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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현대 시인

  • 작성일 2014-08-18
  • 조회수 2,520

 

[기획특집]

 

 


미국의 현대 시인

[제1회] 블랭크 어펙트, 벤 파마, 미국의 릭키 컬쳐

 

제이크(Jake Levine, 시인)

 

 

 

< 미국의 현대 시인을 소개하며 >

 
21세기 미국 시에 있어 주요 쟁점은 정서가 미국 문학과 함께 잘려나가고 있더라도 개념시가 정서의 본질에 담고 있는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시의 권위자인 칼빈 베디언트(Calvin Bedient)는 보스턴 리뷰지에서, 그들이 쓴 시는 개념시가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교활하게 말하면서 ‘삶의 가치를 무시하라’와 같은 개념 프로젝트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썼다. 개념론자들은 개념시가 표현하는 것은 감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찰스 번스테인(Charles Bernstein)이 말한 것처럼, 개념시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시라고 반박했다. 그러는 동안, 이 논쟁은 미국의 더 젊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전달하거나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논쟁은 엘리트적이고, 지적으로 멍한 채로, 백인 중심으로, 역사상 있어왔던 이전 논쟁과 같이 가부장적인 태도가 반복될 뿐만 아니라, 대체적으로 사회와 미국 문화와 시의 관계를 무시한다. 또 미국 대학에서 존경 받는 종신교수들이 시는 거품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논쟁을 발전시키는 동안, 젊은 세대의 시인들과 이들의 시는 성장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작품은 미국의 문화, 정치, 사회를 대표하는 동시에 정면으로 맞선다. 단지 시학에 관한 분석과 해석에 국한하는 것은 시에 해가 되며, 시를 제약하는 것이다. 이는 패러다임 밖의 시이고 그러므로, 적어도 지금까지는, 구체적인 꼬리표 또는 움직임으로 분류되기를 거부해왔다. 몇 회에 걸쳐 나는 미국의 가장 젊은 세대의 시인 몇 명과 그들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고 그들의 시 세계를 인터뷰해보고자 한다.

 

 

    ◆ 시인 소개 _ 벤파마

 

    1982년에 출생한 벤 파마는, 미국 시인이자 편집자 및 큐레이터이다. 저서로는 아티스트북『쇼핑 마녀(Mall Witch)』가 있으며, 그 외 다수의 소책자와 소논문을 집필했다. 2015년, 출판사 미운오리새끼(Ugly Duckling Press)에서 그의 첫 장편『공상(Fantasy)』이 출간될 예정이다. 벤 파마는 출판사 ‘원더(Wonder)’의 공동 설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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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벤파마의 시

 

from Like

 

There are some feelings I’d like to demonstrate
To a woman of my age
I know you about 3%
We’ve hung out
Then you moved to Los Angeles
Thank you for accepting my invitation to chat
I like your hair
I like your shirt
I like how you have a funny picture
Of Justin Bieber in your online photos
And some sexy ones of yourself too
Are they ironic?
They’re good
Have you ever had sex outside?
Is there a relation between the internet and madness?
Perhaps this video chat application will provide a forum
For us to further explore this question
You will not be upstaged

 

    「좋다」 중에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
나랑 동갑인 그녀에게
너에 대해 3% 정돈 알고 있어
우리 한 번 만났잖아
그리고 넌 LA로 가버렸지
채팅 초대를 받아줘서 고마워
너의 머리가 맘에 들어
너가 입은 셔츠가 맘에 들어
온라인 사진첩에 올려 놓은
저스틴 비버의 웃긴 사진과
섹시하게 찍은 너의 사진이 맘에 들어
그거 아이러니하지
그거 좋았어
밖에서 섹스해 봤어?
인터넷이랑 미친 행동이랑 관련이 있는 걸까?
우리가 이 질문에 답을 더 잘 찾을 수 있게 해줄
아마 이 화상 채팅 어플리케이션이 토론장이 될 거야.
너는 무대 뒤에 있진 않을 거야.

