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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인터뷰_나는 왜] 나는 왜 판타지에 끌리는가

  • 작성일 2015-04-01
  • 조회수 4,659

 

연속기획 공개인터뷰 _ 나는 왜?(제10회)

 

 

나는 왜 판타지에 끌리는가?

- 소설가 정세랑 편

 

 

정리 : 안희연(시인)

 

 

 

    작년 한 해 꾸준한 사랑을 받았던 공개인터뷰 [나는 왜]가 올해도 계속해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싱그러운 새봄을 맞아 모신 3월의 손님은 최근 장편소설 『재인, 재욱, 재훈』을 출간하신 쫄깃한 문장의 소유자, 정세랑 소설가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연, 아주 조그만 초능력, 평범하고 작은 친절, 자주 마주치는 다정함”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들은 3월 11일 수요일 오후 7시에 둥글게 모여 앉았습니다. 평소 손재주 좋기로 소문난 작가님께서 독자들을 위해 유자파운드케이크와 스콘을 구워 오셨고, 우리는 ‘지구에서 하나뿐’인 그 빵을 마음의 양식처럼 오물거리며 작가님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빵이 맛있는지, 이야기가 맛있는지, 실은 둘 다였겠지만, 어느덧 시간은 훌쩍 지나고 기분 좋은 포만감만 남았더군요. 아마 그곳에 모인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맛있다, 맛있다,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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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르, 현실의 조건을 한두 가지 바꾸어 보는 퍼즐 놀이

 

    ▶ 김미월(이하 김) : 《문장 웹진》 연속기획 공개인터뷰 [나는 왜] 열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 『이만큼 가까이』, 『재인, 재욱, 재훈』 이상 네 권의 소설을 출간하신 정세랑 작가님을 모시고 “나는 왜 판타지에 끌리는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 보려 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차차 나누기로 하고, 첫 번째 질문은 순전히 팬심으로 여쭤 보겠습니다. 혈액형이 무엇인가요? 좋아하는 색깔은? 카페에 가면 주로 어떤 커피를 주문하시는지요?

 

    ▶ 정세랑(이하 정) : (웃음) 저는 에이형이고요. 에이형 처녀자리 쥐띠라 ‘소심 3콤보’예요. (웃음) 좋아하는 색은 제가 혈색이 없는 편이라(다크서클도 태어날 때부터 있었고요) 그래서 붉은색 계통을 좋아해요. 커피는 마시면 밤에 잠을 잘 못 자서 주로 과일주스를 마시는 편이고요. 대신 글을 마감해야 할 때는 제가 실험을 해보니까 녹차나 커피보다는 홍차가 가장 효과가 좋았어요. 얼마 전에 스티븐 킹도 트위터에 진하게 우려낸 차의 효용에 대해 강변하셨더라고요. 여러분도 레포트가 잘 안 써질 때는 홍차를 드셔야 해요. (웃음)

 

    ▶ 김 : 말씀을 어쩜 이렇게 재밌게 하실까요? 저도 에이형인데 혹시 피 모자라면 얘기하세요. (일동 웃음) 저는 왠지 정세랑 작가님께서 트렌디(trendy)한 커피를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

 

    ▶ 정 : 커피는 아침에 딱 한 잔만 마셔요.

 

    ▶ 김 : 저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이지만, 이런 개인적인 질문들이 궁금하더라고요. 아무쪼록 정세랑 작가님은 지난 연말에 네 번째 장편소설 『재인, 재욱, 재훈』을 출간하셨습니다. 2010년에 등단하셨는데 5년 동안 무려 네 권의 책을 내셨으니 어마어마한 속도입니다. 심지어 내놓는 책들마다 완성도가 높고 정세랑 작가만의 색이 분명하게 드러나니 공력 또한 어마어마합니다. 비결이 뭔가요?

