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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문학은 시장권력과 테크놀로지의 압박을 돌파해야 한다’

  • 작성일 2014-05-01
  • 조회수 2,381

 

 

<연속좌담 2> 어떻게 문학이 변하니?

 

‘문학은 시장권력과 테크놀로지의 압박을 돌파해야 한다’

 

 

 

 

    《문장 웹진》의 두 번째 연속좌담이 ‘매체 환경의 변화와 문학의 변화’라는 주제로 개최되었습니다. 지난 연말에 진행된 좌담 원고를 이제야 올리게 되어 독자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당시 좌담회에는 김미정(문학평론가), 김민정(시인), 김중일(시인), 정우영(시인), 허희(문학평론가), 그리고 사회자로 문학평론가 오창은(《문장 웹진》 편집위원)이 참여했습니다. 인터넷과 SNS 등 매체 환경의 변화가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 독자와 함께할 수 있는 문학의 대중적 실천, 정책적 부분에서 가능한 문학 대중화 실천 등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뤄졌습니다. 자유로운 목소리로 문학 현장의 상황을 전하는 이번 좌담 내용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일시 : 2013년 12월 10일(화) 저녁 6시 30분
     ● 장소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회의실
     ● 사회 : 오창은(문학평론가)
     ● 좌담 : 김미정(문학평론가), 김민정(시인), 김중일(시인), 정우영(시인), 허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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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시들도 SNS에서는 단 두 줄만 떠돌아다녀요”

 

    ▶ 오창은 : 한국 문학의 현재를 점검하고, 문학인으로서 미래를 가늠하는 자리인 <어떻게 문학이 변하니> 두 번째 좌담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번째 좌담에서는 독자와 작가의 관계, 문학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논의 중 하나가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 한 사람을 만들기보다는 1만 부가 팔리는 작가 100명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서효인 시인의 제안이었지요. 그 이야기에 다들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신문보도를 보니 조정래 작가의 『정글만리』가 백만 부를 넘어섰다고 하더군요. 소설이 백만 부가 팔렸다면, 한국 문학으로는 기적이죠. 앞으로 기대하는 것은 만 부가 팔리는 백 명의 젊은 작가들이 한국 문학의 토대를 든든하게 닦아 주었으면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한국 문학에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번 좌담이 주로 담론의 층위였다면, 이번에는 구체적인 층위에서 이야기가 오갔으면 합니다. 출판계 내에 국한되지 않고 출판시장과 유통의 문제들까지 포함해서, 또 최근 많이 이루어지는 문학 행사에 관한 이야기, 소규모 문학 동호회 이야기도 좋고, 생산하는 작가들의 층위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의 층위가 만나는 지점들, 출판시장의 상황과 문학 출판과 관련된 이야기도 좋습니다.
    먼저, 매체 환경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면 어떨까요. 이건 멀티미디어와 인터넷 네트워크, 그리고 SNS 등 활자매체가 약화되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 개인들이 체감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먼저 김미정 평론가님께서 말문을 열어 주시면 어떨까요?

 

    ▶ 김미정 : ‘변화’와 관련지어 생각하자면 의외로 문학은 굉장히 보수적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돼요. ‘문학’이 초역사적인 실재가 아니라 역사적·제도적 구축물이라는 사실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드러난 셈인데도, 한편으로는 저를 비롯한 문학 관련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문학이 변한다는 것에 대해 불안감, 저항감 같은 걸 갖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죠. 이 자리에 오면서 저는 제 안의, 혹은 문학 안의 양가성이 또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도 좀 궁금하네요.
    오창은 선생님이 매체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확실히 문학의 변화는 관념 수준이 아니라 물질적 조건, 환경들 측면에서 체감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글쓰기만 하더라도 종이-펜이냐, 모니터-키보드냐 차원뿐 아니라, 블로그냐, 페이스북이냐, 트위터냐 등의 차원에서도 각기 다른 몸으로 글을 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거든요. 여기에 읽기, 활자 텍스트의 향유방식의 변화에 대해서까지 생각하면 이전에 유년의 저를 이끈 그 문학과 지금의 문학은 분명 다른 것이고요.

 

    ▶ 오창은 : 독일 사상가 발터 베냐민은 매체 환경의 변화와 글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한 사람입니다. 그의 고민은 ‘어떻게 쓰인 글이 물질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었지요. 지금 사이버 시대라고 하지만, 발터 베냐민은 20세기 중엽에도 ‘작가들에게는 글이 써짐으로써 물질성을 갖는 문제들’에 대해 예민한 생각들을 펼쳤어요. 글은 써짐으로써 물질성을 갖는다, 멋지지 않나요? 우리는 쓰이는 방식의 변화가 우리들만의 문제인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글이 쓰인다는 것에 대한 성찰은 이미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매체 환경의 변화는 우리 시대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온 ‘변화와 적응’이라는 측면에서 객관화시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마치 인터넷 사이버라는 매체 환경은 인류 역사에서 유례가 없었던 급격한 변화인 것 같지만, 발터 베냐민 시대에도 사진의 등장과 인쇄복제술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끼며 똑같은 고민을 했던 것이지요.

 

    ▶ 허희 : 좌담 제목이 <어떻게 문학이 변하니>인데,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대사를 패러디하신 거 맞지요? (웃음) 이것은 변심한 한은수(이영애)를 향한 이상우(유지태)의 애절한 토로입니다만,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하는 사람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변하는 거다.”라고 분석을 하더라고요. 저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데 이를 문학과 연결 지어 본다면 <어떻게 문학이 변하니>라는 문제는 문학계 종사자 및 매체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시를 쓰시는 선생님들께서 계시니까 드리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글쓰기 측면에서 보면 워드, 즉 컴퓨터로 글을 쓴다는 게 PC통신이 활발해지기 전까지는 별로 보편화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김현 평론가가 1980년 후반에 쓴 일기에서 “서정인 문체의 비밀을 드디어 알았다. 서정인 문체의 비밀은 그의 컴퓨터다!”라고 했을 때 손으로 쓰는 글이 아니라 컴퓨터로 쓰는 글의 차이를 지적한 것인데요. 저는 뇌에서 손으로 바로 이어지는, 말하자면 손이 먼저 움직이는 글쓰기가 요즘 시인들의 시 쓰기에도 영향을 준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기성세대에 비해 지금 세대는 손보다는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게 훨씬 더 익숙한 사람들이다 보니, 근래에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시의 산문화 경향은 시인들이 시를 쓰는 도구 자체가 변한 요인도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 오창은 : 어때요? 지금 혹시 원고지에 쓰는 분 계신가요?

 

    ▶ 김민정 : 저, 저요. 글쓰기를 컴퓨터로 시작했던 사람인데 첫 시집을 내고 난 후부터는 웬만하면 원고지에 쓴 뒤 컴퓨터로 옮기려 노력하고 있어요. 몸과 마음에 부지불식간 불꽃이 일어 시를 쓸 수 있던 건가, 아니면 손끝과 자판이 만나는 순간 나도 예상치 못한 내 안의 힘이 나를 끝없이 시로 몰고 간 건가, 그 고민을 처절히 좀 했었거든요. 무엇보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고요. 그러다보니 길 위에서 시와 맞닥뜨릴 순간을 자주 도모했던 것도 같아요. 그런데 수요가 없어서 그런가, 200자 원고지 디자인이 너무 후진 거예요. 그 위에 뭔가 쓰려고 하는 자체가 스트레스기도 했어요. 다행히 600자, 800자, 1300자 원고지는 좀 달랐어요. 일단 촘촘했고, 여러 번 접다보면 나름의 간지도 나왔고요. 어떤 향수가 불러일으킨 변화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원고지 모양새를 속지로 한 노트도 예쁜 게 꽤 나와요. 사 모으는 재미도 있고, 쓰고자 하는 테마별로 노트를 정리할 수 있어 좋고요. 참 시를 제외한 칼럼이나 에세이 등은 휴대폰으로 몇 년째 써오고 있어요. 제가 자판 느낌이 살아 있는 블랙베리 마니아였거든요. 아 블랙베리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금 부활할 수는 없는 걸까요.(웃음)

 

    ▶ 오창은 : 정우영 선생님 어떠세요? 원고지에 쓰세요? 아니면?

 

    ▶ 정우영 : 아니, 어설픈 타자로 치죠.

 

    ▶ 오창은 : 김중일 시인은요?

 

