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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인터뷰 나는 왜_제5회] ‘판매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감정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나? (조혜은 시인편)

  • 작성일 2014-08-01
  • 조회수 2,769

 

연속기획 공개인터뷰_ 나는 왜? (제5회)

 

 


‘판매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감정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나?

― 시인 조혜은 편

 

정리 : 안희연(시인)

 

 

 

 

    내가 소장한 조혜은 시인의 시집 『구두코』는 꽤 여러 페이지가 접혀 있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무늬를 가진 것들」이라는 시를 특히 좋아한다. 이별을 경험한 여성 화자의 내면을 바다거북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이 시는 “하루는 내 손등 위에/육각의 무늬를 그려 넣고,/바다거북이 되었다”는 구절로 시작해 “눈을 떴을 때/모든 건 꿈뿐인//나는, 무늬를 가진 것들”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그때는 조혜은이라는 시인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처를 과장하지 않고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구나, 심지어 그것을 몸에 새겨진 아름다운 무늬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나의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실제로 만나 본 시인은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작은 체구에서 어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것일까. 첫 질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오늘 이 시간이 아주 즐거운 시간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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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유년의 스티로폼 집

 

    ▶ 이영주(이하 이) : 문장웹진》 연속기획 공개인터뷰 ‘나는 왜’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달에는 조혜은 시인을 모셨습니다. 행사에 앞서 조혜은 시인의 프로필을 잠깐 읽어 드릴게요. 조혜은 시인은 82년 서울에서 태어나셨고 강남대학교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하셨습니다. 2009년 월간 《현대시》에 「89페이지」 외 2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셨네요. 첫 시집으로는 민음사에서 출간된 『구두코』가 있는데 시집이 소설책처럼 아주 두껍지요? 조혜은 시인의 시세계를 본격적으로 탐사하기 전에 시 한 편을 읽어 볼까 하는데요. 직접 낭송 부탁드립니다.

 


플랫슈즈

 

 

길게 이어지는 약속을 좋아해요
색다르게 부푼 아침

 

소멸하는 뒤꿈치를 따라

 

가벼워진 굽의 무게로
자꾸만 흐려지는 당신의 무늬를
바닥 가까이 흩어 놓는 일

 

뜨거운 무늬로 얽혀 있는 하루
따뜻한 상처들로 채워진 발바닥 아래는
무지개송어처럼 예쁜 이름을 숨기고

 

부드러워진 뒤꿈치를 따라

 

지워진 문항의 뒤를 밟는 일

 

바바리코트를 입고 다음 계절로 사라지는 남자들
자꾸만 낮아지는 여자들을 따라

 

눈이 내리기 전에 뒤돌아가요. 구두코에 올린 커다란 통증 같은 장식들은 떼어버리고

 

소멸하는 뒤꿈치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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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 조혜은 시인의 육성으로 시낭송을 들어 보았습니다. ‘나는 왜’ 행사는 첫 시집을 내고 활발한 활동을 하는 시인들을 주로 모시려고 하고 있어요. 특별히 오늘 이 자리에는 시인이 되기를 꿈꾸는 열다섯 명의 안양예고 학생들이 자리해 주셨는데,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이 학생들에게 조혜은 시인이 처음 문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 조혜은(이하 조) :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뭔가 거창한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어릴 때 아빠가 보시던 전집을 보면서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예고에 진학하진 않았지만 백일장에도 참가했어요. 학교에서 CA 활동으로 ‘문예반’을 운영했는데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독서부 같은 것이었어요. 간혹 습작을 하기는 했죠. 대학에 입학할 때도 특수교육학과와 문예창작학과 두 과 중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특수교육학과를 선택했고요.

 

    ▶ 이 : 아, 문예창작학과 진학도 고민하긴 하셨군요?