 

    ▶ 정 : 사실 그중 두 권은 데뷔하기 전에 써놓았던 거예요. 단편으로 데뷔를 할지 장편으로 하게 될지 잘 몰라서 일단 최대한 많이 써두었거든요. 단편도 7편 정도 비축해 둔 상태에서 활동을 시작했고요. 재고가 많아서 활동하기가 편했어요. 좋은 기회가 왔을 때 닥쳐서 쓴 것처럼 소설을 딱 내놓으면, 다들 잘 쓰는 줄 알잖아요. (웃음) 제가 보기에 소설가들은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아요. 수공예 하듯이 깎고 다듬어 3∼5년에 하나 내놓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공장파도 있고요. 저의 경우는 공장파인 것 같아요.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다른 거죠, 전반적인 스타일이. 그래서 친한 작가분이랑 “너 요즘 생산라인 잘 돌아간다 ” 그런 얘기도 해요. (웃음)

 

    ▶ 김 : 비축량도 있긴 있지만 기본적인 창작력이 왕성하신 것 같아요. 정말 부러운 점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세랑 작가님은 독특하다면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르 문학 잡지 《판타스틱》에 「드림, 드림, 드림」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셨잖아요. 워낙 많이 알려진 얘기인데, 여러 순수 문학 매체의 최종심에서 아깝게 낙선한 적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순수 문학 매체에서 장르 같다고 계속 떨어지니까 아예 장르 쪽으로 지원을 하셨다고요. 작가님이 생각하시기에 이렇게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을 구분하는 것이 온당한지,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 정 : 저도 오래 고민한 질문이에요. 사실 저는 문예지 편집자로 일을 했기 때문에 순수 문학의 한가운데서 자랐거든요. 문예지라는 게 한국 문학의 정중앙에 있는, 동시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잖아요. 문예지 편집을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제가 장르를 쓰고 있다는 자각을 전혀 못 했어요. 그런데 최종 2인에서 아슬아슬하게 떨어질 때마다 모든 사람이 나에게 장르를 쓴다고 하니까 ‘내가 쓰는 게 장르인가?’ 싶은, 후천적인 자각이 생기더라고요. 그 당시 친구인 소설가가 《판타스틱》 편집장을 만나러 가는데 너도 가지 않겠느냐고 해서, 써두었던 단편을 가지고 갔어요. 다음날 바로 전화가 와서 데뷔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쓰는 것이 장르였다는 것을 알게 됐죠.
    어떤 것이 장르인가를 생각했을 때 최근 답을 얻은 게 있어요.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이 2014년에 전미 도서상을 수상했거든요. 그때 한 연설이 유투브에 올라와 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에요. 장르 작가로는 최초 수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연설에서 르 귄이 “장르 작가들은 더 큰 현실을 말하는 리얼리스트”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말이 와 닿더라고요. 사실은 현실에 대해 쓰고 있는데 그것을 커다란 비유로 쓰기 때문에 달라 보이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현실의 조건들을 한두 가지 바꿔 보는 게 장르 같아요. 이를테면 ‘해리 포터’에서는 마법학교가 있다면 ‘반지의 제왕’에서는 중세풍의 세계에 다른 종족이 있다면 현실의 조건 하나를 바꿔 본 거잖아요. 순문학이 수채화 같은 느낌이라면 장르 문학은 퍼즐놀이나 콜라주의 느낌이랄까요. 쓸 때의 즐거움이 다른 것 같아요.
    그런 고민들을 계속하고 있는데, 사실 장르 작가랑 순문학 작가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진 것 같아요. 시인들도 요즘은 SF를 많이 쓰잖아요. 순문학으로 분류되는 작품에도 장르적 요소가 활용되는 경우가 많고요. 점점 더 장르적인 코드를 흡수하는 게 자연스러워질 것 같아요. 그 원인은 텔레비전 만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80∼90년대에 텔레비전 만화가 인기를 끌면서 장르적인 코드를 흡수하는 게 훨씬 쉬워졌고, 영화 쪽에서도 대작들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졌고요. 장르라는 게 기타 코드 같아서 한번 익히면 자유로워져요. 처음 진입 장벽이 클 뿐.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자연스럽게 보고 자란 세대가 앞으로 글을 읽고 쓰게 될 텐데 그러면 더 장르적으로 되지 않을까요? 장르의 궁극을 지향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저는 그보다 장르를 손에 붙은 악기처럼 쓰는 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쓰는 도구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더 귀를 기울여 주셨으면 해요.

 

    ▶ 김 : 장르가 손에 익은 악기라는 말씀이 간명한 답이 된 것 같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용’이나 ‘지하세계’가 나오면 장르다, 판타지다 규정하는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덧니가 보고 싶어』를 먼저 읽은 작가에게 “그 책 어때?” 물었더니 “어, 용이 나와.” 하더라고요. (일동 웃음) 아무쪼록 『덧니가 보고 싶어』는 장르냐 아니냐를 떠나서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화자가 어느 예쁘고 세상 물정 모르는 한 여자를 ‘경단 같은 아가씨’라고 묘사하는 대목이 있는데, (웃음) 그 묘사를 읽는 순간 ‘아, 이 작가도 경단 같은 사람이겠구나’ 싶더라고요. 정말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저희는 경단 아가씨를 모시고 대화 중입니다. (일동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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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에서 하나뿐인 황금 박쥐

 

    ▶ 김 : 편집자로 오래 일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편집자였을 때 바라본 작가의 삶과 등단 이후 실제 작가의 삶은 어떻게 다른가요? 편집자 이력이 작가 생활에 미친 영향이 있다면요?