    ▶ 김중일 : 현재 저는 당연히 컴퓨터로 하고 있고요. 시를 쓰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90년대 중반까지는 저도 손으로 썼었는데요. 일단 매체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 개인적 경험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제가 대학에 입학한 1996년에는 저의 경우 학과 리포트를 손으로 써서 냈었어요. 당시는 워드로 타이핑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저 역시 1998년에 군대에 갔는데 행정병으로 근무하면서 처음 타자를 배웠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 사이, 다음과 같은 주요한 포털 사이트들이 생겨났을 거예요. YES24 같은 인터넷 서점도 아마 그 무렵 생겨났을 테고요. 선배님들처럼 저 역시 대학 1, 2학년 때는 시집을 구매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어 교보문고나 종로서적 등 오프라인 서점에 다녔어요. 인터넷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실제로 저의 경우 인터넷과 서점의 결합을 상상해 보았는데, 그것이 정말 현실이 된 것이죠. 저의 경우는 청소년기를 지나 막 성인이 됨과 동시에 거대한 과도기를 경험하게 된 것이에요. SNS를 비롯한 지금의 두드러진 매체 환경의 변화보다도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당시가 더 가파른 변화였어요. 제가 성인이 되고 처음에 문학에 대한 습작을 시작했던 1990년도 중후반부터 2000년도로 이어지는 세기말에 찾아온 인터넷 환경, 다음이 생기고 한메일에 가입하는 등 여러 포털사이트가 생겨나고 급속히 활성화되던 그 당시에 겪은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매체 환경의 변화가 개인적으로는 더 충격적이지 않았나 싶고요.
    인터넷 공간이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정확치는 않지만 아마도 그 무렵 출판사들의 홈페이지도 하나 둘 생기지 않았을까 싶고요. 미니홈피나 블로그 같은 중요한 플랫폼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문학의 유통에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2005년에 출간된 이병률 시인의 『끌림』이라는 산문집이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도, 홍보라는 측면에서는 당시 유행했던 미니홈피를 통한 확산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고요. 전에 없었던 방식으로 홍보가 이루어지게 된 거죠.
    그런 순기능도 있는 대신, 미니홈피나 블로그,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문학 작품들의 경우 점점 행과 연이 무시되는 시, 오탈자를 매단 채 계속해서 다른 페이지로 복제되어 확산되어 버린다는 등의 문제점을 낳았어요. 최근 매체 환경을 대표하는 SNS의 경우는 당시의 그런 문제점을 포함하여 더욱 잘게 쪼개져서 작품을 유통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한 편의 시에서 독자가 개인적으로 인상적이라고 생각되는 극히 일부를 SNS에 올리고 그것이 계속 리트윗 되는 식이죠.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면, 제가 다소 긴 시를 한 편 썼는데, SNS에는 단 두 줄만 떠돌아다녀요. 작품의 중간에 끼어 있는 감각적인 추임새 같은 그런 문장이었는데, 그것만 발췌되어 읽혀지다 보니까 말미에 같이 붙어 다니는 시의 제목과는 호응이 잘 안 되는 거죠. 근데 제목은 왜 이걸까? 하는 괴리가 생기는 거죠. 책을 잘 사지 않는 이른바 SNS 시대인데, 작가 입장에서는 창작된 한 편의 완결된 작품으로서의 시가 그나마도 온전히 전달되고 있지 못하는 거예요.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제는 점점 작가가 어떤 창작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탈고했더라도, 소비되는 방식은 그것과 무관한 거 같아요. 예전엔 그래도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의미를 독자가 가급적이면 찾아가고자 했던 소비라면, 이제는 문학이 소비되는 방식에 작가의 의도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바야흐로 그런 문학 환경이 된 거 같아요. 예나 지금이나 독자의 손에서 작품은 독자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아쉬운 점은 앞에서 말했듯 독자의 손에 들린 그 작품이 물리적으로 이미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는 데 있어요.

 

    ▶ 오창은 : 중요한 얘기인 거 같아요. 실제 경험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부분이고요. 인터넷 환경 속에서는 시는 새로운 중흥기를 맞이한 거 같아요. 시가 변화에 잘 적응하고 있느냐는 차치하더라도, 시를 향유할 수 있는 폭은 훨씬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요. 문학의 중심축이 소설에서 시로 옮겨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지요. 비평의 역할은 더 축소되고 있지요. 독자와 작가가 바로 직접적으로 소통함으로써 매개자이자 평가자라고 할 수 있는 비평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이죠. 비평이 그다지 필요 없어지는 상황이라고 할까요. 사실, SNS에 소설이나 시는 일부 올라와 있지만, 평론이 올라오는 일은 거의 없거든요. (웃음)

 

    ▶ 다른 사람들 : 잘 쓰면 올라와요. 평론도 잘 쓰면. (웃음)

 

    ▶ 오창은 : 그럴 수 있겠네요. 분발하겠습니다. 처음 스마트폰이 보급되던 시기에 있었던 일이에요. 한 시인이 시 낭독회를 하는데 따로 원고가 없는 거예요. 상당히 긴 시였는데, 걱정이 돼서 물어봤어요. ‘너는 네가 쓴 시를 다 기억하고 있냐?’라고요. 그러자 그 시인이 ‘아니에요. 스마트폰으로 보면서 하면 돼요.’라는 거예요. 지금은 뭐 일반적이지만 처음 봤을 때는 많이 놀랐고 인상적이었어요. 그만큼 매체 적응력이 뛰어난 문인이 시인들인 것 같고, 가장 경직되어 있는 문인들이 평론가들인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은 어떠세요?

 

    ▶ 김민정 : 글쎄요. 시가 매체에 적응력이 뛰어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어요. 소설이나 평론, 혹은 희곡에 비해 짧게 후려치고 가는 문장들을 운명처럼 끌어안고 있는 장르가 시니까 시는 그래도 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전부터 그렇게 시를 써왔고 지금도 사람들이 굴릴 문장들을 감안해서 시를 쓰지는 않거든요.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소설이나 평론 가운데 진짜 이거다 싶은 문장들은 시 못지않게 소개되고 있다고 봐요. 다만 그 한 줄 두 줄이 한 권의 시집, 한 권의 소설, 한 권의 평론을 대변하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잖아요. 문제는 그 한 줄 두 줄로 한 권의 책을, 한 사람의 작가를 다 안다고, 알겠다고 치부해버리는 문화의 소비 태도가 문제인 것 같아요. 음반만 봐도 그렇잖아요. 예전에는 좋아하는 뮤지션이 있다고 할 때 그의 음반을 사서 그의 전곡을 다 들어보고 그 안에 저마다 좋아하는 노래가 달랐을 때 뭔가 완전히 소유한 것 같고 팬심이 확인된 것 같은 그런 낭만도 있었다면 요즘엔 누구 나왔대, 누구 노래가 좋대, 누구 노래 다운받자, 딱 한 곡으로 쉽게 한 뮤지션의 세계가 정리되어버리는 경향이 짙은 것 같아요. 저만해도 한창 공부할 때 누군가 나 모르는 작가, 나 모르는 책을 얘기하면 무지하게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학교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서점이나 음반 코너에 들러 몰래 그 문화적 향유거리를 빠르게 흡수하곤 했는데요, 요즘엔 모르는 게 있으면 일단 검색을 해요. 바로 답을 알려준단 말이죠. 착각은 바로 그 순간에 이뤄집니다. 다들 모르는데 안다고 대충 넘어가게 되는 안도감이요. 저는 저를 포함한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상당히 헐벗었다고 생각하는데 쉽게들 인정하지 않는단 말이죠. 사실 필요를 따진다면 소용을 따진다면 시, 문학…이라는 게 이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 얼마나 콧방귀 나는 얘기겠어요. 혼탁한 시대일수록 무용한 예술과 예술가의 존재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지는 않을 거예요. 혼의 갈증이란 것을 풀어줄 유일한 열쇠가 바로 예술일 테니까요. 어쨌든 저는 오늘도 소유와 소비라는 소자돌림에서 시소를 타는 것만은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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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나 소설보다 페이스북이 훨씬 재미있는 시대”

 

    ▶ 허희 : 비관적인 말씀을 하셨지만, 김민정 선생님은 모 일간지에 <시가 있는 아침> 연재를 하셨잖아요? 저는 신문 지면에 좋은 시가 소개되고, 그 밑에 감각적인 해설이 부기되어 있는 걸 보면서 이러한 시도가 조금이라도 독자들에게 문학적인 영향을 끼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민정 선생님은 암담한 문학 시장 상황에 절망하시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러 노력을 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합니다.

 

    ▶ 김민정 : 말은 시니컬하게 했지만 저야말로 문학, 특히나 시에 대한 애정이 과하게 들어찬 사람입니다. 바쁜 와중에 왜 연재를 맡았냐 하면 맞아요, 우연히 시에 기댄 독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되도록 짧은 시, 길지만 한 토막 정도 옮겨도 이해가 되는 시, 그리고 시를 말씀이 아닌 일상에서의 발견 정도로 받아들이게끔 해설도 만만하게 써봤지요. 그 작업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간간 독자들에게서 이메일도 받고 신문사로 걸려온 전화도 대신 전달받으면서 의미가 있구나 싶은 안도는 했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왜 내가 말하는 시, 시란 장르를 마치 처음 접하는 사람들처럼 신선함을 요지로 받아들일까. 우리가 시 교육을 안 받거나 못 받고 산 건 아니었잖아요. 그럼 대체 학교 다니면서 우리가 배운 시는 뭔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독서의 훈련이란 것이 너무도 중요하다는 얘기인데, 우리들에게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가르쳐준 선생은, 교육은, 거의 없었잖아요. 세상의 모든 책을 교과서이자 시험지로 삼는 프랑스와 달리 우리들의 책은 어떤가 하고 보자고요. 답 없어요, 참.

 

    ▶ 오창은 : 논쟁적인 부분이 제기되었네요. 그러니까 아까 얘기했지만 저는 한때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급격한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문학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수동적이었다, 매체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컴퓨터, 스마트폰 이런 기구들이 문학과 결합할 수 있는 과정에서 너무 무력했다는 것이죠. 테크놀로지가 압도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서, 그것에 대응하거나 적응하는 데 너무 무력해서 지금에 이르지 않았나 싶어요. 기술과 정신이 융합되지 않은 채 테크놀로지에 압도되어 온 것이죠. 그것이 다시 순환해 융합이다, 창조경제다 뭐 이런 것들이 정책적인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것의 맥락이 뭐냐면 기술 개발의 비약을 위해 문학이나 인문학적 자산이 다시 필요하다는 것인데, 웃기는 순환이지요. 거의 20여 년 동안 문학 독자들, 창작자들, 문학의 정신적 가치나 인문학적 가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속수무책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봐요. 또 다른 측면에서는 우리가 일종의 퇴화하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방치했고, 적응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반성도 해봐요. 예전의 방식대로만 생각을 하다 보니깐 출판시장이 오히려 위기상황이 된 거 아닌가 하는 거죠. 그러니까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세만 생각하고, 2차 저작권이라든가, 문학의 향유라는 측면이 간과된 부분도 있지요. 좀 더 논쟁적인 얘기를 해보지요. 아까 시의 부흥이란 얘기를 했잖아요? 반대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시는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대응하고 있어요. 하지만 시가 인터넷이나 SNS에서 향유되는 방식은 놀라워요. 그 어떤 제한 없이, 시인의 동의나 출판사의 동의 없이 무한 복제되고 있잖아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어떤 문화적이고도 정책적인 해결 방향은 없는지 고민해 봐야 해요. 프랑스나 일본 등 외국의 사례를 검토해 봤어요. 작가가 글을 쓰고, 그것이 향유되는 과정에서 문화 생산자에게 그 대가가 지불되는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어요. 꼭 사용자가 지불하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공적 영역에서 환급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지요.