    ▶ 조 : 네. 제 생활기록부를 보면 장래 희망이 작가가 아닌 적이 없었어요. 되레 특수교육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더 인상적인 것 같아요. 고3 때 짝이었던 친구가 강남대 특수교육학과 가는 게 꿈이었는데 그 친구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참 괜찮은 과구나 생각했었는데, 정작 그 친구는 떨어지고 저만 합격을 했어요. (웃음)

 

    ▶ 이 : 시집에도 전공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서 한번 여쭤 보고 싶었습니다. 전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나누고 우선 유년 시절 이야기를 해볼까요. 조혜은 시인이 발표하신 산문에서 굉장히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결핍된 유년의 기억이 정서적으로 풍부한 감정을 낳기도 하지요. 유년의 환경이 시 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 조 :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했더라도 정서적으로 결핍된 부분은 있을 거예요.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테고요. 말씀하셨다시피 저는 유년 시절에 좀 불편할 정도의 가난을 경험했어요. 아버지께서 사업을 정리하시고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부터였죠. 당시 제가 살았던 집은 옥상마다 텐트를 치고 그 위에 가건물을 짓고 사는 형태였는데, 한번은 아버지께서 스티로폼으로 집을 만드신 거예요. 열전도율이 높아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무척 추웠던 기억이 나요. 꼭 이글루 같았죠. 그때의 특별한 경험으로 두 가지가 생각나는데, 하나는 언니랑 인형놀이를 하면서 갖은 이야기를 꾸며내며 놀았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젓가락 같은 걸 열에 달궈 집에 꽂았던 기억이에요. 젓가락을 쑥 밀어 넣으면 구멍이 뚫렸는데 그걸 씹던 껌으로 막기도 하고. 집을 훼손해 가면서 노는 게 재미있었어요. 그 상상력을 가지고 쓴 시도 있는데 발표는 하지 못했죠.

 

    ▶ 이 :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가족이라는 화두로 넘어가는데요. 사실 가족이라는 게 겉으로 보면 행복의 결정체인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극히 불완전한 관계이기도 하잖아요. 조혜은 시인은 그런 가족의 불완전성에 대해 남달리 예민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 조 : 가족이라는 소재가 워낙 상투적이라 많은 시인들이 피하고 싶을 텐데 제 경우에는 가족 이야기를 한 번쯤 쏟아내지 않으면 그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보통 화목한 가정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희 가족은 그렇지 못했어요. 그런 관계에서 오는 상처를 어른들에게 치유 받지 못해서 글을 쓰면서 화풀이를 했던 것 같아요. 학교 가는 걸 답답해하고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제 경우에는 집이 워낙 힘들었기 때문에 학교가 탈출구와 같았거든요. 학교에 가면 모든 아이들이 똑같이 공부를 하고 똑같이 밥을 먹었으니까요. 물론 학교에서 상처받은 기억도 있죠. 제 아픈 과거사를 선생님께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옆 반에 누구는 아빠가 혁대로 때려서 맞기도 한다는데, 그게 뭐라고.” 하시더라고요. 학교에 워낙 가난한 아이들이 많았으니까, 선생님께서도 더 강해지라는 의도로 해주신 말씀이었겠죠. 그 경험을 통해서 상처라는 건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구나, 내가 누군가에게 내 상처를 털어놓으면 그 사람이 불편해 할 수도 있겠다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시는 달랐어요. 시의 화자와 내가 동일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화자를 통해서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상상력을 덧입힐 수도 있고요. 관계에 대한 문제도 저로서는 쓰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 이 : 관계는 누구에게나 다 힘든 것 같아요. 관계라는 건, 시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얘기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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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적 세계, 「은폐」에 대하여

 

