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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백일장]심사평

  • 작성일 2013-11-01
  • 조회수 2,115

[제31회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심사평]

 

 

시 부문 심사평

 

 

 

    올해도 많은 참가자들이 마로니에여성백일장을 빛내 주었다. 편편이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정성된 마음, 가족을 사랑하는 참된 마음으로 가득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성장했다고는 해도, 아직 가정의 일우(一隅)에서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어머니, 또 누이들이 그들의 문재(文才)를 능히 펴지 못하고 꼭꼭 여미고만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어머니와 누이 들이 사실은 그들의 헌신과 사랑에 대해 모두 그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무등(無等)’의 칭송을 들어야 마땅하겠으나, 단풍과 은행잎이 그 미(美)를 겨루듯 오늘은 그 문재를 겨루는 한 축제의 장에 임하여 더러는 낮은 자리에서 더러는 높은 자리에서 서로 축하하고 격려하는 자리를 오늘 우리 모두가 꾸미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올해 시 부문의 참가작들은 예년에 비해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쉬웠던 점을 밝혀 두는 것이 참가자들에게는 더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많은 참가자들이 시를 필요 이상으로 길게 쓰고 있다. 시의 압축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또 이야기가 ‘가족’을 못 벗어나고 있다는 점은 되돌아보아야 할 문제다. 가족도 소중하지만, 우선 여성으로서 자신을 찾아본다든지 사회나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본다든지 시야를 더 넓혔으면 좋겠다. 그리고 슬픈 일을 쓴다고 해서 다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 함몰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못 보는 세상의 날빛 속에 서보는 생기 넘치는 여성의 각선미를 내년에는 꼭 보고 싶다.
    심사위원들은 심은정 씨의 「그림자」와 김정순 씨의 「사육―그림자」를 놓고 어떤 작품을 장원으로 밀어야 하는지 마지막까지 고심했다. 「사육―그림자」는 번뜩이는 비유가 여러 군데 있었지만, 시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적 긴장이 이완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에 비해 「그림자」는 몇 군데 상투적인 문구가 거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상이 잘 정돈되어 있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수완이 돋보였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심은정 씨의 작품을 장원으로 정했다. 그러나 시상식이 끝난 마당에 이미 이러한 분별은 큰 의미가 없는 일인지 모르겠다. 모든 참가자들이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시월의 유난히 맑은 하늘 아래서 한나절을 함께 보냈다는 것이, 아름다운 시간을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 더 특별한 일로 참가자들의 마음에 남았으면 한다.

 

 

 

산문 부문 심사평

 

 

 

    5명의 심사위원은 소설가 2명, 수필가 1명, 극작가 1명, 시인 1명으로 구성되었다. 각기 다른 장르에서 활동을 하는 것만큼 작품의 가치에 대한 기준점의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 덕분에 응모된 작품들의 장점을 골고루 챙길 수 있는 다양한 안목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문체가 뛰어난 산문에 더 좋은 점수를 주었고, 누군가는 압도적인 스토리텔링을 더 높이 평가했고, 누군가는 글제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구성을 더 존중했다. 응모작을 함께 일독하면서 우리들 각자는 그러한 자신의 평가기준에 대해 자연스럽게 의견을 교환했다. 5명의 심사위원 모두가 골고루 돌려가며 작품을 읽었고, 점수를 매겨 합산 과정을 거쳤고, 그 총점의 순서대로 입상자 명단을 작성했다.

 

    응모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모두가 정말 글을 잘 쓴다”며 자주 감탄했다. 자신이 직접 간접으로 겪은 이야기를 매우 정확하게 표현해 냈다. 문장 하나하나와 글의 구성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랜 세월 글쓰기를 연마한 것임이 분명한 자신감과 유연함이 돋보였다. 거의 모든 응모작들이 그러했다. 글의 소재들이 대부분 ‘가족사’에 치우쳐 있었다. 가족의 임종, 투병, 이별 등을 겪으며 마음속에 맺혔던 응혈들을 글로 풀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상처의 두께가 어마어마한 것일수록 감동은 더 깊었다 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의 두께에 짓눌린 채로 써내려간 글보다 절제와 거리를 확보한 채로 묵묵하게 글이 진행될 때 그 감동은 더 깊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청아하게 빛나던 그 좋은 토요일 오후에, 어느 벤치 어느 나무 아래에 앉아 이 깊고 어두운 상처들을 꺼내어 원고지를 채웠을 응모자들의 마음결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자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당선 여부를 떠나서, 백일장이 치러지던 그 하루에 응모자들 모두가 자신의 상처를 맑은 햇살에 꺼내어 깨끗하게 잘 헹구어내셨으리라 믿어진다. 그래서 다시 굳건한 자신의 삶속에 표표히 들어가서 삶의 생기를 더 잘 챙기며 살 수 있게 되셨으리라 믿어진다.
    장려상에는 김가미 님의 「그림자, 지다」, 조명 님의 「꽃그림자」, 백무늬 님의 「벌레들」 등이 선정됐다. 「그림자, 지다」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를 적었다. 가족사의 자기 고백들이 주류를 이룬 상황 속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소중했고, 유년시절의 한 친구 얘기에 집중한 솜씨가 일품이었다. 「꽃그림자」는 중환자실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며 그 이미지를 동백꽃과 연결하며 자연스레 비극을 희망으로 치환해 내는 솜씨가 뛰어났다. 「벌레들」은 지방 출신이 서울의 고시원에서 어렵게 혼자 살아가며 겪는 이야기를 ‘벌레’에 집약해 냈다. 어조가 담담했고 사소한 자기 성찰 속에 묻어 나온 세태상(도시에 표류 중인 1인 가족의 생활)의 한 단면이 명징해서 의미가 있었다. 우수작으로 선정된 정선진 님의 「엄마의 얼룩」은 글제 ‘염색’을 소재로 한 많은 글들이 ‘늙어감에 대한 소회’로 치우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발상 자체부터 특별했다. 암 투병 중인 어머니의 속옷에 묻은 하혈의 흔적에 대해 ‘표백’의 에피소드를 적어 내려갔기 때문이다. 아프고 독창적인 글이었다. 장원으로 선정된 박현 님의 「엄마의 그림자」는 심사위원 전원이 입을 모아 감탄하며 읽었던 작품이었다. 이복형제를 둔, 불행한 가족사를 조근조근 들려주는 글 솜씨가 우선 압권이었다. 담담했고 사려 깊었다. 불행을 불행으로 수긍하는 쪽이 아니라 불행 자체를 이해하려는 의지가 순한 어조 속에 글 전체에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 결말로 제시된, 이복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인 제삿날의 풍경은 사람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매우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아동문학 부문 심사평