 

I’m sad a lot
I’d like to get away from culture
Are you staying with anyone?
I have these records …
There are a few things I know by heart
Today I had to look up the definition of perfidy and louche
And remembered
Things said for Art always sound true and aren’t forever
Dark all day
Glamour all night
Public makeouts
Unsolved celebrity murders
Tabbed browsing
Cubicles
Love me or not
You’ll be sorry all fall

나는 자주 슬퍼
문화 밖으로 탈출하고 싶어
너 누구랑 같이 있어?
나 앨범 가지고 있는데……
기념할 게 몇 가지 있는데
오늘 난 퍼피디(perfidy)와 라우체(louche)의 정의를 찾아야 해.
예술이 늘 진짜인 것 같고 영원하지 않다고 한 말이
기억났어
하루 종일 어둠
새벽까지 매력적이야
바깥 사람들은 서로 핥아대
미해결된 유명 살인사건들
탭 브라우징
칸막이 방
나를 사랑해 안 해
가을 내내 안타까울 거야.

 

Have you met my housekeeper?
I was touching you and you said not too much, that was it
The balcony windows were open and we slept
Someone put peacock feathers under the door
But there are still things I want more of
So you live in California
We meet in a hotel room
VH1 plays in the background all night
No compromises are necessary
Just ride it out
Express wave
Basically I’m wearing shorts
And there’s a lot of white girls

우리 집 가정부 만나봤어?
난 너를 만지고 있었고 넌 너무 그러지 말라고 했지, 그게 땡이야
발코니 창문은 열려 있었고, 우리는 잠들었지
누가 문 밑에 공작새 날개를 놔뒀지만
난 아직 뭔가를 더 원해
캘리포니아에 살아서 그래
우리는 호텔에서 만났어
밤새도록 VH1에서 음악이 흘렀어
생각할 필요 없어
잘할 수 있어
익스프레스 웨이브
기본적으로 난 반바지를 입고 있고
백인 여자가 많아

 

I want a Blonde more than I want my next book to be pink
Loveless
Sometimes I feel that way
Did we have a good time
I’m here
You’re just leaving Soho?
Wanna come to Chelsea?
I am
I’m going to Boston tomorrow morning...
Do you know anything about car insurance?
I may be driving a car?
My friend Lindsey says hi
I need a cocktail now

다음 책 표지색이 분홍색으로 되는 것보다 더 금발여자를 원해.
사랑 없는
가끔 그렇게 느껴
지난번에 만났을 때 재밌었어?
나는 여기 있어
넌 소호로 곧 떠날 거지?
첼시로 오고 싶어?
나는
내일 아침 보스턴에 갈 거야
자동차 보험에 대해 아는 거 있어?
내가 차를 운전하게 될 수도 있는 거야?
린지가 안부 전하래
지금 칵테일 좀 마셔야겠는데.

 

I think I’m in love with the world of billboards and magazines
It is so intrepidly based in fantasy
Like things online
And literature, all the immaterial world
I mean the actual world we live in all the time
Like mp3’s and collage art
Which is the new painting, sort of, right?
I dunno
You’re the best actress in the world
Right now you are acting retarded
Your agent comes in on roller blades, wet and horrible
I like it
I’m gonna to go shopping all afternoon
Then I’m gonna need to have sex with someone
Let’s talk about it in the car
This work will not last

광고랑 잡지 세계에 빠진 것 같아
너무 겁대가리 없이 공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든
온라인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문학, 모든 실체가 없는 세상
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상을 말한 거야
mp3 같고
새로운 그림인 콜라주 미술 같은, 맞아?
몰라
너는 세상에서 최고의 여배우야
지금 정신지체 연기를 하고 있잖아
니네 소속사 직원은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들어와, 축축하고 끔찍해
맘에 들어
오후 내내 쇼핑할 거야
그러고 나서 아무나랑 섹스 해야 할 것 같아.
쇼핑하고 나서 섹스할 건지 차에서 얘기하자
이 작품은 오래가진 않을 거야

 