    ▶ 이 :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집에 등장하는 코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혜은 시인의 시를 보면 상당히 많은 소품들이 등장합니다. 구두, 화장품, 핸드백, 선풍기, 모자, 메이크업과 코디 등등 다양한 소품이 화자의 행위와 맞물려 중요하게 쓰입니다. 이러한 소품들로부터 시를 출발시키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 조 : 시 안에는 굉장히 많은 소품이 등장하지만 실제의 저는 그런 소품들에 상당히 무심한 편이에요. 여자인데도 화장품이나 옷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겨울에도 엄마가 얼굴 트니까 제발 로션 좀 바르고 다니라고 당부할 정도였거든요. 제가 고등학교 시절 IMF가 터졌고 그땐 워낙 다들 어렵다 보니까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특수교육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고요. 특수교육학과에서 교직을 이수하면 교사가 될 수 있었거든요. 물론 할머니께서 글 쓰는 사람은 피 토하고 죽는다더라고 워낙에 싫어하시기도 했고요. (웃음) 언니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보태 줘서 간신히 대학에 등록을 하긴 했는데 등록금을 충당하려면 계속 일을 해야 했어요. 주말에 일을 하지 않으면 주중에 학교 갈 차비가 없을 정도였거든요. 평일에는 백화점 판매사원으로 일을 했고, 주말에는 용인 에버랜드에서 일했죠. 그때 사람들이 너무들 겉모습에 현혹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우리는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구나, 우리는 개성을 나타낼 때조차 나를 어떻게 꾸미고, 내가 몇 킬로그램이고, 내 눈이 얼마나 큰지 그런 것들에만 의존하는구나. 나아가 진실이란 뭘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죠. 「은폐」 연작을 쓰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어요. 그중 「생방송」이라는 시가 있는데, 예전 저희 집 근처에 인도가 없어서 매년 여학생이 차에 치여 죽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그걸 떠올리며 쓴 시예요. 인도를 만들려면 집을 뒤로 밀어야 하니까, 주변 상권의 이익 때문에 자기 딸 같은 학생들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예요. 얼마 전 볼일이 있어 그 동네에 다시 가봤는데 아직도 그대로더라고요. 착잡했어요.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아무도 그걸 인정을 안 한다는 게.

 

    ▶ 이 : 그러니까 시집에 등장하는 코드들은 우리를 억압하는 코드들인 셈이네요. 아르바이트를 할 때의 경험에서 파생된 사유들이 진실의 문제로까지 확장이 되고, 그게 시와도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구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어요. 구두라는 게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도구일 텐데, 사실 하이힐 같은 경우에는 발을 기형으로 만들기도 하잖아요. 존재를 억압하는 기제랄까요. 더불어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시집에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이 아이들은 기형적 몸의 연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시인의 전공과도 관련이 있는 부분이고요.

    ▶ 조 : 저는 기본적으로 이 세계가 기형적이라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모두 기형적인 부분을 하나씩 다 가지고 있거든요. 그것을 나의 특화된 성격이나 매력으로 받아들이면 개성이 될 수도 있는데, 생각하기 달린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에는 유년 시절의 환경이나 관계에 대한 부분이 기형적인 삶의 형태로 체화되어 있는데 어차피 가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면 그걸 추하지 않게, 아름답게 밖으로 표출해도 되지 않은가 싶은 거죠. 그러기 위해 제가 선택한 매체가 시였고요.
    대학 때 전공 공부를 하다가도 참 시적이라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았어요. 가령 시각장애인 중에 전맹인 경우는 빛을 느끼지 못하거든요. 시각장애 개론서를 보다가 “전맹은 뺨에 빛이 닿는 온도를 가지고 물체가 있는지 안다.”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는데, 저는 이게 참 시적이라고 느꼈어요. 또 감각 장애라는 건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각을 누군가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저는 이 모든 것들을 공부하듯이 받아들인 게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것 같아요. 졸업 후에 발달장애(자폐) 아이들 치료 교사로 잠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시 안으로 들어왔고, 그게 소통의 문제로도 확장이 된 것 같아요.
    ‘구두’라는 사물을 떠올린 계기 역시 아르바이트 할 때와 관련이 있는데요. 당시 제가 좋아하는 오빠가 있었어요. 사복을 입고 출근을 하는데 그 오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처음 구두를 사 신은 거예요. 그런데 처음 립스틱 바르면 서툴러서 이에 바르는 것처럼 구두를 처음 신으니까 발이 다 까지고 피가 났어요. 특별히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라진 않았는데 그때 처음 아, 이런 식으로 나의 여성성을 확인하기도 하는구나 싶었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나의 여성성이 표출되기도 하는구나, 하고요. 메이크업에 관한 시도 비슷한 맥락에서 쓰인 것 같아요.

