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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현대 시인④] Donmee Choi최돈미

  • 작성일 2015-06-02
  • 조회수 3,441

 

[기획특집]

 

 


미국의 현대 시인 ④

Don-mee Choi (최돈미)

 

제이크(Jake Levine, 시인)

 

 

 

< 미국의 현대 시인을 소개하며 >

 
    21세기 미국 시에 있어 주요 쟁점은 정서가 미국 문학과 함께 잘려나가고 있더라도 개념시가 정서의 본질에 담고 있는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시의 권위자인 칼빈 베디언트(Calvin Bedient)는 보스턴 리뷰지에서, 그들이 쓴 시는 개념시가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교활하게 말하면서 ‘삶의 가치를 무시하라’와 같은 개념 프로젝트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썼다. 개념론자들은 개념시가 표현하는 것은 감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찰스 번스테인(Charles Bernstein)이 말한 것처럼, 개념시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시라고 반박했다. 그러는 동안, 이 논쟁은 미국의 더 젊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전달하거나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논쟁은 엘리트적이고, 지적으로 멍한 채로, 백인 중심으로, 역사상 있어왔던 이전 논쟁과 같이 가부장적인 태도가 반복될 뿐만 아니라, 대체적으로 사회와 미국 문화와 시의 관계를 무시한다. 또 미국 대학에서 존경 받는 종신교수들이 시는 거품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논쟁을 발전시키는 동안, 젊은 세대의 시인들과 이들의 시는 성장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작품은 미국의 문화, 정치, 사회를 대표하는 동시에 정면으로 맞선다. 단지 시학에 관한 분석과 해석에 국한하는 것은 시에 해가 되며, 시를 제약하는 것이다. 이는 패러다임 밖의 시이고 그러므로, 적어도 지금까지는, 구체적인 꼬리표 또는 움직임으로 분류되기를 거부해왔다. 몇 회에 걸쳐 나는 미국의 가장 젊은 세대의 시인 몇 명과 그들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고 그들의 시 세계를 인터뷰해보고자 한다.

 

 

 ◆ [시인 소개] 최돈미 시인은?

 

    최돈미는 『아침의 소식은 흥미롭다(액션 북스, 2010)』를 저술했다. 그녀는 동시대 한국 여성 시인들의 시도 번역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번역한 시집으로는 김혜순의 시집 『슬픈 치약 거울크림(액션 북스, 2014)』이 있다. 그녀는 화이팅 작가상(Whiting Writer’s Award)과 2012년도 루시앙 스트뤽 번역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로는 소책자 『자그마한 선언문(베가본드, 2014)』을 포함하여 소논문 『마음대로 닳아버린』, 『ㅋ=q』, 『& 인종=국가(웨이브 북스, 2014)』가 있다. 그녀는 2013년도 펜 어워드(PEN Award), 시 번역 부문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최돈미

▶ Don-mee Choi(최돈미)

 

 

   ■ [서문] 패자의 시 : 최돈미의 시

 

    우리가 한국 시와 미국에서 출판된 세계적인 주요 문집이라는 틀 안에서 가시성을 높게 인정받은 시를 읽어 보면 제한된 표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아주 드물게, 미국 경제 식민주의와 미 제국의 흔적을 비판하고 있다. 이 제한된 표현의 결과는 미 제국주의 때문에 생겨난 피해이며, 계속 진행 중인 군사점령은 검열된 무죄로 승화된다. 이러한 결백으로 하여금 미국 독자들이 자기네들의 정치적 또는 윤리적 과오는 생각하지 않고, 동떨어진 인공산물로서 한국 문학을 조사하고 발견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끊임없이 시를 제시하는데, 이 시는 아시아 문화, 미 제국주의가 아시아 배경에 배어 있는 정치적인 충돌, 그리고 동시대 아시아인들의 삶에 녹아 있는 미 제국주의의 과거 유산 및 실재를 담고 있을지도 모를 문화적 시도에 맞서는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준다.

 

    미국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한국 시인은 고은이다. 고은의 시가 한국 시를 대표한다는 게 아니라, 여지없는 사실이지만, 고은의 시가 미국인들에게 가장 쉽게 먹히는 시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고은의 시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문화적인 가설과 신념에 도전하지 않는다. 시인으로서 그리고 정치적인 인물로서 고은의 엄청난 관록과 권력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번역된 그의 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로 인해 서양 사회가 아시아 문화에 대해 지니고 있는 단순한 생각이 대변되고 지지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미국 시 재단 웹사이트에서 발췌한 고은의 시 「귀」(번역: 곽김수지와 김곽순자)를 살펴보자.

