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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현대시인9] 엘리사 가버트 (Elisa Gabbert)

  • 작성일 2016-08-01
  • 조회수 2,016

 

[미국의 현대시인]

 

 


미국의 현대 시인 ⑨

엘리사 가버트 (Elisa Gabbert)

 

 

제이크(Jake Levine, 시인)

 

 

< 미국의 현대 시인을 소개하며 >

 

    21세기 미국 시의 주요 쟁점은 정서가 미국 문학과 함께 잘려 나가더라도 개념시가 정서의 본질에 담고 있는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시의 권위자인 칼빈 베디언트(Calvin Bedient)는 보스턴 리뷰지에서, 그들이 쓴 시는 개념시가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교활하게 말하면서 ‘삶의 가치를 무시하라’와 같은 개념 프로젝트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썼다. 개념론자들은 개념시가 표현하는 것은 감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찰스 번스타인(Charles Bernstein)이 말한 것처럼, 개념시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시라고 반박했다. 그러는 동안, 이 논쟁은 미국의 더 젊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전달하거나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논쟁은 엘리트적이고, 지적으로 멍한 채로, 백인 중심으로, 역사상 있어 왔던 이전 논쟁과 같이 가부장적인 태도가 반복될 뿐만 아니라, 대체로 사회와 미국 문화와 시의 관계를 무시한다. 또 미국 대학에서 존경 받는 종신 교수들이 시는 거품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논쟁을 발전시키는 동안, 젊은 세대의 시인들과 이들의 시는 성장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작품은 미국의 문화, 정치, 사회를 대표하는 동시에 정면으로 맞선다. 단지 시학에 관한 분석과 해석에 국한하는 것은 시에 해가 되며, 시를 제약하는 것이다. 이는 패러다임 밖의 시이고, 그러므로, 적어도 지금까지는, 구체적인 꼬리표 또는 움직임으로 분류되기를 거부해 왔다. 몇 회에 걸쳐 나는 미국의 가장 젊은 세대의 시인 몇 명과 그들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고 그들의 시 세계를 인터뷰해 보고자 한다.



 

 

 ◆ [시인 소개] 엘리사 가버트(Elisa Gabbert)

 

엘리사 가버트1

 

    이 달의 시인 엘리사 가버트(Elisa Gabbert)는 『불안정한 자아(自我)』와 『인사할 겨를 없이 황망히 떠났네』의 저자이다. 2016년 블랙 오션 출판사에서 그녀의 시집 『여명(黎明)』과 『주디 시』가 출간될 예정이다. 최근에 그녀가 쓴 시와 에세이는 웹진 주비랫, 캐터펄트 일렉트릭 리터러처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현재 덴버에 살고 있다.

 

    글쓴이 제이크 레빈(Jake Levine)은 소책자 두 권을 출판했으며, 현재 한국의 현대시를 번역하고 있다. 최근에 블랙 오션 출판사에서 김경주 시인의 작품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I AM A SEASON THAT DOES NOT EXIST IN THE WORLD)』를 출판했다. 제이크 레빈은 스포크 프레스의 편집장으로 서울에 살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비교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 《들어가는 글

 

 『불안정한 자아』 엘리사 가버트와 시의 내재성

 

시는 우리 스스로 소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주한 채로 우리 자신에 관한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편안한 생각에서 벗어난 것들을 담고 있다. 소멸이란 많은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보통은 안정적인 자아 정체성의 산재를 동반한다.

 

좀비의 파멸. 생태계 파멸. 외계인 파멸. 문명-의-충돌-세상-의-끝-모래로 뒤덮인-경주용-자동차-돌연변이-액션 장면으로 채워진 죽음. 반(反)이상향을 이끄는 붉은색 기타. 그리고 지카 바이러스도. 에볼라도. 트럼프도. 내 스승님들은 남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혹은 개성을 발휘하거나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인터넷과 영화에서는 세상의 종말이 오면 우리 모두 함께 손잡고 나가게 될 거라고 예언한다.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편이 더 쉽다. 시 친구들아 어서 와서 내 손을 잡아 그리고
         장미꽃 주위를 에워싸,
         꽃다발 한 아름.
         잿더미! 잿더미! 우리 모두 떨어진다…….