 

    ▶ 이 : 제가 사회를 봐야 하는데 너무 집중해서 얘기를 듣느라고. (웃음) 시 이야기를 하는데 조혜은이라는 인간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 이쯤에서 시를 한 편 읽어 보면 어떨까요? 이번에는 독자 분께 낭송을 부탁드릴게요. 어떤 시를 읽어 주시겠어요?
    (잠시 관객석에서 서로 낭송을 미루는 낭독 권유전(?)이 벌어졌고, 안양예고 남학생 두 명이 당첨되는 행운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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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방문기

 

 

    먼 곳으로 가야 해. 할머니를 보려면
    하지만 고모, 우리는 한 번도 할머니를 먼 곳에 둔 적이 없어요

 

    자정을 지난 시곗바늘은 제 살을 깎으며 돌아가고
    스티로폼처럼 가벼워진 영혼으로도 우리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어둠이 만든 할머니의 형상은 이불 위에도, 부엌으로 통하는 작은 문 뒤에도, 내 옆에도 있었다

 

    그게 되면 돈을 받을 텐데. 할머니의, 입이 돌아간 말들을 주워 벽에 던져버렸어요. 할머니는 장애인이 아니에요

 

    그날 밤, 별이 되어 떠오른
    조각난 말들
    할머니, 기억은 미쳤어요. 매일 다른 옷을 선물해요

 

    비가 왔다. 동생은 내일 헤어질 남자 친구의 졸업식에 가야 했고, 나는 이제 정말 시골에 간다
    오촌 아저씨의 차 안에는
    새 옷으로 갈아입은 할머니의 기억
    그날은 소처럼 우는 소,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닭이 있었고

 

    이젠 정말 찾을 수 없는 먼 곳에 있었다

 

 


셋의 풍경

― 토요일

 

 

    오늘 우리 반 아이들 셋이 죽었어요.* 가위바위보. 아이들은 순서를 매기고. 사자는 동그라미 속에 있어요. 들리는 모든 것은 동그라미. 아이들은 겹겹이 접혀진 책장 속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글씨의 굴곡 밑에는 어떤 색이, 어떤 촉감이, 어떤 은밀함이 숨어 있는 걸까요? 쓰다듬어 본다

 

    선생님에게 이름을 알려주세요.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토요일. 기꺼이 변형을 참아내는 아이들. 선생님에게 들려주세요. 복지관 수업이 끝나면 왜 점심은 먹지 않니? 저요 저요 저요. 들리는 모든 것은 동그라미. 아이들은 사소한 물음에 손을 늘이고. 서로의 꿈을 헤집어 본다. 모르는 것들을, 그저 모르는 것으로 남겨 두려는 모든 의뭉스러운 아이들. 쓰다듬어 본다

 

    벌려 냄새를 맡아 본다. 너무 작은 세계. 문장의 화음이 맞질 않아요. 충분히 감춰진 세계.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니? 종이 위에서 나는 조금 아프고 부끄러워요. 저는 오늘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아요. 가위바위보. 아이가 순서를 매겨 웃는다. 너무도 깊고 무심한 놀이의 세계. 들리는 모든 것은 동그라미. 우리가 만든 문장은 ‘폭압적’인가요? 문장은 잊히고. 쓰다듬어 본다

 

    지우개를 빌려 서로의 몸 구석구석에 남은 손끝을 문질러 지우는 아이들. 너의 자국. 셋의 풍경

*오정희, 『새』.

 

    ▶ 이 : 어떠세요? 독자 분들이 시를 읽어 주니까 기분이 색다르죠?

    ▶ 조 : 네. 「시골 방문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데…….