 

    ▶ 정 : 사실 편집자일 때 바라본 작가들 중 글만큼 사람이 좋은 작가는 자주 없었어요. (웃음) 아, 김미월 작가님! 김미월 작가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제가 완전 신입 편집자로 일할 때 김미월 작가님과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 김미월 작가님께서 제게 생선 가시를 발라 주셨어요. 그날은 일기도 썼어요. ‘김미월 작가님이 나에게 생선 가시를 발라 주었다’라고. (웃음) 아무래도 작가들과 일하는 건 예민한 것 같아요. 각자 내면의 광기나 불안, 상처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작가들의 반응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는 해외문학팀을 부러워했어요. 작가들이 멀리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하니……. (웃음)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저도 글을 쓰게 되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젠 편안해진 것 같아요.
    편집자로서의 경험이 도움 되는 건 작품을 고칠 때 냉정해질 수 있다는 점이에요. 쓸 때는 일단 쓰더라도 작품을 고칠 땐, 만약 이게 다른 사람 작품이면 어디를 들어낼 것인가, 어디를 고칠 것인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되더라고요. 또 하나 좋은 점은 업계의 악당들( )을 피할 수 있다는 것? 출판사 직원이면 다 알 거든요. 어떤 회사가 나쁜 조항의 계약서를 들이미는지, 글을 잘 의논하지 않고 고치는지. 그런 부분들을 미리 피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 김 : 그럼 본격적인 작품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아마도 긴 질문이 될 듯한데요,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 『이만큼 가까이』, 『재인, 재욱, 재훈』 이상 네 작품을 쓰게 된 각각의 계기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 정 : 출간 순서가 뒤바뀌었는데, 가장 먼저 쓴 소설은 『지구에서 한아뿐』이었어요. 그때는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 시나리오로 썼던 작품이었고, 그래서 소설 챕터가 시나리오 씬 수와 일치해요. 시나리오를 소설로 바꾼 것이라 가장 영상에 가까운 작품이고요. 가장 대중적이고 달콤하고 쉽고, 그래서인지 장르 쪽에서는 이 소설을 ‘입문자용 소설’이라고 하더라고요. 칭찬일 수도 욕일 수도 있는데 저는 칭찬으로 받아들였어요. 누군가는 입문자용을 써야 하잖아요. 독자들이 제 소설을 시작으로 더 정교하고 어려운 소설로 옮겨 간다면 제 몫을 한 거라 생각해요.

 

    ▶ 김 : 아, ‘입문자’라는 말씀이었군요. 저는 인문계, 자연계 할 때의 ‘인문자용’이라는 말씀인 줄 알았어요. (일동 웃음)

 

    ▶ 정 : (웃음) 사랑스럽고 작은 소설인데, 이 소설 좋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성격 좋은 분들이 많아요. 마음이 밝고 건강한 분들이요. (웃음)
    그다음으로 쓴 소설이 『덧니가 보고 싶어』였어요. 데뷔는 했고, 장르 작가가 되긴 했는데 장르가 대체 무엇인가 한참 고민하던 시기였죠. 그때 제가 3년 정도 연애를 안 해서 매우 다크했어요. (일동 웃음) 그래서 제가 자꾸 소설에서 옛날 남자 친구들을 죽이더라고요. (웃음) 만약에 이걸 책으로 묶었을 때 옛날 남자 친구들 심정은 어떨까, 재밌지 않을까 싶어서. 화자와 제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옛날 남자 친구를 죽이는 설정, 이런저런 삽화를 추가해서 쓰게 된 소설이 『덧니가 보고 싶어』였어요. 그래서인지 이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단호한 분들이 많아요. (웃음) 책마다 독자의 성향이 다른데, 단호하고 취향이 확고한 분들이 『덧니가 보고 싶어』를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다음 소설은 『이만큼 가까이』인데, 다른 소설이 인물이나 스토리가 먼저 왔다면 이 소설은 풍경이 먼저 왔던 소설이에요. 제가 모 출판사에 취직을 했는데, 파주출판단지가 그 당시에는 굉장히 황량하더라고요. 그곳에서 2년 반 정도 보냈는데 출판단지에는 병원도 슈퍼마켓도 없고 본 것이라고는 논, 밭, 흙, 야생동물……. 특히 수리부엉이는 얼굴이 이만 해요. 옛날에 독수리를 보면서 애 잡아간다고 하시던 어른들 말씀이 사실이겠다 싶더라고요. 제가 어릴 때 일산에서 살았었는데요. 일산이라든가 파주라든가 세종시라든가, 그런 신도시들이 모두 폭력적인 과정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신도시들은 다 똑같이 생겼잖아요. 우리 세대는 각자의 고향 풍경 같은 건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파주라는 황량한 풍경에 어떤 인물을 풀어 놓으면 좋을까 생각하며 『이만큼 가까이』를 썼죠.
    마지막으로 『재인, 재욱, 재훈』은 ‘희미한 초능력’에 대한 이야기예요.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단편에는 넘치고 장편에는 허술할 듯해 고민이었는데, 마침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 분량에 딱 맞겠구나 싶어서 쓰게 됐죠. 이 소설을 쓰면서 형식이 내용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쓰는 동안 정말 흥미로웠고요.