 

    ▶ 정우영 : 정치적인 것과 연관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뭔가 할 수 있는 여력이 별로 없는 시대를 거쳐 왔잖아요. 테크놀로지든 권력이든 담론이든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끌려가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대항할 수 있는 전술이 실은 없는 거예요. 그런 전략전술마저도 가진 자들, 있는 자들 쪽에서 쥐고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테크놀로지가 일반 중소기업에 있지 않거든요. 극히 일부 소수인 1퍼센트한테 편중되어 있는 거죠. 따라서 그게 일반화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여겨집니다.

 

    ▶ 오창은 : 시민사회 영역과 더불어 문인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죠.

 

    ▶ 정우영 : 시의 경우에도 인터넷 등에서는 굉장히 부흥했다고들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기존의 관점으로 보면 시가 축소된 것이라 보입니다. 인터넷이든 동인지든 발표되는 시들을 보십시오. 시인이나 독자의 구분이 거의 없어요. 시의 전문성이 사라진 거지요. 그러다 보니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시인인 전문가가 펴내는 시집은 팔리지 않습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요. 보시다시피 시는 널려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요즘은 등단하기도 쉬워서 엄청난 수의 시인들이 배출됩니다. 희소성도 없어졌지요. 시에서도 일반화, 평준화가 이뤄진 겁니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일반적인 작품이 아니라, 단 하나의 독자적인 작품이 더 의미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점으로 보면 시가 이렇게 일반화된 현재는 종래 의미에서의 활황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 그 『서울 시』라고 혹시 보셨어요? 이런 작품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시가 아닙니다. 그냥 글귀지요. 옛날에 귀여니라는 작가가 인기를 끈 적이 있는데 그것보다 이 경우가 제게는 더 충격이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시라는 이름으로 함께 부르고 있는데 이게 과연 적절한가, 우리 관념 속에 들어 있는 시와 어떻게 같고 다른가, 이런 것들을 점검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 오창은 : 전자책은 어떨까요? 아직까지는 활성화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데요.

 

    ▶ 정우영 : 전자책은 지금보다 훨씬 활성화되리라고 봅니다. 우리가 종이책에서 향유할 수 없던 수많은 정보와 콘텐츠들을 젊은 친구들은 찾아낼 거예요. 물론 기성세대는 그에 대응하기 어렵겠지요. 단순히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는 문화와 습관, 능력 등이 들어 있거든요. 전자책의 경우,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준비를 갖춘 뒤 그에 따라서 움직여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아까 김중일 시인이 컴퓨터 초창기 이야기를 했는데 저도 기억 하나를 덧붙일까요. 1989년에 제가 깡통 컴퓨터를 처음 접했어요. 하드가 없는 컴퓨터, 도스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글이 작동하는 컴퓨터지요. 불과 25년여 지난 지금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전혀 다른 세상에 저는 와 있습니다. 1989년의 그 컴퓨터, 지금 그걸 컴퓨터라고 할 수나 있겠어요? 이 정도로 많이 바뀌었는데 어찌 쉽게 대응할 수 있겠어요.
    우리끼리는 문학을 진보라고 이야기하지만 문학이라고 하는 장르는 엄청나게 보수적이에요. 어찌 보면 그 보수성 때문에 문학이 견디고 있는지도 몰라요. 문학이 계속 진보적으로 정체성을 바뀌어왔다고 하면 문학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양식이나 이런 건 다 사라져 버렸겠죠.
    그런데 요즘 그 문학의 고유성도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은 거예요. 기술이 문학의 고유성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거지요. 전자책도 전자책이지만 저는 페이스북에 주목해야 한다고 봐요. 최근에 제가 페이스북을 하고 있는데 시집이나 소설책 보는 것보다 이게 훨씬 재밌어요. 제가 하고 있었던 일의 성격이 시집과 소설집을 봐야 하는 거여서 근래 10년 동안 많은 문학 책들을 접했거든요. 하지만 시들해졌어요. 대신 그 시간을 페이스북이 메꾸고 있어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페이스북에도 감정이 실리더라고요. 일정 정도의 문장력도 필요하고 말이지요. 나랑 페이스북 친구 대부분이 시인인데 이들도 마찬가지예요. 문장을 허투루 안 써요. 문장에 어떤 폼과 감정을 넣는 거지요.

 

    ▶ 오창은 : 페이스북에 실린 글들을 모아 책으로 내기도 하지요.

 

    ▶ 정우영 : 음, 맞아요. 책 내기 좋잖아요? 반응도 알 수 있고. 반응을 보고 내용도 수정할 수 있고 하니까. 또한 페북 독자가 1차 독자가 되어 주기도 하잖아요? 게다가 광고도 할 수 있으니 페북 활용도는 더욱 높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감응과 감응이 이어지니까 파급력도 더 세지고 말이지요.
    하지만 에세이가 아닌 시의 경우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시 올리는 사람은 드물었는데 슬슬 시 올리는 분이 있더라고요. 물론 대체로 짧은 시들입니다. 긴 거는 사람들이 싫어하니까요. 문제는 그러한 시들에 대해 반응이 잘 안 달린다는 거예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시가 가진 고유의 경직성이 동의 받기 쉽지 않은 것 아닌가 싶어요. 대체로 페북은 일기장과 같은 사담의 공론화 기능이 더 강한 것 같거든요.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일기장을 다소간 뻔뻔하게 게시하는 거지요.
    일기장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을 것 같긴 해요. 지금 무언가 메모해야 할 경우, 페이스북은 참 요긴해요. 메모하다 보면 메모가 줄글로 나아가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메모뿐만 아니라, 다양한 저장창고 역할을 해주지요. 이제 페이스북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합적인 매체로 바뀌었다고 봐요. 시와 일기 등과 같은 기록에 더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메신저 기능도 들어 있잖아요. 이미지도 담을 수 있고 말이지요. 페이스북은 거대한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입체 매거진이 되어 가는 것 같아요.

 

    ▶ 오창은 : 제가 문제 제기를 하고 싶은 게 그건데요. 제가 테크놀로지의 생산자들, 문학 생산자들이 무력했다 하는 것은 보통 페이스북이나 이런 포털 사이트에 대한 대응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해요. 문학 생산자들이 보통 자신의 생산물들을 내지요. 독자들도 마찬가지고요. 독자들도 거기다 올리고 서로 공유하고 하다 보면 마치 자신이 주체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이익은 포털 사이트들이 가져가는 거죠. 1차 생산을 유지하려면, 1차 생산물이 유통되기 위해서는 가공도 되고 시장도 거쳐야 하는데, 지금은 마치 개별 사용자들의 열정을 착취하는 방식과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털 사이트는 자신들이 무슨 장을 열어 준 것인 양, 자신들이 수혜를 베푼 것처럼 권력을 행사하지요. 열정적인 생산자들이 콘텐츠를 계속 채우는 양상이지요. 실질적으로는 매체에 의한 착취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고, 문학 생산자들은 점점 고사되는 방식으로 삶의 방향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포털 사이트들이 생산자들의 열정에 기대 자본을 축적한다면, 그 생산자들에게도 부가가치가 환원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이런 부분이 고려되지 않다 보니까, 출판시장이 교란되고, 결국 물질성을 갖고 있는 종이책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이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자발적으로 열정을 착취하고 있는 문학인들이 아닌가요? 이런 메커니즘이라면 당연히 출판시장이 붕괴되는 거 아닐까요?

 

    ▶ 허희 : 오창은 선생님의 말씀은 타당하십니다만, 착취를 당하는 것은 문학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건 웹툰 작가들이 아닐까요? 그러니 문학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거대 포털 사이트에 의탁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항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지 하지 않으면 대의를 가지기 어렵다고 봅니다.
    아까 정우영 선생님께서 페이스북 등을 거론하시면서 시가 점점 저열해지는 현상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셨는데요. 하상욱 씨의 『서울 시』를 그 예로 드셨지요. 하지만 『서울 시』를 수준 낮은 작품이라고 폄하하기 이전에 독자들이 거기에 왜 그토록 열광하는가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재치 있는 말장난에 독자가 현혹된다는 것은 외피일 뿐, 실제로는 그 책에 독자를 감응케 하는 어떤 요소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서울 시』는 SNS, 특히 트위터에 최적화된 글입니다. 그 책에 실려 있는 것 중에서 “서로가 소홀했는데/ 덕분에 소식 듣게 돼”라는 구절이 있어요. 그런데 밑에 쓰여 있는 제목은 “하상욱 단편시집 ‘애니팡’ 中에서”예요. 소통의 문제를 대유행한 게임인 ‘애니팡’으로 제기한 것인데요. 소재를 차용한 별것 아닌 언어유희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현실의 단면을 포착하는 통찰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물론 통찰의 폭과 깊이에 대해 논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가 되겠지만요.
    예전에 제가 고등학교와 입시학원에서 문학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을 만난 소감을 그대로 말씀드리면, 미래의 문학 독자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들이 시에 대해서 심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시라는 말만 나와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짜증나는 표정을 지어요. 최승호 시인이나 김기택 시인 등의 좋은 시를 봐도 학생들은 ‘이 시어가 긍정인가 부정인가?’ 그러면서 시를 기계적으로 분석한 참고서 요약을 암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어쩔 수가 없어요. 시는 핵심정리를 외우고 공부하는 거라고 체감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해서 자발적으로 시를 찾아 읽어보는 것 자체가 기적이에요. 그런데 바로 자신들이 속한, SNS 세대의 시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시』를 접하고는 ‘시라는 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네. 나도 시를 한번 써볼 수 있지 않을까?’라든가, ‘이건 재미있기는 한데, 나한테 남는 건 없는 것 같아. 요즘 나온 다른 시를 찾아볼까?’ 하면서 시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서 시를 읽지 않던 독자가 스스로 더 좋은 시집, 정확히 말하면 자신과 코드가 맞는 시인을 찾아나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새로운 문학 독자의 유입과 성장은 학창 시절에 주입된 읽을거리에 대한 강박부터 제거하지 않으면 요원합니다. 감수성이 형성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문학에 대해서 질려버리게 만드는 현재의 교육 상황에서 『서울 시』도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서울 시』도 충분히 시로 향유될 수 있을 테고요.