 

    ▶ 이 : 자기 시 자기가 막 좋아하고. (일동 웃음)

    ▶ 조 : (웃음) 이 시는 사실 제가 습작할 때 쓴 작품인데요. 한 산문에도 자세히 썼는데, 할머니가 같이 사시다가 먼 시골로 가게 되셔서, 시골로 할머니를 찾아가는 길에 느꼈던 감정들을 떠올리며 쓴 시예요. 제가 시를 쓰는 모든 이유들이 이 한 편의 시 안에 다 존재하는 것 같아요. 멀리 두어야 하고 잊고 살아야 하는 것들, 제가 경험했던 아픈 가족사,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 조금씩 잊혔던 것 같아요. 망각은 중요하잖아요. 집착하면 그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니까.
    그래서인지 첫 시집을 묶었을 때 정말 좋았어요. 상처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원망하게 되고,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밖에 못 되었다고 탓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시집을 묶으면서 그런 마음들이 잘 정리된 것 같아요. 독자들에게는 길고 지루하고 낯선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지나온 제 삶이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된 것 같아서 시집을 묶고 나서 정말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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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바이트의 여왕

 

    ▶ 이 : 보기에 전혀 유부녀 같지는 않지만. (웃음) 실제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시잖아요. 결혼생활, 육아는 시인으로서의 삶과 어떻게 만나나요?

    ▶ 조 : 여기 계신 독자 분들이 육아와 가사의 고통을 이해하기에는 나이가 상당히 어린데. (웃음) 그래도 앞으로 결혼을 하게 될 테니까 이야기를 해볼게요. 시를 쓰는 저와 엄마로서의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여러분도 엄마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잖아요. 엄마가 늘 웃고 있길 바라고, 엄마로부터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길 원하고, 저 역시도 그런 역할을 아이에게 해줘야 하는데 시를 쓸 때는 그와는 다른 에너지를 필요로 하거든요. 아무래도 시를 쓸 때는 예민해지고 나를 상처받게 했던 것들, 나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을 추적해 가는 방식으로 쓰게 되니까요. 그 둘 사이의 간극이 좀 힘든 것 같아요. 실제의 나와 시의 화자는 다른 존재이고, 제 시에 남편이나 아이가 얼마든지 등장할 수도 있는데 나중에 그걸 보고 우리 신랑이나 아이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점도 있어요. 그리고 체력적으로도 육아에 모든 정신을 쏟고 나면 시를 쓸 기력이 하나도 남지 않아요. 시를 집중해서 쓸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 그 문제를 극복하면 두 번째 시집은 좀 더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이 : 여러분들은 동감하기 어려운 얘기였나요? (웃음) 저는 깊이 공감이 되네요. (일동 웃음) 조혜은 시인이 계속 마르는 이유가 있군요.

    ▶ 조 : 육아와 가사 분담은 결혼 전에 미리미리 확실히 해두시길 바랍니다. (웃음)

 

    ▶ 이 :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 볼까요?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 시집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는 도시의 공간들입니다. 미용실, 사무실, 고시원 등등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이지만 이 공간들이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깊고 낯선 공간으로 치환됩니다. 이미 세상에 없는 공간인데, 그곳(불타버린 고시원)으로 놀러오라는(「우리 집에 놀러오세요」) 시인의 전언이 아마도 그 정점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공간들은 시인의 상상력을 어떻게 촉발시킨 것인가요?