I think the invention of the alcoholic energy drink Sparks was the Event that launched the 21st century
Not 9/11
This is some really good music
If Frankenstein was in a really good band it would sound like this
I was alone on the beach thinking about you
Like really late last night
If the world ends tomorrow I don’t want to still be mad at you
Once I was dumped via email
While I had an auto-reply response up
It took two weeks
For me to learn my new status
It was so sunny that day, I remember
I was drinking on the balcony of some house in Miami
You know how wonderful the 21st century can be
The details do not improve what’s at stake here
Maybe this new profile picture will open some doors
I’ve been dying my hair black for 15 years
What’s it like to be you?
That post on Deleuze started a fucking orgy
I don’t even talk like this
You make me
I’m so obsessive
My car is beautiful
Antonio Villaraigosa calls me for advice
So we meet for lunch
I say
I’m not a writer
I’m a stylist
A charlatan
With an unwholesome interest in all people
He wants details
I’m ready to fall
For the subtle grace which I am able to describe you with

알코올 에너지 드링크 스파크가 발명된 게 21세기를 시작한 사건인 것 같아
911 테러가 아니라
이거 정말 좋은 노래야
프랑켄슈타인이 진짜 좋은 밴드에서 활동했으면, 이런 사운드였을 것 같아
그냥… 어젯밤 정말 늦게까지
니 생각하면서 해변에 혼자 있었어
세상이 내일 끝난다면, 세상이 끝날 때는 너한테 화내고 싶지 않아
어느 날 이메일로 차였을 때
이메일을 확인할 수 없어서 자동응답시스템을 작동시켰어
그래서 내가 우리 관계의 새로운 상황을 알기까지
2주가 걸렸어
그날 날씨가 참 좋았어, 내 기억엔
마이애미 어느 집 발코니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어
21세기가 얼마나 멋질 수 있는지 너는 알지
세부 사항이 여기에서 중요한 건 아니야
아마 새로 찍은 프로필 사진이 문을 열어줄 거야
15년 동안 머리를 검정으로 염색했었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

드루즈에 붙은 저 우편물을 보니 난교파티가 시작됐어, 시발.
난 평소에는 이런 말 안 해
니가 날 그렇게 만들었어
난 완전히 강박증에 걸렸어
내 차는 아름다워
안토니오 빌라래고사가 상담 받으려고 전화했어
그래서 점심 먹으려고 만났어
작가가 아니고
스타일리스트야
나는 말했어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해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기꾼이라고 했어
그는 세부 내용을 원해
너에게 우아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에
빠질 준비가 됐어

 

Soak a sugar cube in bitters
And place it in a glass
Fill the glass with champagne
The decade happens
You’re not the only one I’ll love
Solar plexus
I am evil in it
My life
Walk to the water
What’s been done here will
Be relevant
I’m writing this so the youth may learn
The power that kills that they may live
Fama Witchcraft Ouija The Valley
Muscular and romantic
I’m ready to fall in love
And envy the perfection of what I’ve done

비터에 각설탕을 담가
그리고 잔 속에 넣어
잔에 샴페인을 가득 채워
때가 됐어
너는 내가 사랑할 유일한 사람이 아냐
복강 신경총
내 인생
나는 그 속에서 사악해
강변을 걸어
여기서 일어난 일이
관련이 있을 거야
나는 이걸 씀으로써 젊은이들에게
파괴력을 알리려고
생존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어
파마 마법 점판 벨리
근육질의 로맨틱한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됐어
그리고 내가 해온 것들의 완벽함을 부러워할 준비가

 

Who will keep my secrets when I die?
I want to be shot with an arrow
Into a jacuzzi while the jets are firing
Boys
Girls
Pools
Human Sexualities
Suburban spells
I cannot numb these vulgar emotions
Maybe in a long email made of disabled things people say as “I”
Maybe you heard them
In the original French version?
As if falling in love were so uncool

죽으면 내 비밀을 누가 간직해줄까?
화살에 맞고 싶어
자쿠지 안으로 제트가 발사되는 동안
소년들
소녀들
수영장들
인간의 성 정체성
교외에 있는 시간
이런 천박한 감정들을 마비시킬 수가 없어
아마 장문의 이메일에, “나”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망가진 것들을 만들었을 거야
아마 너는 들었을 거야
원래 프랑스 버전으로?
사랑에 빠지는 게 멋있지 않은 것처럼

 

I want a swan to spit an expensive Malbec
Straight into my wanton mouth
It’s harder if it’s true
I could make an enemy
I’d like to get involved
You can’t die from loneliness
But can’t I try?

