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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이야기하는 여섯 가지 시선 - 한국문학의 명장면

  • 작성일 2017-11-01
  • 조회수 1,894

[기획]

 

 

오늘을 이야기하는 여섯 가지 시선
- 한국문학의 명장면

 

 

 

 

하나.
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강지희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문학들 41》, 문학들, 2015년.
[/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400"]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제6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6년.
[/caption]

 

 

    재혁은 자신을 찍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오래 전부터 꿈꿔 온 풍경이었다. 자살을 중계하는 쓰레기 같은 뉴스 카메라. 그가 사랑하는 호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디스토피아였다. TV뉴스채널이 쓸데없이 많아질 때 재혁은 그가 꿈꾸던 장면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반정부 집회 장면을 비추며 집회 참가자가 든 피켓에 쓰인 폰트가 북한에서 쓰이는 폰트라는 내용을 진지한 얼굴로 아나운싱하던 여자를 보던 날 재혁은 자신의 날이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미래는 항상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다. 엿 같은 모습으로. 재혁은 트위터에 멘트를 남겼다.
    재혁은 리모콘을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의 발치에 이미 스마트폰이 있었다. 꽃신을 벗어 두고 강물로 뛰어드는 소녀처럼. 재혁은 갑자기 이런 죽음의 장면이 진부하게 느껴져 당황했다. 겨우 술 먹고 뻗은 여자애들의 몸을 핸드폰 카메라로 몰래 찍던 녀석이 떠올랐다. 너도 찍어 봐. 괜찮아. 녀석이 하도 간곡하게 애원해서 재혁은 그 짓에 동참하는 흉내를 냈을 뿐이었다. 녀석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신에게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대학 시절 녀석은 굳이 재혁에게 메일을 보냈다. 법대 간 소식 들었다는 둥, 다행이라는 둥, 보태 준 것도 없이 주제넘게 지껄이는 내용이었다. 주원은 자신은 오랫동안 깊이 반성 중이라고 떠들었다. 차라리 누가 나를 벌해 주었으면 좋겠어. 누나들에게 너무 미안해. 왜 나를 벌해 주지도 않지. 애초부터 재혁에게 솟대 녀석들은 죄다 하찮은 녀석들이었지만, 주원이라는 녀석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찐따 같은 행동이 지나쳤다. 재혁은 메일을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따위로 딸딸이나 치면서 살아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랑 내가 정말 잘못했다, 를 반복해서 뇌까리면서.

 

- 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중에서

 

 

    올해는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은 지 십 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서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나온 지도 정확히 십 년이 되었다. 이 둘이 결합하면서 현실에서는 더없이 궁핍하고 무력하지만, 사이버 세상에서는 무엇이든 실현가능하다는 전능감을 느끼는 기이한 존재들이 탄생했다. 지난 십 년이 일베, 몰카, 소라넷, 여성혐오, 김치녀, 메갈리아 등의 키워드로 점철된 것은 바로 이 어긋난 접합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격렬하게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며 만들어진 전선은 이제 세대 사이가 아니라 젠더 사이에 놓여 있다.
    위에 인용한 장면에서 ‘재혁’은 SNS를 통해 미리 세상에 예고한 자신의 자살을 실행에 옮기려는 중이다. 남성연대 대표였던 ‘성재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자학적 쇼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주목받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이를 단순히 원한 감정에 사로잡힌 루저의 일탈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재혁은 강남의 사립고와 서울법대 출신의 남자로 상정되어 있고,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세상 전체에 대한 멸시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재혁에게 유독 짙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주원’에 초점을 맞춘다. 고등학교 시절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해 적극적인 자기반성을 드러내고 다니는 주원의 기만적인 면모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자신의 정치적 온건함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흔들어 놓는다.
    전체를 조감하는 ‘드론의 시선’은 재혁을 매개해 욕실에서 몰래 훔쳐보는 내밀한 ‘몰카의 시선’으로 매끄럽게 연결된다. 2000년대 초중반 편의점, 옥탑방, 고시원 등에서 고립되어 있던 청춘들은 지난 십 년 사이 쉴 새 없이 외설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거나, 훔쳐보는 대상이 되었다. 세상을 조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버드아이즈 뷰’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개인과 사회는 이렇게 과잉 시선으로만 연결된다. 혼자 있을 때에도 온갖 SNS와 뉴스와 카톡으로 늘 함께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고독은 오히려 선망할 만한 특별한 존재방식이 되어 가는 중이다. 당신은 정말 재혁의 내면이 궁금한가? 하지만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서로의 내면을 알아보는 방식 역시 이미 파편화되어 있는 SNS의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자살을 중계하려는 죽음 충동과 타인의 육체를 훔쳐보는 에로스 사이에서 분열하는 재혁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매혹과 혐오 사이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되어 가는 우리의 존재 양태를 고스란히 노출한다. 박민정의 「버드아이즈 뷰」는 기민한 시대감각으로 가장 먼저 도착한 미래의 소설이다.

