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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백일장 참가후기]일상속의 판타지, 마로니에 백일장 축제

  • 작성일 2013-11-01
  • 조회수 1,468

[제31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참가기_2]

 

 

일상 속의 판타지, 마로니에 백일장 축제

 

 

윤푸빗(마임이스트)

 

 

maro-yoon

 

    삶은 축제!
    우리의 삶이 축제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부턴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 바람은 많은 축제를 경험하면서 조금씩 더 선명해졌다. 공연을 하기 위해 가는 축제이지만 나 또한 축제를 만나는 것이 설레었다. 축제 공간에서는 일상에서 해볼 수 없는 일에 용기를 내기도 했다. 신발을 가방에 매고 맨발로 풀밭을 걸어 다니기도 했고 야간 공연을 보면서는 그곳에 누워 보기도 했다. 소풍 온 듯 야외에서 먹는 간식도 그 분위기를 한껏 살려 주었다. 하늘을 지붕 삼아 바람과 나무들, 그리고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연하는 작업의 매력. 그리고 공연을 보는 이들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이거나 바다처럼 깊어지는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 참 좋았다.

 

    극단에서 배우로 생활하다 처음 극단 이미지헌터빌리지(당시에는 이미지헌터빌리지 극단, 숨은그림)를 만들고 거리극을 준비하면서 거리극의 의미에 대해 극단 내에서 다시 정립하기로 했다. 멤버들과 함께 거리극은 무엇인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뜨거운 논의 끝에 우리는 거리극을 '일상 속의 판타지'라는 말로 정의하고 공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 속 거리를 걷다가 어떤 판타지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 그렇다. 갑작스레 찾아온 판타지 같은 사건을 통해 우리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기를 꿈꿨다. 그렇게 정의하고 만든 첫 공연은 2007년 과천거리극 축제에서 공연한 「보물찾기」라는 작품이었고, 다행히 솜사탕 같은 공연이었다는 평을 받아 멤버들 모두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마로니에 백일장 참관기를 쓰는 자리에서 축제와 공연 이야기를 왜 이렇게 장황하게 풀어 놓느냐 의아해하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마로니에 백일장에 참여하기 위해 공원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 광경에 잠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전날, 대전 청소년 마임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하고 새벽에 올라와 한 시간가량 늦게 도착했다. 당시 대학로엔 스쿠터를 타고 왔는데 그것을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공원 뒷문 쪽에 있어서 이를 세우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한눈에 공원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였다. 나는 일상을 걷다 어떤 판타지를 만나고 말았다. 대학로에서 몇 년 살았기에 마로니에가 가지고 있는 그 일상성이 내겐 짙게 배어 있었다. 또한, 마로니에 공원에서 거리 공연을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이 느낌이 더 진하게 다가온 것 같다.

 

    나는 거리극의 한 장면을 만난 것만 같아 잠시 멈추고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둘러보았다. 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단장한 마로니에 공원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배우들이 저마다 생각에 잠겨서 각자의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무대는 조화로웠다. 공간의 무게감은 어느 한쪽으로 쏠려 있지도 않았고 그 공간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는(여기서의 움직임은 마음의 움직임을 말한다) 사람들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노트북을 꺼내든 사람, 하늘이나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 자신의 노트나 원고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 등등 수많은 이들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눈을 깜박이자 햇살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딱, 그 장면에 어울리는 따뜻한 가을 햇살이었다.
    "아, 좋다."
    잘 왔다는 생각이 마음을 물들였고 얼굴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눈을 다시 깜박이자, 멀리 마로니에여성전국백일장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보였다. 그렇다. 그것은 어느 공연의 한 장면이 아니었고 백일장 참가자들의 모습이었다.

 

    집중하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아이가 웃으면서 뛰어온다. 멀리서 아빠 같은 한 남자가 다가온다. 엄마 품으로 달려드는 아이, 그리고 이내 방해하면 안 된다며 아이의 손을 이끌어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는 그들, 비슷한 자세로 글을 쓰고 있는 모녀 사이처럼 보이는 두 여자, 글을 쓰다 서로 작은 수다를 나누는 친구처럼 보이는 학생들, 우리의 일상 속에 찾아온 축제 같은 순간이었다. 나도 빨리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접수를 하고 원고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공연 속으로 나 또한 스며들어 갔다.

 

    백일장.
    몸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마임이스트가 어떤 연유로 언어의 매력을 살려야 하는 백일장에 참여하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고 싶었다고 설명하고 싶다. 표현하고 싶은 것이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 딱 맞는 수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을까. 온전히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마임이라면 온전히 글로만 표현하는 것이 소설이나 시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째서 이 극단을 오가는 아름다움에 빠져서 헤매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저, 몸이든 글이든 하나의 도구로만 온전히 표현되는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마음이 모아지는 그 순간이 좋았다면 이해받을 수 있을까.

 

    현재 나는 공연의 대본을 쓰고 있으며 소설가 지망생으로 습작도 하고 있다. 마로니에 백일장엔 두 번 참여했는데 몇 년 전에는 소설을, 이번에는 시를 썼다. 이 백일장은 극단 연출님이 함께 해보자고 해서 참여하게 되었다. 정해진 짧은 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해 낸다는 행위 자체가 주는 신선함이 좋았다.

 

    커피도 마시면서 글을 쓰려고 근처 카페로 향했는데 그 주변 모든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 참가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래. 눈을 돌리는 대학로의 모든 곳에서는 글을 쓰는 여성들이 가득했다.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말 그대로 축제였다. 전날 대전 청소년 마임 페스티벌에서는 공원 주위에 길게 천을 달아 놓고 시민뿐 아니라 모두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있었는데, 모두가 하나 되는 모습에 이게 축제구나 했었는데 그때의 감정이 다시 솟아났다. 곳곳에서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말풍선들을 잠시 상상했다. 그렇게 그들의 생각들이, 마음들이 원고지를 물들이고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날의 시제는 눈동자, 그림자, 벌레, 염색 네 가지였다. 나는 눈동자로 정했다. 타인의 눈을 바라보다 내가 담겨 있는 작은 행성 같은 눈동자를 만났던 그 놀라운 순간을 기억한다. 그 순간을 언어로 담아내고 싶었다. 하나하나. 단어와 단어를 적어 간다. 단어와 단어가 문장이 되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 나는 행복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화로운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 누구나 자신과 어울리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한편,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경품을 준다는 접수증을 잃어버려 점심식사를 한 식당을 찾았다. 식당 주인에게 사유를 설명하자 그곳에서 식사하던 참가자분들이 자기 일처럼 도와주셨다. 접수증을 찾진 못했지만 감사한 시간이었다. 시상식 때에야 지방 곳곳에서 많은 분들이 올라오셔서 백일장을 즐기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상을 타자 폴짝폴짝 뛰던 아이의 모습도 인상 깊었다. 따뜻한 가을날, 소풍 같은 시간을 마무리하고 나는 마로니에 공원을 빠져나왔다. 내 삶의 작은 판타지 같던 그 순간이 한동안은 머릿속에서 종종 떠오를 것 같다. 우리의 삶이 늘 축제 같기를 꿈꾼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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