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강연록] 두 언어, 두 풍경

  • 작성일 2012-08-01
  • 조회수 1,907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제3회_ 시인 심보선 편

 

 

 

[강연록] 두 언어, 두 풍경

─ 불의 언어와 물의 언어

 

 

김용규(철학자)

 

 

 

 

 

 

1

 

   여러분은 조금 전에 프랑스 소설가 겸 극작가인 장 지로두(Jean Giraudoux, 1882~1944)의 〈벨락의 아폴로〉를 보았습니다. 장 지로두는 프랑스 오트비엔 주의 가난한 시골 벨락에서 태어났지만, 공화주의의 은덕을 입어 국비장학생으로 모든 예비 지식인들이 선망하는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 그는 잠시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강사 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귀국해서 그가 생업으로 삼은 것은 학문이 아니라 공직이었지요. 그는 28세 때인 1910년 외무부에 들어가 58세 때인 1940년 정보국장직을 사임하기까지 30년간 외무 공무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소설과 희곡을 썼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작품들을 남겨 장 아누이, 폴 크로델과 함께 프랑스 대표적인 현대극작가로 인정받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언어가 가진 놀라운 힘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두 가지 풍경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럼 우선 〈벨락의 아폴로〉를 잠시 되돌아볼까요?

   이 극은 평범한 처녀 애그네스가 취직을 하려고 세계 발명협회라는 회사를 찾아오면서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겁을 먹은 애그네스에게 접수를 맡은 늙은 서기는 몹시 냉정하게 대하지요. 이때 갑자기 신화 속의 인물인 아폴로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순진한 처녀에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그것은 비결이랄 것도 없이 아주 단순합니다. 만나는 대상이 누구든지 주저하지 말고 “정말 잘생겼어요.”라고 말하라는 거지요. 상대가 “추남이거나 절름발이거나 홀쭉이거나 뚱뚱이거나 가릴 것 없이” 그리고 “바보도 똑똑한 자도 겸손한 자도 허영심 있는 자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구별하지 말고” 잘생겼다고만 하라는 겁니다. 그것도 “상대방이 미처 입을 열 사이도 없이” 말이지요.

 



   어때요? 좀 우스꽝스럽지요? 게다가 애그네스는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하는 초라한 차림의 사내가 아폴로 신인 줄을 아직 모릅니다. 그러니 그녀가 좀 어리숙하긴 해도 그 말을 선뜻 믿을 수가 없지요. 그럼에도 아폴로는 만일 당신이 그 말을 “철학박사에게 하면 당신에게 학위를 줄 것이며, 푸줏간 주인에게 말하면 고기를 줄 것이고, 사장에게 말하면 일자리를 줄 것”이라고 그녀를 부추깁니다. 뿐만 아니라 연습까지 시키지요. 처음에는 파리를 상대로, 다음에도 늙은 서기를 상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애그네스가 마지못해 파리에게 “넌 참 잘생겼구나.”라고 말을 하자 파리가 그녀에게 달라붙어서 날아가질 않지요. 또 늙은 서기에게도 “정말 잘생기셨어요.”라고 말을 건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자기 귀를 의심하던 늙은 서기가 나중에는 자진해서 부사장님을 만나도록 해주지요.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겁니다. 그래도 반신반의하는 애그네스는 이번엔 천정에 걸린 샹들리에에게도 “오 아름다운 샹들리에야, 넌 참 근사하구나.”라고 실험을 해봅니다. 그러자 꺼져 있던 샹들리에가 갑자기 깜박이다가 저절로 훤히 불을 켜지요. 놀라운 효과를 확인하고 자신을 얻은 애그네스는 이후 부사장과 이사들, 그리고 사장에게까지 차례로 “정말 잘생기셨어요.”라는 말을 반복해 건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상하지 못한 결과들을 얻어내지요. 그리고 마침내는 사장도 아니고 그 회사 회장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우화나 희극 풍의 이 극에 대해 기존의 평론가들은 대개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이 극은 작가 장 지로두가 이 세상은 사실상 추하고, 모든 사람은 자기가 추하다는 콤플렉스에 빠져있으며, 현실은 항상 암울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썼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새삼 일깨워 주어 좋을 일이 없는데다가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이 나름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기 때문에 작가는 기왕이면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냉소적 풍자를 이 작품에 담았다는 거지요. 그래요.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작품을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먼저 문제를 삼고 싶은 것이 아폴로가 가르쳐주고 애그네스가 따라한 “정말 잘생겼어요.”라는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이 말을 단순히 취직이라는(또는 신분상승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애그네스의 영악함에서 나온 거짓말로 파악한다고 하지요. 그러면 이 작품은 듣기 싫은 사실보다 듣기 좋은 거짓말이 더 낫다는 걸 이야기하는 우스꽝스럽고 부도덕한 극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작품에 대해 더 이상 할 말도 없거니와 이리저리 살펴볼 필요나 가치가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경우는 애초부터 아예 배제하고자 하는데, 장 지로두도 분명 그런 의도로 이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다음 경우지요. 즉, 우리가 “정말 잘생겼어요.”라는 말을 ‘신이 인간에게 가르쳐준 언어’로서 애그네스는 단지 그것을 순수한 마음으로 따라서 했을 뿐이라고 인정하자는 겁니다. 그러면 상황은 전혀 달라져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말도 있거니와 살펴볼 필요와 가치가 생깁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장 지로두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을 썼을 것인데, 이때 우리가 가져야 할 의문은 신은 왜 인간에게 이런 거짓말을 가르치는가 하는 거지요. 우리는 오늘 저녁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을 해석해 보고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을 이해하며 나아가 우리가 살아갈 삶의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다음의 대조적인 두 장면입니다. 하나는 애그네스와 사장과의 대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사장과 그의 부인인 떼레즈와의 대화 장면지요.