 

 

 

 

 

작가소개 / 강지희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둘.
서유미, 「검은 문」

 

고봉준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서유미, 「검은 문」
《문장웹진》 201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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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400"]서유미, 「검은 문」
『당분간 인간』, 창비,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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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쁠 것 없는 저녁이었다. 하지만 211번은 이런 평화가 거짓처럼 느껴졌다. 99번과 123번은 하루 종일 출구가 없는 것처럼, 등 뒤가 벽으로 막힌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의 생활은 철저히 철창과 배식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숫자와 밥그릇에 매여 있었다. 211번은 고개를 돌려 출구를 힐끗 보았다. 그것은 검고 음험한 수수께끼처럼 여전히 거기 있었지만 지워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출구는 외면하고 살 수 있지만 끼니때마다 제공되는 음식과 사탕, 쌓아 놓은 숫자,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무서운 것은 등 뒤의 출구가 아니라 눈앞에 버티고 있는 생활이다.”

 

- 『당분간 인간』, 창비, 2017, 215쪽.

 

 

    이 소설은 문학의 미적 가치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독창적인 방식의 창조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숫자로만 지시되는 죄수들,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기계적으로 ‘벽돌’을 돌리는 행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숫자의 증가에 집착하는 강박…….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 정체불명의 ‘큐브’를 연상시키는 감옥 구조는 우리의 일상적 배치를 보여주는 알레고리적 장치들이다. ‘출구’를 향한 주인공의 탈주가 결국 ‘철창’으로 되돌아오는, ‘출구’ 없는 세계의 불가능성도 흥미롭지만, 현실 또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부조리극의 무대처럼 세부적인 맥락을 모두 제거해 버린 형식,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최소의 장치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면모를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실 ‘세계’와 ‘현실’의 부조리한 측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독창적인 말하기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은 드물다. 낯선 이야기 방식으로 익숙한 우리 ‘세계’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이다.

 

 

 

 

 

작가소개 / 고봉준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다른 목소리들』,『유령들』『비인칭적인 것』이 있음. 현재 계간 《포지션》, 월간 《시인동네》편집위원.

 

 

 

 

 

 

 

셋.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김대산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문학과지성사, 2011년.

 

 

    “나는 오래도록 너무도 작위적인 삶을 살아왔고, 이제는 작위적인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내가 작위적인 삶을 산 것은 삶의 그 무엇도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그에 따라 삶에 진지할 수 없었고, 삶의 어떤 사실들이 아니라 그 사실들에 대한 생각들에만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나의 삶의 가장 큰 실질적인 어려움이기도 했다.”

 

-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문학과지성사, 2011년, p.190

 

 

    정영문의 소설은 생각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우리 모두는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을 생각하는 일은 드물다. 생각이 생각된 대상으로 표상(재현)되기 이전에 발생하는 생각의 현실적 운동의 과정을 경험하는 일은 더욱 드물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연적인 감각세계와 사회적 관습의 세계에 대한 적응을 강요하는 실용적 삶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쁜 사업적 생활(혹은 생존) 속에서 생각 자체를 생각할 틈이 없다. 생각은 항상 생각의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로 대체된 실용적 삶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실용적 삶에서 분리된 순수한 생각의 현실성은 비-현실성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대인이 처해 있는 의식 속에서 물리적 세계와 분리된 생각 자체는 비-현실적(혹은 비-사실적) 허구이거나 무용한 추상물이다. 정영문의 소설이 생각을 생각하기를 주제화하면서 드러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렇게 ‘그 자체로 생각된 생각 자체가 갖는 비-현실적 무능함에 대한 현대인의 일상적 의식’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과 사물(혹은 언어와 존재)을 대립시키듯이 생각과 실천적 행위를 대립시킨다. 즉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말한다. 말이 사물이 아니듯이, 생각은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과 생각을 부정하는 일도 역시 말과 생각의 일(활동)이다. 말과 생각을 부정하면서 사물과 행위에 이르는 길은 인간에게 없다! 그러므로 정영문 소설에 등장하는, 말과 생각에 작위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의 유희적 말과 생각은 인간의 숨겨진 본성(말과 생각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 말과 생각과의 본질적인 내적 관계성을 갖는 존재)에 관한 진지한 관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파악된 말과 생각은, 대개 자연과학이 그렇게 하듯이, 어떤 주관에 맞세워져 그 주관과 분리된 객체 같은 것으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일반적으로 생각을 생각하는 학문으로 알려진 논리학에서처럼 형식적으로 관찰되는 것도 아니다. 주관과 객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함이 없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말을 말하고 생각을 생각하는 일, 혹은 말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말하는 일에 관한 진지한 관찰과 결합된 유희적(놀이적) 서술은 문학의 가능성에 속한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을 위해 왜 작위적이거나 허구적인 공간이 필요한지, 혹은 왜 창조성이 요구되는지 등에 대한 물음의 해답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말과 생각의 비밀스러운 본성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 비밀스러운 본성은 존재인가 무인가? 의미인가 무의미인가? 정영문의 소설은 그런 물음과 연관된 삶의 어려움을 ‘진지한 언어놀이와 관련된 창조적 활동’으로 파악될 수 있는 문학적 예술로 변형시키고 있다.