백조가 비싼 말벡을 부정한 내 입으로
직접 뱉었으면 좋겠어
사실이면 더 힘들어
나는 적을 만들 수 있어
몰두하고 싶어
외로움 때문에 죽을 순 없어
하지만 나는 해볼 수 있을까?

 

    시 출저 「cool memories, 2014 spork press」

 

 

    ◆ 블랭크 어펙트, 벤 파마, 미국의 릭키 컬쳐

 

    20세기 하반기에, 주관성은 세계화와 세계 무역에 있어서 정체불명의 경제를 향한 길을 만들었다. 『포스트 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를 쓴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이 과정을 “정서의 쇠퇴”라고 했다. 결국, 주제는 과거, 현재, 미래 간에 일시적인 지속성을 구축하려는 능력을 빼앗는다. 인간의 경험에서 기승전결의 상실은 제임슨이 “파일 조각”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지리멸렬하게 된다. 시학에서, 문학 비평가 스티펀 버트(Stephen Burt)가 ‘함축’ 시학을 만들어낸 것의 발흥이 문제가 되었다. 시속 화자의 자아 분열을 특징으로 한 함축시는 사회의 승화된 자아를 반영했다. 21세기에 주관성이 현실을 상쇄한 반면, 결국 인간이 그 자체를 연대기 순으로 기록하는 그릇처럼, 혹은 벤 파마가 쓴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세계”인 현실을 빼앗음으로써 급속도로 가상의 세계가 주관적인 인간 경험을 표현해내는 유일한 환경이 되었다.
    형체를 가진 것에서 가상의 것으로 전환된 점을 예로 들자면, 식당에서 음식을 찍어서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과 같은 소셜 미디어 프로그램에 게시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새로운 인간 주관성,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경험의 목적(맛난 음식을 먹는 것, 식당 분위기를 즐기는 것,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닌 가상 세계에 입증할 문서이다. 마찬가지로, 벤 파마의 시 「좋아요」에서, 그는 “이메일로 차였을 때/ 자동응답을 켜는 동안 / 내가 새로운 상황을 알기까지 / 2주가 걸렸어”라고 썼다. 이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가상의 현실”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가상 세계를 본떠 만든 현실 대신에, 현실을 본떠 만든 가상 세계이다.
    하지만, 국가 안보국을 거쳐 미국 정부와 소셜 미디어 기업이 전 세계인들의 가상세계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있다고 에드워드 스노우덴(Edward Snowden)이 폭로한 이후, 인간 정체성의 위기가 닥쳤다. 스노우덴의 폭로는 절망적인 암시를 뜻하는데, 이전에 형체를 가진 주관성처럼 가상의 인간 주관성은, 결국 장소를 제공하고 가상의 인간 상호작용을 온라인에서 할 수 있게 해주는 세계적인 기업(트위터, 페이스북, 지메일 등)이 소유하고 작동시킨다.
    형체가 있는 것에서 가상의 것으로 인간 주관성의 이동이 실패한 것처럼, 21세기 정치적인 조치는 인간의 주관성을 탄압하기 위해 집단주의 상황으로 뒤틀었다. 에드워드 스노우덴의 NSA 누설 사건, 첼시 매닝(Chelsea Manning)이 위키리크스 웹사이트에 누설한 사건, 월가점령운동 등이 모든 것은 정부가 기업을 소유하고 있고 사람들의 관심사보다는 기업의 이익을 선호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결국에는, 기업은 미국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합법적인 상태가 부여되었다. 그래서 월가점령운동 같은 어떤 움직임도 집단 행동의 모의실험이고, 유명인사 숭배, 스포츠, 대중매체 오락물과 일일시트콤 같은 정치적 반란은 집단의 의미, 사회적 통제의 한 형태, 인간 의지의 끊임없는 삭제를 위한 필수적인 모의실험이 되었다.
    벤 파마의 시는 이 배경인 미국에 맞서서 주체성과 진실성을 표현함으로써 투쟁을 보여준다. 그의 시에는 유명인사 숭배와 브랜드 집착의 증거가 나타나 있는 반면, 실질적인 사람들의 상호연결에 대한 열망과 갈망 또한 나타나 있다. 채팅 어플리케이션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문화 속에 예술의 가치를 반추하는 언어로 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이야기의 조각, 수사적인 서술, 명상을 통해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911테러, NSA스파이게이트, 조지 워싱턴 부시 대통령, 해체된 제국의 문화를 견뎌온 세대의 심리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감정을 대신하거나 함축 시학처럼 분열된 정체성을 반영하려 했다기 보단, 분리와 재전유는 의미 있는 담화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특징들이 일종의 바로크 시대의 시를 만들어낸다는 논쟁을 빚어오고 있지만, 거기에는 과장되거나 화려함은 없다. 그것은 그 순간의 언어로 쓰여졌다. 부풀려진 것은 없다. 역사 혹은 저널리즘이라고 불려질 순 없지만,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존재 할 것이다.