    ▶ 조 : 다시 아르바이트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웃음) 대학 때 정말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학교에서 수업 듣다가 공강 시간에는 학생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끝나면 특수아동 개별화 과외 가고, 주말엔 에버랜드에서 일하고.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어요. 그렇게 일을 해야만 간신히 다음 학기 등록금을 벌 수 있었거든요. 단순노동을 많이 했어요. 불꽃놀이 구경하러 온 연인들 옆에서 대걸레질 하는 자신을 보며 펑펑 울었던 적도 있지만. 아무튼 그때의 경험은 다시없을 귀중한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 불타버린 고시원을 쓸 때의 경험은 그리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어요. 이 얘긴 정말 처음 하는데. (웃음) 여러분들도 익히 들어 알고 계실 불법 피라미드 다단계라고. (웃음) 선배 언니가 저를 거기 끌고 가서 찜질방에 사흘 동안 감금된 적이 있었거든요. 그리 친하지 않은 학과 선배였는데 제가 찜질방에서 말도 안 듣고 절대 안 한다고 하도 악을 쓰니까 이렇게 지독한 애 처음 본다면서 집에 보내주더라고요. 집에 돌아와 친언니에게 이 얘길 했더니 “글쎄, 다른 사람이라면 성공할 수 있을 텐데, 넌 안 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홧김에 제 발로 찾아갔고…… (웃음) 일수가방을 팔게 된 거죠. 물건 자체가 안 좋았어요. 주변에 대학생들밖에 없는데 일수가방 같은 게 팔릴 리 없잖아요. 아무튼 그때 지방에서 내려온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고시원이라는 델 가봤어요. 방도 좁고 카펫은 눅눅했죠. 그런데 어느 날 그 고시원이 불에 탄 거예요. 누가 사고를 당하거나 죽지는 않았는데 그 불타버린 고시원을 보면서 사람이 소비되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와 관련해서 「그녀의 인사 」라는 시가 떠오르는데, 그 시는 제가 백화점에서 고가의 옷을 팔았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거예요. 백화점에서 일할 때 제자신이 부속품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당시 제가 일하던 브랜드의 주요 고객은 흔히 볼 수 없는 대단한 그룹의 사모님들이었는데, 그중 한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직원들에게 둘러싸여서 “어머, 사모님, 너무 예쁘시네요.” 그 말을 들으려고 몇 백만 원을 그냥 긁고, 집에 가면 물건을 포장도 안 뜯고 쌓아 둔다고요. 한번은 매장에 매일같이 오시다가 며칠 안 보이는 고객이 있어서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내가 얼마 전에 장애아동을 차로 치었는데 걔가 많이 다쳤어. 그래서 내가 죽을 때까지 A/S 해줘야 해.” 하시더라고요. 아, 저 사람에게는 사람도 A/S 되는 것이구나. 저는 판매사원이니까 웃으며 응대를 했는데 너무 씁쓸하더라고요.
   저는 돈에 대한 생각이 그리 크지 않은 게 인간이 돈 때문에 행복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돈이 있어도 가치 있게 쓸 줄 모르면 나 같은 판매사원에게도 저런 눈총을 받는구나 싶었죠.

 

    ▶ 이 : 말씀하시는 걸 듣다 보니, 조혜은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공간은 이러한 삶의 세목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번엔 좀 다른 측면의 질문을 할게요. 2000년대 이후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말을 줄이고 여백과 틈을 내세우는 경향이 한 흐름으로 존재하는데, 그에 반해 조혜은 시인의 언어는 정황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인상적이고 언어가 분출되듯 쏟아집니다. 아마도 이런 시작법이 조혜은 시인의 시가 지닌 미덕이기도 할 텐데 자신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 조 : 제 시에 이야기가 있는 것은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소설을 썼기 때문일 거예요. 이야기를 덧붙이거나 꾸미는 걸 좋아했거든요.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면서부터는 거의 장편소설에 육박할 정도로 많은 분량의 시를 썼어요. 다 발표를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산문적인 어법이 저한테 잘 맞았기 때문에 계속 이렇게 썼던 것 같아요. 시를 단순히 길이로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문장의 완성도를 고려한달지 언어를 신중하고 예민하게 만지는 일이랄지 하는 일들이 저한텐 잘 맞았거든요. 제 은사이신 김행숙 선생님께서도 “만약 이 방식이 네게 맞으면 질릴 때까지 그렇게 써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시의 호흡이라는 건 노력해서 금방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맞는 호흡이 있다고.
    이제 한 권의 시집을 묶었으니, 두 번째 시집에서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겠죠. 『구두코』를 내고 나서는 저절로 말이 줄기도 했어요. 상황이나 느낌은 같은데 말이 줄어드는 기간이 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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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 쓰다 보면 또 다른 길이 열리고, 다른 언어들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럼 독자 여러분의 질문을 한번 받아 볼까요?

    ▶ 독자 : 「204호 미용실」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축적되어 있는 시인데 이 시는 어떤 계기로 쓰게 되셨나요? 시를 쓸 때 한 호흡에 쭉 쓰시는 편인가요?