 

    ▶ 김 : 말씀하신 소설 중 세 번째 장편소설 『이만큼 가까이』는 장르적 요소가 전혀 없는, 문자 그대로 정통 순수 문학 작품이지요. 이 작가는 장르도 썼다가 비장르도 썼다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척척 쓸 수 있구나 놀랐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장편소설에서 다시 장르 문학으로 돌아왔어요. 『이만큼 가까이』는 외도였나요? 왜 자꾸 장르로 가게 되는지요. 아마도 이 질문이 오늘 ‘나는 왜’의 핵심 주제와도 닿아 있는 질문인 듯합니다.

 

    ▶ 정 : 제 취향이 그쪽인 것 같아요. 존 스칼지(John Scalzi)는 최근에 가장 좋아하는, 너무너무 뛰어난 작가예요. 올해만 대여섯 권은 읽은 것 같아요. 그 외에도 닐 게이먼(Neil Gaiman), 스티븐 킹(Stephen King) 등등 제가 좋아하고 즐겨 읽는 작가들 중에 장르 작가가 많은 것 같아요. 장르 쪽으로 몸이 기운 거겠죠.
    장르를 쓰기 위해 장르를 쓰는, 정통 장르 작가들도 있지만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박쥐에 가까웠어요. 순문학에서는 장르라 하고, 장르 문학 쪽에서는 너무 문학적이라고 하고. 그래도 계속 활동하다 보니 서로 우리 애라고 하고 받아들여 주시는 것 같아 좋아요. (웃음)
    저는 인물의 내면을 깊이 파내려가는 것보다는 리얼과 리얼이 아닌 것의 경계를 아슬아슬 걸어가는 쪽에 더 흥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단편을 써보니 장르 문학과 순문학의 비율이 2:1 정도 되더라고요.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이만큼 가까이』의 경우에는, 파주라는 풍경에 판타지가 잘 안 입혀졌고, 순문학으로 썼어야 하는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이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안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 분들, 상처가 많은 분들이 많죠. 『지구에서 한아뿐』을 좋아하시는 분들만 밝아요. 나머지는 다 심각해요. (일동 웃음)

 

    ▶ 김 : 정말 귀한 황금 박쥐 캐릭터 아닌가요? 편할 때마다 몸을 바꿔 탈 수 있으니, 라이터로서의 재능이 출중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심히 부럽습니다. 그런가 하면 책마다 독자의 성향까지 분석이 가능할 정도로 확고한 고정 독자층을 가지고 계시군요. (웃음)

 

    ▶ 정 : 제가 SNS를 하는데 독자 분들이 말을 걸어 주시니까 성향이 보이더라고요. 저도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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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줌밖에 안 되더라도

 

    ▶ 김 : 말씀하시는 걸 들어 보면 알겠지만, 정세랑 소설가의 서사는 하나같이 밝고 명랑하고 사랑스러워요. 무엇보다 인물들이 악하지 않아요. 악역이 있어도 귀엽다고 해야 하나, 가가멜처럼. 악하지만 진짜 나쁜 놈은 아니고, 우습다, 귀엽다, 동정심이 난다 정도의 악함이에요. 달리 판타지가 아니라 그래서 판타지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세랑 작가의 세상을 보는 시선이 악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악한 인물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일까요?

