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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특강 후기] 철마는 계속 달려야 한다

  • 작성일 2014-11-06
  • 조회수 1,018

 

[황현산 특강 후기]

 

 

철마는 계속 달려야 한다

-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님 강연 후기 -

 

 

 

허희(문학평론가)

 

 

 

    2014년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열린 ‘문학행 야간 특급열차’의 차표 네 장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예매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문학을 향해 갈 수 있는 길과 방법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길과 방법을 찾을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열차에 반드시 탑승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열차를 운행하는 책임자가 다름 아닌,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한 여정을 떠나는 데 길잡이의 중요성을 새삼 더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하자면, 저는 문학을 지향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공언은 하고 있으나, 항상 좌충우돌하고 우왕좌왕하는 미숙한 문학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저에게 선생님이 이끄는 열차는 안전하고, 안락하며, 정확하게, 목적지에 도착함을 약속하는 말 그대로 ‘특급열차’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작년에 발표한 어떤 글에서 저는 선생님의 평론집 서문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습니다. 너무 노골적인 듯해서 저어되는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고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기에 조금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숙하는 평론가가 있다. 그는 읽는 이로 하여금 시의 안과 밖을 넘나들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작품ㆍ독자ㆍ비평이 함께 공명하게 하는 글을 쓴다. 정동(靜動)과 강유(剛柔)를 갖춘 대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시가 지겨워지거나 의심이 들면 다음의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그의 평론집을 탐독하면서 마음을 달랠 때가 많았다.

 

    “시는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저를 지우고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하며, 진실한 것이건 아름다운 것이건 인간의 척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까지 닿으려고 정진하는 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

 

- 황현산, 「책 머리에」, 『잘 표현된 불행』, 문예중앙, 2012, 7쪽.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 저는 이 문장에 의지해서 갈팡질팡 흔들리는 스스로를 버텨내고는 했습니다. 이처럼 선생님을 사숙하되, 사사할 기회는 없던 저에게 이번 강연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입니다.
    드디어 첫 번째 강연이 열리는 날, 저는 기분 좋은 설렘을 가슴에 품고 강연 장소인 명동 호텔 프린스 세미나실로 향했습니다. 시작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많은 좌석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역시 저 말고도 선생님의 문학행 야간 특급열차를 타려는 손님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초면이었지만 예전에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친숙한 얼굴들도 보였습니다. 공식적인 행사가 아닌 다음에야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시인?소설가?평론가를 바로 이곳에서 한꺼번에 만나게 된 것입니다. 미리 협의한 것도 아닌데 강연을 구심점으로 이렇게 자발적으로 문인들이 모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선생님의 위상이 어떠한가를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정착역은 ‘작가 탄생의 서사와 시 쓰기의 열정’이었습니다. 코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프랑스 영화 「베티 블루 37도 2분」, 한국 영화 「그녀에게 잠들다」, 「러시안 소설」을 통해 한 인간이 작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살피고, 같은 관점에서 김수영의 시 몇 편을 읽는다.” 선생님은 우리 사회의 들끓음과 식음?피상성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화두를 던지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와 노래에서 출발한 이상, 문학은 궁극적으로 진지한 희망과 열정에 결부된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선생님은 「베티 블루 37도 2분」이 ‘베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조르그’가 작가가 되어 가는 이야기라고 하셨습니다. 소설은 성공의 결과물이 아니며, 허기와 불만과 결핍에 관한 탐색의 과정임을 조르그가 잘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점에서 소설은 실패에서 비롯되며, 이는 단순한 실패이기는커녕 허망하지 않은 실패라고 할 수 있으므로, 실패를 성찰하고 천착하는 일이 문학적으로 중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또한 열정과 자기의 관계를 설정하는 문제도 거론하셨습니다. 열정만 가득해서는 오히려 아무 일도 못 할 수 있는데, 그럴 때는 열정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영화에서 조르그는 자신의 뮤즈이자 예술의 화신인 베티를 죽인 다음에야 비로소 작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소설 쓰기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작업이므로 열정의 순수함을 다른 형질로 변화시켜야 하고, 이것이야말로 ‘실패의 성공’에 이를 수 있는 왕도라고 첨언하셨습니다.
    「그녀에게 잠들다」와 「러시안 소설」 및 김수영의 시 「꽃(二)」도 이와 같은 견지에서 설명하셨는데, 새로운 작가(서사)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치면서 들어 올리는 ‘변증법적 지양’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설명을 덧붙이고자 「꽃(二)」의 시구 일부를 옮겨 보겠습니다.

 

꽃이 피어나는 순간(瞬間)
푸르고 연하고 길기만한 가지와 줄기의 내면(內面)은
완전한 공허를 끝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중단(中斷)과 계속(繼續)과 해학(諧謔)이 일치(一致)되듯이
어지러운 가지에 꽃이 피어오른다

 

    선생님은 “푸르고 연하고 길기만한 가지와 줄기의 내면은 / 완전한 공허를 끝마치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변증법적 지양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 이 시는 꽃이 피는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시는 존재의 비원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 강독이 끝난 뒤에는 강연 내용과 관련된 청중들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모든 물음에 대해서 선생님은 친절하고 자세하게 답변해 주셨는데,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선생님과 청중들이 함께한 소박한 뒤풀이에서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문학행 야간 특급열차는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이후 한여름에 갑작스럽게 감기에 걸린 저는 아쉽게도 두 번째 정착역인 ‘시인과 지사’에는 동행하지 못했고, 세 번째 정착역인 ‘난해시의 존재 방식’과 네 번째 정착역인 ‘시의 언어와 번역의 언어’에는 갈 수 있었습니다. 지면 제한상 이에 대한 자세한 소감을 서술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적어도 이것만은 밝힐 수 있을 듯합니다. 선생님의 강연은 제가 난해시와 번역에 대해 가진 편협한 인식의 틀을 깰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상술한 대로 저에게는 행복했던 강연이었으나, 그렇다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예매할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문학행 야간 특급열차가 겨우 네 번만 운행한다는 것, 예정된 대로 선생님의 강연이 단지 네 번밖에 진행되지 않은 현실이 제일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선생님의 저서를 읽으면서 미련을 달래고 있습니다.
    후기를 쓰는 김에 주최 측과 선생님께 한 가지 제언, 아니 강력한 요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디 선생님의 문학행 야간 특급열차를 대대적으로 증편해서 재운행해 주십시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해주시면 바람직하겠습니다만, 설령 아주 늦게 운행 재개 공고가 난다고 해도, 다시 열차가 달리기만 한다면 승객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애타게 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 관련 게시글 : [기획특강_동영상]황현산의 문학행 야간특급열차(제1강 1부)
        [기획특강_동영상]황현산의 문학행 야간특급열차(제1강 2부)

 

 

허희(문학평론가)


1984년 서울 출생.
2012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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