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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제1회)]공개인터뷰: 나는 왜 서정을 미인처럼 사랑하나

  • 작성일 2014-04-02
  • 조회수 1,769

 

연속기획 공개인터뷰_나는 왜(제1회)

 

 


나는 왜 서정을 미인처럼 사랑하나

― 시인 박준 편

 

정리 : 황현진(소설가)

 

 

 

 

    지난 3월 12일 수요일, 독자 열 명을 초대해 작가를 심층 인터뷰하는 <나는 왜?>의 첫 번째 무대가 아르코 미술관 내 스페이스 필룩스에서 열렸다. 주인공은 박준 시인이다.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를 2012년 출간, 2013년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한 그를 만나기 위해 열 명의 열혈독자들이 대학로에 모였다. 한낮에 비가 내렸으나 해질 때쯤 그쳤다. 저녁 공기에 찬 기운이 돌긴 했지만 간만에 맑고 쾌청한 바람이 불었다. 시를 이야기하기 참 좋은 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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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 시인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점퍼를 입고 등장한 그는 어느 독자의 말처럼 시인이라기보다는 ‘친한 동네 형’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오늘 이 자리가 마냥 재미를 추구해선 안 되는 자리지만, 우리는 재미를 추구하면서 이 시간을 보내도록 해요.” 과연 ‘친한 동네 형’다운 인사말이었다.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사회는 오창은 평론가(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교수)가 맡았다. 둘은 인터뷰 도중 각별한 인연을 밝혔다. 박준 시인이 2008년, 계간지 《실천문학》으로 등단하던 당시, 때마침 오창은 평론가는 《실천문학》 편집위원에 재직하던 중이었다. 박준 시인이 시인으로서 첫발을 내딛은 날, 둘의 인연도 시작된 셈이다. “당신은 왜 서정을 미인처럼 사랑하는가” 라는 물음은 오창은 평론가에게도 매우 뜻 깊은 질문이 확실했다.

 

 

    ◆

 

    ▶ 창은 : 세상엔 다양한 직업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신기한 존재들이 시인 아닐까요? 시인은 날 때부터 타고날 수도 있고, 언어와의 친연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인의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요. 아니면 어떤 상황들이 연거푸 생겨서 시인이 되기도 하고요. 박준 시인은 어떤 즐거운 계기로 시인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 준 : 제가 모험을 굉장히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성격입니다. 여행을 갈 때도 늘 가던 여행지만 가고, 식당을 선택할 때도 가본 곳만 가요.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가 없어서 계속 시를 썼어요. 스무 살 때부터 꾸준히 투고를 시작했는데요, 군대에 다녀와서 이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할 용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계속 시를 썼어요. 결정적인 계기는 없고요. 낯선 것을 싫어하는 습관 때문에 젖는지도 모르게 발을 들여놨던, 시 쓰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원래 꿈은 수의사였어요. 수의사가 되려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개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웬만한 의료 행위는 제가 다 했죠. 그랬더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기르던 개가 아프면 저를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개가 군만두를 먹다가 목에 걸렸다거나 새끼를 낳다가 난산일 경우에도 저를 찾았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가려고 처음으로 배치표를 봤더니 한의대 밑에 수의학과가 있는 거예요. 전 공부를 엄청 안 했거든요. 아, 나는 왜 삼 년 동안 개만 키웠을까. 공부를 했었어야지.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공부를 잘해야 되는 꿈인 줄 알았으면 애당초 꿈꾸지 않았을 텐데, 이런 생각도 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지난 삼 년 동안 뭘 했나 돌이켜보니까 개에 관한 관찰일기를 썼더라고요. 다른 페이지에는 지지부진하고 답답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일기를 썼고요. 나는 왜 답답할까, 답답해하는 나는 누구일까 고민하는 글이었어요. 아, 그렇다면 내가 개 키우는 일 말고 잘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이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문예창작학과에 지원했죠.

 

    ▶ 창은 : 수의사라는 꿈이 개를 물질적으로 치유하는 것이라면 그 개를 관찰하고 일기를 쓰면서 언어로 표현하는 것, 그것에는 정신적인 치유 행위의 의미가 있었던 거겠죠. 생명에 대한 치료를 언어로 하는 것, 그게 바로 시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준 시인의 생활 경력이 참 다채로워요. 마트에서, 신문사에서, 청과물 경매장에서 지게차를 운전하기도 하고, 출판사에서, 문학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하기도 했고요. 박준 시인은 삶의 현장 속에서 언어를 길어내고 몸에 새기고 있는 시인인 것 같아요.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을 것 같아요.