사람들은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꿈꾸지만, 지금 우리는 집단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이는 현재 미국 시에서 특히 진실처럼 보인다). 결국 좀비의 파멸을 계획하는 것이 요즘 선거 기간에 일어나는 소식을 따라가는 것보다 더 감당하기 쉽고, 스트레스를 확실히 덜 받을지도 모른다. 또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누군가를 씹어대는 이야기, 또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비방하는 글을 보고 있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끔 생각하는데, 좀비의 파멸을 계획하는 것이 사실 이번 선거를 준비하는 최고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예술의 파멸을 계획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속담처럼 시는 도처에 있는데 심지어 어두운 시절에도…… 사람들은 노래한다. 엘리사 가버트의 시집을 보기 전에 유명한 영화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의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내재적 죽음에 관한 이러한 감정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는 우리 자신의 파멸(막대한 예산을 가진 스튜디오로 상징되어 있지만 강탈을 통해 축적된 예산을 가진 스튜디오)의 힘과 모든 게 괜찮다 또는 괜찮아질 거라(기술력 덕분에 또는 나사(Nasa) 때문에 또는 아이언 맨이 우리를 구해 줄 것이다)는 망상이라는 상징적 되새김 사이에서 할리우드의 결합보다 더 좋은 예는 없다. 자, 그러면 한 솔로(Han Solo)를 살펴보면서 최근에 나온 두 편의 영화를 들여다보자.

 

      영화 <인터스텔라>와 <앤트 맨>에는 할리우드 영화에 꼭 들어가야 할 요소가 모두 들어 있다. 이를테면 모두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거나 생사가 달린 주요한 임무가 주어지는데, 이 임무에 실패하면 세상(또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삶)의 종말이 온다. 두 영화 모두 문자 그대로 과학에서 말하는 시공간 압축을 그들만의 방법으로 탐구하고 있다. 공동체 세상에서 나타나는 효과에 비은유적 암시를 던지는 <앤트 맨>은 개미처럼 몸이 줄어든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관료가 된다기보다는 그냥 몸이 줄어서 관료가 된 것 같다). <인터스텔라>는 지구의 산소가 다 떨어지는 기이한 지구 파멸 현상으로 고통 받게 된 후, 지구를 탈출해서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행성을 찾으러 우주로 떠나는 전직 우주비행사에 관한 이야기이다(여기서 또 한 번, 산소를 다 써버린 미래가 아니라 새로운 재벌 시대에서 프레카리아트 삶이라는 망할 떼죽음이라는 공기를 들이마시는 현재를 암시해 본). 역설적으로, 두 영화의 주인공은 기술과 과학에 의존함으로써 비슷한 위기에 봉착하는데, 두 사람은 개념 시공간을 뛰어넘어 아래 세상으로 이동한다. 딸(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 개미 인간 옷을 입은 스콧은 원자보다도 작은 크기로 몸을 줄여서 양자(量子) 세계로 들어간다.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2014년 작품 <인터스텔라>에서 매튜 매커너히(Matthew McConaughey)가 맡은 주인공 쿠퍼는 로봇 친구와 함께 웜홀 속으로 뛰어 들어간 후 4차원 정육면체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5차원 물체를 통해 유령 형태의 딸과 대화하는데, 딸은 망가진 손목시계로 똑딱거리는 소리를 반복해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가 수십 년 걸릴 것이라고 추측하는 동안, 쿠퍼의 딸은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분석해 시공간 여행을 통해 과학적 명제를 풀어냄으로써 아빠가 구출되도록 돕는다. 스콧(앤트 맨)은 강적 옐로 재킷을 무찌르기 위해 몸의 크기를 줄여 양자 세계( <인터스텔라>에서 컴퓨터 생성 화상의 빈 공간에 초자연적 영상을 보관한 장소)로 들어간다. 해리 포터의 마술 지팡이로 순식간에 용이 날아가 버린 대기 속에 둥둥 떠 있는 스콧은 특별한 능력을 지녔는데, 몸의 크기를 다시 보통 사람 크기로 되돌릴 때 확대 디스크(WTF?)를 사용한다. 부성애(사이비 공상과학 소설/만화로 된 연산책의 애매모호한 언어로 가려진)로 인해 쿠퍼와 스콧은 자신들의 시간, 공간, 물리력, 절망적 운명을 거슬렀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이 과연 나빴을까? 5차원 세상과 지옥은 우리가 피해야 할 세상일까?

 

      하이데거(Heidegger)가 깨어 있고 확실한 현실 바깥에 존재하는 억압되고 폐기된 잠복 물질을 설명하고자 ‘본질의 심연(an abyss of essence)’에서 사고(思考)란 과학보다는 시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을 때, 우리는 그가 <앤트 맨>과 <인터스텔라>의 5차원 세계에서 나타나는 원자보다도 작은 양자를 설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시작도 끝도 없는 알 수 없는 형체와 개념, 육안으로 보이는 혼돈으로 꽉 찬 모호한 세상에 떠 있는 채로, 시는 언어, 그리고 사고가 하찮은 것이라는 환상을 벗겨낸다. 이렇기에 하이데거는 릴케에게 영감을 받은 초안에 시적 사고의 원고에 관해 “우리에게서 침잠해 바로 그 침잠 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시 언어는 잘 알려진 것에서 찾아 쓰는 것이 아니라, 알려진 것의 막을 벗겨내는 것으로 가장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찾아서 들추어내고, 가장 은밀한 것(언어 자체)을 찾아서 소외시킨다. 그리고 과학은 찾아낸다. 페덱스는 배달한다. 음악은 우리를 흥분시킨다.

