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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현존철학에서 본 블랑쇼와 바르트

  • 작성일 2012-04-27
  • 조회수 1,418

 

  [철학, 삶을 탐하다_제6회]

 

 

현존철학에서 본 블랑쇼와 바르트

 

조광제

 

 

 

 

 

  1. 현존과 존재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 존재는 뒤로 물러서 있으면서 현존을 앞세운다. 존재는 현존을 빚어내어 현존이 자신을 부정?극복하게 함으로써 의미/무의미의 구도로 재편성되고자 한다. 현존은 자신을 빚어낸 존재를 부정?극복함으로써 형성되는 의미/무의미의 그물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더 빠른 속도로 앞서 나아간다. 의미/무의미의 구도가 더욱 고정되면 본질/비본질의 구도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르트르가 “현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했을 때, 그 바탕에는 현존이 의미에 앞선다는 사태가 놓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현존이 의미와 본질에 앞서도록 한 것은 존재다. 예컨대 나의 존재가 나의 현존을 빚어낸 것이고, 그럼으로써 나의 존재 스스로 그 나름 의미에 이어 본질을 구비해 가지고자 한 것이다.

  현존은 근본적으로 지금 여기의 상황에 의거해서 성립한다. 지금 여기의 상황은 흔히 존재한다고 일컫는 일체의 것들이 현존토록 한다. 현존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각각의 사물들이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 다른 사물이 아닌 바로 그 사물로서 존립하는 것은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바깥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물이 놓여 있는 자신의 바깥은 다른 일체의 사물들과 공유하는 경계이다. 이 경계는 존재하지 않고, 현존한다.

  논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면 지금 여기의 상황을 벗어난 지경을 떠올릴 수 있다. 그 지경에서는 일체의 것들이 뒤범벅이 되어 마치 카오스처럼 된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된다는 것은 무시간적?무경계적인 상태에서 시간적?경계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지금 여기의 상황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지금 여기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코스모스는 수없이 많은 현존의 경계들을 품고 있다. 코스모스에서 현존의 경계들은 경계 지어진 것들, 즉 존재?의미?본질 등에 비해 우뚝 솟아있으면서 미래를 향해 앞서 나아간다. 그 현존적인 경계들은 아무런 존재도 의미도 본질도 지니지 않는다. 그저 벡터적인 힘을 지닐 뿐이다. 존재 쪽에서 보면, 이 현존적인 경계들은 간극 즉 빈틈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존재의 빈틈들이다. 존재를 옆으로 죽 펼쳐놓고 보면, 존재는 지독한 가뭄에 수도 없이 갈라진 논바닥의 형상(形狀)을 띠고, 존재를 아래위로 쌓아놓고 보면, 존재는 수없이 접고 또 접어 만들어지는 주름의 형상을 띤다. 주름진 것은 존재이고, 주름은 현존인 셈이다. 주름은 주름진 것의 형상일 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존은 존재가 지금 여기의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켜 생겨난 형상인 것이다.

 사물에게서 현존이 붕괴되면 그 사물은 자성(自性)을 상실하고 순수한 존재의 차원으로 내려앉아 스며들고 만다. 나의 존재는 나의 현존으로 인해 ‘나’의 존재라고 하는 자성을 띠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나의 존재가 자신에게서 나의 현존이라고 하는 빈틈을 만들어 자신보다 앞세움으로써 ‘나’의 존재라고 하는 자성을 띠는 것이다. 나의 현존이 항존(恒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 여기의 상황을 놓쳐버리면 나의 현존은 붕괴된다. 그렇게 되면 ‘나’의 존재 역시 붕괴되어 어느 누구의/무엇의 존재도 아닌 순수한 존재의 차원으로 내려앉아 스며들고 만다. 때때로 나의 존재가 특별히 따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일컬어지는 일체의 것들에 함입되어 사라지기도 한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의 현존 아래에 나의 존재가 도사리고 있고, 나의 존재 아래에 순수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 현존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존재는 ‘hypostasis’(휘포스타시스), 즉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레비나스가 존재에서 존재자가 생겨나는 것을 휘포스타시스라고 했을 때, 그것은 순수한 존재에서 개별의 존재자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말한 것이 아니라 결과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휘포스타시스의 결과는 레비나스가 크게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각 사물의 현존과 각 사물의 존재 간의 관계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현존은 철저히 경계, 즉 사이에 서 있다. 각 사물의 현존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즉 대타성(對他性)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문이다. 달리 말하면, 각 사물의 현존은 각 사물의 존재가 대타성을 끌어들여 그 나름의 자성을 풍부하게 하고, 또 그렇게 풍부해진 자성을 통해 더욱 풍부한 대타성을 갖도록 하는 이중 통로 내지는 여과기다. 각각의 사물들이 개별성을 갖는 것은 그 사물들이 갖는 의미와 본질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사물들의 현존 때문이다. 그러나 각 사물의 현존은 각 사물의 존재가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 의미와 본질을 띠기 위한 하나의 필수적인 존재론적인 장치임을 감안하게 되면, 코스모스가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 의미/무의미 내지는 본질/비본질의 휘황찬란한 ‘꽃’의 열개(裂開)를 일구어내는 것은 근본적으로 존재의 일이지 현존의 일은 아니다.