 

    ▶ 준 : 구로구 오류동의 마트에서 배달을 이 년 정도 했어요. 대학 등록금을 제가 알아서 벌어야 했거든요. 낮에 학교 다니고 밤에 일하는 생활을 오래 했어요. 일하면서 우리는 굉장히 낯선 경험들을 많이 하잖아요. 하다못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만 해도 정말 기상천외한 경험을 겪잖아요. 근데 그것들이 시가 되지 않아요. 시로 들어오면 반드시 망해요. 제가 영등포의 어느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동네에 걸인 분들이 많았어요. 그분들은 편의점이 따뜻하니까 술을 사선 편의점 바닥에서 드세요. 자꾸 저보고 한잔 하라고 하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그런 긴박하고 생생한 경험들은 오히려 시가 안 되더라고요. 대신 우리가 일을 할 때면 ‘내가 오늘 과연 생산적인 일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잖아요. 그래서 집에 오면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들잖아요. 저에겐 그게 바로 시 쓰기였어요. 노동의 다양한 경험이 시에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고 싶다는 강한 욕망의 본질을 제게 남겨 주는 것 같아요.

 

    ▶ 창은 : 일은 자신을 소모시키죠. 그래서 빈자리가 생기잖아요. 근데 박준 시인은 그 빈자리를 시로 채운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게임으로, 술로, 책 읽기로 채우고요. 박준 시인은 그 빈자리를 문학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특수한 경우이죠. 박준 시인의 말처럼 생활 속의 생생한 경험들이, 즉 삶이 곧장 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한 역설이란 생각이 듭니다. 박준 시의 특징은 이야기가 있는 시, 내러티브가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어요. 식민지 시대에 임화라는 시인이 단편 서사시라는 개념을 쓴 적이 있는데 박준 시인에게는 서정 서사시라는 개념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다른 사람의 삶을 발견하고 그 삶에 다가서려고 하는 시편들이 많아요.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경험들이 궁금합니다.

 

    ▶ 준 : 등단 전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자극적인 시를 쓸 수 있을까 더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때 우연찮게 이런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시들이 등단이 잘 된다는 게 보였어요.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옥탑방, 지하방처럼 삶의 비애들이 배어 있는 장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이 등장하는 시인 거죠. 그렇다면 나도 폐지 줍는 노인, 병원 나이롱환자에 대해 시를 써보자. 그래서 취재를 하려고 교통사고 전문 병원에서 죽치기 시작했어요. 그런 병원 로비는 낮보다 밤에 활성화가 돼요. 병원 주위에 있는 PC방, 당구장, 술집들이 불야성을 이루고요. 링거를 꽂고 PC방에 앉아 있는 환자들이 있어요. 거기 앉아 있다 보니까 새로운 사실들을 수집하게 됐어요. 노트에 기록했죠. 근데 그 기록들을 가지고 어떻게 시로 쓸까 고민하는 찰나, 처음으로 자의식이 발동하더라고요.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시를 써도 될까. 내가 함부로 발화해도 될까. 이른바 시를 못 쓰게 하는 자의식에 빠지게 됐어요. 때마침 제가 문화관광부에서 우리 시대의 장인들을 찾아서 그들의 일대기를 쓰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홍천에서 매잡이 사냥을 하는 분을 만나게 됐어요. 그런데 이분이 말씀을 안 하시는 거예요. 제가 귀찮게 하면 소리를 지르며 저를 막 때려요. 처음엔 그분이 농아인 줄 알았어요. 근데 매잡이가 끝나면 자주 가는 술집이 있는데 술집 주인에겐 말을 하더라고요. 근데 저한테는 한 마디도 안 하시는 거예요. 도저히 그분을 인터뷰할 수가 없으니 글을 쓸 수도 없는 거죠. 근데 담당자가 반드시 글을 써야 한다는 거예요. 아예 소설을 쓰란 얘기죠. 별수 없이 내가 이 사람을 잘 모르지만, 앞으로 이 사람이 이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서 소설처럼, 시처럼 글을 썼어요. 그때부터 제게 중요해진 것은 시를 쓰기 위해서 사실을 수집하는 것 말고, 개별적 사실들이 얼마나 특이한가를 떠나서, 공통된 진실을 찾기 위해서 다녔던 것 같아요. 타인의 삶에서 디테일한 것들을 독자한테 보여주고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삶들이 결국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창은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의 키워드는 ‘미인’입니다. 때로는 이인칭인 듯 삼인칭인 듯 낯설면서 익숙해 보이는 인칭대명사 ‘미인’을 사용해서 시를 쓰는 시인. 「꾀병」에 나타나는 ‘미인’처럼요. 시인의 목소리로 그 시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 「꾀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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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은 : 미인을 둘러싼 이야기를 해주시면 시를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준 : 미인은 한 시절 사랑했던 애인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사랑이 끝난 뒤 되돌아봤을 때의 미인이죠. 「꾀병」에서 미인이 한 말이 나오는데 사실 대단한 말들은 아니죠. 애인과 나누는 대화들을 잘 복기해 보면 쓸데없는 말들을 주로 주고받아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 상황들이 가장 무용하면서도 유용한 순간이 아닌가 싶어요. 또, 살면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밤에 고속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분이 졸고 있어요. 승객들이 기사가 얼마나 피곤한지 눈치 채고 잠을 자지 않아요. 다들 감시하면서 여러 개의 눈으로 길을 보고 있어요. 운전석 바로 뒤에 앉은 사람은 더욱 그렇죠. 그때 저는 타인들의 도움을 받고 산다는 기분이 들어요. 다 미인이죠.

