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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학축제 특집] 프랑스 시 축제 '시인들의 봄'

  • 작성일 2016-03-15
  • 조회수 2,551

[세계 문학축제 특집]


프랑스 시 축제 '시인들의 봄'



표지

'시인들의 봄' 포스터


1. 봄, 프랑스 그리고 시詩

    따뜻해진 날씨에 외투를 벗어 던지고 해바라기를 하고 싶다가도 느닷없이 달려드는 찬바람에 어깨를 움츠리게 되는 계절이다. 3월이고 봄이다. 개구리가 잠에서 깬다는 경칩과 밤보다 낮이 더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춘분 사이, 프랑스에서는 흥미로운 문학축제로 도시가 분주해진다. ‘시인들의 봄(Printemps des Poètes)’이라는 이 축제는 프랑스 전 문화부 장관이자 교육부 장관이었던 자크 랑(Jack Lang)의 아이디어로 1999년부터 시작되어 올해 18회를 맞이한 시문학축제다. 해마다 3월이면 보름 동안 열리는 이 축제는 프랑스 시민들이 시를 가깝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행사들로 가득 차있다.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와 함께 각 지역의 학교와 병원, 서점은 물론이거니와 도서관과 카페, 심지어 아파트에서까지 시를 읽고 듣고 시와 관련된 여러 가지 활동들로 이루어지는 축제다.

    축제는 올해의 시로 추천된 시가 인쇄된 우편엽서가 시민들에게 배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화려한 개막식이나 유명한 배우나 가수가 나오는 개막공연은 없지만, 프랑스적이라 할 수 있고 ‘시인들의 봄’이라는 축제의 이름에 알맞은 시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축제 기간에는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도 시를 적극적으로 배포하고 시와 관련된 활동을 장려한다. 이런 학교와 마을은 시의 학교와 시의 마을이라는 인증서를 발급받게 되는데, 이렇게 인증서가 발급된 곳에서는 ‘시인들의 봄’ 기간에 축제와 관련된 행사를 공식 일정으로 등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정에 맞춰 시인들의 봄 행사는 학교에서, 마을에서, 공연장이나 영화관 카페 등에서 다채롭게 치러진다. 그야말로 누구나 어디에서든 시를 즐길 수 있는 시 축제가 바로 ‘시인들의 봄’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시인들의 봄’에서는 시의 마을, 시의 학교를 지정해 시와 관련된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또는 일상생활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활동들을 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시인들의 봄 활동 목록”을 제공하고 있다. 이 리스트에는 활동 주제와 함께 참여방법에 대한 짧은 설명이 딸려있다. 시민들은 학교에서, 일상생활 공간에서, 회사에서, 카페에서 그리고 도서관이나 공원 등지에서 여기에 나열된 목록들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으며 어떻게 적극적으로 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목록에 적혀있는 활동들을 직접 체험해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괜찮다. 어느 누가 됐든 공원에서 시를 낭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옆을 지나는 모든 사람 또한 그 시를 함께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이 축제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축제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시를 즐기며 시를 퍼뜨리면, 시는 춤을 추듯 노래를 부르듯 파리 전역에 퍼져나간다. 이 축제는 시가 어려운 것이 아니며 누구나 어떠한 방법으로든 시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시배송 시의광장

시 배송      시의 광장



2. ‘시인들의 봄’은 시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1) 일상에서 시인들의 봄에 참여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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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들의 봄 활동목록

   ‘시를 확산시키기 위해 구체적으로 제시된 제한적이지 않고 독창적인 행동의 작은 목록
각자 가능한 모든 장소를 점령하고 기획하라!‘

    ‘시인들의 봄’ 활동 목록에는 흥미로운 활동들이 제시되어 있다. 애피타이저 시, 시의 나무, 낭송 아틀리에, 번역 아틀리에, 행복한 바벨, 시 플래카드, 시 우편함, 시 돌려보기, 시 출동팀, 시 카페, 시 동아리, 시 상담 등 약 50여 개가 넘는 활동을 제안하고 있다. 이 활동들은 공연, 전시, 영화제, 콩쿠르, 강연회, 낭독회, 체험활동, 콘서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목록이 강조하고 있는 말이 있다. ‘각자 가능한 모든 장소를 점령하고 기획하라!’ 세상에 이렇게 시적이고 재치 있는 축제가 또 어디에 있을까? 이 중 몇 가지 주목해볼 만한 활동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를 홍보하라!