 

    글 _ 제이크(Jake Levine, 시인)

 

 

    ◆ 벤파마와의 인터뷰

    제이크(Q) : 벤파마(A)

 

    Q : 안녕하세요, 벤. 저는 당신이 어째서 뉴욕으로 이사했는지, 또 그게 당신과 당신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읽었습니다. 아마도 시인으로서 뉴욕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말은, 사람들은 뉴욕이라 하면 미국에서 창조와 에너지의 소용돌이였던 20세기 뉴욕상을 떠올리거든요. 물론 지금도 뉴욕이 그렇긴 하지만, 미국의 문화 전망이 상당 부분 분산되었잖아요. 그리고 맨해튼은 너무 비싸고,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백인이 살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당신을 뉴욕에 사는 젊은 시인 그룹의 출현으로 연결 짓고 있고, 또 외부에서 본 뉴욕을 여전히 우리는 로르까가『뉴욕에서의 시인(1940)(Poeta en Nueva York)』에 쓴 상상대로 여기고 있어요. 또 뉴욕은 당신이 쓴 많은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어요. 당신이 생각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와 뉴욕에 살면서 글을 쓰는 시인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줄 수 있을 것 같군요.

 

    A : 주택지구 상류화에도 불구하고, 뉴욕은 여전히 영향력 있지만 힘든 도시죠. 문화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 부드러워진 당신의 감각은 정확하며, 심지어 수많은 도심문화를 창조했던 가령 패티 스미스(Patti Smith)와 데이비드 번(David Byrne) 같은 사람들, 그리고 뉴욕 같은 것들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에게 그 자체를 차단하고 있죠. 뉴욕은 여전히 동부연안의 출판 중심지이고, 나는 뉴욕에 있고 싶어요. 하지만 살기가 힘들어서 떠나고 싶어져요. 뉴욕 시에 관한 이런 류의 향수는 뉴욕 입장에서는 나쁘다고 말하고 싶군요. 패티 스미스와 데이비드 번을 만든 뉴욕은 오랜 시간을 거쳐 많은 것이 변했고, 그들 또한 스스로 변했어요.