 

Ear / Ko Un 귀 / 고은
Someone’s coming 이 세상 넘어
From the other world. 다른 세상에서 누가 온다
Hiss of night rain. 밤빗소리
Someone’s going there now. 누가 그 세상에 간다
The two are sure to meet. 꼭 만나리라

 

 

    짧은 행으로 구성된 짤막한 시로, 자연의 감각적이고 목가적인 인상을 담고 있으며, 부처의 지혜에 대한 모순으로 끝을 맺고 있다. 시는 도전적이지 않지만, 아시아인들의 감수성을 느끼게 한다. 이 시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하스 로버트라는 시인이 “강단 있고 격렬한 사람…… 회색머리에 맨발의 소작농 차림을 한…… 한국의 전통 북을 두드리고 있는”이라고 쓴 것처럼, 서양 독자들은 이런 유의 시를 아시아 미학시의 대표로 꼽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시선집 ECCO에 대표작으로 실린 한국 시를 들여다보면, 서정주, 김남조, 고은, 한용운 등의 시를 찾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일본 식민주의에 반대하고, 박정희 독재정부에 반대하는 친민주주의를 대변하고 있지만, 한국 내 미 제국의 지속적인 실재와 역사의 복잡한 본질을 대변하는 시는 없다. 그러므로 선발과정을 통해 한미 관계를 긍정적으로 반영한 친민주주의 또는 일본 식민주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미학적 선택 또한, 아무 말 없이 정치적 검열의 행위를 끌어들이지는 않을까? 이 선집에 포함되어 있는 시인과 시의 형태 또한, 당대의 한국 생활에서 계속 문제되고 있는 더 복잡하며 독재정부라는 최근 역사와 정치 부패 그리고 대기업의 탐욕에 관해 조사하는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일본 식민주의의 중요성을 고양시키려고 맞춰진 민족 주체성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 이는 또한 미국의 잔혹행위(과거와 현재)는 묵과하는 한편, 일본 식민주의는 악마처럼 만든다. 일제 침략기가 분명히 중요하지만, 세월호 사고와 국민 자살률 같은 현대의 비극을 질질 끌고 있는 일본 식민주의의 영향에 직접적인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여기서 요지는 세계 질서와 동등한 것이 아니라 관련 없는 내용으로 국가 정체성에 잘 들어맞는 특정한 시에만 특권을 줌으로써, 이러한 주체성이 세계 권력의 불균형을 다루는 역할을 우리가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한제국 또는 한미제국 내에서 최돈미 시의 불안정한 설득력을 논의하기 위한 발사대로 이러한 정체성과 권력에 대한 가공된 구성을 이용해야 한다.

 

    시를 역사의 증인으로 바라본 캐롤린 포르셰와 달리 최돈미의 시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노마돌로지(닫혀 있는 내적 공간에서 자기 입장을 견고히 하는 상징과, 반대로 열린 공간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노모스적인 것)라고 묘사된 것에서부터 일어난다. 최돈미의 시는 고정된 정체성을 지닌 적극적인 구경꾼의 필요한 정치적·사회적·언어적 특권을 지닌 목격이라는 유리한 입장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최돈미의 언어는 어마어마한 외부로 연결된 진술의 공동 집합체에서 발생한다. 즉, 한 세력은 제도뿐 아니라 제국의 힘의 문법성까지 고발한 순전히 다른 것을 형성시켰다. 미국에 창의적인 글쓰기 과정이 급부상하면서, 많은 프로그램에는 “성공한” 시인은 어떻게 글을 쓰는지, “성공한” 직업을 갖는 법, 본인 및 본인의 작품을 “파는” 방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최돈미의 시는 오류, 혼란, 방해 행위를 기반으로 한 시다. 그녀는 조웰 멕 스위니가 “패자 비술(이는 “낡은 부계제단과 문학유산제단을 여전히 숭배하는 문학의 어떤 개념의 배제”다)이라고 일컬은 것의 일부다. 스위니가 말하길, “문화생산자들 중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로 취급당하고, 돈도 없고 무기력한 시인들이 늙은 성차별주의자와 재산에 강박이 있는 지배층이 소유한 소금광산에서 밤낮으로 작업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최돈미와 그녀의 시, 번역물에서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2012년 랜턴 리뷰지에 게재된 그녀의 인터뷰 내용처럼, 그녀는 자신의 글과 번역물을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는 행위로 간주하며, “내가 초기에 한 번역(및 시 쓰는) 기술은 실패다.”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가 잡은 주제 문제 때문에, 최돈미로 하여금 우리는『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시는 패자 승리의 사례다”를 제시한 사르트르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고 나서 제국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제국과 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승자 같은 건 없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과 한국에 관해 이야기하고 현재에 관해 이야기하기보다 전쟁과 제국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전쟁에는 패자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목표에서 행동을 떼어 놓을 수 있다면, 언어가 표현수단으로 그 후 폭력의 외설물로 만듦으로써 시는 그렇게 하기 때문에, 보들리아르가 제시했던 동시대 전쟁의 과도현실 경험은 괴물 같은 인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들이 시를 통해 폭력을 기록하는 행위는 비로소 기괴한 현실이 된다. 영화와 역사서에서 최돈미가 쓴 잔학행위들을 보여주었지만, 그녀가 쓴 시를 통해서만 그러한 행위들은 충격을 안겨 준다. 우리가 일어난 일을 몰랐던 게 아니라, 해당 언어로 진실을 제공한 방식 또한 거짓말이었음을 몰랐던 것이다.