 

    ▶ 창은 : 그럼 ‘당신’이 등장하는 시는 현재진행 중인 애인을 가리키는 건가요?

 

    ▶ 준 : 아직 감정 정리가 안 된 애인이랄까요. 그림처럼, 장면처럼 남아 있지 않은…….

 

    ▶ 창은 : 시에 자주 가족 이야기, 서울 변두리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도시적 감성이 밴 서정이 스며 있는 시들이 책의 중후반부에 자주 보입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 준 : 제가 은평구 불광동 언덕배기에 있는 연립주택에서 태어나서 20년 동안 살았어요. 그 동네의 집들이 한 번에 다 지어지면서 신혼부부들이 대거 입주한 동네예요. 제가 그중에서 제일 어린아이였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 어머니 같았어요. 아주머니들이 산책 나갈 때 말동무를 하기 위해 저를 데려가거나 약수터에 물 뜨러 갈 때도 제 손을 잡고 데려가는 일이 잦았어요. 예전 분들은 이상하게 아기가 있으면 젖을 물리는 문화가 있었나 봐요. 젖동냥? 엄마가 얘기해 주길 제가 동네 아줌마들의 젖을 다 물고 자랐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굉장히 싫어하는 아줌마가 있었는데, 엄마가 말씀하길, 넌 어릴 때도 그 아줌마 젖은 물지 않더라고 하시더라고요. 엄마가 스무 명이나 있다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어요. 제가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피웠는데 어쩌다 한 명의 엄마에게 걸리면 나머지 열아홉 명의 엄마에게 며칠 동안 돌아가면서 혼이 났어요.

 

    ▶ 독자 : 유년의 추억을 몇 살 때까지 기억하시나요?

 

    ▶ 준 : 기억을 메모하는 노트가 있어요. 그 공책을 정기적으로 보면서 옛일을 학습하는데요, 최초의 기억이 쓰인 날은 다섯 살 때. 그때의 기억을 열세 살 때 쓴 기록이 있어요. 제가 엄마가 해준 간장밥을 먹으면서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이때가 좋은 거겠지 이랬대요.

 

    ▶ 독자 : 습작생 시절에 일기나 메모와 같은 산문을 주로 쓰셨는데 왜 소설이 아닌 시를 선택했는지요?

 

    ▶ 준 : 시로도 부족하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충분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시라는 장르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 독자 : 얼마 전에 모 출판사의 팟캐스트를 들었는데 나에 대한 탐구가 끝났기 때문에 타인에게로 탐구 대상이 옮겨갔다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무슨 뜻인지 다시 설명해 줄 수 있나요?