 

      하지만 시에 관한 것은 시처럼 작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부정하는 시나 거절하는 시라고나 할까?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말한 과도현실처럼, 시인은 인지된 현실을 초월하려는 미학적 욕망 또는 진실 폭로의 장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지만, 현실은 가상 세계와 얽혀 있어서 낭만적이고 미학적 전통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자기 반영성 포스트 모던 시학들,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시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등…… 그래서, 소위 진짜와 꼭 같은 세계 혹은 실제 세계를 바탕으로 한 선험적 순간이 과거 전통 시에 흔적을 남긴 것이라면 더 이상 경험하기 어려운 가상 세계에서 전통적 선험적 경험을 하기 위해 ‘블랭크 어펙트’ 시는 욕망을 이야기하는 걸까? 향수 따위에 대한 낭만적인 것은 없는 것일까? 이런 의미에서, 궤도는 블랭크 어펙트(텅빈 감정) 시와 어펙트(감정) 시 둘 다 적용된다. 둘은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지만, 이 두 종류의 시에서 최고의 방식은 신빙성이 있는 순간에도 그리고 폭로의 순간에도, 시의 한 발은 한계점을 넘어 공허함을 향해 걸어 들어갈 때 현대의 삶의 다른 쪽에는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시가 폭로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김이듬(이 시인은 블랭크 어펙트 시인이 아님)이 최근에 낸 시집 『히스테리아』에 “아니스캔디가 든 유리 항아리 옆에 잠시/쇼윈도를 바라보면서/나는 홑겹입니다/내 안에는 내가 없습니다”라고 쓴 것처럼. 초월할 수 있는 현실이 없듯이, 시에는 향수를 향한 향수를, 진짜 열망을 위한 열망을 전시하고 있다. 초월적 ‘결핍’, 사고(思考)의 상(像)인 부재는 객관화와 성취 너머에 있다. 하지만 이것이 철학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도시 국가에서 시인들을 끌어내려 한 사람이 플라토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 활동으로 인해 사람들은 언어의 중요성을 떠올리는데, 짜증이 나는 시인들이 여러 생각을 붙잡아 머릿속에서 그 수많은 생각과 싸우기 시작할 때 사고를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프로이트 학설이 부인한 내용을 살펴보면, 플라톤 학파의 배제의 표현이야말로 시와 철학은 늘 혼합되어 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시인들이 생각이라는 놈과 고군분투할 때 이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 게 아니라 언제나 목표 지향적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말이 두 가지가 늘 분리되어 있다는 점, 그러니까 시 활동(활동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기념하는 일)과 추론적 사고〔(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논쟁의 길〕가 외관상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점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시를 거부한 플라토나 시를 믿은 하이데거가 자연에서 발견된 진실에 닿아 있는 것에 반해,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철학과 시를 분리된 것이지만 늘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 바디우에게 시란 묘사와 이미지를 거부하고, 의미를 통한 이해에 반(反)하고, 그리하여 설명을 요청하는 진술을 통한 사실 창조를 위한 현장이다. 이 “진술은 시의 반(反)-마취상태, 그리고 시가 붙잡은 생각의 존재와 시가 버린 육체의 애정에서 생겨난 비애감 간의 분리를 거쳐 효과를 드러낸다…… 버려진 것은…… 언어에 대한 시의 관계와 관련된 것 같은 것이다”. 이렇게 비애감(효과)은 버리고 상징(논리)을 향해 쓴 시는 의미라는 열쇠처럼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위한 활동처럼 작용한다. 이는 합리성이라는 시학이며, 바디우가 말한 진실처럼, 증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포괄적이며, 이름 붙일 수 없으며,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가버트의 시집 『불안정한 자아』는 린 하이제니안(Lyn Hyjenian)이 쓴 “내 인생”과 비슷하진 않지만 “인생”과 더 닮았다.

 

      하이제니안의 시와 같은 언어 시는 언어를 가지고 놀면서 익히 알려진 가부장적이고 전통적이며 역사적으로 해온 독서법에서 탈피하라고 청중에게 가르쳤다. 하지만 언어를 해체하면서 화자 자신은 진정성이라는 장소에서, 안정감이라는 장소에서 오는 듯했다. 개념 시학에서조차도, 작품 뒤에는 늘 언어의 규제를 둔, 불안정한 과업이라는 여행을 나선 영웅이 있었다. 여기, 언어의 문법적 또는 의미구조를 거부한 것은 없다. 이 때문에 『불안정한 자아』는 소위 ‘블랭크 어펙트’ 시학(블랭크 어펙트 시학은 개념론자들이 모여서 하는 기획에 참여하지 않고, 비애, 서정, 형상화, 전통적 시학 장치를 거부한다)에 특히 부합하는 본보기 시이다. 이러한 의미로 보면 그녀의 시집은 새로운 문장에 반대되는 것 같다. 인간미 없고, 서정적인 것에 반(反)하는 ‘예술 형식’은 진실 생산을 위한 사건의 출현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내재성의 평면에서 쓴 시이다. 기획된 글이 아니라 사고(思考)의 상(像)이다.