 

    힘의 문법의 닫힌 논리는 언어를 초월할 수 있으며, 그것은 최돈미가 대처하는 정체성 정치학의 문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상품의 중재 없이 예술작품을 현실적인 관계로 해방시켜 줄 수 있었던 국제시장 너머에 있는 세상을 꿈꾼 마르크스처럼, 최돈미의 시는 고정된 정체성의 닫힌 정치로부터 떼어낸 혁명적인 문법을 만들어내는 마술을 부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 같은 행동을 통해, 제국의 힘의 굴레를 벗어나려 한다. 그녀는 미국인인가, 한국인인가? 그녀는 외국어로 글을 쓰는 외국인이다. 우리 모두 그러하다. 국적은 신화다. 고향 같은 건 없다. 배(mother ship)가 어느 행성에 정박해 있다. 모국어(mother language)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글 _ 제이크(Jake Levine, 시인)

 

 

   ■ 최돈미의 시

 


  귀화 일기

 

    2002년 8월 8일

    38선 이남에 도착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장소는 한 국가의 허리 아래에 있다. 내가 떠나기 전, 제국은 출범했고, 즉, 제국은 위대하다. 나는 그곳의 지형을 따라간다. 멀리서 보면, 허리 아래는 벼를 심어 놓은 논, 채소를 심어 놓은 밭, 그리고 산으로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골목과 전통 기와지붕이 얹힌 집들이 모여 있는 뭔가 다른 작은 시골 마을처럼 보인다. 이 광경을 보면 고향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이곳이 내 고향이다.

 

    상세 묘사: 영어로 된 간판이 달린 클럽, 식당, 기념품 가게. 옷 가게, 그러니까 영어는 나보다 먼저 도착했고, 내가 떠나기 훨씬 전부터 여기에 있었다. 파파 산, 러브 숍, 팝스, 골든 테일러, 파운. 이 간판들을 따라가자 헬리콥터 이착륙장인 캠프 스탠리 문 앞에 다다랐다. 그러니까, 언어란 믿는 게 아니라, 따르는 것이며,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 70대 여성이 러브 숍 옆집에 살고 계셨다. 이 할머니는 오후에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할머니는 한 번도 허리 아래쪽 나라를 떠나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결국 정부는 이 할머니를 열렬한 애국자로 인정했다. 즉, 할머니는 간판을 따라갔고,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득실대는 이 때문에 고생했고, 미군에게 이를 옮겼다. 난 고향이었던 걸로 기억나는 집들을 따라갔다. 집을 따라가 보니 내 앞엔 또 다른 철문과 철조망이 놓여 있었다. 또 다른 여성이 마이 시스터스 플레이스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귀향한 해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들은 일은 기억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여기 있었고, 나는 여전히 다른 곳에 있었고, 언어 통일은 본질적으로 정치와 관련이 있다. 여자는 자신의 오른쪽 집게손가락으로 이야기를 하나 해줬다. 손가락으로 거칠게 자신의 입을 가리켰고, 이어서 벌린 다리 사이를, 이어서 뒤를 가리켰다. 미군의 총이 있는 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즉, 절대적인 선택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말해, 가난에 대해 선택은 없었고, 절대적인 선택이 강요됐을 때, 여자는 미군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즉, 제국이 대통령보다 더 위대했기 때문에, 여자는 제국을 선택했다. 다시 말해, 여자는 따라갔고, 자신의 딸을 이 지형에 남겨 놨고, 자신의 집게손가락은 절대적인 선택에 따라 사나워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여자는 고향에 도착했다.