 

 

 

    먼저 아동문학 부문에 제출된 작품들이 대체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혀 두고 싶다. 무엇보다도 동화의 경우는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하나의 작품을 완결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작품이 완결된 이야기를 갖추고 있어서 금년도 백일장에 참여한 여성 문사들의 그동안 갈고 닦은 역량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케 했다. 그런 만큼 작품의 우열을 가려야 하는 평자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아동문학 부문이 동시와 동화를 아우르고 있는 까닭에 우선 두 장르를 나누어 예심을 진행했다. 동시 장르는 시적 형상화의 완결성에 중점을 두었고, 동화 장르는 안정적인 문장 구사는 물론이고 일관성 있는 서사의 흐름과 참신한 이야기의 완성도에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동시는 4편, 동화는 12편이 걸러져 본심에 올라왔다. 이에 각 장르 간의 형평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시는 4편 모두 입상권 안에 넣기로 하고 동화 12편 중 비교적 흠이 적은 작품 6편을 골라냈다. 서사가 지녀야 할 여러 품격을 대체로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한두 가지 결점으로 인해 서사의 완결성에 균열이 드러난 작품을 제외한 것이다.
    일례로 「난 굼벵이가 아니야」는 무척 아쉬운 작품이다. 문장도 좋고 이야기도 잘 짜였으나 결정적으로 서사의 인과관계를 놓친 점이 입상권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즉 주인공이 형의 스마트폰으로 찍은 굼벵이 사진이, 평소 주인공을 굼벵이라고 괴롭혀 온 형의 생각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데, 왜 주인공이 형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는지 설정해 놓지 않고 지나간 것이다. 현실 이야기를 다루는 생활동화나 아동소설에서 특히나 사건의 인과관계는 서사의 현실감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현실을 은유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다루는 전통적인 동화에서처럼 두루뭉술하게 처리하다 보면 리얼리티를 잃고 서사의 설득력을 놓치기 십상이라는 점을 유념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입상권 안에 동시 4편, 동화 6편을 올려놓고 작품의 우열을 가리느라 한동안 씨름해야 했다. 다른 작품에 비해 평이한 관점으로 인해 문학적 깊이가 옅다거나 참신성이 떨어지는 작품을 가려내다 보니, 결과적으로 김선정의 「그림자」와 이득자의 「푸른 눈동자, 윤석이」가 남게 되었다. 두 작품 모두 장원으로 내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동안 논의한 끝에 「푸른 눈동자, 윤석이」가 아동소설에 가까운 반면, 「그림자」가 지닌 따뜻한 시선이 좀 더 동화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는 이유에서 장원으로 밀게 되었다.
    「그림자」는 사물을 바라봄에 있어 관습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아이와, 이를 놓치지 않고 감싸 주는 선생님 사이의 교감이 따스한 울림으로 전해 오는 작품이다. 도입부의 시험문제 형식이 이미 다른 이의 작품에서 유사하게 쓰인 적도 있지만, 이 작품이 지닌 따뜻함이 그러한 형식적 익숙함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사한 형식을 자기화해서 서사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음 또한 눈여겨보았다. 이 작품 역시 생활동화의 일종으로 볼 것이나, 생활동화의 일상성에 머물지 않고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안목이나 주인공의 상처 입은 내면을 치유해 주는 따뜻한 결말이 더욱 동화답게 잘 마무리되어 읽는 이의 내면에도 잔잔한 파동이 일게 하는 감동을 지니고 있다.
    아무쪼록 금년에 수상의 영광을 안은 문사들에게 축하와 함께 작가로서의 길을 성큼성큼 나아가길 바라며, 이런저런 이유에서 이번에 선에 들지 못한 문사들에게도 이미 충만해 있는 문운이 머지않아 활짝 꽃피우리라는 기대와 격려를 전하는 바이다.
    모두들 건필하시길 바란다.

 

 

2013년 10월 12일
심사위원 일동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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