 

    ▶ 정우영 : 전혀 그렇지 않을 거 같은데요.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씀 드린 것처럼 지금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가 달라져 버렸거든요. 시라고는 부르지만 성격이 달라져 버린 거예요. 달라져 버린 사례에는 이런 것도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불편하지만 「불편」이라는 친구들이 쓴 시와 그 이전 시가 같은가, 다른가? 어때요? 같은가요? 나보다 더 나이 드신 분들은 이와 같은 시들을 시가 아니다, 라고 얘기하거든요. 저요? 저는 시라고 여기면서 따라가려 애쓰지요. 흐흐.
    시에도 층위가 있어 차이가 나긴 하는데 정말 이런 시는 다른 거 같아요. 이렇게 트위터 140자에 맞추기 위해서 쓰인 시라든지 혹은 그 이전에 귀여니라는 친구가 쓴 소설이 작품인가, 아닌가? 제 보수성은 아니라고 여겨요. 물론 이건 그냥 내 생각입니다만, 이전 것들과 달라진 층위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기본은 지켜져야 하는 건 아닌가요.
    전 우려합니다. 이런 것들이 입문 역할로 시를 접한 친구들이 나중에 과연 최승호 시집을 들여다 볼 것인가. 저런 시들을 보고 시를 안 친구들이 도시인의 비애를 알게 될 것인가. 시의 지평을 넓혀서 이영주나 김민정의 시를 보면서 ‘오, 이건 대단해’ 이렇게 생각할까요? 제 촉수는 불안 쪽으로 흔들립니다.
    이제 갈라질 측면이 있으면 좀 갈라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맘대로 이게 ‘시다, 아니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시의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고 봐요. 저는 제가 문학과 관련되는 동안, 그와 같은 작업들은 시로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시의 공유성과 보편성을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이와 같은 것들(‘것들’이라 부르고 싶은데요, 저는)을 ‘이것이 시다!’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것도 아닌 마당에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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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이 멸종위기종 보존, 관리되는 듯한 대상이 되었다”

 

    ▶ 김중일 : 여담으로 제가 최근에 겪은 개인적인 경험을 얘기해 보자면 한 문예지로부터 신작 시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청탁서는 아니고 메일 내용에 간단한 안부와 함께 이런 코멘트가 있는 거예요. 저희는 단시 위주로 수록하고 있으니 너무 길지 않게 써달라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좀 길게 쓰는 편이긴 해요. 정우영 선생님도 방금 얘기를 하셨지만, 정우영 선생님보다 더 선배 시인인 분들께서 제 또래들 중 당시 이른바 미래파라 불렸던 시인들의 시를 두고 과격하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이것은 시가 아닌 것 같다’ 이런 얘기를 곧잘 하시는 것도 많이 들었어요. 제가 드리고 싶은 얘기는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고 독자들 개개인의 취향이 더욱 두드러지면서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시란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잖아요. 그 문제는 이미 시인들이 독자들을 선도하거나 주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린 것 같아요. 사실 SNS가 등장하기 전에는 적어도 작품 창작 과정에서 유통 매체에 의한 영향은 거의 없거나 미약했던 거 같아요. 그냥 유통 매체 자체는 어떤 유행일 수는 있어도 문학적 시류는 창작자가 여전히 주도해 갔다고 할까요. 그런데 방금 트위터 140자에 대해 얘기했지만, SNS라는 강력한 매체가 등장하고 유통 매체의 주도권이 거의 다 그쪽으로 넘어가면서, 문학 작품의 외연적인 부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까 제게 가급적 짧은 시를 요구하는 청탁도 그렇지만, 하루에도 수십 수만 명의 대중에게 노출되는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인쇄된 시들도 다 짧고 간결하잖아요. 짧고 간결한 시가 나쁘다는 건 당연히 아니고요. 수십 년 전에도 보장되었던 시가 가진 예술로서의 다양성 측면에서, 이미 조금씩 위축되고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봐요. 이미 주도권은 SNS 이용자의 손으로 넘어갔고, 극히 일부분만 도려낸 몇 줄의 시(의 일부)를 SNS로 처음 접한, 이를테면 문학 자체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에게는 SNS에 올린 시의 일부가 완결된 ‘한 편의 시’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에요.
    시인에 의해 완결된 원본으로서의 시는 발표되는 순간 실체가 희미해지고, SNS에 의해 편집되고 확산된 시(의 일부)가 잠재적 문학 독자들에게 ‘시’인 것으로 전달되는 최근에 와서 원본으로서의 온전한 ‘시’를 예술적 영역 속에서 보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 바야흐로 이제는 공공의 차원에서 지금까지보다 더욱 치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라는 것이 이제 상대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이 분출하는 예술적인 에너지 같은 것인데, 마치 멸종위기종을 보존하듯 공공 영역에서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보니 좀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요. 매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겠지만, 매체에 작품을 맞춰 갈 수 없으니까요. 아까 오창은 평론가께서도 말씀을 하셨지만, 시는 이렇게 기형적으로라도 SNS라는 매체 환경 속에서 유통되고 있는데, 평론의 경우 그마저도 저항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소외되는 듯한 느낌이 있고요.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모르지만. 소설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소설은 뭔가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가 소설가가 아니라서.

 

    ▶ 정우영 : 그냥 얘기해도 될 것 같은데요.

 

    ▶ 김미정 : 문학이 멸종위기종 보존, 관리되는 듯한 대상이 되었다는 말씀에 저도 무척 공감합니다. 안타깝고요. 한편으로는 문학에 대한 우리 안의 관념들이 시대와 함께 호흡하지 못한 측면이 분명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시 쪽이 의외로 새로운 매체들의 영향에서 나름 선전하고 있다는 말씀도 고무적이네요. 개인적으로 90년대에 대학의 문학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내내 문학은 위기였기에 문학과 위기는 언제나 짝패처럼 붙은 말로 제게는 이미지화되어 있는데요. 지금 말씀하신 것과 관련한 생각도 그때 한참 했던 것 같아요. 막연하지만, 문학 장르 중에서 가장 덜 대중적이고 가장 근본적(?)이라고 여겨지는 게 시였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의 매체들 속에서도 제일 소외되는 것이 시가 될 것이라고요. 외국에서도 시는 굉장히 급격히 축소되고 있더라, 그런 얘기도 상식 같은 얘기였고. 그런데 지금 말씀을 듣고 보니 오히려 새로운 매체들과 시의 관계는 적어도 유통 측면에서는 분명 고무적인 점이 있네요.
    평론의 경우는 매체 변화를 고려하기 이전부터도 워낙 읽히지 않던 장르다 보니……. (웃음) 지금 말씀하신 평론이란 걸 문학평론으로 한정하면 얘기하기 어려울 것 같고요. 오히려 접근이 용이해진 다양한 매체가 평론의 외연을 확장시킨 면도 분명 있다고 봅니다. 문학을 베이스로 하는 평론이 아니라 정말 다양한 영역의 평론들이 나름 공공의 아젠다를 형성하고 여론을 만드는 흐름이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문학평론의 경우, 확실히 글로서만 파이팅 하기란 어려워진 시대인 것 같아요. 글로써 독자와 텍스트를 매개해 온 역할 이외에도, 직접 텍스트, 독자, 작가를 매개하는 역할도 요구되고요. 개인적으로 한때는 자조적으로 브로커, 매니저 역할도 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한탄 같은 것도 하긴 했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게 그런 것인데 어쩔 도리가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후퇴한 것도 같고요. 그런데 이게 분명 매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터넷상의 다양한 다운로드 루트라든지 유투브라든지 등등의 매체 관련 변화로 인한 국내 음악 시장 사정과도 비슷해진 거죠. 오디오만으로 음악을 향유하지 않게 되었듯, 글만으로 문학을 향유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가수가 더 이상 노래만 잘해서는 안 되고 영화, 예능, CF 활동도 잘해야 하는 구조로 바뀌고 정착되어 간 것같이, 마치 문학이나 문학평론가도 그런 구조 속에서 파이팅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이게 평론가의 역할 변화 뿐 아니라 글쓰기 자체에도 분명 영향을 끼친 측면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문단 제도 내의 문학평론의 입지를 약화시킨 것 중 단연 꼽을 수 있는 건 인터넷 독자 리뷰들이죠. 일반 대중 독자들이 텍스트에 관여한 통로가 많아진 관계로, 스스로가 발화하고 그 이야기를 서로 유통하는 장이 인터넷상에서 이미 충분히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아요. 과거 문학의 종언 이야기가 활황을 띨 때, 더 이상 평론가의 해석을 원치 않는 소설들이 등장하는 것도 그 일례로 거론되곤 했는데요. 그런 텍스트 자체의 형질 변화 이외에도, 기존 평론의 장이 위축되어 보이는 건, 일반 대중 독자가 새로운 해석의 장을 만들어내고 자족적으로 텍스트들을 유통해 온, 이미 정착된 향유 시스템의 영향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념적으로는 전문가-대중식의 계몽적 이분법 모델에 다소 저항감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문학에 대한 고전적 믿음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체감되는 것들에 대해 아직은 제 안에서 정리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공공의 정신적·문화적 역량에 믿음을 갖는 한편으로는, “비평가에게 있어서는 동료들이 상급심이다. 공중이 아니다.”라고 한 베냐민의 올드패션한 테제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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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은 있는 것일까?”