 

 

 

 

 

작가소개 /김대산

1974년 출생. 2006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평론집 『달팽이 사냥』(2011)이 있음.

 

 

 

 

 

 

 

넷.
황정은, 「백의 그림자」

 

노태훈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황정은, 「백의 그림자」
『세계의 문학 133』, 2009년.
[/caption]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년.

 

 

은교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39쪽

 

 

    어떤 작가는 그저 좋은 작품을 써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스타일과 정서를 만들어 당대 소설의 흐름과 분위기마저 바꿔 놓는데, 정확히 황정은의 지난 십 년이 그랬다. 2008년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로부터 2016년 『아무도 아닌』에 이르기까지 황정은은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걸으면서 한국 소설을 좀 더 섬세한 쪽으로, 좀 더 사려 깊은 방향으로 밀고 왔다. 황정은 소설의 인물들은 슬픔과 쓸쓸함을 꾸준히 단련해 쉽사리 절망이나 체념으로 빠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게끔 스스로를 곱씹는 힘을 보여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어쨌든 그들에게는 삶이 지속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함을 끈질기게 증명해 왔다. 그것은 그들을, 그리고 이 세계를 오래도록 응시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시선이었고, 그러한 시선은 때때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빛나는 눈으로 포착해 내는데, 오래된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은교와 무재의 사랑을 그려낸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한국어로 쓰인 문장과 대화가 어떻게 그토록 낯설면서도 정확할 수 있는지, 그래서 그 흔한 사랑 이야기 없이도 얼마나 풍성한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속한 세계가 왜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되는지, 이 소설은 정말로 아름답고 감각적으로 증명한다. 지금도 황정은 문학의 본령은 이 작품에 있고, 우리가 끝내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할 세계의 한 풍경도 이곳에 있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꽤 오랫동안 생각하고, 바라게 될 것이다. 은교와 무재가 여전히 서로를 확인해 가며 무사하기를.

 

 

 

 

 

작가소개 / 노태훈

문학평론가. 1984년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다섯.
박성원, 「고백」

 

서희원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박성원, 「고백」,
『문학과사회 100』, 문학과지성사,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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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고백』, 현대문학, 2015년.

 

 

   “나는 월리스 컬렉션의 「Daydream」을 신청하고는 술을 마셨어. 난 ‘젖 나오는 남자’에게 물었어. 이봐, 대체 저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라고. 그러자 박성원이 말했어. 글쎄, 하고 말이야.”

 

- 박성원, 『고백』, 현대문학, 2015년, 38쪽.

 

 

    “한국 문학의 명장면”을 추천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유의 범위를 ‘나’로 한정한 후 잊히지 않는 하나의 장면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고백」의 마지막 장면에서 발췌한 이 문장에는 네 개의 고유명사가 등장한다. 월리스 컬렉션(Wallace Collection)은 근대 유럽 장식미술의 걸작들을 모아 놓은 미술관이 아니고 1960년대 말 결성된 벨기에 출신의 록밴드이다. 그들의 대표곡인 「Daydream」은 영화 <미스터 노바디(Mr. Nobody, 2009)>에 삽입되어 영화팬들의 귓가에 아른거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 명의 등장인물인 ‘나’와 친구인 ‘젖 나오는 남자’, 그리고 실제 작가의 이력을 참조한 인물 ‘박성원’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동일인물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듣지 않는 오래된 음악을 틀어 주는 LP바에서 ‘나’, ‘젖 나오는 남자’, ‘박성원’이 나누는 이 대화는 사실 분열된 자아가 나누는 독백에 불과하며,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고백」의 모든 장면에서 예술, 특히 소설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고민을 대화와 사건으로 펼쳐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마지막 장면에서 독백임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정신이 분열된 한 자아의 기록으로 읽어야 하나? 아니면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사라져 가는 예술을 향수하고 간직하려는 자아의 안간힘으로 읽어야 하나? 내게는 후자로 읽힌다. 저 많은 사람들은 여기가 아닌 어디로 가버렸고,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을 들으며, 이젠 아무도 읽지 않는 문자예술의 한 장르에 대해, 아무하고도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을 읽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쓸쓸했지만,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작가소개 / 서희원

2009년 《세계일보》,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등단. 《문예중앙》 편집위원 역임. 지금은 《현대문학》 편집자문위원.