   우선 애그네스와 사장과의 대화를 볼까요? 회사 사람들이 하루 하침에 갑자기 긍정적으로 변해버린 데에 놀란 사장이 애그네스에게 그 비법을 묻자, 그녀는 “정말 잘생기셨어요.”라고 했을 뿐이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사장은 “그럼 사장인 나는 어떻소? 나에게는 왜 아무 말이 없죠?”라고 묻지요. 애그네스는 “그 이유는 사장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라고 대답합니다. 사장이 다시 “나는 모르겠는데……”라고 말하자, 그녀는 “그건 굳이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사장님께서는 미남이시기 때문이지요.”라고 답하지요. 이 말에 사장이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말해주겠소?”라고 요청하고, 애그네스는 “사장님은 미남이세요.”라고 같은 소리를 반복합니다. 사장이 다시 “잘 생각해봐요. 애그네스양, 이건 심각한 문제요. 확실히 내가 미남으로 보인다는 건가요?”라고 다그쳐도, 그녀는 “사장님은 미남으로 보이지 않아요. 그냥 미남이시죠.”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사장은 곧바로 비서인 슈브레땅을 불러 해고하고 애그네스를 새 비서로 채용하지요.   

   그럼, 이제 사장과 그의 부인인 떼레즈와의 대화를 볼까요? 떼레즈가 “왜 이 아가씨를 비서로 채용하는 거죠?”라고 묻자 사장은 “나를 미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오.”라고 답하지요. “갑자기 돌았어요?”라고 떼레즈가 다그치자 사장은 “천만에 미남이 되었을 뿐이오.”라고 말을 되받습니다. 그러자 떼레즈가 다시 “그럼 내가 거짓말쟁이란 말인가요? 나는 당신을 속이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당신을 알아왔어요. 물론 당신에겐 여러 가지 장점이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추남이에요. … 추남이고말고요. 이 여자의 동기가 뭔지 몰라도 달콤한 거짓말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나 나는 모든 걸 걸고 명백한 진실을 외치겠어요. 당신은 추남이라구요. ……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지요.”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15년 동안 지속해온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생각을 하지요.

   어떻습니까? 극이니만큼 분명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하나는 천국의 풍경을, 다른 하나는 지옥의 풍경이 그려지고 있지요. 자, 그럼 여기에서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떼레즈는 왜 자기 남편에게 그런 악담을 퍼부을까요? 극 내용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럴 만한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건 다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단지 남편이 못생겼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그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말’이 악담처럼 들리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유가 뭘까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 잘못인가요? 아니지요! 그런데 왜 떼레즈가 마치 악녀처럼 보일까요?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어떻게 남편에게 대놓고 그리 말할 수 있느냐 하는 예의 때문일까요? 떼레즈의 문제가 단지 에티켓에 관한 문제냐 하는 겁니다.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비단 그것 때문에 그녀가 악녀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아닐 겁니다. 그럼 이유가 뭘까요?