 

    ▶ 오창은 : 좀 빠른 진행을 위해서 두 가지 주제를 묶어서 얘기를 나눠 보면 어떨까 해요. 지금 나온 것들 중에 문학에 대한 가치관이 쟁점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문학은 문학이다, 시다, 라고 얘기하는 부분에서 상반된 의견이 갈리고 있잖아요? 독자들이 읽는 것에 작가들이 적응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런 흐름에 연연하지 않고 문학적인 것에 대한 옹호가 지속되어야 하는가. 그런데 이런 논의는 이전까지는 별로 이뤄지지 않은 것 같아요. 또 문제가 되는 사항은 아까 매체 변화도 그렇고 SNS도 그렇고 시를 향유하는 방식이 바뀌면서 기존의 문학에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북콘서트 등에서 독자와 만나고 직접 접촉하려는 노력도 많지요. 문학의 현장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 김미정 : 문학적인 것에 대한 옹호 층위가 실제 유통 현장과는 무관하게 있는 것은 확실히 오늘 이 자리에서도 확인되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이 있다고 감성, 지적 훈련을 받은 세대지만 이제는 이 기준의 고수가 같은 업계 내에서만 통용되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를 점점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음과 나쁨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일관되게 문학 담당자들 내부에서 이야기된 것만은 아닌 것도 아이러니인데요. 가령, 근대문학 초창기를 떠올려 보아도 그래요. 문예지에서 이야기되는 관념, 담론 수준의 문학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로 ‘그’ 문학을 지지하는 건 그들 스스로가 말하는 문학과 무관한 문학들일 때가 많았죠. 소위 대중문학, 통속문학이라고 해서 지금도 우리 안의 이분법으로 굳어져 있는 문학들이요. 문학의 좋음을 고수할 수 있도록 그걸 물질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던 건 사실 그 ‘좋음’을 위해 타자화 된 ‘나쁜’ 문학들이었던 거예요. 좋은 문학 이야기는 문예지, 담론 차원에서 이루어지지만, 실제 그 좋은 문학의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는 건 그런 기준과는 별 상관없는 소위 팔리는 문학이라는 거죠. 전 이 시스템이 지금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건 비판 뭐 이런 거라기보다, 그저 오늘날 우리가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해 온 ‘문학’, 근대적 문학이라는 것의 태생적 아이러니라고 생각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가령 『서울 시』가 좀 전에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것도, 이런 우리 안의 양가성, 아이러니를 드러낸 경우라고 봐요. 감성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이라고 표현해서 죄송하지만, 아무튼 일반 대중은 『서울 시』를 통해서도 나름의 어떤 문학적 개안의 통로를 얻을 수 있지 않나, 그렇게 해서 시에 대해 더 알고 싶고,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나, 그렇다면 『서울 시』 같은 것도 소위 ‘좋은 시’로의 작은 통로 역할은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정우영 :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전 제 시평 에세이에 텍스트로 『서울 시』 같은 걸 쓸 것 같진 않아요. 어떤 시에 대해서 얘기해야 할 경우, 저런 류를 제 글의 소재나 테마로 삼진 못할 것 같아요. 이것이 아마도 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방향을 잠깐 바꿀까요. 우리도 이렇게 대담을 나누고 있지만 나중에 웹진에 실리는 거는 이런 식이 아닐 거예요. 굉장히 폼 나게 나올 거란 말이지. 그런데 민정 씨하고 김화영 선생하고 하는 대담을 봤거든요. 이거랑 상관없이. 몹시 날렵하고 재밌더라고.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두 분이 문학 얘기를 하지 않는 건 아니거든요. 언어 사용이나 정서의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가볍고 날렵하게 얘기를 주고받는 거 같지만 내용인즉슨 상당히 심오한 얘기더라고요. 아하, 대담을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싶었지요. 대담의 어떤 새로운 측면을 봤습니다. 제게는 참 신선한 발견이었는데 모두가 다 그렇게 되진 않을 테지요. 김민정 스타일과 김화영 스타일이 그렇게 만났기 때문에 가능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형식적인 가벼움을 가지고도 충분히 무거운 얘기를 전달할 수 있다면, 저 시들의 가벼움 속에도 무게감이 담길 수는 있겠다 싶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좋다, 싫다’의 관점에서 보면 싫은 거죠. 아마도 이 관념의 고집은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현대시의 변모 과정을 지켜본 저보다 나이 많은 시인들 대부분이 저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 오창은 : 그렇다면 출판 환경의 변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정우영 : 아, 물론 메이저 출판사들의 상업적 야욕도 이런 문학 환경을 굉장히 왜곡시켰다고 전 생각합니다. 최근에 저는 지역 시 전문지와 메이저 문예지(이렇게 표현해도 괜찮나요?) 게재 시를 냉정하게 구분해 본 적이 있는데요. 거의 다른 게 없었어요. 오히려 지역 시 전문지에 실린 시들이 더 다채롭게 활력 있어 보이더라고요. 이 정도라면 ‘메이저 문예지에 내 시가 실리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여겼습니다. 제가 보기에, 시의 경우 메이저 출판사의 에콜적 성향 쪽으로 게재 빈도가 바뀌었다고 봅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시인을 평가하지 않는 거지요. 메이저 출판사에서 봤을 때 시인이나 시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대단치 않은 거예요. 그러니 새로운 시인들을 찾아서 새로운 흐름을 투입할 필요가 별로 없지요. 그냥 그 나물에 그 밥을 돌려도 큰 문제없으리라 판단하지 않았을까요. 서글프지만 이게 현실이고 이러한 현실이 역설적이게도 지역 전문지의 강화로 나타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소소한 시 전문지가 훨씬 다양하고 재미있게 시를 실어가고 있게 된 거지요.
    하지만 소설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소위 문학적 향기가 짙은, 잘 모르긴 하지만 독자들이 찾을 수 있는 작가군은 그리 많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런 작가군을 두고 경향도 서로 다른 출판사가 재빨리, 조금 더 많은 인센티브를 주고 빼가는 거지요. 그저 팔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는 것 같아 자조적이 됩니다.
    독자들의 변화도 무시할 순 없겠지요. 독자들의 선택이 현대에서는 시가 아니라 소설입니다. 그것도 장편이었지요. 그런데 최근 그 흐름이 바뀌는 추세입니다. 400매 500매짜리 경장편(경장편이라는 말이 세상에 있을 수 있나요? 잘 모르겠지만)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요. 문제는 이 움직임이 창작자의 내부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장의 요구지요. 요즘엔 더욱이나 출판사들이 이런 추세를 작가들에게 밀어붙이고 있지 않나 싶어요. 시장 논리로 말이지요.
    이런 게 아까 오창은 선생이 말한 테크놀로지가 콘텐츠를 끌고 가는 형국과 같은 것이 아닌가 봅니다. 출판 환경이라는 테크놀로지가 문학이라는 콘텐츠를 강하게 압박하여 줄 세우는 거지요. 그 결과 소설이 가진 위상마저도 상당히 취약한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생산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개자나 소비자에 의해서 창작자가 움직여가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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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취향도 분석되고 프로그래밍화 되고 있다’

 

    ▶ 김미정 : 생산자가 아니라 매개자, 소비자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가령 지금 각 포털 인터넷 검색 시스템은 거의 자동완성 기능이 있잖아요. th를 검색하면 자연스럽게 e, t, a 같은 뒤의 글자들이 추천(?)으로 뜨는 기능이요. ‘좋은 시’라고 치면 추천 검색어가 뜨고 그러는 것 말이죠. 그 추천 검색어, 자동완성 기능은 그간 제일 많이 선택된 빈도수, 그걸 데이터베이스화한 것이잖아요. 그리고 우린 그 자동완성 기능, 추천검색어의 영향을 자연스레 받고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가령 ‘좋은 시’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검색을 했을 때, 그가 일차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건 자연스레 추천검색어, 자동완성 기능에 의한 것일 거예요. 그 추천어들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좋은 문학, 나쁜 문학 혹은 문학생산자들의 노력과는 무관한 거죠. 말하자면 많은 이들에게 선택된 시가 좋은 시일 가능성이 높죠. 그리고 웹상에서 좋은 시란 그런 식으로 유통되고 있고요. 그렇다고 해서 이게 시장에서 잘 팔리는 문학과 같은 류로 이해할 것이냐 하는 건 또 다른 문제고요.
    그리고 실제 인터넷 서점에서 오는 메일에서 추천책 목록들을 확인할 때도 아주 놀랄 때가 있어요. 특히 국내 서점보다도 외국 아마존 쪽 메일 내용에는 엄청난 위력을 느끼는데요. 그래서 아마존 한국 진출이 현실화되는 것에 대해 국내 출판계가 받을 영향도 꽤 크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아무튼, 내가 그동안 구매한 책 내역들이 분석되고 프로그래밍화 된 결과와 그것이 다른 독자들의 취향과 매치되어 향후 선택이 예상되는 결과가 너무 조밀하고 설득력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워요. 웹상에서의 내 문학적 선택이 이미 독자적으로 나만의 선택인 게 아니라, 웹상의 무수한 비슷한 독자들과 연동되어 있다는 것 말이죠. 지금 문학과 관련된 우리의 환경이 지금 이렇다는 걸 생각한다면, 좀 전에 정우영 선생님이 말씀하신, 생산자-매개자-소비자 구분도 어쩌면 좀 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게 확실한 것 같아요. 사회자님, 정우영 선생님 말씀대로 테크놀로지가 콘텐츠를 이끌어가는 상황, 나아가 정말 조밀한 시스템 안에서 우리 삶들이 재배치되고 있는 상황 말이죠. 제가 너무 논의를 추상화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선생님의 구체적 실감도 좀 듣고 싶네요.