    시 나무, 빨랫줄 위의 시, 쇼윈도의 시, 대중교통 시, 시 배너 등 ‘시인들의 봄’ 축제 홍보와 함께 ‘시인들의 봄’이 제안하는 시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즐기는 활동이다.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를 홍보하고 소개하는 매니저가 될 수 있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약 100여 편의 시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원하는 시를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홍보하는 활동이 권장된다. 나무에 시를 걸어두기, 계단의 단과 단 사이에 시구 붙이기, 빨랫줄처럼 길게 늘어뜨린 줄에 시를 걸어 전시하기, 쇼윈도나 유리창에 시 쓰기 등의 활동 등이 있다. 이런 활동들이 모이면 도시 곳곳에 전시된 시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길을 지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유리문을 열거나 계단을 오르다가도 눈 닿는 곳에 시가 전시되어 있고 누구나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중에서라도 시를 마주하게 된다. 화려한 플래카드나 유명 연예인이 등장하는 영상광고가 아니어도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아주 소소하게 시詩가 도시 곳곳에 스민다.

쇼윈도의 시와 '시인들의 봄' 로고 바닥에 쓴 시

                쇼윈도의 시                                                        바닥에 쓴 시

                     

계단에 쓴 시 시 나무

  계단에 쓴 시                                                                         시 나무

 

빨랫줄 위의 시

빨랫줄 위의 시



  

    시를 즐겨라!

    낭송 아틀리에, 번역 아틀리에, 시 우편함, 시 돌려보기, 시 카페, 시 전단 등 지역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시를 향유할 수 있는 활동들이다. 낭송 아틀리에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의 시를 낭독 또는 낭송한다. 조용한 공간에서 대표자가 시를 낭독하거나, 큰 공간에서 감정을 전달하며 열정적으로 낭송하기도 한다. 번역 아틀리에는 외국어로 된 시나 지방언어로 써진 현대시를 번역하는 작업이다. 시 우편함은 건물 안에 시 우편함을 배치하고, 이 우편함을 통해 시가 적힌 엽서가 배송될 수 있도록 해서 누구나 시 엽서를 받아볼 수 있게 한다. 시 돌려보기는 공공장소에 시 또는 시집을 남겨두어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한다. 시 카페는 카페에서 배우나 낭독배우 또는 시인이 시 낭송을 하면 카페를 찾는 일반 시민이나 시 카페 참가자들은 차를 마시며 시 낭송을 즐길 수 있다. 시 전단은 아직 발표되거나 책으로 발간되지 않은 시들을 대상으로 시인들의 봄 홈페이지에서 저작권에 구애받지 않고 전단 형식으로 배포될 수 있는 시들을 제안하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 시들을 적극적으로 배포할 수 있게 한다. 공식 행사 전에 개인 참가자 또는 학교, 기관, 단체 등이 공식적인 행사와 함께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에 대한 신청서(일정과 장소 참가조건 등)를 제출하면 이를 검토하여 ‘시인들의 봄’ 공식 일정에 포함한다. 일정표는 날짜별 또는 지역별로 조회해 볼 수 있으며 보통 대규모의 행사라기보다는 카페나 식당 작은 소극장이나 공연장 등지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진다.

 

시 낭송

낭송 아틀리에



    시인을 예찬하라!

    축제가 시작되기 전 ‘시인들의 봄’ 공식 홈페이지에 ‘시인에 대한 예찬’을 접수할 수 있다. 시인에 대한 예찬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시인, 새롭게 알게 되었거나 주목받는 시인, 다시 회고하고 싶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시인을 이 축제를 통해 소개하고 관심을 두자고 제안하는 활동이다. 이 시인예찬은 문서파일로 받고 있으며(사진이 포함되어도 된다) 3,000단어 이내로 작성되어야 하는데, 보통 두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 접수된 시인예찬은 ‘시인들의 봄’ 공식 홈페이지에 사진과 함께 소개된다. 공식 홈페이지에는 대략 90여 개의 시인과 시를 예찬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몇몇 의미 있는 시인예찬은 영상으로 제작되어 축제 홍보 영상으로 쓰이거나 곳곳에 소개된다. 베스트셀러인 시와 시집, 유명시인들은 물론이고, 시인이 자신을 직접 추천할 수도 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시인들의 목록이 90여 개 가까이 모인다는 점에서 놀랍다. 시인 자체가 추천되기도 하지만 시인이 쓴 한 작품에 대한 추천도 가능하고 시인과 남다른 인연을 소개하는 것도 하나의 예찬 방법이 될 수 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시를 쓰는 시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인에 대한 예찬에 참여할 수 있다.