 

    ▶ 준 : 사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제가 나 자신에 대한 탐구에서 어떤 대답을 얻었다는 게 아니라 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겁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존재는 누구인가, 그 고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질문에서 서양철학이 시작되잖아요. 그런데 끝나지 않을 것을 아니까 끝나더라고요. 또 하나는 시를 쓰기 위해서 일부러 하는 내적 갈등, 거꾸로 말하면 내적 갈등 때문에 시가 써지기도 하는데 그 갈등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더라고요. 혼자 분열하고 갈등하는 과정이 재미가 없어요. 차라리 타인을 보는 게 훨씬 흥미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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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은 : 담백하게 말하자면 철학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주체를 서브젝트로 접근하는 방법 즉 나 자신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방법이고요, 또 하나는 관계로서 접근하는 방법이 있거든요. 하지만 오로지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만 사유가 가능하지는 않아요. 마치 시야가 좁아지면 줌렌즈로 들여다보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죠. 때로는 접근방법이 사유의 방향을 바꿔 주기도 하거든요. 아마 박준 시인의 경우에는 주체의 철학에서 관계의 철학으로 전환되면서 시의 막혔던 부분이 다르게 표현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 제가 다시 질문을 할게요. 생활인 박준과 시인 박준, 그 둘 사이를 오가는 갈등들이 있잖아요. 그런 생활을 칠 년 정도 하셨는데, 지난날들을 복기하면 어떤가요?

 

    ▶ 준 : 출근할 때 시인으로서 자의식은 방 안에 가둬 두고 나가요. 시인으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사회에 나가면 불합리한 것에 반발하는 정도가 너무 거세요. 제가 힘들 정도로요. 지금 직장에서도 제가 시인인 줄 몰라요. 글을 잘 쓰는 사람 정도로만 알아요. 시인이 본래의 것이고 밖에선 가면을 쓰죠. 이 가면은 참 좋아요. 상처와 스트레스가 제 마음 깊숙한 곳까지 와 닿지 않아요. 다만 집에 돌아오면 다시 시인이 되죠. 근데 그게 쉽지 않아요.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거나 노트북 앞에 앉는다고 바로 시인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쓰죠. 물리적 시간이 많으면 여행을 가거나 산책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로딩 시간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없으면 가장 빠른 방법이 술이에요. 근데 문제는 딱 5분만 지속된다는 거예요. 5분이 지나면 술을 더 마셔서 취하거나 피곤해서 잠들거나. 하루 중 그 5분이 정말 보석 같은, 제겐 더할 나위 없이 창의적인 시간이거든요. 그 5분 사이에 전화가 오면 정말 창의적인 헛소리를 하고, 문자를 보내면 기이한 문자를 보내고, 인터넷 서핑을 하면 창의적인 지름신이 와서 생각도 못 했던 물건을 사게 돼요. 전 백열등을 좋아해요. 근데 백열등이 화재의 위험도 있고 전기세도 많이 나온대요. 그래서 어젯밤에 문득 LED인데 백열등 효과를 내는 건 없을까, 궁금하더라고요. 찾아봤더니 당연히 있더라고요. 바로 주문했어요. 지금 배송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창은 : 갑자기 박준 시인의 쇼핑 리스트가 궁금해지네요. 마치 접신하듯이 시가 강림하는 5분. 가장 화려하게 불꽃이 발하는 5분. 엄청난 에너지가 응축된 시간이라는 건데, 사실 그런 시간들이 가만히 있는데 오지 않거든요. 시인이 일상에서 이미 시와 굉장히 맞닿아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겁니다. 부럽습니다. 등단작이 「모래내 그림자극」, 「휴일」, 「유성고시원 화재기」, 「찌그러진 곳 펴드립니다」, 「탑」이었어요. 근데 시집으로 묶이면서 「탑」은 「날지 못하는 새는 있어도 울지 못하는 새는 없다」, 「찌그러진 곳 펴드립니다」는 「이곳의 회화를 사랑하기로 합니다」로 제목이 바뀌었네요?

 