   답을 하기 전에 이번에는 애그네스의 대화를 보지요. 그녀는 거짓말을 합니다. 잘 생기지 않은 남자들에게 미남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당사자들이 왜 그리도 좋아할까요?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 처녀가 자기들에게 뭔가를 얻어내려고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기꺼이 애그네스를 돕거나 채용하려고 했을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틀림없이 사장도 그 부인 떼레즈처럼 “이 여자의 동기가 뭔지 몰라도 달콤한 거짓말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의심을 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녀를 비서로 채용하려 하지요. 도대체 왜 그럴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오늘 우리는 그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신약성서》 ‘요한의 복음’ 18장에는 참으로 안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 예수가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는 장면이지요.

   당시 빌라도는 예수를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선 유대인들의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고, 게다가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지난 밤 꿈 이야기를 하며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보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명확히 대답하지요. 빌라도가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하고 다시 묻습니다. 이에 예수는 “네 말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나는 이를 위해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해 증언하려 함이노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라고 대답하지요. 이로써 예수는 자기가 세상에서 말하는 왕이 아니라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난 진리의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겁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인가?”(요한복음 18:38)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지요. 그러자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하면서도 예수를 유대인들이 원하는 대로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줍니다.

   안타까운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빌라도는 웬일인지 예수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는 무슨 영문인지 자기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빌라도의 마지막 질문에 침묵했습니다. 왜 두 사람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했을까요?

   성서에 ‘빌라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무식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로마에는 스토아(Stoa) 철학이 번성했지요. 스토아 철학이란 진리가 무엇인지를 최초로 밝힌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의 막강한 영향 아래 만들어진 철학입니다. 때문에 빌라도는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친 진리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지요. 어쩌면 《형이상학》에 적힌 그의 진리론을 직접 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되물었을까요? 일부러 딴지를 걸기 위한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사실상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배운 진리와 예수가 가르친 진리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알고 있었던 진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그리스적 진리’였고, 예수가 말하는 진리는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믿는 신이 내려준 ‘히브리적 진리’였습니다. 따라서 둘 모두 ‘진리’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서로 전혀 달랐습니다.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는 그것을 설명하기를 아예 포기했던 것입니다. 벌써 2천 년이 지난 이야기지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진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혼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요.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 란트만(M. Landmann)은 그의 저서 《근원의 형상과 창조자의 행위》에서 바로 이 두 진리의 차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그리스적 진리를 ‘거울’에, 히브리적 진리를 ‘반석’에 비유해 설명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요,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거나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다.”

   무척 단순해 보이고 조금은 우스꽝스럽게도 들리지만, 이것이 지난 2300여 년간 학자들이 변함없이 숭상해온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론’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있는 것’, 곧 ‘존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플라톤 이후 ‘있는 것’이란 ‘무엇으로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idea)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eidos)란 어떤 사물이 단순히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있는 그 형상으로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이데아 또는 에이도스에 의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있습니다. 책상은 책상으로 있고, 사과는 사과로 있고, 컵은 컵으로 있지요. 이때 그 ‘무엇’을 철학에서는 본질(本質)이라 하고, ‘있는 것’을 존재(存在)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론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무엇(예; 책상)으로 있는 것을 무엇(예; 책상)으로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무엇(예; 책상)으로 있지 않은 것을 무엇(예; 책상)으로 있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요, 무엇(예; 책상)으로 있는 것을 무엇(예; 책상)으로 있다고 말하거나 무엇(예; 책상)으로 있지 않은 것을 무엇(예; 책상)으로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한마디로 책상을 책상이라고 하고 책상이 아닌 것(예를 들어 컵)을 책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진리라는 말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론은 이처럼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하지만, 바로 이것이 지난 2300년 동안 우리가 진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내용입니다. 란트만은 이처럼 진리란 ‘주어진 사실에 대한 올바른 진술’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진리 개념을 ‘거울’에 비유했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비유지요. 그리스적 진리는 마치 거울이 사물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듯이 사실을 그대로 반영(反映)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실적 진리’, ‘과학적 진리’ 또는 ‘판단의 진리’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오늘 밤 이것을 기꺼이 ‘지상의 진리’라고도 부르고자 하는데, 앞의 이야기에서 발라도가 알고 있는 진리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런데 예수가 말하는 진리, 곧 히브리인들이 이해한 진리는 전혀 다릅니다. 히브리인에게 진리란 그들이 믿는 신, 곧 야훼(Yahweh)의 ‘말씀’이지요. 그리고 그 말씀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와 있듯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세기 1:3)와 같이 우주만물을 창조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고 가는 힘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사람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진리에 대한 이 같은 이해는 신구약성서 곳곳에서 신의 말씀을 ‘시냇물’ 또는 ‘반석’으로 비유해 그것이 사람이 살 수 있게 하는 그 바탕임을 밝힌 것과 연결됩니다.