 

 

 

 

 

 

 

여섯.
배명훈, 「예술과 중력가속도」

 

허희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배명훈, 「예술과 중력가속도」
      『창작과비평 150』, 2010년.
[/caption]
배명훈, 『예술과 중력가속도』, 북하우스, 2016년.

 

 

    은경 씨는 몸을 잔뜩 구부려 온몸에 힘을 가득 모으더니 몇 발인가를 빠르게 앞으로 내디디며 공중으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두 팔을 자연스럽게 벌리고 가슴을 쫙 편 다음 긴 목선이 최대한 드러나도록 목을 쭉 뻗었다.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언젠가 은경 씨가 한 말처럼 천장에 닿을 듯 굉장한 점프였다. 저쯤 가면 이제 아래로 내려가겠지 하는 지구인의 상식 때문에 위로 솟구쳐 올라가는 은경 씨의 동선이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제는 떨어지겠지, 이제는 떨어지겠지. 은경 씨는 그런 상식의 착각을 세 번이나 저버리고 계속해서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등에 로켓 엔진이라도 단 듯, 누군가 위에서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 아니, 처음부터 하늘에 속해 있던 사람이 온몸에 지워진 중력의 구속을 끊어내고, 마침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은경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감은 눈, 온몸 가득 무언가 소중한 것을 품은 듯 애틋한 표정. 저런 거였구나! 나는 처음으로 진짜 은경 씨를 만난 것 같았다. “예술 하는” 은경 씨. 환희에 찬 은경 씨. 다시는 보지 못할 은경 씨의 진짜 얼굴. 은경 씨는 그 상태 그대로 영원히 지면에 닿지 않을 것처럼 공중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 배명훈,『예술과 중력가속도』, 북하우스, 2016, 196쪽.

 

 

    은경 씨는 달에서 예술―현대 무용을 했다. 하지만 달 기지가 폐쇄되면서 그녀는 지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구 중력은 달의 6배이다. 달에서 할 수 있었던 어마어마한 도약을 더 이상 은경 씨는 할 수 없게 됐다. 그녀의 남자 친구인 ‘나’의 말마따나, “달 출신들에게 지구의 중력이란 엄연히 실체를 가진 짐이었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은경 씨가 ‘나’에게 티켓을 한 장 준다. 달 환경을 재연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 입장권이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점프를 보여줄 수 있다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보러 와야 한다고 ‘나’에게 말한다. 은경 씨와 결혼을 약속한 마당에 뭐가 대수겠는가. 기꺼이 ‘나’는 공연이 열릴 미국으로 향한다.
    그런데 공연장에 도착하고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든다. 고래를 닮은 커다란 비행기가 공연장이었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탑승하자 비행기는 이륙한다. 그리고 서서히 하늘로 솟구쳤다가 갑자기 곤두박질친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그러나 관객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공연에 맞게 중력의 크기를 조정하는 것이다. 엄청난 멀미에 시달리며 구토를 하는 사람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와중에 은경 씨가 출연하는 공연이 시작된다. 그녀는 “처음부터 하늘에 속해 있던 사람이 온몸에 지워진 중력의 구속을 끊어내고, 마침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점프를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멀미를 잊고, “공중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은경 씨에게서 경이감을 느낀다.
    물론 우리는 안다. 은경 씨가 하는 예술도 결코 중력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아무리 높이 올라도 그녀는 결국 지상으로 내려오고 말 것이다. 노력해 봐야 어차피 환경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식의 빤한 체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은경 씨가 증명했듯이, 예술은 잠시나마 모든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를 갖는다. 또한 그것은 ‘나’에게서 드러나듯이, 예술가가 아닌 예술을 감상한 사람마저 예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파급력이 있다. 문제는 구조적 억압—중력이 아니라고, 이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예술로 한번 훌쩍 초월해 볼 수 있지 않겠냐고, 「예술과 중력가속도」는 은경 씨가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우리에게 제안한다.

 

 

 

 

 

작가소개 / 허희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 평론 부문에 「감각적 경계인의 정치적 사색―김경주론」과 「잔혹한 세계 : 청춘의 테제―김사과‧윤이형‧박민규 소설에 나타난 청춘의 양태」가 당선되며 등단.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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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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