    ▶ 준 : 제가 등단하면서 서운한 게 하나 있었는데요. 그때가 2008년 여름이었어요.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축하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2차를 촛불집회 현장으로 가자는 거예요. 전 경황이 없었는데 일단 따라갔어요.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려 보니까 저 혼자만 덩그러니 있더라고요. 선생님들은 다 사라지셨어요. 전번도 없고요. 그 수많은 군중들 사이를 찾아다니다가 혼자 집에 왔어요. 그때 예감했어요. 내가 오늘 이렇게 혼자 헤매는 것처럼 시인으로 산다는 것도 이렇겠구나……. 제목을 바꾼 데는 나름 전략이 있었어요. 제 시의 제목이 낙서 반달 동생 꼬마 파주 이런 식으로 두 글자인 경우가 많은데, 자칫 성의 없어 보인다고들 해요. 근데 그런 제목이 가지는 변별점이 분명 있어요. 한편으로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서 독자들을 유인하고 싶지 않았고요. 문예지의 목차를 펼치면 한결같이 길고 멋있는 제목들이에요. 그 가운데 두 글자에 불과한 제 시의 제목이 목차에서만은 튀어 보이더라고요. 근데 이 시들을 시집으로 묶다 보니 제목이 다 두 글자라서 동시집 같았어요. 편집자가 용납을 못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시를 다시 천천히 읽으면서 시 속의 문장들을 제목으로 옮겨왔죠. 원래 이 시집의 제목도 ‘미인’이었어요.

 

    ▶ 창은 : 등단 초기의 시들이 현상을 깊이 관찰하면서 모던한 언어들이었다면 시집에 묶이면서 전반적으로 굉장히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한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변화의 지점이 있었나요?

 

    ▶ 준 : 등단하자마자 수많은 군중 속에 버려진 기분을 겪으면서 시 쓰기가 더 외로워졌어요. 그래서 시 쓰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했어요. 시가 안 써질 때 공통적으로 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한 편의 시를 조각조각 분할한 뒤 소제목을 달아서 그 소제목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또 한 편의 시가 만들어지는 것.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형식에 기댄다거나 형태에 기대는 느낌이 적지 않죠. 그런데 그래 봤자 제가 또래 시인들의 감각을 따라갈 수가 없더라고요. 그 순간 모던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정공법으로 가겠다, 라고 결심을 했어요. 의식적인 기법들을 포기하면서 제 몸을 찾을 수 있었죠.

 

    ▶ 창은 : 그러한 작업들이 곧 자기 발견의 과정이죠. 그게 자기 시를 찾는 과정이고요. 저는 자주 이런 말을 해요. 좋은 문학작품이란 없다. 더군다나 착한 문학작품도 없다. 시인이 자기가 발견한 세계를 시로 쓰는 것, 그게 바로 개성이고 문학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죠. 그 과정이 첫 시집에 담겨 있고요. 혹 좋아하는 시인, 부러워하는 시인 있나요? 자기도 모르게 닮지 않으려고 하면서 닮아 가는, 불안의 친연성이랄까요?

 

    ▶ 준 : 이시영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서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분의 시 형태가 저보다 짧은데도 불구하고 담겨 있는 이야기는 엄청나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에 대한 태도는 이문재 선생님께 많이 배웠어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분에게 많이 배웠어요. 무엇보다 생물학적으로 저보다 열 살 정도 많은 시인들, 김경주 신영목 이병률 이영주 이런 분들의 작품을 정말 많이 읽고, 따라 썼어요. 등단 후에는 의식적으로 따라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이미 그 자체로 영향을 여전히 받고 있는 거겠죠.

 

    ▶ 창은 : 광주, 해남, 통영 등등 여행의 풍경 속에서 깊이 스며들어가 있는 공간들이 자주 등장해요. 도시적 감각과 향토적 감각의 차이를 분명히 느낄 텐데, 그런 시적 개성이 드러나는 계기나 상황이 있었나요?

 

    ▶ 준 : 사실 저란 사람은 취향이나 개성이란 게 별로 없어요. 나란 인간이 어떻게 개성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돈도 없고 해서 우리나라 여러 곳을 여행했어요. 근데 문제는 또 가본 데만 간다는 거죠. 한번 통영을 가면 지겨워질 때까지 여러 번 찾아가요. 태백이란 곳도 그렇고요. 태백의 인구수가 엄청 줄었어요. 진폐증 환자들이 많이 계세요. 「태백중앙병원」이란 시에 아버지가 광부로 등장해요. 저의 아버지가 광부냐고 누가 묻기에 아니라고 했더니, 시에 거짓말해도 되냐 그러더라고요. 혼자 태백을 갔는데 할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태백중앙병원에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얘기들을 듣다가 이 비루하고 위험했던 삶이 우리 아버지의 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과도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결국 도시와 도시 아닌 곳의 차이는 크게 다르지 않은 거죠.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이문재 선생님한테 자랑했거든요. 근데 이문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이거 물수제비가 잘 떠지냐? 그러곤 전화기가 아무리 바뀌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 둘이 되지 않고, 내 앞으로 오지도 않으니 달라진 건 없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본질적으로 달라질 것도 다른 것도 없다는 것을 여행하면서 더 잘 알게 되었어요.