   예컨대 신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편 1:3)는 식이지요. 같은 말을 예수는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 하나니.”(마태복음 7:2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관점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와 같이 사람이 가야 할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을 같은 원리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란트만은 히브리인에게 진리란 ‘흔들리지 않는 지속성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허용되는 것이고,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곳에 사람들이 집을 지을 수가 있는 것’이라면서 ‘반석’에 비유했던 거지요.

   정리하자면, 히브리적 진리는 사물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행위와 삶 그리고 마땅히 따라가야 할 ‘길(道)’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물을 존재하게끔 하는 바탕’이 아니라 ‘사람이 살게 하는 바탕’이라는 말이지요. ‘밖으로 드러난 어떤 것’이 아니라 ‘드러날 것이 드러나게 하는 어떤 것’입니다. ‘이미 되어진 것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앞으로 되어질 것에 대한 진술’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진리를 ‘과학적 진리’에 대하여 ‘종교적 진리’, ‘사실적 진리’에 대하여 ‘인간적 진리’, ‘판단의 진리’에 대하여 ‘사랑의 진리’라고도 하며, 일상용어로는 ‘사실’에 대하여 ‘진실’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것을 기꺼이 ‘천상의 진리’라고 부르고자 하는데, 앞의 이야기에서 예수가 선포한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때요? 뭔가 또 어려운 철학적인 이야기 같은가요?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요. 표현만 조금 바꾸면 여러분들도 이미 다 아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들 옛날 어른들이 하셨던 ‘덕담’이라는 말 아시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시골 할아버지가 마을 아이들을 만나면 그때마다 “어 그놈 장군 깜이다.”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지요. 이것이 바로 덕담입니다. 할아버지는 만나는 아이마다 장군 깜이라서 그리 말하시는 게 아니지요. 별 생각 없이 그리 덕담을 하시는 겁니다. 사실이 아니라는 거지요. 하지만 그 말은 아이들이 용기를 갖고 의젓하게 자라게 하는 바탕이 됩니다. 이렇듯 덕담은 ‘사실적 진리’는 아니지만 ‘인간적 진리’를 담고 있고, ‘판단의 진리’가 아니지만 ‘사랑의 진리’를 품고 있는 거지요.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내가 자주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거센 바람이 드러누운 눈발들까지 일으켜 세워 이리저리 몰고 다니던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허름한 중국집에 젊은 여인이 철모르는 소년을 하나 데리고 들어왔지요. 그리고 난롯가에 놓인 좌석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난로 위에선 커다란 주전자가 수증기를 거세게 뿜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방 싱글벙글거렸고 여인은 그런 아이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웃었습니다. 주인이 물을 날라다주며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물었지요. “자장면 하나 주세요.”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엄만, 안 먹어?” “응. 엄만 조금 전에 밥을 먹었거든. 그래서 배가 불러.” 여인의 말에 소년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그래?”