 

      <인터스텔라>의 쿠퍼처럼, 가버트의 시는 그녀가 있는 심연에서 온 메시지이지만, 쿠퍼의 메시지와 달리 위험 신호는 아니다. 심연이라는 공포는 질(膣)의 세계로 향하는 남근 질서 성교(전통)에 굴복하는 남성 불안감이다(<앤트 맨>과 <인터스텔라>에서는 심연을 안으로 떨어지면 금세 빠져나오고 싶어지는 구멍〔질(膣)이라고 이해하라〕으로 상징했다). 전통 때문에 우리는 심연이라는 공포심이 생길 것이다. 영화에서 공간을 잃고, 시간 밖에서 꼼짝 못하는 두려움을 맛본 스콧과 쿠퍼처럼. 하지만 둘 다 진짜로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돌려받은 시처럼, 자궁 속 유아 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다.

 

 

  ■ 엘리사 가버트의 시

 


 

불안정한 자아로부터

 

 

*
기억이 먼저 찾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성이 찾아온다. 7세나
8세 즈음에. 나는 예뻐지고 싶었고, 지금 나는 예쁘다. 소망해서 그렇게
된 건가? 내가 나라는 것은 그 반대인 네가 너라는 것보다
덜 충격적이다. 20대 어느 날, 차가운 차에 앉아 있는데
자아란 보편적인 것이고, 유일한 존재인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생각이 떠올랐지만, 더는 심오한 생각이 아닌 것 같다.

 

*
고양이는 아기보다, 그리고 번식을 목적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사용하는 고단수의 말보다 더 귀여워요. 우리의
적은 친구보다는 예술에 더 유익하죠. 내가 긴장하게 만들었다면
용서해 줘요. 내가 미흡하고 간접적으로 사과할 수밖에 없더라도
용서해 줘요. 이건 협상이긴 하지만
내겐 무기가 있지요.

 

*
그냥 네가 되지 말고 너라는 상표를 만들어 봐. 자아는
불안정하지. 검색엔진에서 찾지는 못할 거야.
거절당할 수도 있어. 자아는 5일 내지는 6일 동안 내내
재생되지. 한결같은 상표, 일관된 자아. 유용성을 시험해 보면서
접점을 생각해 봐. 까마귀도 자아와
그에 따른 자아 존중과 자기혐오를 지니고 있어.
까마귀는 자아성찰을 하기도 자멸하기도 하지. 까마귀는 어떻게
기가 죽는 걸까.

 

*
동물들도 진화의 거대한 실패에 관해 생각할 수
있지요. 최고의 경험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을 훨씬 덜하거나,
영원/이상한 순환에 대한 생각을 훨씬 덜하거나 아니면 아예 하지 않는
거예요. 뭘 하든 간에, 생각에 관한 생각을 시작도
하지 마세요.

 

*
까마귀는 인간과 다른 것들을 구별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까마귀들을 구별해 낼 수가 없지요. 이것은
모순처럼 잘못된 묘사를 하는 거예요. 인간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지만
까마귀들은 읽을 수 없고, 로봇은 실제로 춤을 출 수가 없어요. 모든 종(種)들이
과대 특수화를 향해 진화하죠. 당신이 음식이나 섹스보다
재미난 것을 찾는다면 그건 신호를 보내고 있는 중인 거예요.

 

*
사토리란 “자신의 천성 바라보기”를 향한 첫 수행 단계이다. 여기에는
거울을 회피하는 것이 아마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는 신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해라
너의 적들에게. 네 적들이 너를 더 너답게 만들어주니까.” 나는
불교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난 내가 좋다고 생각한다. 적이
있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다. 나는 사랑받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오해받고 싶은 것일까?

 

*
인간과 돌고래 중 어느 것이 더 지능이 뛰어난가 하는 것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흔해빠진 회색 큰 다람쥐와 얼룩무늬 홍합이
쟁취하고 있다. 기술은 간단명료하게 발전했는데,
이론상으로 보면 우리 세대는 무한정 살 수 있다. 이 말은
지나치게 학문적이다. 그리고 소행성이자 극(極)의 전환이며, 파이프 속에 있는
얼룩무늬 홍합이다. 기술은 파괴될 것이다.