 

    ▶ 김중일 : 심지어 전 그런 느낌을 받아요. 거칠게 이야기하면 메이저 출판사 같은 경우에 어찌 됐건 상업적인 성과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 정우영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시의 영역 같은 경우에는 마케팅을 통해 크게 기대할 게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시집(시인선)에 대해서는 그저 마치 꾸준하게 발행되는 정기간행물처럼 진행되는데 소설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 같아요. 최근에 《문학과 지성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니까 패션 잡지 《아레나》라는 매체와 협력을 해서 주목받는 작가들과 함께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더라고요. 그런 프로모션이 이제 더 이상 크게 낯설지 않지요. 아마도 《아레나》는 문학에 대해 큰 관심이 없던 잠재적 독자들도 많이 보는 잡지니까 작가 입장에서는 새로운 독자들한테 어느 정도 홍보가 될 수 있겠죠. 대여섯 명의 작가들이 제시된 테마를 가지고 소설을 쓰니 추후 한 권의 소설집으로 출간될 수 있겠고요. 소수일 수 있어도, 그 패션 잡지에서 작가들을 처음 접한 사람들의 도서 구매로 이어질 수도 있겠고요. 그 또한 조금씩이나마 문학 독자가 확장되는 것이고. 어떻게 하든 결론적으로 문학이 유통되는 여러 플랫폼 중 하나로 패션지라고 해서 나쁠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에게 ‘입다, 쓰다, 신다, 들다’라는 작품 키워드가 주어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물론 그 작가들은 프로니까 진정성을 가지고 훌륭한 작품을 쓰겠지만 이미 창작 과정에서 아주 작은 제약이라도 받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최소한 창작 과정에는 가급적 유통 매체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 좋겠다는 게 일관된 제 개인적인 바람이에요.

 

    ▶ 정우영 : 다 보니까, 그거 되게 액세서리 같은데요? 그런 느낌이 강하지 않은가요?

 

    ▶ 김중일 : 그런 프로젝트가 문인 모두가 아는 전통 있는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그리고 그게 어찌 됐건 인기 없는 장르가 되어 가고 있는 문학의 어려운 출판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출판사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순기능도 크거든요. 요즘 출판사 경영이 무척 어렵다는 말씀을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는데, 내부 사정까지는 잘 모르지만 사실인 거 같아요. 너무 자극적이고 상업적으로 마케팅을 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쉽게 비판하기에는 출판사의 어려운 사정들, 심지어 문을 닫기도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그런 자생적 노력에 응원을 보내야 할 것 같기도 해요. 모 출판사처럼 처음부터 기업 자본에 의해서 운영되다가, 몇몇 편집인의 노력으로 겨우 시작된 ‘시인선’이 팔리지 않는다고 중단되고 심지어 회사 측에서 해당 작가?시인들에게 전화를 해서 창고를 비우려고 하니 저자가로 당신의 책을 싸게 구입하라고 종용하는 일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문학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인지하고 초지일관하게 지지해 줄 수 있는 출판사는 어떤 식으로든 생존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서도 작가들의 창작의 자유가 훼손되지 않게 최대한 보호해 줄 수 있는 안전망도 필요한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부분이기도 해요. 중언부언했는데 복잡한 심정입니다.

 

    ▶ 허희 : 낯 뜨거운 마케팅에 대처하는 작가들의 자세와 독자와의 접점 마련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출판자본의 힘이나 인터넷 홍보 등은 오늘 이 자리뿐만 아니라 다른 지면에서도 많이 지적되어 왔으니까 제가 굳이 여기 첨언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런 말씀은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요. 출판 자본과 인터넷 서점의 마케팅의 방외 세력으로 존재하는 (물론 이제는 많이 공고화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일련의 서평가 집단, 말하자면 자기만의 전문 분야를 구축하고 어떤 출판 자본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취미로 하는 서평 활동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평가들이 문예지에 싣는 리뷰보다 서평가들이 개인 블로그에 올리는 글에 독자들이 반응하고 그 책을 구입하는 것이지요. 저도 평론을 쓰고 있지만 가끔 ‘내가 리뷰나 비평을 쓰면 나하고 편집자 외에 또 누가 읽을까?’라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물론 제가 쓴 글이 평론 그 자체로 매력이 없다는 이유가 첫 번째이겠지만, 제 주변에 그나마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제 글을 보여줘도 읽으려고 하지 않아요. 시나 소설을 읽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다룬 비평을 자기가 왜 보냐고 하면서 말이지요.

 

    ▶ 정우영 : 페이스북에 올려야 됩니다.

 

    ▶ 허희 : 그래서 저는 문예지에 실린 제 글을 나중에 다시 개인 블로그에 올립니다. 블로그에 평론과 리뷰를 올려 두니까 의외로 조회 수가 높더라고요. 저는 비평이 과거에 수행해 왔고 지금도 하(려)는 역할 ? 이를테면 작품을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평가하고, 문학을 통해 사회 공동체의 담론을 생산하는 등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비평이 너무 고고한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문학 혹은 비평에 대한 자존감이 어느 순간 알게 모르게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수준 높은 문학을 하고 있다. 우리가 이끌 테니 발맞춰서 따라와라.’라는 자세로 변질된 듯한 느낌도 있어요.

 

    ▶ 정우영 : 지금 민정 씨와 접점이 생기는 것 같은데요? 저쪽은 독자가 오만하다고 했고 이쪽은 창작자가 오만하다고 했으니까 둘 사이에 접점이 형성된다는. (웃음)

 

    ▶ 허희 :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가령 어떤 독자가 김민정 선생님 시를 읽었는데 “도대체 이 시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 “네가 무식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라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가 얘기하는 건 내가 보기엔 이러이러한 거 같다.”라고 같이 논의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끄는 거예요. 좋은 해설은 좋은 비평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저의 입장에서 보면 요즘은 비평을 위한 비평이 너무 많이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저도 결백하지 않지요.)
    독자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우연한 기회로 제가 북콘서트 사회를 몇 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독자들을 만나면 예상보다 반응이 긍정적이에요. 북콘서트에 오시는 분들은 그 책 혹은 그 작가에 관심이 있어 자발적으로 신청을 하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오셨기 때문인 듯합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저는 작가들이 독자와의 만남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 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상당히 고무적으로 봤던 사례는 김영하 작가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입니다. 김영하 작가가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을 때 선두에 나서서 책 낭독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지금도 높은 순위를 유지하고 있어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쓴, 뭔가 다가가기 어려운 이미지를 가진 작가라는 고정관념을 작가가 나서서 깨버리기에, 저는 김영하 작가의 인지도가 작품뿐만 아니라 독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측면으로도 구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동진 영화평론가에게 굉장히 감사해요. 왜냐하면 영화평론을 하시는 분이 팟캐스트에서 문학을 주제로 방송을 하면서 독자들과 새로운 소통의 장을 만들어 가고 있으니까요.

 

    ▶ 정우영 :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드리면, 이동진 씨가 에세이집을 냈는데 그 책이 우수문학도서가 됐어요. 근데 정말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담당자가 우연찮게 이 사람하고 통화했는데 “정말이냐. 내 책이 우수문학도서가 됐느냐” 확인하면서 진심으로 좋아하더라는 거야. 내가 문학과 연결될 수 있구나 하면서. 그래서 “아, 문학나눔이 이동진을 감화시켜서 저렇게 생각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빨간책방》 하기 훨씬 전입니다.

 

    ▶ 김미정 : 맞아요. 평론가도 이젠 마케팅도 하고 브로커가 되어야 하는 시스템 안에서 다들 더 빠르게 소진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도 많이 들었어요. 이 피로감에 다들 어떻게 대처하고 계신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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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버스 프로젝트 - 버스에 시집을 싣고 다니면서 새로운 마케팅 방법을 찾아와 보겠다”

 

    ▶ 김민정 : 저 같은 경우는 별 스트레스 없이 SNS를 해오고 있어요. 처음에는 물론 제가 만든 책들을 모두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이 분명 있었기에 어떤 강제에 의한 스트레스가 있던 것도 사실이었어요. 그런데 긍정적으로 보자니 그 140자를 저만의 글쓰기 훈련으로도 보게 되더라고요. 한편으로 저는 제 책보다 제 동료의 책을 소개할 때 무한한 에너지가 샘솟는 기질의 사람인 것도 알게 되었어요. 제가 140자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한 시인을, 한 시집을, 그런 식으로 다양한 한 권의 책을 감질나게 소개할 때 그걸 본 한 사람이 바로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장바구니에 책을 넣었다는 얘길 종종 듣기도 하는데요, 그럴 때 나름의 쾌감도 생기는 듯해요. 물론 다수의 열린 SNS에 노출되어 피로감을 얻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저는 일단 다 보고 다 알려하지 않아요. 일단 내가 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고 그 일에 목적성을 선두에 두지 않지요. 그저 좋아하는 일의 즐거움이랄까. 성향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어요. 전 시인이기보다 천성적으로 편집자가 적성에 딱 맞거든요. 다른 직업에 비유를 하자면 그래요, 맞아요, 매니저. 전 배우보다는 한 배우를 잘 보필해서 크게 키울 수 있는 매니저에 더한 욕망이 있나 봐요.(웃음)

 