   일본의 동화작가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을 생각나게 하는 이 이야기에서 과연 무엇이 진리일까요? 그때 여인은 물론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단지 돈이 없었을 뿐이지요. 그래서 자장면 한 그릇만 시켜 “응. 엄만 조금 전에 밥을 먹었거든. 그래서 배가 불러” 하며 아이에게만 먹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자기 아이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세요? 소년은 자라 나중에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형이상학》도 읽었지요. 그리고 그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자라서도 엄마가 자기에게 거짓말을 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자기 엄마가 한 말은 ‘사실’은 아니었지만 ‘진실’이었고, 사실에 대한 판단의 진리가 담긴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랑의 진리가 담긴 진술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아마 여러분들도 기꺼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진리’가 이후 소년이 평생을 두고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길이자 반석이 되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다시 〈벨락의 아폴로〉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이 극에서 떼레즈는 남편에게 “물론 당신에겐 여러 가지 장점이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추남이에요. … 추남이고말고요. 이 여자의 동기가 뭔지 몰라도 달콤한 거짓말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나 나는 모든 걸 걸고 명백한 진실을 외치겠어요. 당신은 추남이라구요. ……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지요.”라고 외칩니다. 그렇다면 떼레즈는 남편에게 악담을 한 게 아니라 단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사실적 진리’, 곧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판단의 진리’를 담아서 말한 것뿐이지요. 이에 반해 애그네스는 ‘달콤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비록 아폴로가 시켜서 하긴 했어도 사람이 살게 하는 바탕, 사람이 마땅히 나가야 할 길인 ‘인간적 진리’, 곧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진리’를 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적 진리든 아니면 인간적 진리든, 지상의 진리든 천상의 진리든 관계없이, 모든 진리는 오직 언어 안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거나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다.”라고 할 때도 이미 진리는 언어 안에서 표현된다는 것을 명시했지요. 신구약성서에서도 모든 진리는 ‘말씀’을 통해서만 선포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진리의 집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할 때에도 같은 맥락이었지요.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존재란 곧 존재의 진리인데 이 진리가 자기를 드러내는 장소가 바로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두 진리가 있는 만큼 우리에게는 두 진리가 사는 두개의 집, 곧 두 언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빌라도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히브리 선지자들과 예수의 언어’입니다. 하나는 ‘사실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의 언어’입니다. 하나는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판단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살게 하는 바탕을 밝히는 ‘사랑의 언어’지요. 하나는 ‘지상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벨락의 아폴로〉와 연결시켜 이야기하자면, 하나는 ‘떼레즈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애그네스의 언어’지요.

   장 지로두는 〈벨락의 아폴로〉에서 두 언어의 차이를 이렇게 대비시켜 묘사해 놓았습니다. 화가 난 떼레즈가 먼저 애그네스를 향해 “이 양반을 가져가요. 얼마든지 양보하겠어요. 밤마다 코고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이젠 질렸으니까.”라고 소리칩니다. 이에 애그네스는 “사장님은 코를 고시나요? 정말 멋있어요.”라고 대꾸하지요. 그러자 떼레즈가 다시 “게다가 깡마른 무르팍은 또 어떻구.”라고 험담을 합니다. 애그네스는 “전 개성이 있는 무릎이 좋아요.”라고 받아넘기지요. 약이 더욱 바싹 오른 떼레즈가 “저 흉측한 얼굴은 또 어때요? 이 양반 눈썹이 귀족의 눈썹을 닮았다고 말해 보시지.”라고 악담을 합니다. 애그네스는 “천만에요. 그렇지 않아요. 사장님의 눈썹은 제왕의 눈썹을 닮았어요.”라고 하지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는 떼레즈가 자기 남편에게 무슨 사연이 있어서 악담을 퍼붓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애그네스가 취직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떼레즈는 단지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판단의 언어, 곧 지상의 언어를 구사했고, 애그네스는 다만 사람을 살게 하는 바탕을 밝히는 사랑의 언어, 곧 천상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가 떼레즈에게는 지옥을, 애그네스에게는 천국을 경험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잠시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지금 주로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있나요? 물어볼 것도 없이 대부분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판단의 언어’, 곧 ‘지상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옳다고 배워왔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사람을 살게 하는 바탕이자 사람이 나아야 할 길을 밝히는 다른 언어적 가능성, 곧 ‘사랑의 언어’, 곧 ‘천상의 언어’에 대해서는 교육받은 적이 거의 없고, 아는 것도 역시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새로운 언어적 가능성에 대해 잠시나마 관심을 갖고 천착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을 덜 지옥으로, 아니 더 천국으로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판단의 언어’, ‘지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경우에 지옥이 드러나고, ‘사랑의 언어’, ‘천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어떤 경우에도 천국이 나타난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벨락의 아폴로〉에서와는 달리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판단의 언어’인지 아니면 ‘사랑의 언어’를 구분하기 쉽지 않은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언제 이런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또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자 하는데, 이 문제와 연관해서 괄목할 만한 사유를 남긴 철학자가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입니다.