    ▶ 조 : 「204호 미용실」은 이런저런 이미지들을 오래 묵혀 두었다가 그 이미지들을 중첩해서 쓴 시예요. 한번은 제가 미용실에 갔는데 스태프로 일하던 고등학교 여학생이 머리를 만져 주다 말고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녀오라고 했더니 “손님 두고 화장실 가면 죽어요.” 하더라고요. 그 뒤부터는 미용실이라는 공간이 전혀 다르게 보였어요. 나는 기분전환을 위해 가는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됐고, 그렇게 떠오르는 생각들, 이미지들을 중첩시켜서 쓴 시입니다.

 

    ▶ 독자 : 저는 안양예고 학생입니다. 학교에서 입시를 위해 가르쳐주는 시가 있는데 자꾸 그렇게 습작을 하다 보니 제 스타일이 죽어버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도 안 써지고 속상합니다. 대학 진학 문제를 떠나서 제가 쓰고 싶은 대로 써야 할까요, 아니면 입시를 위한 시를 계속 써야 할까요.

    ▶ 조 : 저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뒤늦게 시를 알았기 때문에 시에 대한 수업을 많이 듣지도, 시집을 많이 읽어 보지도 못했어요. 아마 여기 있는 친구들이 저보다 더 많이 읽고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인지 저는 시의 길이라든가 스타일에 관한 억압이 전혀 없었어요. 다만 시 쓰는 게 재미없어지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는 돈 벌려고 쓰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으려고 쓰는 것도 아니에요. 입시를 위해 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지 않을까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쓰고 그걸 유지해 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시 쓰는 일이 1, 2년 하고 말 일이 아니고 평생 내가 가지고 갈 일인데 지금부터 쓰기 힘들고 지겨우면 안 되죠. 시는 배워서 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배움의 시기가 있지만, 그 시기에만 쓸 수 있는 문장이 있고 그 시기에만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있는데 그걸 놓쳐버리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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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 마지막으로 시 한 편을 낭송하며 오늘 이 자리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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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투박하고 두꺼운 손은 참으로 친절합니다 반짝이는 도시 어딘가에 너의 손들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환하게 불행을 드러내고 아무것도 아닌 듯 커튼을 드리운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손자국이 켜켜이 쌓인 너의 몸이 차례차례 들어앉아 있는 밤 죄송해요 내려야 할 정류장이 오기도 전에 잘못해서 벨을 누른 사람처럼 나의 손은 부끄럽고 너의 손은 또 어디로 향해야 할까요 우리는 매일같이 주인이 바뀌는 방에서 빌리듯이 서로의 마음을 공손하게 탐하고 서로의 몸속을 채운 통통하고 마른 손을 지워 가며 잘못했어요 두 손을 모아 진심으로, 이 방을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요? 불 켜진 도시의 밤 손자국이 쌓인 벽을 더듬어 또 너의 손을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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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현장에는 열다섯 명의 안양예고 학생들이 관객으로 자리했다.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한 이력답게 학생들이 어떤 질문을 건네든 실제 체험 위주의(체험교육!) 눈높이 답변을 해주셨다(눈높이 교육!). 보통 행사가 끝나면 자리를 옮겨 맥주를 한 잔씩 하지만, 그날의 관객은 모두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행사장에 삼삼오오 모여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나눠먹고 단체사진을 촬영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인 조혜은과의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 데이트는 그렇게 끝이 났다. 조혜은 시인이 초대한 집은 동화에 나올 법한 행복의 집이 아니라 지극히 기형적이고 불편한 곳이었지만, 정작 그 집에서 걸어 나왔을 때 우리는 모두 이상한 아름다움에 도착해 있었다. “판매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감정들”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놓은 것일까? 그렇다, 우리는 전부 손등에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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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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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건

  • 익명

    진솔하고 아름다운 자리, 학생들에게 정말 좋은 자리였겠군요. 좋은 이야기, 좋은 사람들, ... 감사합니다.

    • 2014-08-03 15:55:0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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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1500
  • 마루아토

    안양예고 아 진짜 부럽다 시인도 만나고

    • 2014-08-18 13:17:00
    마루아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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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1500
  • vinoshy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 2014-09-24 12:49:23
    vinos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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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