    ▶ 오창은 : 열정적인 말씀입니다. 현장감이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생각해 볼 부분이 많네요. 여기서 김민정 시인이 얘기했던 부분과 연관시켜서 어릴 때 일도 좋고요, 문학과 관련되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행사나 최근에 참여했던 것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와의 만남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참고로 얼마 전 이시백 소설가랑 술을 마셨는데,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자기는 봉고차 하나 빌려 가지고 차력사하고 자기하고 한 몸이 되어 6개월에서 1년 정도 5일장을 도는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는 거예요. 뱀장사처럼 책도 진열해 놓고, 삶의 현장인 오일장에서 함께 호흡하며 책도 팔고 싶다고요. ‘시 버스’ 구상과도 닿아 있는 부분이 있네요. 이런 발상이 굉장히 의미 있다고 봐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야에서 사라진 공간이 농촌이라고 생각하고요. 농촌에서도 아까 설명했듯이 시장이라는 곳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작가가 부대껴 보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봐요. 제가 이시백 작가에게 ‘선생님, 농담이지만 참 재밌네요.’ 했더니, 정색을 하며 ‘농담 아니다, 진짜 할 거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이시백 작가 같은 경우에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발상이고 이시백 작가 소설은 그렇게 하면 먹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좀 전에 인상적으로 참여했던 팟캐스트 얘기도 나왔었고, 북콘서트도 얘기가 나왔는데요. 다양한 경험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 허희 : 저는 현재 교보문고에서 하는 팟캐스트에 패널로 참여 중인데, 작년 여름에 독자와의 만남 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작가를 모신 건 아니고 독서를 좋아하는 분들 50명 정도가 같이 모여서 책에 관련된 대화를 나누자는 취지였어요.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한 권씩 갖고 와서 교환하는 이벤트도 했어요. 무엇보다 이 행사의 특징은 독자의 능동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MC들도 모둠에 소속되어서 각자 들고 온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모두가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동질감이 독특한 연대의식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와 사회자가 나누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는 일반적인 북콘서트와는 다른 형태가 오히려 긍정적으로 느껴졌어요.
    조금 다른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뮤지션 중에 ‘재주소년’ 멤버이자, 솔로 음반을 내기도 한 박경환 씨라고 있는데 그분이 기타 교실을 열어서 활동하더라고요. 기타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주말마다 그 가수의 작업실에 와서 강습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가수들이 박경환 씨한테 “너는 그 시간에 곡이나 만들고 노래 연습이나 하지 사람들한테 강습료 받고 그러냐?”라고 몰아세우지 않을뿐더러, 기타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 박경환 씨의 새로운 팬이 되기도 하면서 ‘재주소년’ 혹은 박경환 음악의 저변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피력하고 싶은 건 예술가가 작업실에서 작품만 생산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매체 환경이 변하는데 작가의 역할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두고 작가의 위신을 떨어뜨린다는 식으로 매도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작가에게 독자는 추상적인 대상일 수밖에 없다고 해도, 작가와 더불어 같이 문학판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독자를 인식하고 어떻게든 한 명 한 명의 구체적인 독자를 확보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김미정 : 그런데 궁금한 게, 실제 그런 행사를 할 때 오는 사람들이 그냥 행사 관계자들, 문창과 학생들 아닌가요? 좀 표현이 과격해서 죄송하지만 동원된 사람들 아닌가 하는 생각을 평소 했는데요.

 

    ▶ 김민정 : 어쩌다 문학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시키는 프로그램을 자주 가동시키게 되었는데요, 그 일을 하다보면 신기한 게 오히려 문창과나 국문과 학생들은 별 흥미가 없는지 제 스승이 자리하는 자리가 아니면 별로 없고요, 각종 낭독회나 문학 콘서트 프로그램에 정말이지 다양한 직업군과 연령대들이 찾아주신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글을 전공하는 아이들은 이런 행사에 냉소적이거나 무심하거나 좀 차갑다 싶은 분위기라면 비록 글과는 관련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누구보다 책과 작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이들은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 정도로 뜨겁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다른 장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시’만 놓고 본다면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에서의 판매 전략을 다시 써야한다고 봐요. 제가 직접 경험한 걸 예로 들어볼게요. 작년 가을 와우북페스티벌 때 시집을 대거 들고 나가 팔아본 적이 있어요. 제가 일하고 있는 회사가 문학동네잖아요. 워낙 출간되는 책도 많고 또 베스트셀러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터라 보통 그런 행사 때 시집을 매대 위에 올려놓기란 쉽지가 않거든요. 한두 종이면 모를까. 그런데 제가 작심을 하고 수십 명의 작가 수십 권을 챙겼어요. 곱해보면 수백 권이잖아요. 마케터들이 3일 동안 300권 팔기는 기적이라면서 안 팔리면 어쩔 거냐고 우려를 해서 남은 책 내가 다 사겠다, 눈을 부라리며 큰소리 뻥뻥 쳐댔지요. 진짜 적금이라도 깨서 남은 책 죄다 사올 요량이었거든요. 쓸데없는 오기였지만 쓸데 있는 객기라고는 여겼어요. 바쁘게 시집을 출간한 시인들에게 시간이 되면 와주십사 요청을 드렸어요. 독자들에게 직접 사인도 해주면서 우리들은 즐거운 추억거리를 만들면 좋지 않겠느냐며 마음을 비워보자 하였지요. 물론 홍보는 SNS를 통했지요. 생각보다 많은 관심들을 가져주시더라고요. 저와 시집 편집 팀들은 사람들이 들어설 때마다 눈과 눈을 마주쳐가며 이 시집은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쓰였다, 평소 어떤 시집을 좋아하셨냐, 그렇다면 이걸 권하겠다, 침을 튀겨가며 시집 부스 안에 들어선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부스가 완전 왁자지껄, 글쎄 다른 부스에서 시끄럽다고 신고가 들어올 정도였다니까요.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 친 것도 아닌데 어쩌랴, 저는 응원차 와준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집을 직접 소개하고 사인도 해주는 풍경에 감격해서 발톱 빠지는 줄 모르고 뛰었는데요, 그게 그렇게 훈훈할 수가 없더라고요.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900권 정도의 시집을 팔고 거 봐라 하면서 도도히 손 털고 손 씻기는 했는데요, 그 지점부터 더한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오프라인 서점이 죄다 문을 닫아가고 있는 이 마당에, 온라인에서도 안 팔리기로 소문자자한 시라는 장르에 어떻게 새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80년대 정도의 시 부활을 일으킬 수 있을까, 더 큰 숙제를 안고서요. 개인적으로 여러 실험적인 기획을 해보고는 있는데요,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와 같은 문화프로그램이 만들어지지 않고서는 쉽지 않다고 봐요. 가장 비싼 예능인들과 가장 똑똑한 피디들이 결합하여 주말이나 평일 황금시간대를 장악한 뒤 내보내고 있는 프로그램들을 좀 보세요. 개인적인 취향의 차이도 있으니 그 평가는 삼가도록 할게요. 어쨌든 그렇게 문화적인 운동을 공인들이 힘 있는 매체에서 벌이지 않는 한 당분간 이 불황을 해소하기 힘들 것 같아요. 앞서 말한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같은 코너를 통해 전국에 기적의 도서관이 열 몇 개나 지어졌잖아요. 손에 책 든 대통령, 책을 밥숟가락처럼 가지고 다니는 국회위원들, 난 본 적이 없어요. 책을 멀리하는 데서 오는 국가적 후퇴, 그 심각성을 어디 상상이나 하고 있겠어요. 우리들이 부지런해야 하는 것도 우선시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들이 농사를 잘 지어 건강한 나무를 키워내기 위해서 일단 필요한 건 넉넉한 땅일 테지요. 그 토양을 제공하는 건 국가의 의무라고 보고요.

 

    ▶ 정우영 : 팟캐스트 같은 방식이 너무 대중화되면 읽기 위주로 쓰일 것 같은 우려도 생기지만, 전 팟캐스트가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다양한 팟캐스트가 생겨나 또 그만큼 다채롭게 작가들을 발견해 주었으면 하는 거예요. 이를테면 《창비》의 작가군, 《빨간책방》의 작가군, 《문학동네》 작가군과는 다른 친구들이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야 이 신선한 시도가 식상해지지 않고 포괄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여겨지거든요. 문학을 하는 개개인은 다 하나의 독특한 세계잖아요. 전체로 보면 굉장히 다양한 작품세계인 거지요.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지만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고 봐요. 바로 그런 사람들을 발굴해서 팟캐스트로 들려주는 거죠. 언론 매체들을 보세요. 다 출판 쪽에서 키우려고 하는 작가들만 받지, 먼저 ‘저 사람이 뛰어난데 내가 저사람 발굴해서 해봐야지’ 이런 언론은 전혀 없거든요. 팟캐스트가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 김미정 : 과연, 팟캐스트가 해야 할 역할이 사실 평론의 역할 중 하나이기도 했을 텐데요. 말씀 듣고 보니 여기까지 오도록 평론은 확실히 직무유기를 해온 게 맞다 싶네요. 다양한 작품 세계에 대한 얘기를 사실 1차적으로는 평론가들이 해줘야 하는 게 맞는데, 이건 저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고요. 한편으로는 평론 업계 안에서는, 평론에서의 텍스트 중심주의를 안 좋게 보는 시선도 크고……. 문학 안에서의 딜레마들,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게 한두 개가 아니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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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이 가진 특수성에 대한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이해 없어 아쉽다”

 