 

    Q : 그래요. 뉴욕에 관한 향수라…… 일종의 겹쳐놓은 향수겠죠, 우리는 존재하는 곳에서 뭔가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뭔가를 갈망하는 것 같은 사색적인 향수라고 생각해요. 역겨울 수도 있어요. 인터넷이 갈망에 대한 플랫폼이었을 때, 역겨웠던 것처럼요. 그리고 고양이 사진도 역겨워요. 하지만 인터넷은 우리가 대화하는 장소예요. 지금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선 거의 그런 셈이죠. 『쿨 메모리즈』 도입부인 「좋다」라는 시는 마치 채팅창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한 사람이 혹은 여러 사람이, 진짜로든 상상으로든 간에 마치 채팅창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썼어요. 그리고 단호함과 당신이 읽어낸 진지한 태도가 있고, 당신 작품 속에 수사적인 시구들을 찌부러뜨려놓는 방식이 있어요. 그 방식으로 하여금 놀람, 반어뿐 아니라 나약함과 무상을 만들어내죠. 심지어 어마어마한 시구를 맞닥뜨렸을 때, 가령 “관심 받지 못할 거예요.” 같은 말이 우리들 위에 떠 있어요. 인터넷에서 떠다니는 언어는 당신이 쓴 글 한 줄과 같아요. “문학, 모든 물리적인 세상, 다시 말해, 우리가 늘 살고 있는 실제 세상.” 그런 면에서 보면, 일종의 자아의 탈영토화가 있어요.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자랐습니다. 이 탈영토화가 그런지 음악(Grunge music)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림프 비스킷(Limp Bizkit)과 그 밖의 남성 밴드들은 그런지 음악을 하고 있죠. 인터넷 1세대예요. 커트 로더(Kurt Loder)가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죽었다는 보도를 한 내용, 라디오 헤드(Radio Head),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 상상도 못 했던 테러 등……. 모두 다 보이죠. 단 호이(Dan Hoy), 존 리안(Jon Leon) 같은 당신의 작품에는 일종의 부산스러운 심리적 상태가 반영된 것 같은데, 제 생각엔 우리가 자라온 분리된 시간을 대표하는 것 같아요. 에드워드 스노우덴 시대, 웅웅대는 싸움과 셀피(스마트폰이나 웹 카메라 등으로 자신의 얼굴 사진을 촬영해 SNS에 올리는 행위) 그리고 첼시 매닝으로 이어지는 그 모든 것들이 제게 있어서는 안락함과 동시에 두려움이에요…… 오늘 날짜 뉴욕 타임지에, 앱을 개발 중인 셀피에 관한 리뷰 옆 지면에 발라클라바 모자를 쓴, 총을 든 남성 사진이 실렸습니다. 나란히 놓여 있는 이 사진들은 실제로 내게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주얼 문화의 소비자로서 제게 그 점은 옳지 않은 부분일 뿐 아니라 괜찮은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시리얼을 먹었죠. 전통을 파괴하는 것에 관해 얘기할 때, 그것이 뜻하는 바를 얘기할 수 있나요? 책정된 대중문화, 인터넷 문화가 오늘날의 예술에 필요할까요?

 

    A :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거의 모든 면에서 “그렇다”고 하고 싶군요. 혹시 림프 비스킷이 새 밴드 멤버를 영입할 때 이 도시 저 도시 돌아다니면서 기타 연주자들을 비디오로 촬영했던 일을 기억하세요?(기타 센터와 초대형 상점 같은 곳에서 이 “오디션”을 열었죠.) 그들이 찍은 영상 전부가 재산이 되어서 세상에 나왔어요. 이걸 확인한 사실은 없지만 그건 마치 에드워드 스노우덴 시대 이후에 새로운 방식의 주관성을 향한 좋은 아날로그 같아요. 그리고 맞아요, 당신이 (뉴욕 타임지에) 쓴 블랭크 어펙트가 있고, 그것은 권력과 특권을 다룰 뭔가를 가지고 있어요. 에이미 디아스(Amy De’Ath)가 클라우디우스 앱(Claudius App) 신간에 백인 남성 특권과 블랭크 어펙트에 관해 언급했어요. 현대의 문제로, 나는 부숴버리고 싶은 것들, 부숴버리고 싶은 몇 가지 것들이 있는데, 그건 여전히 내가 함께 살고 있고, 심지어 욕망도 있는데, 이런 애매모호함은 내가 『쿨 메모리즈』를 작업할 때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것들 중 일부예요.