 

 

 

 

From The Self Unstable (Courtesy of Black Ocean)

 

*
Memory comes first, then identity shortly after, at age 7 or
8. I wanted to be pretty, and now I am. Did wishing make
it so? That I am I is less shocking than its opposite, that
you are you. One day in my 20s, sitting in a cold car, I
realized the self is universal, there is only one I—again, the
thought arrives, but no longer seems profound.

 

*
Kittens are cuter than babies, an indication that they’re
using us for propagation at an advanced level. Our
enemies are better for our art than our friends. Forgive me
if I fabricate tension. Forgive me if I’m only capable of
incomplete and indirect apologies. This is a negotiation,
but I’ve got the weaponry.

 

*
Don’t just be yourself—build your personal brand. The self
is unstable. It might not be found by the search engines.
It might be rejected. The self regenerates every five or six
days. A consistent brand, a coherent self. Consider the
interface, testing for usability. Even crows have a sense of
self, and the accompanying self-esteem, self-loathing. The
crow is self-reflexive, self-defeating. How dejected is the
crow.

 

*
Animals can think about thinking, a grand failure of
evolution. The best experiences involve no thinking at all,
much less self-reference, much less an endless/strange
loop. Whatever you do, don’t start thinking about
thinking.

 

*
Crows can tell one human from another, but we are
unable to distinguish among various crows. This is
mischaracterized as a paradox. Humans may be racist, but
crows can’t read, and robots can’t really dance. All species
evolve toward overspecialization. If you find anything other
than food or sex interesting, it’s signaling.

 

*
Satori is the first step toward “seeing your self-nature.” This
probably involves avoiding mirrors. I met a woman who is
writing a novel about goodness. I told myself, “Be thankful
for your enemies; they make you more yourself.” I know
nothing about Buddhism. I believe I am good. To have
enemies is a coming of age. Do I want to be loved or
misunderstood?

 

*
Whether humans or dolphins are more intelligent is
academic. The common gray squirrel and zebra mussels
are winning. Technology has advanced to the point that
our generation could theoretically live indefinitely. This
too is academic—asteroids, the switching of the poles, zebra
mussels in the pipes. The technology will be destroyed.

 

 

 

엘리사 가버트

 

 

   ■ 시인과의 인터뷰

 

    - 제이크 리빈(이하 JL) : 몇 년 전 당신은 마이크 영(Mike Young) 씨와 HTMLGIANT(이 웹진이 한창 유명세를 탈 무렵) 웹진에 50가지 현대시 작법 개요를 만들었어요. 처음 그 개요를 읽었을 때 당신이 완전 천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요즘에도 워크숍에서 시 작법을 가르칠 때 그 개요를 사용하고 있어요. 어째든 그 작법을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엄청 많이 읽었고, 꽤 많은 시간 연구를 했어요. 처음에 어떻게 시를 공부하게 된 거예요? 특별히 당신을 어두운 쪽으로 끌어당긴 시나 시인이 있나요?

 

    - 엘리사 가버트(이하 EG) : 고마워요, 제이크! 교수법으로 그 개요를 사용했다니 너무 기쁘네요. 내가 처음 좋아한 시인은, 어릴 적에는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었어요. 실버스타인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나요? 시를 쓸 때 늘 라임과 미터를 완벽하게 쓰는데, 셸 실버스타인이나 닥터 수스(Dr. Seuss)의 글, 동요 등을 읽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 후로도 시를 계속 읽었지만, 열다섯 살 무렵에 앤 섹스턴(Anne Sexton)을 알기 전까지는 시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처음에는 플라스(Plath)의 시를 읽으려 했는데, 그녀를 참 좋아했죠. 하지만 플라스의 시는 너무 추웠고 반대로 섹스턴의 시는 굉장히 따뜻했어요. 두 작가의 작품이 순전히 섹시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 지나치게 표면에 가까이 닿아 있어요. 두 작가 모두 감정을 자제하는 편이 아니에요. 플라스를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녀의 작품을 읽었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그다음으로 내 마음을 꽉 채워 준 시인은 앤 칼슨(Anne Carson)인 것 같아요. 그녀의 시는 대학 때 (보고) 읽었어요.

 

    - JL: 한국에 셸 실버스타인의 번역본이 있어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번역되어 있네요! 내가 찾아봤어요. 그렇지만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는 몰라요. 그의 글에 담긴 매력을 잡기란 굉장히 어려웠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뭐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죠?

    앤 라우터바흐는 자신의 시집 『밤하늘』에 시를 써서 돈을 받았을 때 처음으로 자기가 진짜 시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고 썼어요. 당신은 언제 처음으로 ‘시인이구나’ 하고 느꼈나요?