 

    ▶ 정 : 사실 저는 비관적인 사람이라 세계가 끔찍하다고 생각해요. 잔인하고 비열하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 이 세계라는 생각.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작가도 필요하지만 저는 친절함이나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위기가 닥쳐도 빛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는 계속 ‘폭력’에 대해 쓰고 있거든요. 폭력에 쉽게 물들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한 줌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지만, 한 줌에 불과해도 그들을 아껴 주고 싶어요. 너무 끔찍한 이야기는 읽히지 않으니까, 부드러운 방식으로 쓸 수 없을까 늘 고민해요.

 

    ▶ 김 : 저는 정세랑 작가님이 ‘폭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쓰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세계에 대한 사랑, 위험에 처한 인간에 대한 사랑 등등. 그런데 사랑을 얘기하려면 폭력을 피할 수 없지 않나 싶기도 하네요. ‘작가의 말’을 보면 작가가 세계를 보는 시선이 느껴지는데, 정세랑 작가님에게는 양지에서만 자란 것 같은 따뜻한 기운이 있어요. 작가의 몸이 그렇게 만들어져서 밝고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서사를 쓸 수밖에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 정 : 그런데 제가 최종심에서 가장 많이 떨어진 이유가 너무 가볍고 밝아서였어요. (웃음) 사람이 가벼워서 글도 가벼운 건데 억지로 무거울 수는 없잖아요. 술을 안 마시는데도 늘 취한 것 같거든요. (웃음) 글에도 조증이 있어서 팔랑팔랑한 게 있지만 모두 다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쾌감’에 대해 쓰고 싶어요. 천천히 걸어가는 사색하는 자아 말고, 주인공들이 활보하고 뛰어다니게 하는 속도감 있는 이야기. 그래서 다음 작품은 좀 더 ‘쾌감’이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아요.

 

    ▶ 김 : 정세랑 작가의 작품이 지닌 장점 중 하나가 표현의 신선함입니다. 뻔한 비유가 전혀 없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정세랑표 비유가 작품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그런 비유들은 어떻게 생각해 내시는지요?

 

    ▶ 정 : 그런 단어들 있잖아요, 평소에는 전혀 안 나오다가 소설에만 나오는, 이를테면 ‘거무룻하다 ’

 

    ▶ 김 : ‘웅숭깊다’ 그런 단어 말씀이죠? (일동 웃음)

 

    ▶ 정 : 네. 그런 단어들은 안 쓰려고 노력해요. (웃음) 제가 친구가 많은 편이에요. 작가에게는 글 안 쓰는 친구가 최고인 것 같아요. 문학과 관련 없는 일을 하는 친구들의 말이 더 문학적일 때가 있어서, 친구들이 하는 말만 받아 적어도 소설에 큰 도움이 되거든요. 책상에 앉아 억지로 좋은 표현을 만들려고 해도 안 나와요. 친구들을 만나 대화하다가 인상적인 표현이 있으면 핸드폰 메모장에 메모해 두고, 이따금씩 제가 쓰고 있는 이야기의 구조 위에 얹는 거죠. 문학하는 사람들은 문학 바깥의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게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 같아요. 글 쓰려고 준비 중인 분들이 자기와 비슷한 친구들하고만 만나면 작품이 서로 비슷해질 거예요.

 

    ▶ 김 : 주변 사람들에게서 비유의 힌트를 얻는다고 하셨는데 내 문학에 끌어올 비유를 포착하는 것도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세랑 작가님의 경우에는 비유의 신선함도 물론이지만, 유머감각도 탁월하시잖아요. 정세랑 작가님의 유머는 악의가 없는 유머 같아요. 비유와 유머야말로 뛰어난 지성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데, 머리가 좋으신가 봐요.

 

    ▶ 정 : 저희 엄마가 들으면 아마 반대하실 거예요. 제 새치를 보시고 “머리 나쁜 애가 머리 좋은 사람이 하는 일을 해서 그렇게 하얘지는 게 아니냐” 그러시거든요.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무슨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소설 어디에 들어가겠구나 하고 포착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센서가 민감한 타입. 그게 제가 가진 유일한 재능인 것 같습니다.

 

    ▶ 김 : 그게 얼마나 대단한 재능인데요. 정말 부럽습니다. 그러면 정세랑 작가님께서는 문장을 한번 쓰면 그대로 쭉 가는 편인가요? 아니면 퇴고를 하면서 더 나은 표현을 찾아 끊임없이 문장을 다듬는 편인가요?

