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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민들레예술문학상 특별기고]서로 손-잡기의 협력은 예술이다

  • 작성일 2013-11-01
  • 조회수 680

[제2회 민들레예술문학상 특별기고]

 

 

서로 손-잡기의 협력은 예술이다


 

 

고영직(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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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사세요?” 우리나라에서 이 질문은 당신이 사는 동네를 알고 싶어 묻는 순수한 질문이 아니다. 이런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잘 알고 있다. 이 질문은 당신의 소유권과 지배권처럼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호패(號牌)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당신이 사는 집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라는 사회적 신분을 확인하는 일종의 계급적 표지가 된 셈이랄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급증한 거리 노숙인들의 숫자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서울역을 비롯한 주요 역들과 지하철역 그리고 터미널 등지뿐만 아니라, 반지하․옥탑방․쪽방․고시원․동굴 같은 곳에서 거주하는 전국의 주거취약 계층을 모두 합하면 적지 않은 숫자가 될 것이다. 국가와 지방정부가 공공임대주택을 확충하여 주거복지를 최우선적으로 실현하겠다는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해 추진해야 함은 물론이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랑 노래’(신경림)조차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사회는 혼자 살다 혼자 죽는 무연사회(無緣社會)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사회에서의 죽음은 고독사가 아니라 고립사(孤立死)라고 고쳐 불러야 마땅하다.
    우리는 누구나 대박을 꿈꾸지만, 쪽박 안 차면 다행인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금융시장은 우리가 상상하는 규모보다 막대하지만,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진짜 보이지 않는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를 겪은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저축은행이 도산하고, 증권회사가 부도날 때마다 희생양이 되는 존재는 사회적 약소자들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로익 바캉이 “보이지 않는 손이 철장갑을 끼고 나타났다”라고 한 말이 갈수록 우리나라에서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치워졌고, 그 자리에는 미끄럼틀이 놓인 셈이랄까. 한번 미끄러지면 다시 정상 궤도로 올라가기 힘든 미끄럼틀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런데 맨몸밖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의 연명을 위해 생존의 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일수, 외상, 계 같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돈을 구하는 일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카드깡, 대포차, 러시앤캐시처럼 ‘제도화된 빚’을 지는 방식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추세를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가난이 낳은 가난 문제를 금선이 할머니(가명) 사례를 통해 25년간 탐사한 조은 교수는 『사당동 더하기 25』(2012)에서 “만약의 위기상황에서 기댈 곳이 할머니와 영주 씨에게는 교회였고, 아저씨와 덕주 씨는 복권이었다고 한다면, 은주 씨에게는 생명보험이었다”라고 말한다. 교회, 복권, 생명보험에 의존해야 하는 주거취약 계층의 마음을 헤아리는 좋은 정책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열등생들이 된 사회 약소자들이 정상화 계획을 통해 자립(自立)의 경제와 자치(自治)의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복지정책이 필요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워크푸어, 하우스푸어, 헬스푸어 같은 온갖 푸어(poor)들이 넘쳐나는 현상을 보라. 어느 시인이 “푸어라는 어종이 인간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공광규)라고 쓴 시적 표현은 적절한 예가 된다. “백성은 가난한 것에 화나는 것이 아니라 불공평한 것에 화나는 것이다(不患貧 不患均)”라는 『논어』의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장 발장’들을 양산하는 미끄럼틀 사회는 품위 있는 사회가 아니다.

