속속들이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우글쭈글하고 꾀죄죄한 이 얼굴을 말끔하게 씻어낼 수 있는 길은 아예 차단된 것인가?

  1920년대 격동의 중국 상황에서 중국의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루쉰은 “먹으로 쓴 거짓은 결코 피로 쓴 사실을 덮어 가릴 수 없다. 피 값은 반드시 같은 피로 갚아야 하리라.”라고 절규했다. 피의 신성함은 곧 인간 삶의 신성함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인간 삶의 신성함은 온 우주적인 신성한 시간을 분비해 내는 근원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애당초 신성한 시간은 인간의 신성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신성한 시간을 갈아 뭉개는 자본주의의 ‘악마의 맷돌’에서 신성한 인간의 피가 흘러내려 흥건하다 못해 지구 전체를 뒤덮는다. 몽상이라고 매도한다고 할지라도, 신성한 시간이 그리운 까닭이다.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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