 

    - EG : 전 늘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처음 소책자가 출판되었을 때 확실히 정당한 효과가 있었어요. 제가 낭송을 할 때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인쇄물을 갖는다는 것은 혹은 팔 가치(실제론 한 푼도 받을 수 없더라도)가 있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식’이라는 기분이 들게 하죠. 한 권의 장편물은 다시 두 배 길이로 늘어나고, 두 번째 책이 출판되고. 돌이켜보니, 2부로 구성되기보다는 연재 수준으로 시인 시절을 경험하고 있네요.

 

    - JL : 그 발상이 참 맘에 드네요. 알아주는 시상식에서 수상작 후보에 오르는 것은 갈색 띠를 따는 것과 같죠. 흥미로운 발상이에요. 비평가들이 “이분은 이 분야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시인 아무개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해 줄 때도 기분이 좋지요. 그런 글을 읽으면 내가 제다이 전사(Jedi warrior)가 된 것 같거든요. 혹시 제다이 전사들도 시인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당신은 언제나 시인인 것처럼 느낀다고 했는데, 당신이 쓴 칼럼을 보니까 시인이 사회에서 상당히 구체적 역할을 하는 것 같더군요. 최근에 성(性)에 관한 발언에 대해 당신이 쓴 기사가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지요. 지금, 미국 시 무대(Scene)에서 정체성 정치학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생각엔 사회에서도 같은 전쟁이 일부 일어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최근에 저는 시인의 사회적 역할에 관해 한국 시인 친구인 김경주 씨와 이야기를 했어요. 이를테면, 프란츠 라이트(Franz Wright)나 루이스 글럭(Louise Gluck) 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만 시를 써오고 있어요. 그 후로 클라우디아 랭킨(Claudia Rankine)이나 감히 말하건대 바네사 플레이스(Vanessa Place) 같은 사람들이 있지요. 이들 작품의 중심에는 그 시대의 정치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그리고 어쩌면 현재에는, 예술학 석사 과정 프로그램이 늘고 있어서 작품에 진짜 돈과 진짜 권력이 담겨 있는 것 같고 그래서 판돈은 더 커지고……. 인터넷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미흡하고 아직 출판해 본 적 없는 예술학 석사 과정생들도 떠들어대죠. 어떤 면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나고 있는 게 좋은 것(바네사 플레이스(Vanessa Place)와 케니 지(Kenny G)가 부른)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다른 날에는 마녀사냥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죠(브루스 코베이(Bruce Covey) 강간 혐의 사건). 사회에 관여하는 게 시인의 역할이라고 혹은 시인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 EG: 시인이 사회에서 어떤 특정한 역할을 하는지, 혹은 이 땅에서 뚜렷하게 사회적 또는 정치적 변화를 일으킬 의무를 가지는지 잘 모르겠어요. 개인적으로 정치는 저에게 문제가 되기 때문에 내가 행하는 모든 면, 가령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하는 말, 내가 읽고 쓰는 글에 드러나요. 하지만 시인 혹은 어떤 형태의 예술인이라고 해서 공공연하게 ‘반드시’ 정치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가정해 볼게요. 당신이 쓴 시의 내용이 명확하게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이 정말 지루하고 너무 뻔해서 어떤 생각도 할 수 없게 한다면, 그 시에는 정치적 가치는 보이지 않죠.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을 통해 정치적인 면에서 뭔가 할 수 있고,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전반적으로, 현재 매일 일어나는 인종과 성(性)에 관한 분노를 보고 있자면 기분이 짜릿해져요. 동성애 결혼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나 강제로 보수당 깃발을 끌어내린 사건 등을 보면 확실한 승리를 얻어낸 것 같아요. 그 순간에는 “결국 해냈다”는 기분이 들어요. 마녀사냥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면, 저와는 좀 동떨어진 주제 같아요. 공개망신/군중재판/보복행위 따위는 좌파 또는 ‘정체성 정치학’에만 치중된 일은 아니니까요.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 JL: 형태면으로 봤을 때 당신의 첫 번째 시집은 안쪽으로, 개인적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두 번째 시집은 오히려 밖을 향해 움직이고, 진짜로 철학적이더라고요. 그리고 전통적 서정시 형식에서 서정적 수필 형식으로 변했어요. 작품이 변한 이유가 있나요? 두 번째 시집에서 서정적 수필 형식을 취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 EG: 필요에 의해서죠. 처음에 카피라이터로 일을 시작했는데, 하루 종일 산문을 쓰는 게 일이었어요. 코드-스위치, 이를테면 여러 개의 긴 문장을 쓰는 게 무척 어려웠죠. 그때는 그냥 시 쓰기에 대한 생각은 딱 멈추고 문장 쓰기에 대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쓰지 않겠다’라기보다는 형식을 고안해 내기로 마음먹었는데, 긴 문장을 짧고 재미난 조각으로 배열해 보기로 한 거예요. 제가 존경하는 시인들(매기 넬슨(Maggie Nelson), 샘슨 스탁웨더(Sampson Starkweather), 줄리아 스토리(Julia Story))이 쓴 산문 몇 편을 읽고 영감을 얻었어요. 시를 산문으로 바꾸면 결국 작품 내용도 바뀐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동시에 나이를 먹으면서 변하는 결과처럼, 내면적/개인적 태도에서 철학적 태도로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되죠. 첫 번째 시집은 20대 중반에 썼는데, 그 당시 감정 상태가 극에 달하고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어요. 두 번째 시집 제목에 ‘불안정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두 번째 시집을 쓸 당시의 삶은 확실히 더 안정적이었어요. 아마도 그래서 철학적 거리의 수준에 이를 수 있었나 봐요.