 

 

    1992년 10월 28일

    윤금이의 머리는 코카콜라 병으로 세게 얻어맞았다. 그녀는 죽어 있었고, 벌어진 다리 사이로 음부에 코카콜라 병이 꽂혀 있었으며, 항문에는 우산이 꽂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제국이 하나의 세상 또는 대통령의 보호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제국은 대통령이 집게손가락에 하얀색 소독약을 뿌리기 전후에 안팎으로 문법성을 강요한다. 그 어떤 이도 문법성에 무지할 순 없다.

 

 

    1999년 9월 10일

    어느 여자의 불가사의한 죽음.

 

    그 여자는 출혈이 심했고, 전신에 짙은 멍투성이가 발견되었다. 얼굴은 혀를 쑥 내민 상태로 바닥에 딱 붙어 있었다. 며칠 동안 세입자가 보이지 않자, 집주인이 경찰에 신고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녀는 새 출발의 희망을 안고 클럽 일을 그만뒀다. 미군들이 향수병 때문에 그리고 취미 삼아 그런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해서 이제 여자들을 강간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다른 곳에서, 두 달 전에 동두천에서 만났던 한 여성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를 내가 번역한다는 것이며, 식민주의적 거리는 이질적인 향수병 때문에 틈으로 가득 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국이라는 기지로부터 허리 아래쪽의 강 한 줄기를 따라 흐르는 석유와 포름알데히드가 근거가 되어, 식민주의적 2개 국어 구사능력이 아닌 저항력 있는 2개 국어 구사능력이 없다는 게 아니라 지배언어로 인해 정복된 유일한 힘, 모국어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번역이란 추방이자 제국의 한 형태다. 있다 그리고 나는.

 

 

    2002년 8월 10일

    돌아올 적에 돌아올 적에, 나이 어린 군인들이 시청 앞 빗장을 지른 창문이 달린 버스 안에서 점심을 먹고선 낮잠을 자기 때문에 내가 그러한 일들을 말할 때, 사건들은 가까움 중에서도 가까이에 있다고 말한다. 제국 대사관이 낮잠 자는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실제로 옆방에 있다고 말할 때, 사건들은 가까움 중에서도 가까이에 있다고 말한다. 돌아올 적에 돌아올 적에, 낮잠 자는 군인들보다 더 크고 장성한 사람들에게 사건들은 작은 것 중에서도 작다고 말한다. 귀여움 그 자체. 돌아올 적에 돌아올 적에, 대통령 플라자에 걸려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올려다본다. 제국의 대사관이 실제로 옆방에 있었을 때도 스크린에는 아들들의 아들들이 대통령을 위한 축구 경기를 응원했다. 대통령의 자식들이 결국 철회된 비자 목록에 지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문을 두드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는 지원서를 작성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돌아올 적에 돌아올 적에, 내 어린 시절의 골목을 따라가는 동안 둘인 것 중에서도 내 쪽은 조화의 강 위에 놓인 다리를 서성거리고 추방됨 중에서도 추방을, 그리고 제국적인 것 중에서도 제국을 번역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찾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돌아올 적에 돌아올 적에, 러시아 여인들은 제국의 헬리콥터 이착륙장 뒤에 자리한 숲길을 따라 매일 밤 산책을 하고 모든 간판들이 간판 중에서도 간판이기 때문에 필리핀 여인들은 대낮에 아기를 데리고 쇼핑몰이라는 클럽들 중 스트립쇼를 하는 클럽으로 걸어 내려간다고 말할 때 낮잠 자는 군인들보다 더 크고 장성한 사람들에게 나는 가까움 중에서도 가까이에 있다고 말한다.