 

    ▶ 정 : 저는 초고는 쭉 쓰고 퇴고를 서너 번 하는데, 그때 한 문장을 두세 번씩 고쳐요. 쓸 땐 쓰는 즐거움에 쓰는데 고칠 때는, 부끄럽지 않은 상태로 내보내야 하니 무척 힘겨워하며 고치는 편이에요. 최초의 힘이 되는 모티브는 변하지 않지만 그걸 둘러싼 구조물을 만드는 게 어려운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정교한 소설을 쓰시는 분도 있지만 저는 빈틈이 생기더라고요. 대체로 그런 오류를 잡아 주는 건 남편이에요. 남편은 이공계라서 사실과 어긋난 부분을 냉정하게 짚어 줘요. 과학적으로 틀린 것도 많이 잡아 주고요. 저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 조각이불 만들 듯이 꿰매서 쓰는 것 같습니다.

 

    ▶ 김 : 문장을 많이 고치시는 편이었군요. 저는 정세랑 소설가의 작품을 보면서 지적인 작가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 정 : 무척 기쁘네요. 앞으로도 그 이미지를 유지해야겠어요. (일동 웃음)

 

    ▶ 김 : 소설을 쓰다가 잘 안 되면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기시나요? 스콘을 구우시나요?

 

    ▶ 정 : 네. 소설이 잘 되지 않을 땐 손을 많이 움직여요. 아무래도 소설 쓰기는 뇌로 하는 스포츠이고, 운동선수처럼 뇌를 다뤄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빵을 굽거나 재봉틀을 돌리거나 보드게임을 하거나, 손을 많이 움직이는 일을 하며 보내요.
    그런데 소설을 잘 쓰려면 매일 일정량을 써야 되는 것 같아요. 선배 작가들 중 하루에 30∼40매씩 쓰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작가마다 거미줄처럼 매일 뽑아내는 분량이 다른데 저는 15∼20매 정도인 것 같아요. 안 되더라도 어떻게든 뽑아내면 다음날은 작업이 잘 되는 것 같고, 되도록 같은 시간에 같은 분량의 글을 쓰는 습관을 들여야 마감 날짜를 맞추게 되더라고요.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 고치면 되니까, 일단은 파이프가 안 막히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요. 장편이 정 안 되면 산문이라든지 단편소설을 먼저 쓰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개운해져서 긴 글이 잘 풀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물론 매일 아침 딴 짓부터 시작하죠. 인터넷 검색하고, 웹툰 보고. (웃음) 미루고 미뤄서 쓰면 아드레날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매일 안 써버릇 하면 막히는 것 같아요. 변비처럼. 아, 변비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저도 우아하고 싶은데……. (웃음)

 

    ▶ 김 : 그렇게 성실하게 작업을 하시기 때문에 곧 다음 장편도 만나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을쯤 출간 예정이라고 했는데, 다섯 번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정 : 작년에 발표했던 경장편을 고치는 중이에요. 연초에 아는 소설가 언니가 휴대폰으로 토정비결을 봐주었는데 9월에 책을 내면 잘 된다고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출판사에 조르고 있는데 9월에 맞춰 나올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웃음) 퇴마 능력이 있는 보건교사 이야기고요, 2014년에 쓴 소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조의 모티브가 들어간 것 같습니다. 『재인, 재욱, 재훈』과 통하는 부분도 있을 거고요. 애초에 쾌감, 즐거움을 위해 쓴 소설이기 때문에 읽기 편한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1년에 1∼2권은 책을 내서 죽기 전에 50권을 내는 게 목표거든요. 50권 다 쓰면 그다음에는 열대의 섬 크루즈 여행 다닐 거예요. 50권 중에 한 권은 정말 괜찮은 책이 나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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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큼 가까이

 

    ▶ 김 : 제가 준비한 질문은 여기까지고요, 이제 독자 여러분의 질문을 받아 볼까요? 평소 궁금하셨던 것들 질문해 주세요.

