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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적 가족

  • 작성일 2012-11-22
  • 조회수 868

 

   [민들레 문학특강 참가 후기]

 

 

한시적 가족

 

표명희(소설가)

 

 

 

 

   복지관은 노란 페인트가 칠해진 삼층짜리 아담한 건물이었다. 음식 냄새가 솔솔 나는 1층 급식소를 지나 뒤쪽 계단을 올랐다. 2층은 사무실, 꼭대기층인 3층에 그들의 쉼터가 있었다. 열 평 남짓한 공간인 그 쉼터가 임시 공부방이 되었다. 기다란 탁자를 사각형으로 이어 붙여 놓고 열 명이 채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이십대부터 오십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에다 홍일점도 한 명 있는 구성원이었다. 책상 앞에 앉은 그들은 그동안 내가 서울역 광장을 오가며 숱하게 봐왔던 노숙인들과는 달라 보였다. 공부방 책상 앞에 둘러앉은 그들은 영락없는 만학도 혹은 고학생이었다.

 

   “어, 작가분이세요?”

   내 소개를 하자 그들은 내가, 그들 주변에서 많이 접하는 사회복지사나 종교단체 관련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소설가라는 사실에 부쩍 관심을 보였다. 군인이 민간인에 대해 보이는 것 같은 그들의 호기심에 나는 면접을 통과한 최종 합격자가 된 기분이었다. 강의 요청을 받고 수업 전까지 고민이 많았던 것이다. 우선은 그들이 지금껏 내가 한 번도 그 실체를 접하지 못한 세계 사람들이라는 점, 또 하나는 내가 그들과 함께 풀어 가야 할 화두가 ‘집’에 관한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배고픈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빵’ 혹은 ‘밥’에 대한 얘기를 나눠야 하는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이라고나 할까.

 

   9월 중순인데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선풍기가 부지런히 돌아갔지만 콘크리트 건물 꼭대기층 오후 네 시의 실내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더욱이 근처 공사현장의 중장비 기계들이 내는 굉음까지 수업 분위기를 방해했다. 부득이 창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고 나니 실내가 조금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우선 한 달간 있을 글쓰기 수업의 취지와 방법을 설명하고 A4 용지와 연필을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 다음 글감을 제시했다.

   “어릴 적 살았던 집에 대한 기억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그들은 흰 종이 앞에 잠시 난색을 표하더니 하나 둘 연필을 손에 쥐고 글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소리와 희미하게 들리는 공사현장의 작업소리, 그 위로 또닥또닥 글 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늦여름 시멘트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 같았다.

 

   경쾌하게 또닥거리는 연필 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간을 훌쩍 거슬러 과거의 어느 지점을 비집고 들어선 느낌이었다. 글감 때문일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이곳으로 찾아오는 길에서도 그랬다. 평소 자주 지나다니는 서울역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지도를 떠올리며 낯익은 빌딩이 늘어선 대로변을 따라 백여 미터쯤 걷다 모퉁이 주유소를 끼고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그러자 영화의 플래시백처럼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재개발 구역을 연상시키는 낡은 동네가 보였던 것이다. 경사진 길을 따라 한쪽에는 나지막하고 허술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다른 한쪽은 초고층 빌딩이 세워지는 거대한 공사현장이었다. 그것은 골목길 몇 개를 통째로 삼킨 채 동네 속으로 성큼 들어서 있었다. 높은 패널 담으로 둘러진 공사현장과 허름한 동네는, 길을 가운데 두고 서로 대치하듯 마주 서 있었다. 그런 불균형한 구도 속에 복지관은 동네 쪽 라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글씨 소리가 시계 침처럼 또닥또닥 종이를 메워 가는 이십여 분간, 나는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젖어 낯선 공간에 멀거니 앉아 있었다.

   “선생님, 다 썼는데요.”

   학생 하나가 나를 일깨웠다.

   그들 중 가장 젊은 강이었다. 그는 남들이 종이 한 면을 빼곡히 채우는 동안 딱 한 줄 써놓고 배짱 좋게 버티고 있었다.

   ‘나는 집이 싫다.’ 제목인지 한 줄짜리 시인지, 반항기 짙은 짧은 문장 하나가 A4 용지 가운데 힘 있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젊은 강은 자신이 발표할 차례가 되자 용지의 휑한 여백을 메우기라도 하듯, 가출을 밥 먹듯 했던 철부지 시절 이야기를 모험담처럼 털어놓았다. 그는 글보다 ‘말빨’로 사람들 이목을 끌었다.

 

   남쪽이 고향인 김 아저씨는 대청마루에 앉으면 바다가 훤히 보이는 언덕배기 고향집 얘기로 후텁지근한 공부방에 바닷바람을 몰고 왔다. 그 청량한 이야기에 이어지는, 그가 고향을 떠난 이후의 얘기는 다시 우리를 현실로 데려다 놓으며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7, 80년대 지방 도시에서 잘나가는 월부 책장수였다는 큰형님 임 씨는 최고령 학생이었다. 젊은 시절 맞벌이였던 그는 아내가 하던 만화가게와 분식점에 딸린 가겟방 이야기를 꺼냈다. 손맛이 뛰어난 그의 아내가 하던 분식점의 전통적 메뉴인 떡볶이와 김밥, 순대와 라면 얘기를 시시콜콜 늘어놓은 그의 글은 듣는 내내 우리를 군침 돌게 하며 허기를 부추겼다.

 

   광산촌 출신답지 않게 매끈한 피부와 동안(童顔)을 자랑하는 홍일점 여인 박은 십여 년 만에 찾아간 고향집과 폐광촌이 돼버린 마을 얘기를 했다. 거기에 덧붙여 그녀는 아이스께끼 회사 공장 사장 딸로 부유한 가정에서 공주처럼 자라던 어린 시절 얘기를 즐겁게 회상했다. 홍일점이 아니었더라면 빈축을 살 수도 있을 만큼 화려한 이야기였다.

 

   웃기고 짠하고 찡한, 온갖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 수업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여튼 책상물림 작가의 깜냥이란…….’ 그런 자조의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나의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멍석만 대충 깔아 놓으니 수업은 그들에 의해 잘 굴러갔다. 그들은 할 말이 많았다. 그리고 자신들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줄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 그 수업에서 유일한 학생은 나였던 셈이다.

 

   글감만 약간씩 바뀌었을 뿐 수업은 내내 그런 식이었다. 한 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마주보고 앉아 쓰고 이야기하면서 한시적 가족이 되었다. 처음 식구가 그대로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매시간 내주는 숙제를 꼬박꼬박 해오며 출석률 백 프로를 기록한 ‘효자’도 있었고, 중간에 사라진 ‘집나간 자식’도 있었다. 수업이 내내 즐겁고 유쾌했던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떠나온 집에 대한 기억을 써보라’는 글감을 내주었을 때, 한 학생은 종이를 앞에 놓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다가 끝내 펜을 들지 못하고 공부방을 나가버렸다.

   백지 위에 비스듬히 놓인 연필 한 자루와 빈 의자.

   그날은 수업 내내 그 광경만 눈에 맴돌았다.

   수업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그 모습은 숙제처럼 내 가슴에 남아 있다.

 

   《문장웹진 11월호》

 

 

 

 

 

   * 민들레 문학특강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노숙인 시설의 노숙인을 대상으로 9월 15일부터 약 한 달 간 ‘제1회 민들레 예술문학상’의 부대행사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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