 

    ⑵ 2013년 7월,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에 위치한 용산쪽방상담소 3층 강당. 이면우의 시 「생의 북쪽」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산문시 형식이어서 낯선 탓이었을까. 동자동 쪽방촌 주민 10여 명이 참석한 상담소 강당에는 잠시 선풍기 소리만 들려올 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누군가가 이 시의 첫 대목에 등장하는 ‘일구구팔년 일월 팔일’이라는 구절에 주목한 뒤, “아이엠에프(IMF) 시절 이야기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순간 10여 명의 쪽방촌 수강생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 시의 메시지에 격한 공감의 마음을 표현했다. 한여름 폭염 속에 쪽방상담소에서 진행된 쪽방촌 주민들과 함께하는 민들레문학 특강이 이루어지는 수업 장면이다.
    비슷한 풍경은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양평쉼터, 구세군자활주거복지센터, 비전트레이닝센터를 비롯한 서울시 20개 노숙인 시설에서도 동시에 연출되었다. 노숙인 혹은 쪽방촌 주민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개선하고, 노숙인들이 자존감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2012년에 제정된 <민들레예술문학상> 활성화 차원에서 문학 수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작년에 이어 2회째를 맞은 민들레문학 특강에는 김신용, 최종천, 김응교, 황규관(시인), 이혜경, 이은선(소설가), 노경실(아동문학가)을 비롯한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 20명이 몸으로 하는 연대의 마음으로 기꺼이 참여했다. 어쩌면 참여 문인들은 수업 과정에서 이른바 ‘행세하는 태도’ 따위는 버리고, 마음을 주어야 마음에 남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온몸으로 구현하고자 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이런 사업이 가능한 것은 서로 손-잡기의 협동정신 덕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서울시-빅이슈코리아가 서로 손을 잡았고, 주거복지재단-서울노숙인시설협회가 서로의 온기(溫氣)를 더했다. 이러한 협력(協力)의 예술이야말로 나와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합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슈바이처 박사는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라고 말했다. 노숙인과 쪽방촌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 수업 또한 슈바이처의 이러한 마음과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적 행복을 구현하는 하나의 척도로서 ‘문학은 자유다’(수전 손택)라는 위대한 명제를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리운 그 사람, 내 마음의 고향, 십 년 후의 나, 이 세 가지 주제로 공모된 제2회 민들레예술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다음 시는 그 생생한 실체가 될 것이다. 자신의 낙백한 처지를 비관하며 감사의 빈곤을 드러내는 대신에, “내가 바로 나의 메시아다”(벤야민)라는 위대한 가치를 인생에서 구현하려는 여일(如一)한 마음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고물을 보물처럼 고물도 보물처럼
새벽의 길 위에서
감사합니다
이제야 이 말을 더 제대로 배웠습니다
십 년 뒤에도 그 후에도 이 말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_ 김인수 시 「새벽의 길 위에서」 부분

 