 

    ▶ 창은 : 요즘 시인들의 공통 감각이라면 낯선 언어들이 시에 들어옴으로써 정서적 긴장을 유발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생산력을 독자들에게 이끌어내는 게 트렌드랄까요? 그런데 박준 시인은 세상에 밀착해서 서정적 아름다움 내지는 언어로 다독여 주는 것 같은 느낌들이 보여요. 박준 시인이 바라보기에 언어적 불협화음 그리고 서정적 동일시라는 관점에서 자기의 입장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 준 : 모든 시인들은 질문에서 언급된 특징들을 다 가지고 있지만 비율의 차이인 거죠. 제가 우리 시대의 멘토들의 계보를 따져 보면요, 1세대 웃음전도사 황수관, 2세대 구성애? 요즘은 강신주? 이분들은 대중들에게 인지적 충격을 던져 주는 분들인데 대중들이 이분들을 소비를 하더라고요. 낯선 감각 새로운 감각을 제시하는 게 매우 중요한 과업이긴 하지만 그런 낯섦, 새로움보다 그 반대의 것들에 전 더 많이 끌려요. 오히려 새로워져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지 않음으로 해서 내적 갈등을 피해 나갈 수 있었어요. 갈등보다는 합일을 추구하는 사람인 거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싸움을 싫어했어요. 싸움을 안 하니까 맞지도 않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돌이켜보니까 아예 말을 잘 안 했던 거예요.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고심하는 버릇이 시에 고스란히 나타나기도 하고요.

 

    ▶ 창은 : 본인 시의 힘이 있다면?

 

    ▶ 준 : 항상 죽음을 생각하는데요, 관계의 죽음에 대해서……. 태어났다가 죽는 관계……. 오늘 이 만남도 그런 순간들이죠. 어떤 관계가 태어났다가 죽어가기도 하는. 항상 그런 관계들을 염두에 두고 시를 씁니다. 괜히 애틋한 마음을 갖고요. 모든 시에 관계가 끝나 가는 과정들이 들어가 있는데, 그 유한함이 주는 아름다움이 제 시에 카펫처럼 깔려 있진 않을까…….

 

    ▶ 창은 : 그렇다면 허수경 시인의 발문에서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치르는 일’이란 키워드는 아주 적확해요. 관계가 끝나는 절박한 지점에서 시가 다시 출발하는 것. 첫 시집을 내고 난 다음에 본인과 주변인들의 삶에 달라진 점이 있나요?

 

    ▶ 준 : 우리가 상식적인 삶을 살다 보면 타인에게 갖는 적대감과 타인이 내게 갖는 적대감 때문에 거리를 두게 되잖아요. 가끔 모르는 사람이 박준 시인이시죠, 라며 길에서 제게 말을 걸어올 때, 상대가 여성일 때 특히 좋아요. 적대감이 사라진 순간이니까요. 무엇보다 젊은 사람들이 연애를 하면서 제 시집이 아이템으로 사용되는 것을 목격할 때 정말 좋더라고요. 실제로 얼마 전에 한 커플이 결혼을 했어요. 이 커플이 일 년 동안 연애를 하다가 다시 만나지 않을 것처럼 헤어졌다가 즉 관계가 죽었다가 되살아나 다시 만나는 날, 그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주 오랜만에 함께 맞는 아침이었는데 서로가 제 시집에서 한 편의 시를 골라 읽어 주면서 새로운 시작을 했대요. 물론 저는 그 장면에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지만, 굉장히 보람을 느꼈어요. 그리고 인세가 들어와서 행복하다?

 

    ▶ 창은 : 시집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요.

 

    ▶ 준 : 제가 시집을 낸 지 이 년이 넘었어요. 팔백만 원 들어왔는데 연봉으로 치면 사백만 원?

 

    ▶ 창은 : 부러웠는데 갑자기 비참하네요.