    ▶ 김중일 : 지금 이야기의 흐름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꼭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공공 영역의 지원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문학적 가치를 보존하면서 창작을 활성화하고 독자들의 관심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 그리고 문학작품의 가치 판단에 작용하는 출판자본의 힘 속에서도, 숨어 있는 좋은 문학을 가려내고 유통시켜야 하는 다양한 경로가 형성되어야 하는 지금 저는 다시 ‘우수문학도서보급사업’을 포함한 ‘문학나눔사업’ 얘기를 하고 싶어요. 잘 아시다시피 2005년부터 복권기금으로 조성된 기금을 통해 매 분기 출간된 초판 문학 창작집 중에서 심의를 통해 ‘우수문학도서’를 선정하여 전국의 소외지역 및 시설 독자들에게 무료 배포하는 사업인 도서 보급 사업을 토대로 확장되었던 당시로서는 매우 다양하고 새로웠던 기획의 사업들이 꽤 많았어요. 플래시로 제작되어 메일링 되는 문장배달과 시배달이 시작되었고, 2000년대 중반에는 그리 흔치 않았던 타 예술 장르인 음악과 시각, 다양한 몸짓 등이 어우러져 문학을 색다르게 표현하는 문학나눔 콘서트 등이 그것들이죠. 점자도서관과 협력하여 우수문학도서 선정 시집과 소설집을 오디오북, 점자책으로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어요. 당시 오디오북 제작에 대중적으로 유명 배우도 재능기부를 통해 참여했고요. 그밖에도 많아요. 요즘은 그런 방식의 콘텐츠들이 익숙하지만, 그것이 일반화되기까지 아마도 당시 그런 기획들이 촉발점이 되었을 거예요.
    제가 이번 대담에서 시종일관 얘기했던, 작가들에게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창작 과정에서의 완전한 자유과 그 엄격한 결과물은 훼손시키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독자들의 일상 속 깊이 찾아가고 스며들게 하기 위해 예술위에서 이미 가지고 있던 그런 좋은 콘텐츠가 ‘문학나눔사업’이었는데, 그것이 지금 과연 잘 유지되고 지켜지며, 발전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반성이 필요하다고 봐요.

 

    ▶ 정우영 : 팟캐스트도 운영했다니까요. (웃음)

 

    ▶ 김중일 : 출판자본의 힘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우수한 작품을 생산해 오던 창작자들의 책들도 똑같은 조건 속에서 선정하여, 대규모로 구입함으로써 어려운 재정의 출판사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기도 하고, 예술로부터 소외되었던 계층을 비롯한 잠재적 문학 독자들에게 무상으로 책을 보급하고, 기타 다양한 형식의 문학 콘텐츠까지 개발하며 순수 문학 생산 및 유통의 외연을 넓혀 가던, ‘문학나눔사업’은 창작?출판?독자를 아우르는 다각도의 순기능이 아주 많았는데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시작된 이 사업이, SNS로 상징되는 기형적으로 변화된 유통 매체의 환경 속에서 더욱 사업의 존재 가치가 높아지는 최근 오히려 사업의 외연이 축소되고 있는 듯하여 아쉽습니다.
    지금 전문 작가와 문학 독자를 아우르는 문학 분야 지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문화예술 공공단체가 거의 없어요. 창작기금 등의 지원사업과 사이버문학광장을 비롯한 그나마 다양한 문학 콘텐츠를 운영하는 곳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거의 유일하고요. 서울문화재단의 경우는 점점 축소되고 있지만 특정 규모의 창작기금 지원 사업을 지속하고 있고, 기타 경기문화재단과 강원문화재단의 경우 매우 소규모의 출판지원사업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예요.
    이렇게 공공 영역의 지원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오히려 공공 영역의 문학 지원이 굉장히 축소되고 있어요. ‘문학나눔사업’만 하더라도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밖에서 바라보기에는 문학이 가진 특수성에 대한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이해도 없는 기계적인 판단과 정책, 어떤 행정적 기류에 의해서 사업의 성과나 순기능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상태로, 심지어 사업의 운영처가 여기서 저기로, 다시 저기서 여기로 1년에 한 번씩 바뀌기도 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의 명분을 위해 사업의 가치가 의도적으로 평가절하 되기도 하고, 실제로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던 소소하지만 비용 대비 효과가 컸던 콘텐츠들이 강제로 종료되기도 했고요. 이런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고요. 물론 타 예술 장르, 가령 ‘공연’ 등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지원 규모지만, 문학 분야 공공 지원에 그나마 예술위의 역할이 상당히 컸었는데 최근 들어 점점 위축되고 있는 듯 보이고요. ‘문학나눔사업’ 같은 기왕에 있던 좋은 사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예술위의 별다른 노력도 느껴지지 않는 게 사실이고요. 굳이 이런 말씀까지 드리는 것은, 문학에 공공 영역의 유통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전제로, 갑론을박하더라도 그나마 예술위에 기대를 걸어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 오창은 :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적인 측면에서 어떤 부분이 고려되어야 할까요?

 

    ▶ 허희 : 김중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공공영역의 역할에 대해서 조금만 더 보태면, 저는 창작지원금을 증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문학판 자체를 키워야 문학하는 사람들의 발언권이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판 자체를 어떻게 확장할 것이냐는 문제가 남을 텐데요. 수준 높은 축구 국가 대표 경기를 하려면 유소년 축구부터 활성화되지 않으면 안 되듯이 문학계에 종사하는 모두가 청소년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고등학생을 차치하고, 성인 독자만 타깃으로 하겠다고 작가가 스스로 독자층을 한정하는 순간 미래의 문학 독자는 사라지고 말 겁니다.
    김민정 선생님께서 시 버스를 만들어서 전국의 중고등학교를 방문하고 싶은 생각을 갖고 계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저는 들으면서 ‘좋다!’ 하고 무릎을 쳤어요. 여러 출판사들이 연합해서 학생들과의 만남 등 여러 가지 방안을 고민해 보면 지금 당장은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최소한 10년 뒤에는 독서 인구의 확대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출판사들이 포털 사이트나 인터넷 서점에 쏟는 마케팅 비용을 줄이고 미래를 내다보는 행사에 투자하면 청소년이 문학을 즐기는 독자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김미정 : 저는 사실 이 자리에 모인 분들에 비해 현장과는 좀 거리가 있는 사람이어서 다소 관념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는 문학에 대한 지원, 관심이 왜 당위가 되어야 하는가의 전제부터 점검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좀 남습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문학의 사회적, 공공의 가치가 중요한 것인데, 문제는 일반 대중에게 이 가치가 과연 이전만큼 공유되고 있는지 회의적이고요. 그런 회의적인 부분들을 돌아보지 않고는 계속 문학과 일반 대중은 서로 다른 곳만 바라보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 정우영 : 김중일 시인이 말한 공공영역을 좀 더 보완해 볼까요. 공공영역은 오래도록 지켜보면서 그 사업의 효과를 진작시켜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정권의 취지와 다르다고 흔들거나 담당자의 입맛에 따라 해석해 버리면 그 사업에 들인 숱한 노력과 지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저는 문학나눔사업의 출판문화산업진흥원 이전이 대표적이라 여깁니다. 이 사업의 성격은 책 나눠주는 사업이 아니거든요. 문학의 표현물이 책이어서 우수문학도서를 나눠준 것뿐입니다. 애초에는 문학나눔 사업 안에 굉장히 다양한 문학적 표현들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문학나눔콘서트, 문학나눔큰잔치, 문학집배원, 또 《문장》. 이런 게 문학나눔입니다. 한데 공무원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책만 나눔이라고 우기더군요. 생각해 보세요. 최근 문학으로 시도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이미 문학나눔 자장 안에서 다 이뤄졌던 것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문학나눔이 선도적인 향수사업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수치로 나타나진 않지만 문학나눔 10여 년을 돌아보면서 의의 깊었던 것은 신진에 대한 배려라고 봅니다. 중일 씨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우수문학도서 중 10%를 신진작가로 선정하자’는 강제 조항을 마련해서 시행했습니다. 그러자, 실제로 출판사에서 신인들을 우대하기 시작했어요. 공공성이 출판 환경의 변화를 이끈 거지요. 저는 지난 10여 년 동안 문학나눔의 이 기조가 많은 신인에게 어떻게든 혜택을 주었으리라 여깁니다.
    이보다는 못하지만, ‘지역 출판에 대한 배려’도 조명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마 그동안에는 지역적인 편차를 인정하고 그러한 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지원해 주려는 시도도 거의 없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려사항’이라는 문구로 표현하긴 했어도 동일 평가일 경우에는 지방을 먼저 챙기려 애썼습니다. 문학나눔에서는 이처럼 공공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게 바로 다양성의 구체적 실천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이와 같은 문학나눔이 출판문화산업진흥원 쪽으로 가서도 유지될 수 있을까요? 천만에요. 이제 문학나눔은 사라진 겁니다. 책나눔이 된 거지요. 이와 같은 결정을 한 예술위와 문화부는 그런 점에서 참 어리석은 결정을 했다고 저는 봅니다. 그들은 문학나눔이라는 공공성에 대해 너무 무지했어요. 아니, 우리가 무지했는지도 모르지요. 문학은 본래 이렇듯 시달리는 게 본령인지도 몰라요. 그 어느 것도 문학을 길들일 수 없는 것인데 우리가 공공이란 이름으로 문학을 잡아 두려 한 것 아닌가 반성하게 됩니다. 문학의 신념은 자유잖아요.

 

    ▶ 오창은 : 오늘 국회 본회의에서 문화기본법이 통과됐어요. 최초로 국민의 문화권, 문화권행사를 위한 국가의 책무, 이런 것들이 규정되어 있는 법안이 통과된 것이죠. 이게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국민의 문화적 권리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가 과제지요. 국가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강제할 수 있어야 해요. 공공영역, 시민사회 영역에서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부분이 생긴 것이죠. 문화기본법이 제정되었다면, 이론적이고 담론적인 부분에서 문학의 역할이 커졌다고 봐요. 문학나눔사업을 포함해서 문학의 특권적 지위를 바라는 게 아니라, 문학이 갖고 있는 자율적인 부분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의미 있는 좌담을 위해 애써 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요, 지금 논의된 내용이 생산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실천적인 영역에서도 함께할 수 있었으면 하네요.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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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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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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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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