 

    ▶ 독자 : 결혼 생활 어떠세요? (일동 웃음)

 

    ▶ 정 : 결혼하니까 사는 게 좀 무거워진 것 같아요. 어른이 됐구나, 책임질 게 많아졌다, 그런 생각이요. 원래는 집에 불이 나면 노트북만 들고 나가면 되는 가벼운 인생이었는데……. (웃음) 지난 1년간은 정말 자주 싸웠어요. 사소한 생활습관도 큰 싸움의 빌미가 되더라고요. 저는 집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제 작업 공간에 수건 걸어 두고 과자 먹고 안 치우면 열 받고. (일동 웃음)
    그래도 남편이랑은 동갑 친구라서, 싸우더라도 건강하게 싸운 것 같아요. 평소엔 좋은 매니저 역할을 해줘요. 취재를 할 일이 있으면 남편이 데리고 가주거든요. 저는 게을러서 안 가려고 하는데 강릉이라든가 대전이라든가, 직접 가서 봐야 디테일이 산다면서 저를 데려가요. 자기는 하는 일에 야망이 없으니 네 책이 빵 뜨면 직장 그만둘 거라고 만날 그래요. 그래서 어깨가 무거워요. (웃음)

 

    ▶ 독자 : 아까 작가님께서 본인 소설을 ‘입문자용 소설’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경우예요. 읽고 정말 좋았어요. 장르는 ‘매력적인 코드’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제 상상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땅에 붙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소설 쓰기는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인데 연습을 하면 되는 걸까요?

 

    ▶ 정 : 자기가 좋아하는 장르의 닮고 싶은 작가들이 쓴 글을 몸속에 가득 축적하면, 어느 순간부터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고전들,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들을 100 읽으면 1은 분명 쓸 수 있어요. 꽃잎에서 향수를 추출하듯이 말예요.

 

    ▶ 독자 : 저는 정세랑 작가님의 소설을 네 권 다 읽었는데요. 작가의 말을 보면, 내 친구 누구누구라고 실명이 나와요. 『덧니가 보고 싶어』에도 전 남자 친구 이야기가 나오고요. 저도 소설을 쓰다 보면 아, 이거 소설로 쓰면 좋겠다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중에 얘가 이걸 알면 어쩌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작가님의 경우에는 친구들에게 소설에 쓰겠다고 허락을 구하고 쓰시는지 아닌지 궁금합니다.

 

    ▶ 정 : 즐거운 일이면 보통은 허락해 줄 테고, 다소 아픈 일이더라도 윤색을 해서 알아볼 수 없게 고칠 수도 있으니 우선은 허락을 받는 쪽이 좋은 것 같아요. 말없이 쓰면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수가 있는데, 그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이름 짓기가 하도 힘들어서 실명을 자주 빌리는 편이에요. 진짜 이름에 이야기를 입히는 작업이 재밌기도 하고요. 하여튼 이름은 어려워요. 외국에는 나라별로 주인공 이름을 만들어주는 프로그램도 있더라고요. ‘인도 남자’라고 치면 50개쯤 이름이 뜨는데 하나를 고르면 돼요. 빌릴 이름도 없고 아무래도 생각 안 날 땐 마트나 은행에서 일하는 분들의 명찰을 보고 이름을 훔쳐올 때가 있어요. (웃음)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제 친구들은 “날 죽여도 좋으니 괴롭지 않게만 죽여 달라”고 말하기도 해요. 자기 경험이란 건 곧 바닥나고 결국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빌려야 하는데, 예민하고 힘든 문제이긴 해요. 많이 고칠 거라고 안심시키고 쓰기도 하고요.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잘 해보세요. 데뷔를 하면 생각보다 마음을 잘 열어 주더라고요. (웃음)

 

    ▶ 독자 : 출판사에 다니셨다고 했는데 힘들지 않으셨나요? 일을 하면서 소설 쓰기가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 정 : 출판사 다닐 때 너무 힘들어서 기절한 적도 있어요. (웃음) 일을 하다 중간에 쉬는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 많이 써두었고요. 소설 쓰기라는 게 다른 직업 없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회사 다니면서 작업 시간을 확보하기는 힘들잖아요. 글 쓰는 이들에게는 그 중간 정도의 탄력적인 작업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일주일 내내 일하지 않아도 되거나, 혹은 방학이 있는 직업요.
    출판사에 다니면서 배운 건 많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이의 글을 고치다 보면 자기 작업은 잘 못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상을 받자고 결심했어요. 제때 받아서 다행이지 큰일 날 뻔했어요. (웃음)

 