   마르셀에 의하면, 세상에는 본디 ‘나’라는 1인칭과 ‘그’, ‘그녀’, ‘그것’이라는 3인칭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모든 3인칭 관계에 있는 대상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제삼자’이고, 당연히 서로 응답하지도 배려하지도 않으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것은 단지 ‘존재물의 세계’일 뿐이지요. 오직 1인칭인 ‘나’가 3인칭 대상에게 ‘2인칭 관계’를 맺어 ‘너’ 또는 ‘그대’라고 부를 때에만 3인칭 대상인 그, 그녀도 나를 ‘너’ 또는 ‘그대’라고 2인칭으로 부르면서 응답하고 배려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세계는 삽시에 ‘존재물의 세계’에서 ‘존재의 세계’로, ‘사물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바뀝니다.

   마르셀의 이 같은 사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살거나, 설사 사람으로 넘치는 서울 같은 대도시에 산다고 하더라도,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산다면 여러분 각자는 3인칭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물의 세계를 살 뿐이며, 당신의 존재에는 아무런 의미가 부여되지 않습니다. ‘너’ 또는 ‘그대’라고 부르는 상대가 없는 그곳에서는 여러분 각자는 하나의 3인칭, 곧 ‘대상화된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곳이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가 그의 희곡 《닫힌 방》에서 묘사한 지옥입니다.

   1944년에 초연된 《닫힌 방》에는 죽어서 지옥에 온 가르생, 이네스, 에스텔르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과거의 재현으로서의 현재만 있을 뿐, 그 누구와도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셋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이자, 서로를 지켜보는 시선(視線)으로, 서로를 판단만 할 뿐 사랑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가르생은 다음과 같은 절망을 토로합니다.

   “나를 잡아먹을 듯한 이 시선들. 아! 당신들은 고작 두 명뿐이었는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웃는다.) 이것이 지옥이지. 전에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어. 당신들도 기억하겠지. 유황, 장작더미, 쇠꼬챙이. 아! 다 쓸데없는 얘기야. 쇠꼬챙이 같은 것은 필요 없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요컨대 여러분을 대상화된 대상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3인칭 상대만 있을 뿐, 여러분들에게 ‘너’ 또는 ‘그대’라고 말을 건네며 상호 주관적 매듭을 맺는 2인칭 상대가 없는 그곳이 바로 여러분 각자의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너’, ‘그대’라는 2인칭은 매우 특별한 인칭입니다. 그것은 ‘관계의 인칭’이자 ‘기적의 인칭’이지요. 이 2인칭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물들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바뀌고, 그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이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느끼며 살게끔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세계에는,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것만이, 오직 이것만이 기적일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기적을 오늘 우리가 조금 후에 모실 심보선 시인은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 심보선, 「‘나’라는 말」 부분


 