 

 

    2000년 3월 11일

    이 글은 이태원에서 일어난 한 여인의 죽음과 관련된 우리의 관점이다. 32살의 김 씨는 알몸이 피범벅이 된 상태로 미군 전용 클럽인 뉴아마존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김 씨는 병원으로 이송되자마자 사망했다. 2월 21일 김 씨를 살해한 혐의로 크리스토퍼 매카시가 체포되었다. 김 씨가 자신이 요구한 변태적인 성행위를 거절해서 그녀를 폭행하고 목을 졸랐다고 자백했다. 이른바, 문체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반복된 변형의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문체란 한 개인의 심리적인 창작품이 아니라, 체계적인 진술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문체는 불가피하게도 언어 내에서 언어를 만들어낸다. 이 글은 의정부시 고산동에서 일어난 서정만 살인사건에 관한 입장이다. 만 66세 서정만 할머니는 피투성이로 바닥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오후 2시 20분경에 집주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서정만 할머니의 눈가는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앞니 두 개가 부러져 있었다.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밤 11시 50분쯤 전에 한 미군과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싸움이 일어났다고 했다. 어릴 적, 서정만 할머니는 병을 앓다가 청각을 잃어 말을 못 하게 되었는데, 전쟁 당시 가족과 헤어져 혼자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다. 사실, 문제는 없다. 답은 늘 결론이 없는 답이다. 누군가는 체계어의 체계어를 만들어낸다. 가령, 아들 중의 아들, 클럽 중의 클럽. 체계어에서, 삶은 죽음의 대답을 답해야만 한다. 체계어 아래에 비밀번호가 있다. 이를테면, 작별 중의 작별, 귀화 중의 귀화.

 

【참고문헌】

 이탤릭체 :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 Lond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 시인과의 인터뷰

 

   펜(PEN.org)에 실린 인터뷰

- 취재 : 라우렌 케란드(Lauren Cerand)

 

    Q : 작가가 되겠다는 것이 당신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가요?

    A : 어릴 적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전쟁사진을 찍는 동안, 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어요. 내가 쓴 글은 사실 읽기 어려울 만큼 휘갈겨 쓴 글씨와도 같았죠. 난 영어로 글을 쓰는 척하면서 한국에 살고 있는 여자애였어요. 아픈 사람들과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처방전을 써줬어요. 그리고 내가 영어로 글을 쓴 이유는, 아버지와 늘 떨어져 지냈는데, 어딘가 먼 곳에 계셨기 때문에 난 아버지가 외국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크면 우리 아버지처럼 외국인이 되고 싶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영어로 글을 쓰는 외국인이 되고 싶었던 거죠.

 

    Q : 당신은 어떤 작가의 영향을 받았는가요?

    A : 프란츠 파농, 제임스 볼드윈, 마로사 디 조르지오, 로버트 왈서, 이상, 김혜순입니다. 사실, 김혜순 작품에서는 그녀의 문체나 그녀의 언어 이상의 것을 도용했지요. 그녀의 시를 번역할 때, 그냥 그녀처럼 썼어요.

 

    Q : 어떤 장소에서 글 읽는 걸 가장 좋아하나요?

    A : 우리 집, 제 싸구려 이케아 의자에서요. 제 짧은 다리 길이에 딱 맞거든요.

 

    Q : 체포된 적이 있었죠? 이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요?

    A : 네, 상관없어요. 군사독재정권 시절, 우린 어린 나이였고, 그때 아버지는 한국을 떠남으로써 우리가 체포되지 않게 보호했어요. 하지만 오빠가 독재정권에 맞서 학생시위 운동을 벌여 체포되었어요. 운 좋게도, 오빠는 두드려 맞거나 고문당하지 않고 풀려났죠. 예술 공부를 하러 1981년 미국으로 떠나려는 찰나 한국 정부 관계자가 외국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홍콩에 내려서는 “법에 위배되는” 행위는 절대로 해선 안 된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했어요. 그가 한 말의 의미는 반정부/독재정권에 관련된 행동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죠. 그는 해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한국 정부가 알고 있다고 했어요. 시인이자 번역가로서 내 글에 묻어나는 정치 심미적 태도 및 관례는 “불법”이며 아마도 그렇게 남겨지겠죠. 내가 체포될지 안 될지, 체포된다면 언제 체포될지 당신에게 알려줄게요.

 

    Q : 강박관념이 영향을 줍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요?

    A :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 위치한 빅토리아 대학에서 탈식민문학 및 공상과학소설을 가르치는 더갈 맥닐 씨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논문, 「오버랜드를 향한 ”이민, 나의 조국”(2014년 봄)」에 제 강박관념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어요. 최돈미 시에 쓰인 한 소절처럼 “순서대로 강박관념을 따르라. 이 강박관념들은 전쟁, 언어, 번역, 혼란이다.”