 

    Q : 저는 정말이지 그 콘테스트가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제 기억엔, 그 무렵 2000년도 초반에 앳모스피어(Atmosphere)와 세이지 프란시스(Sage Francis) 같은, 기타 센터에서 기타 수업도 받지 않은 슬픈 백인 남성들로 꽉 찬 언더그라운드 힙합 시기로 주제를 옮겼던 것 같군요. 그냥 이모 앤 이모(emo and emo: 복잡한 기타 연주와 감성적인 선율이 특징인 음악 장르) 래퍼들, 델 타 펑키 호모사피엔(Del the Funky Homosapien) 그리고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던 당시 내가 취했던 유일한 반응은 술에 절어 있기만 했어요. 무력하고 따분한 백인 주정뱅이요.

 

    출판의 한 형태로 트위터, 블로그 등에 대해 말씀하셨죠? 정말 그래요. 우리는 다루죠. 사용해요. 살고 있어요. 하지만 21세기에 출판사는 적절성을 어떻게 주장할까요? 그 사람들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상당히 흥미로워요. 자연적인 선택과정을 통해 시장력이 소비자 선택을 없애고 지시할 수 있을까요? 편집 기능과 큐레이터 기능이 사라질까요? 예술 부문에서, 출판사들은 큐레이터가 새로운 예술인이라고 말합니다. 미국에서는 시 부문에서 점점 더 많은 출판사를 시인들 스스로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텍스트 분석, 시를 위한 언어 수집, 미학적인 부분을 살려내기 위한 편집 부분에 있어서 모두 한 방향이라는 게 보이세요? 제 말은 원더(Wonder)를 집필한 것과 편집한 것 사이에 하나의 연관성이 보이냐는 거예요.

 

    A : 제 글은 그것의 책정과 다양한 문화적 맥락과 상황에 너그럽지만 여전히 제 성격에도 관대합니다. 거기에서 유리한 면이 있죠. 그리고 잘 진행되면, 모든 것들이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갈 수 있어요. 원더는 장편물을 출판하는 방식으로 상당히 전통적인 출판 사례를 담고 있을 뿐더러 장편물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소요 시간을 끌어들이기만 하면 온라인에서 내용을 출판할 수 있는 꽤 빠른 “공개 자원” 사례 또한 담고 있죠. 그러기 전에 우리는 케빈 킬리안스 트위키 빌리지(Kevin Killian’s Tweaky Village)와 케이트 더빈스 이 엔터테인먼트(Kate Durbin’s E Entertainment)를 출판했어요. 이 책들은 소형 출판사인 원더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죠. 이 책들은 대형 출판사에게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책에게 같은 대우를 주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원더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출판사보다 더 재빠르다고 생각해요.
    폭로와 토렌트의 시대이고,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행동합니다.

 

 

소개 및 글 _ 제이크 레빈(Jake Levine, 시인)ame-poem-jake


제이크 리빈은 2010~2011년 리투아니아에서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포함해 여러 장학금 및 수상을 한 바 있다. 두 권의 소책자(삭제의 문턱(The Threshold of Erasure, Spork 2010)와 빌뉴스 악령(Vilna Dybbuk, Country Music 2014))를 저술했다. 자신의 시, 번역물, 에세이 등은 보스턴 리뷰지, 루에르니카, HTML자이언트, 아트라스 리뷰지, 페이퍼 다츠 외 다수의 잡지에 실렸다. 그는 리투아니아어로 쓰여진 토마스 스롬바스의 작품, 갓/씽(God/Thing, Vario Burnos 2011)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현재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정희연과 공동으로 한영 번역 중이다.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비교문학전공 박사과정 중에 있으며, 연세대학교 강사로 재직 중이다. 또 아리조나 투산에서 나온 조그만 출판사인 스포크 프레스(Spork Press)에서 편집장을 맡고 있다.

 

    번역 _ 정희연
    세종대학교 번역학 박사과정 수료,

    정리 _ 김경주(시인)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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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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