    이 시에서 시적 화자에게는 다행히도 자기에게 “미소를 지으며 /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당신’이란 2인칭 상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밤, /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것이지요. 또 그래서 “당신이 없다면, /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라고 고백하는 거지요. “무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간다는 말이 뭘 뜻하겠어요? 자기가 존재하는 의미가 하나씩 사라져간다는 뜻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대가 있으니 내가 있고, 그대가 없으면 나도 없다! 마르셀은 ‘나’와 ‘그대’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관계를 ‘상호주관적 매듭(le nexus intersubjeclif)’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사랑은 상호 주관적 매듭의 상징이지요. 나는 내가 ‘그대’라고 부르는 상대에게서 역시 ‘그대’라고 불릴 때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마르셀이 사랑하는 관계, 즉 우리가 ‘너’, ‘그대’, ‘당신’과 같이 2인칭으로 부르는 관계에서는 ‘사실의 언어’, ‘판단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단언했다는 겁니다. 〈벨락의 아폴로〉에서 떼레즈가 저지른 잘못이 바로 이것이지요. 마르셀은 이 말을 예수가 〈마태복음〉 7장에서 한 교훈인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와 연결하여, “너는 판단하지 말라고 한 기독교적 도덕은 가장 중요한 형이상학적 언표(言表)의 하나로서 고려되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마르셀은 사랑하는 관계, 곧 상호주관적 매듭 안에서는 판단 자체가 부정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애인, 배우자 또는 자녀에 대해 가령 “너는 게을러”, “너는 무책임해”와 같은 부정적인 내용의 판단은 물론이거니와, 반대로 “너는 부지런해”, “너는 책임감이 강해”와 같은 긍정적인 내용의 판단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그대로 상대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애인을 “너는 부자야” 또는 “너는 가난해”라고 판단한다면, 당신은 이미 그가 존재하는 자체로 그를 사랑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얘기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에게는 이 말이 현실에 맞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마르셀의 이 같은 주장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형식을 극복하게 합니다. 예컨대 결혼 상대, 곧 남편 또는 아내가 부자이기 때문에, 아름답기 때문에,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을 뛰어넘게 한다는 거지요. 또 아이가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영리하기 때문에, 말을 잘 듣기 때문에, 착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게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을 마르셀은 “사랑은 본질을 뛰어 넘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요컨대 마르셀은 우리가 적어도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그의 본질이 어떻다(예컨대 부자다, 아름답다, 공부를 잘 한다. 착하다 등과 같은) ‘판단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요.

 

 

4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마셜 로젠버그는 그의 저서 《비폭력 대화》에서 ‘판단’은 상대방에게 가하는 일종의 폭력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가브리엘 마르셀뿐 아니라 장 폴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타자는 나의 인식적 소유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이나,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가 《타자 사유에 대한 에세이》에서 “타자는 인식 속에서 자아의 소유물이 된다.”라고 경고한 ‘타자 사유’와도 맥이 닿아 있지요. 때문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비폭력적 대화’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사랑의 언어’, ‘천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의 손자이자 ‘비폭력간디협회’의 설립자이기도 한 아룬 간디(Arun Manilal Gandhi, 1934~)는 마셜 로젠버그가 쓴 《비폭력 대화》의 머리말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것이다. 오늘날 이 세상이 무자비하다면, 우리의 무자비한 태도와 행동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변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매일 쓰는 언어와 대화 방식을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

   물론 언어와 대화 방식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되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가정을, 나아가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이 일은 그 어떤 것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일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제 우리는 시인 한 분을 모셔서 함께 말씀을 나눠보고자 하는데요, 컬럼비아대학교 사회학 박사이면서,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시인으로 등단했고, 2008년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내, 2009년 제16회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했고, 2011년에는 두 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으로 제11회 노작문학상과 2011년 제4회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 좋은 시상을 수상하신 심보선 시인입니다. 내가 보기에 시인은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해온 사람을 살게 하는 언어, 곧 ‘사랑의 언어’, 이자 ‘천상의 언어’를 ‘물의 언어’라는 용어를 사용해 표현했습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시인은 우리가 규정한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언어, 곧 ‘판단의 언어’이자 ‘지상의 언어’를 ‘불의 언어’라고 부르겠지요.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법과 규칙의 말들은 죄의 무릎과 무릎 사이에 놓인 순수함을 보지 못하는군요./ 세계의 단단한 철판 위에 이성의 흔적을 새기는 사람들은 물의 말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죄악의 틈새에서 잠들고 자라는 어린 영혼들을 보고는, 아이 불결해, 눈살을 찌푸리기만 하네요./ 하지만 물방울로 이루어진 당신의 말은 그 영혼을 투명하게 비춰주는군요./ 물방울로 오직 물방울로 싸우는 당신. 물방울의 정의를 행사하는 당신. 판결과 집행이 아니라 고투와 행복을 증언하는 당신./ 당신은 말하죠. 인간은 세상의 모든 단어를 발명했어요. 사랑을 제외하고는요./ 사랑은 인간이 신에게서 빌려온 유일한 단어예요. 그러니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죠./”

   적어도 내 눈에는 이 글은 시인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를 옹호하면서, 다시 말해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판단의 진리 앞에 인간이 살아갈 바탕을 밝히는 사랑의 진리를 내세우면서 쓴 것으로 보이는데, 정말 그런지 이제 모시고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문장웹진 8월호》

 

 

 

추천 콘텐츠

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