 

    Q : 당신이 말로 옮긴 것 중에서 가장 대범했던 것은 뭔가요?

    A : 발간 예정인 『전쟁이 일어나자마자(Hardly War)』에서 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대학살에 관한 시를 썼어요. 이 시가 대담한 것이겠지요. 잘 모르겠네요. 대학살에 관해 배우고 나서 악몽을 꿨어요. 제국 전쟁이 한국(남한)처럼 “자발적인” 국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방식들은 경제, 문화, 정치적으로 진심으로 엄청납니다. 이미 전화(戰禍)를 입어서 큰 충격을 받은 작은 나라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엄청난 거죠. 그 작은 나라는 인종차별주의 식민주의적 폭력을 습득했고, 병력을 지원하는 데 금전적인 보상을 받았고, 베트남인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행위를 저질렀어요. 전쟁 기간에 한국이 미국을 위한 용병 국가였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그리고 그 과거의 유산은 계속 진행 중인 대 테러전을 지속하고 있지요. “제국은 떠나야 한다!” 내가 낸 첫 번째 시집 『아침의 소식은 흥미롭다』에 쓴 글귀예요.

 

    Q : 작가로서 책임감은 뭔가요?

    A : 내가 동경하는 브라질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문 작가가 되지 않겠다고 했어요. 리스펙토르처럼 우리 작가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아마추어 상태로 머물러야 합니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딱 한 가지는 빚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우리 대부분에게 불가능한 생각일 수도 있지요. 내 시간의 대부분은 빚을 청산하는 데 보내고 있어요. 푸코가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시간 또는 일에 단련되어 있기 때문에 얽매임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 내게 시간은 돈이 아니에요. 시간은 자유지요.

 

    Q : 사회참여 지식인이라는 개념이 뒤처져가는 데 반해 작가들이 공동의 목적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A : 난 에드워드 사이드가 한 말과 개념을 좋아합니다. “추방된 지식인은 관습의 타당성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담함에 반응을 보이며,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옮겨 다니며 변화를 제시하는 데 반응한다.” 그리고 이 말이 독재적인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에게 분명히도 이것이 우리들의 공동의 목적의식입니다. 들뢰즈는 이미 우리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전달했고, 그건 바로 우리가 체계어에 저항할 것이라는 겁니다. 르 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항과 변화는 종종 예술에서 비롯되며, 상당히 자주 우리의 예술, 말의 예술에서 비롯된다.”

 

    Q : 작가들을 투옥시키는 정부 지도자에게 어떤 책을 보내주고 싶나요?

    A : 라울 수리타의 작품으로, 재능이 뛰어난 시인, 다니엘 보르주츠키가 멋들어지게 번역한 『사라진 사랑을 위한 노래(2010, 액션북스)』를 보내고 싶어요.

 

    Q : 관찰과 감시의 경계선은 어디에 있나요?

    A : 감시는 명확하게 규율과 통제에 관한 것이죠. 관찰은 그 자체가 “불법적인” 경계선이라고 생각하고 싶군요.

 

    (출처 : http://www.pen.org/interview/pen-ten-don-mee-choi#sthash.AzQYyycu.dpuf)

 

 

소개 및 글 _ 제이크 레빈(Jake Levine, 시인)ame-poem-jake


제이크 레빈은 2010~2011년 리투아니아에서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비롯해 여러 장학금 및 수상을 한 바 있다. 두 권의 소책자(『삭제의 문턱(The Threshold of Erasure, Spork 2010)』과 『빌뉴스 악령(Vilna Dybbuk, Country Music 2014)』)를 저술했다. 그의 시, 번역물, 에세이 등은 보스턴 리뷰지, 루에르니카, HTML자이언트, 아틀라스 리뷰지, 페이퍼 다츠 외 여러 잡지에 실렸다. 그는 리투아니아어로 쓰여진 토마스 스롬바스의 작품, 『갓/씽(God/Thing, Vario Burnos 2011)』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현재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정희연과 공동으로 한영 번역 중이다.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비교문학 전공 박사과정 중이며, 연세대학교 강사로 재직 중이다. 또한 애리조나 투산 소재의 작은 출판사 스포크 프레스(Spork Press)에서 편집장을 맡고 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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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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