시인 예찬 1

시인들의 봄 홈페이지에 게시된 시인 예찬

'시인들의 봄' 홈페이지에 게시된 시인 예찬

    * 내가 선택한 시인 2016 (시인예찬) 동영상 링크



  2) 학교에서 시인들의 봄이 이루어지는 방법

학교

학교에서의 '시인들의 봄' 활동

 

    ‘시인들의 봄’은 시민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축제이기도 하지만 모든 연령대를 아우르는 축제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들과 학생들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행사들로 축제에 참여할 수 있다. 공식홈페이지에서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시인들의 봄에 참여하는 방법들을 제안하고 있다. 학교와 교사 또는 부보님의 지원과 도움이 필요한 활동이지만, 공식적으로 행사에 참여하고 이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홈페이지에서는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이라는 목록을 제공하고 있는데, 주로 ‘시인들의 봄 활동목록’과 같은 내용이긴 하지만, 어린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진행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시인들의 봄은 올해의 주제와 관련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추천 도서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이 도서 목록은 축제 전부터 홈페이지에 공고된다.

    학교에서 시인들의 봄에 참여하는 방법은 3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시인들의 봄에 참가할 활동들을 만들기 위한 팀을 꾸리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활동은 개인적인 활동이 아니라 팀 구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두 번째, 협회에 활동 일정을 알린다. ‘시인들의 봄’ 활동을 위한 팀이 구성되면 언제, 어떻게,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이 또한 공식 일정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시인들의 봄’ 공식 협회에서는 이렇게 모인 행사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일정표를 제공한다. 세 번째, 활동 내용과 과정 등을 기록한 글과 사진, 영상 등이 포함된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한다. 이 보고서를 제출하면 통해 ‘시인들의 봄’에 공식적으로 참여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물론 위의 세 가지 방법으로 참여하는 것 이외에 개별적으로도 공식 일정에 포함된 행사에 참가할 수 있다. 행사의 성격과 일정 등을 확인하여 친구나 가족과도 참여할 수 있으며, 수업과 연계된 활동도 다양하게 기획되어 있다. 시인들의 봄 축제기간 중이라면 언제든지 시와 관련된 활동들을 학교 안팎에서 즐길 수 있다. 어린이들의 수준과 취향에 알맞게 재밌고 유익한 활동인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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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의 '시인들의 봄' 활동



  3) 시축제를 위한 노래와 영화

   노래가 된 시, 시를 노래하라!

    ‘시인들의 봄’에서 제안하는 시들을 가지고 노래를 작곡하라!. 노래로 만들어진 시는 심사를 거쳐 ‘앙드레 셰디드’(앙드레 셰디드는 프랑스 문학의 어머니로 불리는 작가다) 상을 수여한다. 홈페이지에서는 지금까지 상을 받은 노래들을 직접 들어볼 수 있고 심사평도 확인할 수도 있다. 시는 분명 음악성을 가지고 있지만, 더 분명하게 장르를 뛰어넘어 음악이 되어 다시 들려주는 시는 색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텍스트로만 존재하던 시가 음악을 만나 한 곡의 노래가 되는 예술적인 마법을 누구나 체험할 수 있다.

시를 노래하라

2015년 앙드레 셰디드 상 수상자 가브리엘

    * 2015년 앙드레 셰디드 상 수상작 (가브리엘) 동영상 링크



   영화가 된 시, 시적인 영화, 시네 포엠

    프랑스 브종(Bezons) 시市에서 치러지는 단편영화 축제인 ‘씨네 포엠‘은 영화와 시를 연결하는 새로운 시도로 ‘시인들의 봄’ 축제와 함께 올해로 5회째 치러지고 있는 행사다. 시를 대상으로 한 영화나, 시를 주제로 한 영화 또는 시적인 형식의 영화를 모두 포함하여 상영시간이 최대 15분 이내인 불어권 단편영화를 선별하여 상영한다. 3일간의 영화 상영 기간이 지나면 세 작품을 뽑아 각각 큰 상금이 있는 로랑 테르지에프 상(Prix Laurent Terzieff), 청년상(Prix de la jeunesse), 대중상(Prix du Public)을 시상한다. 축제 이후에 수상작품과 선정된 몇 편의 상영작들은 DVD로 제작된다.

시네포엠

2015년 씨네포엠 로랑 테르지에프 상 수상작 정다희 감독의 'Man on the Chair'

    * 씨네 포엠 홍보 영상 동영상 링크



끝으로. 2016년 제 18회 시인들의 봄

    2016년도 제 18회 시인들의 봄은 '위대한 20세기 - 아폴리네르로부터 보네포이까지, 100년 동안의 시' 라는 주제로 3월 15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된다. 차갑던 공기가 따뜻해지고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프랑스에 3월이면 '시인들의 봄'이 오듯이 우리 문학에도 시와 문학이 따뜻해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라본다.



* 사진 및 동영상 링크 출처 - 시인들의 봄 홈페이지 http://www.printempsdespoetes.com
* 씨네포엠 정다정 작가 작품 사진 출처 - 정다희 감독 홈페이지 jeongdahee.com

◎ 구성 및 작성 : 양서희(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지원부)

◎ 번역 및 자료조사 : 우지영(프리랜서 번역가)


   《문장웹진 201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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