 

    - JL: 스포크 프레스 계정으로 당신의 트위터에 팔로했어요(개인 계정이 없거든요). “이 바닥에서 10년 넘게 있으면 퇴물 취급을 당하는데, 나와 함께할 사람 있나요!”라며 최근에 퇴짜 맞는 것에 관한 글을 몇 개 올렸더군요. 먼저, 제가 당신과 함께하겠다고 말하고 싶군요. 다음으로, 출판물에는 과장법, 풍자적 개작 시문, 평범한 작품들이 많아요. 미국에서 일어나는 기상천외한 일들도 많이 출판되고 있는데, 특히 대학출판사와 연계되어 있지 않은 소규모 출판사(예를 들어 버즈 출판사(Birds)나 블랙 오션 출판사)에서 그런 책들을 많이 내지요. 엘리사 씨는 현재 시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고 인기도 많고 추종자도 많은데, 시 제작에 관해 물어봐야 할 교육적 측면의 질문은 뭐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제가 이 연재물에서 인터뷰했던 시인들(샘슨 스탁웨더, 노아 키케로, 최돈미, 리처드 사이켄)은 전부 시 제작이라는 범위에서 벗어나 있거든요. 시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은 매튜 딕맨뿐이었어요. 제 생각엔, 내가 인터뷰한 열 명의 작가들은 여러 권의 책을 통해 근래에 시 분야에서 가장 흥미로운 소리를 내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중 딱 한 사람만 시를 써서 돈을 벌 수 있을까요. 예술학 석사 과정 또는 문창과는 여전히 인기가 있잖아요? 또 저들은 확실히 인정받고 중요한 목소리를 내는데도 여전히 출판을 거절당하는 이유는 뭘까요?

 

    - EG: 여러 저널과 문학잡지에서 그리고 편집장들이 방대한 양의 개진(開陳)들을 쏟아내는데, 다수의 좋은 작품들이 거절당해요. 희한하게도 전반적으로 특색도 없고 그다지 좋지 않은 작품들이 여러 번 출판됐어요. 다수의 편집장들이 인정한 작품이 자체적으로 재차 받아들여진 결과인 것 같아요. 만약에 어느 편집장은 그 시가 맘에 드는데 다른 편집장은 싫어해요. 그러면 그 시는 출판되지 않아요. 대신 두 사람 모두 맘에 들어 하는 시로 교체될 가능성이 있죠. 그럼 결국 저널은 오케이 받은 시들로만 채워지는 거죠.

    그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북 콘테스트를 상상해 보는데, 최종 결정자들이 결정하기에 앞서 보통은 독자 패널이 있거든요. 제출된 원고를 읽는 사람들이 ‘실수한 부분’을 찾으면 그 책을 그만 읽어도 될 구실이 마련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출판될 작품으로 선정되려면’ 위험을 많이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단조로운 원고를 쓰는 것이 방법이죠. “이 책은 뿅 갈 정도는 아니지만, 최소한 터무니없는 글도 아니고, 공격받을 일도 없다” 같은 거죠.

    학계는 좀 별개의 문제예요. 전 그쪽을 알고 있는데요. 기업이고 교육 분야도 아니고, 시와 관련이 없는 직업을 가져 봤기 때문에, 자기 속도에 맞춰서 일을 할 수 있고, 원할 때마다 출판할 수 있고, 내 분야가 뭘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시 세계에서 저의 모든 행보에 따르는 정치적 영향력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어요. 정말로 흥미로운 작품을 출판하는 여러 소형 독립 출판사들은 영문학부 출신이라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요. 학부에서는 종종 일류 뉴욕 프레스는 아니더라도 공인된 대학출판사에서 출판하는 교수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집단별로 마찰도 있지요.