 

 

  2. 현존과 존재로 본 글

 

  현존은 존재의 바깥에 놓여 있다. 이 바깥은 이른바 ‘존재론적인 바깥’이다. 경험적 공간에서의 안과 바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바깥이라는 이야기다. 사르트르는 이 존재론적인 바깥을 결국 무(無)라고 하면서 무는 존재에서 생겨난다고 했다. 글을 읽으면서 때때로 아찔함을 느끼는 것은 일컫자면 글의 존재 때문인가, 아니면 글의 존재의 바깥 즉 글의 무인 현존 때문인가? 이에 관한 생각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모리스 블랑쇼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

 

 

  작품 ― 예술작품, 문학작품 ― 은 완성된 것도 완성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작품은 존재한다(elle est). 작품이 말하는 것은 오로지 작품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것일 뿐이다. ―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벗어나게 되면, 작품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작품에서 그 이상의 것이 표현되기를 바라는 자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작품이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쓰기 위해서건 읽기 위해서건 작품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자는 존재(être)라는 낱말만을 표현하는 것의 고독에 속해 있다. 존재라는 낱말은 언어(langage)가 그 낱말을 숨김으로써 보호하거나 작품의 침묵하는 공허(le vide) 가운데 그 낱말이 사라지게 함으로써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문학의 공간』 이달승 국역본, 15-6쪽)

 

  모리스 블랑쇼는 작품의 ‘존재’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그가 글의 ‘존재’에 집중하고 있다고 달리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품 또는 글의 현존은 어떻게 되는가? 작품을 읽기 전에 작품의 존재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그’ 작품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과 카오스적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순수한 존재일 것이다. 누군가가 그 작품을 읽을 때, 그 독서의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 순식간에 그 작품의 존재가 순수한 존재로부터 떠오른다. 하지만 그 작품의 존재는 그 작품의 현존에 일단 가려진다.

  작품의 현존, 독서의 상황인 지금 여기에서 작품은 노출과 은폐, 투명함과 불투명함, 채움과 비워냄, 연속과 불연속, 일관됨과 어긋남 등의 이중삼투적인 성격들을 지닌 시공간을 펼쳐 보인다. 그 시공간 속에서 작품은 잇고 자르기, 끼어들어 들러붙기, 덧대어 부풀리기, 멈칫하며 뛰어오르기, 내달으면서 미치기, 차분하게 호흡하기 등의 행위를 일삼는다.

  이러한 작품의 현존적인 활동을 마주하면서 독자는 그 작품의 현존을 통해 그 작품의 존재에로 육박하고자 한다. 작품의 현존은 작품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장치이자 동시에 작품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이중 통로 즉 여과기다. 독자는 작품의 현존과 제대로 투쟁하기 위해 이제까지 꾸려온 자신의 존재를 독서를 하는 지금 여기의 자신의 현존으로 최대한 불러내어 끌어들인다. 작품의 현존과 독자의 현존이 독서의 상황 지금 여기에서 강하게 부닥친다. 작품은 온갖 무장을 하고서 독자를 유혹하면서 동시에 독자를 밀어낸다. 밀어냄이 없이는 유혹은 불가능하다. 작품이 독자를 유혹할 때, 그 유혹의 본거지는 작품의 존재이지 작품의 현존이 아니다.