    ▶ 독자 : 데뷔작을 인상 깊게 보았어요. 데뷔하시게 된 계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 정 : 친구 소설가를 따라 《판타스틱》에 갈 때 단편을 여러 편 들고 갔어요. 무작정 간 거죠. 당시에 「영원히 66사이즈」(다이어트를 하기 전에 뱀파이어에게 물려서 살이 안 빠지는 여자의 고뇌를 다룬 작품)와 「드림, 드림, 드림」 둘 중 하나로 좁혀졌는데, 당시에 「영원히 66사이즈」 결말이 좀 이상해서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게 됐어요. 참 무턱대고 찾아갔던 것 같아요. 계속 떨어지면서도 여기저기 응모도 많이 했고요. 여러분도 애벌레처럼 많이 읽고 축적해 놓으세요. 당장 뭐가 안 되어도 그게 다 재산이니까. 몰두하는 시간을 갖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 오창은 문학평론가 : 소설을 읽어 보니 ‘이 얘기 하면 즐겁겠다. 재밌겠다.’ 그런 게 읽히더라고요. 일단 쓰는 내가 즐거워야 한다는, 소설 쓰기의 이런저런 원칙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원칙이 있을까요? 그리고 소설에서 상처받은 여성,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복수를 다룬 경우가 많은데 여성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 정 : 역시 평론가 선생님이어서 질문이 날카로우세요. (웃음) 제가 소설을 쓰면서 지키고자 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동시대 언어, 구어체를 쓰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에요. 남자 주인공이 세 페이지에 걸쳐 문어체로 고백을 하면 정말 싫을 것 같아요. 짧은 한 마디의 고백으로 꽝 때리는 걸 더 좋아해요. (일동 웃음) 저는 소설에서 제 친구들, 제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합니다. 가독성도 생각하는 편이에요. 물론 제가 6개월간 공들여서 쓰고 고친 글을 두 시간 만에 쓩 읽으셨다고 하면 미묘하게 ‘더 천천히 읽으세요’ 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만요.
    그리고 저는 아무도 해치지 않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미를 위해 누군가를 비하하면 안 되니까, 저도 모르게 불쑥 그런 표현들이 나오지 않게 조심합니다. 얼마 전 한국 문학 트위터 논쟁에서도 ‘소수자에게 너무 폭력적이다’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여자들을 허영심 많고 왜곡된 캐릭터로 그리는 남자 작가들도 많고요. 저도 그런 글은 아무리 좋은 작가, 좋은 글이어도 따라 읽지 않게 않더라고요.
    제가 대학 졸업하기 한 학기 전인 스물네 살에 취업을 했어요. 꼬꼬마 편집자 시절에 사회에서 험한 일을 많이 겪었죠. 정말 정글이었어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요새는 좋아진 부분들이 있겠지만 온갖 폭언과 성희롱 등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소설에서 복수를 많이 했어요. 자기 얘긴 걸 알고 뜨끔한 사람 있을걸요. 저보다 뒤에 올 여성 독자들을 보호해 주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재인, 재욱, 재훈』의 경우에도 데이트 폭력에 대해 쓰고 있잖아요. 생각보다 데이트 폭력은 아주 흔해요. 그런 것들에 대해 계속 얘기할 것 같아요. 꼭 여성뿐 아니라 다른 소수자에게도 자연스레 연대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제 복수는 그만 하고 연대하는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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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복수는 그만 하고 연대하는 소설’을 쓰겠다고 하셨지만, 저는 작가님께서 앞으로 더더욱 앙증맞은 복수를 해주시기를 내심 바랐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해치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는 소설을 쓰는 일이 누구보다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날이 농담을 갱신하며 악랄해지는 이 세상에서 그런 복수마저 없으면, 우리는 무슨 낙으로 살아간단 말입니까!
    전에 정세랑 작가님께서 한 칼럼에 기고한 글을 보고 무릎을 탁, 친 적이 있습니다. “그 한 명이 있어서 그가 속한 공동체가 더 아름다워지고 즐길 만해지고 덜 부패한다. 최소한의 방부제, 수돗물 속의 소독약, 포장 김에 든 실리카겔 같은 걸 떠올리면 비슷하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고 부수적인 듯해도 꼭 필요하다.” 예상하셨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그 한 명’의 정체는 바로 ‘작가’입니다.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정세랑 작가님이 앞으로도 오래오래 글을 쓰셔서 부디 이 세계를 덜 부패하게 만들어주시기를. 크루즈 여행은 50권이 아니라 100권을 출간할 때까지 조금만 더 미뤄 주시기를. 그래서 이 악랄한 세상을 향해 유쾌상쾌통쾌한 복수의 주먹을 훅훅 날려 주시기를!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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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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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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