 

    - JL : 이번 신작에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마찰 같은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쓰인 부분이, 이를테면 “고마워해라 너의 적들에게. 네 적들이 너를 더 너답게 만들어주니까.” …… “적이 있다는 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지” 대목 등에서 상당수 발견되었어요. 하지만 또 그와 동시에 무한반복적인 역설이기도 해요. 이를테면 “난 아이를 원하지 않지만, 딱히 할 일도 없어요.”라든가 “옳은 일을 하고도 그걸 모르는 것보단 차라리 잘못된 선택을 하겠어.” 같은 문장이 그래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감싸는 긴장감을 낚아챈 순간은 브랜든 시모다(Brandon Shimoda)가 시 속에 나타나서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콘을 쓰레기통에 던지면서 “시가 참 지루하군.” 하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책의 여기저기에서 인간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인한 내적 불안감에서 파생된 소외감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씨름하는 것이 엿보였어요. 서른이 된다는 것. (끝나지 않는) 전쟁. 뉴스. 저명인사. 자연계 파괴. 설화 문학 작품의 죽음 등등. 열거하자니 길군요. 『불안정한 자아』의 어조와 맥락을 살펴보면 미국의 자본주의/제국주의/문명의 쇠퇴라는, 미국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일종의 고통이 반영되어 있더군요. 우리 사회의 모든 꿈들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죽어 있던 것처럼 말이죠. 어쨌든,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더 일찍 나눠 봤더라면 적어도 제게는 당신의 두 번째 책에서 21세기 미국에서 존재하는 세대 간의 무관심/불만을 찾아냈을 거예요. 아마도 그건 나이 들어감에 대한 일부분이 될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이 책을 쓸 때, 당신이 잡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어요? 아니면 잠재의식에서 나온 건가요?

 

    - EG : 잠재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요. 전 무신론자이고, 자식도 없고, 가끔 갑자기 무의미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정박…… 그러니까 내 생각엔, 잠깐만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죠? 운이 좋아서 통과됐잖아요. 가끔은 행복하게, 가끔은 슬프게 살다가 죽는 거죠. 이렇게 사는 것 외에 삶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 JL: 『불안정한 자아』를 읽는 과정은 마치 조 웬더로스(Joe Wenderoth)가 쓴『레터스 투 웬디스(Letter’s to Wendy’s)』를 읽을 때와 상당히 비슷했어요. 시 한 편 한 편이 꼭 비네트 같았는데, 비네트 한 편 한 편이 또 다른 비네트와 연결되어 있더군요. 시 몇 편을 연결해 보려고 잠시 책을 내려놓아야 했죠. 궁금한 게, 섹션을 각각 구분해서 쓴 건가요 아니면 묶음으로 생각하고 쓴 건가요? 아니면, 우선 길게 쓴 다음 짧게 나눈 건가요?

 

    - EG : 기껏 써봐야 한 번에 한 편을 썼어요. 어떨 때는 한 문장이나 몇 문장밖에 못 썼는데, 나중에 남은 부분이랑 합쳐서 한 편으로 완성하기도 했어요. 작업은 느리게 진행됐는데, 매일 한 편씩 쓰려 했지만 한 달에 한 편씩 쓴 셈이네요. 결국, 앞에서부터 뒷부분까지 한 번에 쭉 읽힐 수 있는 시집도 되고, 아니면 욕실에서 보는 책처럼 아무데나 펼쳐서 한두 편 골라 읽을 수 있는 시집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 시집은 두 가지 방법 모두 가능하죠.

 

    - JL : 마지막으로, 시라는 결과물로 인해 당신한테 일어날 수 있는 최고로 혹은 가장 놀랄 만하거나 희열을 주는 것은 뭔가요?

 

    - EG : 특별한 순간은 없어요. 하지만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제 작품을 읽었다고, 제 작품이 맘에 든다고 말해 주면 최고로 감사하고 희열을 느끼죠.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해줄 때마다 경이로울 거예요.

 

 

    글 _ 제이크(Jake Levine, 시인)

 

 

소개 및 글 _ 제이크 레빈(Jake Levine, 시인)ame-poem-jake


제이크 레빈은 2010~2011년 리투아니아에서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비롯해 여러 장학금 및 수상을 한 바 있다. 두 권의 소책자(『삭제의 문턱(The Threshold of Erasure, Spork 2010)』과 『빌뉴스 악령(Vilna Dybbuk, Country Music 2014)』)를 저술했다. 그의 시, 번역물, 에세이 등은 보스턴 리뷰지, 루에르니카, HTML자이언트, 아틀라스 리뷰지, 페이퍼 다츠 외 여러 잡지에 실렸다. 그는 리투아니아어로 쓰여진 토마스 스롬바스의 작품, 『갓/씽(God/Thing, Vario Burnos 2011)』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현재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정희연과 공동으로 한영 번역 중이다.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비교문학 전공 박사과정 중이며, 연세대학교 강사로 재직 중이다. 또한 애리조나 투산 소재의 작은 출판사 스포크 프레스(Spork Press)에서 편집장을 맡고 있다.

 

   《문장웹진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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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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