  독자는 작품의 현존과 맞닥뜨린 상황에서 작품의 현존을 벗겨내고 작품의 존재로 육박해 들어가고자 한다. 독자는 글의 현존을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위력을 총동원한다. 그때 독자는 위험해진다. 유혹당하는 자는 항상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독자의 죽음은 곧 독자의 현존의 죽음이다. 작품의 존재에 육박해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존재 전체를 총동원하게 되면 자칫 자신의 현존이 자신의 존재에 의해 붕괴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독자는 작품의 노예가 된다. 현존을 상실한 독자는 자신의 존재와 작품의 존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작품의 존재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모리스 블랑쇼가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지다. 그가 말하는 근원적인 침묵은 바로 현존의 죽음을 일컫는다. 그래서 그는 “죽을 수 있기 위해 글을 쓴다. — 글을 쓸 수 있기 위해 죽는다.”(『문학의 공간』이달승 국역본. 123쪽)라고 했던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작품의 존재를 위해 저자도 독자도 자신의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 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시간의 부재(absence de temps)의 매력(fascination)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시간의 부재란 (…) 우리인 ‘나’(Je)가 얼굴 없는 ‘그’(Il)의 중성(neutralité) 속으로 잠길 바로 그때의 부정이 없는, 결단이 없는 시간이다. 시간의 부재의 시간(le temps de l'absence de temps)은 현재도 없고 현전도 없다. 그러나 이 ‘현재 없음’은 과거를 지시하지도 않는다.(『문학의 공간』이달승 국역본, 28쪽)

 

  저자로서의 나의 현존이 완전히 지워져버리는 시간, 그 시간이야말로 시간이 부재하는 시간이다. 저자는 지금 여기의 글 쓰는 상황에서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저자로서의 자신의 현존을 글을 씀으로써 파괴한다는 것, 말하자면, 카오스적인 글의 존재 자체로 뛰어든다는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의 글 혹은 작품에 대한 입장은 현존이 아니라 존재에 철저하게 입각해 있다. 그렇다고 글 혹은 작품의 본질에 입각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존을 지우게 되면, 본질은 함께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리스 블랑쇼의 비장한 존재 중심의 입장에 비한다면,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제시한 롤랑 바르트는 현존 중심의 입장이고 그렇기 때문에 비장하기보다 명랑하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텍스트는 그것의 차이(그 개별성이 아니라)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 독서는 일회적인 것이지만, 전적으로 인용과 지시물?메아리들로 짜인다. 즉 과거의 혹은 현대의 문화적 언어들이 하나의 거대한 입체 음향 속에 여기서 저기로 텍스트를 횡단한다. 다른 텍스트의 ‘사이 텍스트’(entre-texte)로 해서 모든 텍스트를 사로잡는 상호 텍스트성은 텍스트의 어떤 기원과도 혼동될 수 없다. (…) 텍스트를 작품에 대립시키는 이 복수적이고도 악마적인 짜임은, 일원론적인 담론이 그 법칙처럼 보이는 독서에 중대한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텍스트의 즐거움』김희영 국역본, 42-3쪽)

 

  ‘사이’는 철저히 현존의 영토이다. 텍스트의 현존은 텍스트의 존재 바깥에 있다. 그 바깥은 항상 사이일 수밖에 없다. 주름진 것에 새겨진 주름들로 뛰어다니는 상호 텍스트적인 흥겨움, 독자는 그 상호 텍스트적인 흥겨움에 취한다. 굳이 텍스트의 존재를 염두에 둘 필요가 없기에 독자는 굳이 자신의 존재 전체를 총동원할 필요도 없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독자의 탄생은 독서에서 독자의 현존이 강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저자의 죽음은 저자의 현존이 한없이 약화되는 것을 말한다. 현존은 의미와 본질이 열개되도록 하는 존재론적인 장치이다. 롤랑 바르트가 제시하는 상호 텍스트적인 의미와 본질은 그 바탕이 되는 텍스트의 존재로부터 주권을 빼앗아 텍스트의 현존에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롤랑 바르트에게서는 텍스트와 작품이 뚜렷이 구분된다.

  존재와 현존의 명확한 구분은 사르트르에게서 비롯된다. 사르트르를 원용한 우리의 현존철학적인 존재론을 통해 볼 때, 모리스 블랑쇼와 롤랑 바르트라고 하는 두 문학비평가의 입장은 이렇듯 존재와 현존에서 갈라진다.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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