    실제 참여 노숙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글쓰기 과정에서 자기 발견으로서의 글쓰기가 갖는 말의 힘과 성찰의 힘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계기가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어느 작가가 “우리는 남의 불행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 슬픔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슬픔을 외면한다”(김형경)라고 한 말은 이 점에서 반쯤만 맞는 말이다. 참여 노숙인들은 누구랄 것 없이 자기를 표현하고,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응시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한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 열린 마음의 태도를 여일하게 보여주었다.
    내가 참여한 용산쪽방상담소에서도 그러했다. 평균 연령 50대 이상의 나이 든 쪽방촌 주민 10여 명과 함께한 문학 특강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은 습작품 합평회였다. 합평회 시간은 저마다의 사연을 경청하는 시간인 동시에, 작은 낭독의 밤 시간이었으며, 우리들의 작은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일수대출을 권유하는 ‘찌라시’ 종이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시를 발표하던 임수만 선생의 시 「그리운 그 사람」의 발표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열혈 수강생 신경호 선생의 분투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신 선생은 1962년 봄에 겪은 어느 여고생과의 사랑과 이별 과정을 자전소설 형식으로 풀어낸 산문 「돈암동 347번지」를 써서 우리 모두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마치 기억의 댐이 허물어진 것처럼, 신 선생은 수업이 끝난 후에도 글의 제목을 「코스모스의 잔영(殘影)」으로 고치고 내용 또한 보완하여 장장 200매 분량의 습작품으로 완성해 내지 않았던가. 누구보다 문학 수업에 열정적으로 ‘몰빵’한 신 선생을 비롯한 모든 참여 노숙인들의 분투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⑶ 어느 철학자는 ‘나는 나의 환경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사회 약소자들이 자신의 문화 권리와 욕구를 실현하면서 평등 속의 차이의 권리를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공적 행복의 환경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얼 쇼리스가 『희망의 인문학』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성찰적 사고의 경험을 통해 자율과 자치의 공적 세계(public world)의 시민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한 대목은 시와 철학을 비롯한 인문교육이 추구하는 목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한 해 동안 신원미상의 자살, 행려 사망자, 아사, 동사로 숨지는 사람의 잠정적인 추정치가 무려 32,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2010년 1월 31일에 방영된 NHK 특집 <무연사회 : 무연사 32,000명의 충격> 에서 밝혀진 숫자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없는 사회, 인연이 없는 사회를 뜻하는 무연(無緣)사회의 실상이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가 사회적 약소자들을 위한 예방적 사회정책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중에서 평생 미혼으로 사는 중장년층 남성들의 고립이 특히 위험하다고 한다. 여성에 비해 이웃과 인연을 맺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들이 평생 미혼으로 사는 이유는 여럿이지만, 그 본질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의 증가에 있다는 점은 말할 나위 없다. 불안노동이야말로 사회적 고립을 낳고, 혼자 살다 혼자 죽는 무연사회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사람이 바로 햇볕정책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복지정책이 밥에 머무는 복지여서는 안 되고, 정서적 지원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인 문제를 노인 존재로 보려 하고, 노숙인 문제를 노숙인 존재로 보아야 하며, 청소년 문제를 청소년 존재로 보려는 근본적인 시선의 전환이 요구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 사는 삶터의 복원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식의 안녕을 위해 자발적 독거(獨居)의 삶을 선택하는 어르신들이 적지 않은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스스로를 돌보고 더불어 돌보면 새로운 공공영역이 만들어진다”는 가치를 공유하며, 더불어 사는 삶터를 형성해야 함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말해 인기척이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용산쪽방상담소 앞 2차선 도로에 서면 두 개의 하늘로 분단된 서울 하늘 아래 나누어진 커뮤니티(gated community)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누구나 한번쯤 하게 된다. 상담소 바로 앞에는 도쿄의 롯본기힐스 같은 도심 속 부자 커뮤니티를 한껏 과시하는 ‘센트레빌 아스테리움 서울’이 신축되어 분양되고 있다. 문학 특강에 참여한 어느 칠십대 수강생이 쓴 수필 「내 마음의 고향」은 무엇이 세상의 힘에 맞서는 진짜 힘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나는 용산구 동자동 3-3(후암로 49-13)에서 살며 내 마음의 고향을 현재 진행형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한번 살아 볼 만한 곳이 되도록 서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한 지극한 마음으로 노력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에 있고, 일상 속에서 이상을 실천하려는 행위에 있다. 즉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민들레문학 특강의 효과는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노숙인과 쪽방촌 주민들이 위축과 소외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하며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강력한 마음의 힘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밝아진 얼굴, 온화한 눈빛, 많아진 웃음, 편안해 보이는 모습 같은 신체 변화들에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국민모금 방식인 크라우드펀딩으로 모금을 하고, 참여 기관들이 서로 손-잡기의 마음으로 매입 임대주택을 수상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결코 작고 사소한 것이 아니다. 만해 선사는 시 「잠 없는 꿈」에서 “너의 가려는 길이 너의 님이 오려는 길이다”라고 썼다. 어쩌면 만해 선사는 세상의 힘에 맞서는 진짜 힘은 나 자신의 길을 가려는 용기와 상상력의 중요성이라는 것을 역설한 것이 아닐까. 우리들의 행복한 문학 수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문학은 존재의 형식을 묻는 유구한 ‘질문의 책’(네루다)이기 때문이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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