 

    ▶ 준 : 부모님은 제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 분들이에요. 특히 아버지는 제게 간판쟁이가 되라고 하실 정도였죠. 심지어 고등학생 때는 스님이 되라고 하셨어요. 성공해라, 돈 벌어라 이런 식의 강요를 하지 않는 분들인데 요즘은 은연중에 저를 자랑스러워하셔요. 두 분이 살면서 의견이 합일되는 유일한 순간은 제 기사를 스크랩하려고 가위로 오릴 때예요.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독자 분들이 제 시에 대해서 좋게 읽었다고 말해 주실 때 행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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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 요즘 시인들은 책상에서 시를 쓰는 것 같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고학력자 시인들도 많아졌고요. 예전처럼 삶의 경험치를 많이 쌓는 시인들의 수가 희소해진 것 같아요. 박준 시인은 아닌 것 같아요. 혹시 앞으로 시 쓰는 것 말고 다른 계획이 있나요?

 

    ▶ 준 : 시인들의 학력이 높아지는 현상이 절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학력이 낮은 것도 문제가 아니고요. 시는 학력과 무관하니까요. 앞으로의 계획은 마흔 살까지 일하는 겁니다. 일을 많이 한 것 같은데 돈은 없어요. 마흔 살 이후엔 정규직으로 출근하는 일을 하지 말자, 이게 유일한 계획입니다. 한때 막걸리만 먹고 살자, 이런 식의 결심을 한 적이 있었어요. 일부러 시인의 객기를 가져 보려고요. 그래야 시인인 것 같았거든요. 반대로 시와 아주 동떨어져서 경제 활동만 열심히 해서 많은 돈을 벌 때도 있었는데, 불행하다는 느낌은 똑같은 것 같아요. 그래도 돈 많이 안 벌고 시를 쓰면서 사는 게 비교적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래서 마흔 이전까지만 불행하게, 그 이후엔 조금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죠. 그러려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하고 더더욱 자식도 가져선 안 되는데……. 암튼 그런 현실적 욕망들과 부딪히고 있습니다.

 

    ▶ 창은 : 결혼도 하고 싶고 자식도 갖고 싶다는 이야기군요.

 

    ▶ 준 : 네.

 

    ▶ 독자 : 시집에 실려 있는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 준 : 누나가 있었는데,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떴어요. 그러니 그건 제가 쓴 시가 아닌 거죠. 사진도 제가 찍은 게 아니니까요. 표지 뒤의 이미지로 쓰면 어떨까 싶어서 메일로 보냈는데, 편집자가 이 사진에 생몰연도를 넣으면 시가 되지 않을까, 조언을 했어요. 저는 시가 어떤 형태를 갖는 게 반칙인 것 같아 망설였는데 편집자의 말이 맞더라고요. 결국 이 사진은 죽은 누나가 써준 시이기도 하고, 편집자가 써준 시이기도 한 거죠. 미인이란 말, 이 시집을 관통하는 그리움이 누나 때문은 아닙니다. 누나가 살아 있을 때 제 시를 가장 먼저 읽어 준 독자였는데 그때 이미 저는 미인이라는 연작시를 쓰고 있었어요. 이 그리움은 누나보다 더한 그리움, 가장 사랑하는 상대와의 관계, 누구를 사랑할 때 한 시절 좋았던 나의 모습에 대한 그리움이지 누나만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독자 : 지금 사랑하는 상대가 있는지?

 

    ▶ 준 : 소개시켜 주시길.

 

    ▶ 독자 : 시에서 사진을 차용하는 게 반칙 같다는 말을 하셨는데요, 시는 모든 학문과 예술의 기본 바탕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다양한 장르와의 접목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작업이 시의 대중화에 기여하지 않을까요?

 

    ▶ 준 : 저는 시만큼 대중화된 장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반칙이라고 한 것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다른 예술 텍스트에 기대어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의심이죠. 작품이 최초로 만들어질 때는 오롯이 혼자 힘으로 세상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쉽게 쓰이는 것을 경계하자는 뜻에서 말한 겁니다. 완성된 후에는 어떤 장르와 연애를 해도 상관없어요. 사진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

 

    오창은 평론가의 마지막 인사말로 행사는 끝났다. 박준 시인의 말을 다시 옮겨 보면, 인터뷰가 진행되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을 두고, 그는 어떤 관계가 태어나는 순간이라고 명명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대답하는 일들의 반복 속에서 시인과 독자 사이를 넘나드는 관계가 태어난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는 관계도 엄연히 있을 터. 그 순간이 모여 시가 되는 거라면, 거기 모인 사람들은 잠시 ‘시’를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두가 ‘미인’이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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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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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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