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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작가 간사들의 익명대담 - 1회_등단제도

  • 작성일 2018-12-01
  • 조회수 2,058

[청년 작가 간사들의 익명대담]

 

 

익명대담 1회 : 등단제도

― 미등단자 클립, 비등단자 비누와 함께

 

 

ㅇ 원고정리 및 구성 : 양안다(시인, 《문장 웹진》 청년 작가 간사)

 

 

 

 

김남숙과 양안다는 합정에 모여 익명대담에 대한 주제를 상의했다. 처음에는 무작정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러나 작가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느 주제를 잡더라도, 그리고 누구를 불러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아무도 안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남숙과 양안다는 대학로에서 다시 모였다. 우리는 우리가 재미있는 걸 해요, 그렇게 정했다. 1회에는 등단제도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입을 모았다. 작가나 심사위원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미등단자, 그리고 비등단자에게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미등단자와 자발적 비등단자를 초대하기로 했다.

 

 

미등단자와 비등단자의 생각

 

안다 : 인사를 먼저 할까요? 안녕하세요.

 

일동 : 안녕하세요.

 

안다 : 추운 날씨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대담자 분들께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오브제를 가져와 달라는 부탁을 드렸었어요. 익명대담이다 보니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요. 미등단자이신 분은 클립을, 비등단자이신 분은 비누를 가져왔는데요. 자기소개와 함께 오브제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릴게요.

 

클립 : 안녕하세요. 저는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시를 10년 가까이 쓰고 있는 시 습작생이고 문예창작을 전공하면서 등단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브제는 클립을 가져왔는데요. 원래 프린트한 종이를 찍을 때 스테이플러를 애용하는데 요즘에는 클립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클립을 가져온 것도 있고, 최대한 저를 지칭하지 않는 물건을 찾다 보니까······. (웃음)

 

비누 : 저는 독립 문예지를 만들고, 또 독립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비누를 가져왔고요. 사실 이거는 선물 받은 비누인데, 저는 비누라는 게 만질수록 사라진다는 점이 좋거든요. 근데 이 비누는 너무 예뻐서 못 쓰겠더라고요. 못 쓰겠어서 책상에 두었더니 색이 변하더라고요. 흰색이었는데 노란색으로······ 그래서 오늘 대담에 가져간 다음에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남숙 : 저희가 두 분을 모신 이유는 클립 씨는 미등단자, 비누 씨는 자발적 비등단자예요. 등단제도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다를 것 같았어요. 먼저 등단제도에 대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단편적인 생각을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클립 씨부터 할까요?

 

클립 : 저는 사실 학교를 다니면서 등단제도에 대해 엄청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우선 교수님들이 등단을 하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아, 등단을 해야 하나 보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제가 헷갈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 작가가 튀어 나오면서 등단에 대해 논의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부터는 효율적인 기계라고 해야 하나? 등단이 문단을 유지하기 위한 효율적인 기계처럼 느껴지는데, 그 기계가 유지를 위한 용도로만 쓰이는 것 같아요. 등단제도의 좋은 점이라고 한다면 일정 이상의 퀄리티를 뽑아낸다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등단제도 말고도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는 대체 방안들이 많을 것 같아요. 지금은 등단을 안 하면 작가로 취급 받기 힘들지만, 분명 등단을 거치지 않고도 잘 쓰는 분들도 계시고······ 그래서 지금은 등단제도가 마이너스 요소가 많이 남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 작가는 자기 책에서 등단제도가 절대 비리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묘사를 해놨던데, 그건 ○○○ 작가가 문예창작과를 다닌 것도 아니고, 사제 관계를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죠. 어떤 의미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니까요. 일반적인 문창과생은 습작 작품을 선생님께 보여드리잖아요? 그 선생님들이 모든 제자들의 작품을 알지 못하더라도 좋은 작품들은 기억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알게 모르게 밀어 주게 되고, 심사위원이 많다면 그런 부분이 걸러질 수 있겠지만, 모든 심사 과정이 그렇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가라는 직함을 달 수 있는 루트가 많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등단이 거의 유일하니까요.

 

남숙 : 사제 간의 관계를 포함하여 공정성의 문제가 있다는 거죠?

 

클립 : 네. 입구가 좁아서 경쟁도 치열하고, 그런데 이 부분에서 악용할 여지가 있다 보니까······ 등단을 할 수 있는데도 못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거고요. 공정성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안다 : 비누 씨 말씀도 들어 볼까요?

 

비누 : 네. 저도 클립 씨 의견에 많이 공감을 하고요. 지금 상태에서는 등단이라는 제도가 너무 단단하게······ 작가라고 불릴 수 있는 길이 등단밖에 없다 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 하나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니까 습작생과 기성 작가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생기고, 그 구도가 자연스럽게 학생과 교수라는 구도로 똑같이 이어지고요. 그런데 그 교수들이 등단제도에서 심사위원을 맡다 보니까 당연히 어떤 권력을 가져가고 그걸 이용하는 사례들이 생기고······ 문단에서 습작생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여러 피해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순수하게 문학을 하겠다고 온 친구들이 다른 이유로 피해를 받을 수 있다 보니까 등단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남숙 : 클립 씨가 등단과 문단에 대해 효율적인 기계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그것과 연관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단의 이미지가 어떤지 궁금해요.

 

클립 : 문학인 것과 문학이 아닌 것을 가르는 어떤 기준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이건 문학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어떤 기준. 그 기준이 사실은 되게 불명확하잖아요. 장르 문학인데도 되게 문학적일 때가 있고······. 장르 문학은 등단제도가 없다 보니까 그들이 문학적인 것을 다루어도 장르 문학을 쓴다는 이유로 문학 내 담론에서는 배제가 되잖아요. 등단한 사람들이 내놓은 결과물이 문학이라는 장을 돌아가게 만들고요. 그런 면에서 등단으로 신인들을 뽑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재생산을 한다는 점에서 효율적이지 변동시키기에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다 : 두 분 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에 투고해 보신 적이 있나요?

 

클립, 비누 : 네.

 

안다 : 저의 경우에는 등단을 준비할 때 신춘문예보다 문예지를 선호하는 편이었어요. 두 분은 등단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했을 때 선호하는 기준이 있나요? 이번엔 비누 씨부터 들어 볼까요?

 

비누 : 음······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전반적인 인상으로는 문예지 쪽이 정형화 되어 있지 않다는 인식이 조금은 더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변에도 문예지를 선호하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아요.

 

클립 : 저도 문예지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너무 길거나 낯선 느낌의 시는 신춘문예보다 문예지에 투고하라는 평도 듣거든요. 친구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그게 맞는지 아닌지 몰라도 문예지 쪽이 덜 정형화 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 것 같아요.

 

남숙 : 등단을 준비할 때 '나는 잘 쓴 거 같은데 왜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잖아요. 어떤 경우에는 당선작을 보고 납득하기 힘든 경우도 많고요.

 

클립 : 저는 등단으로 뽑히는 작품이 가끔 정말 이상한 작품도 뽑지만, 평균적으로 잘 쓴 작품들을 뽑잖아요. 등단제도는 생각만큼 호락호락하게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물론 등단을 악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등단으로 뽑히는 분들은 평균적으로 잘 쓴다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을 보면 취향 차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떤 작품을 보면 '이게 왜 뽑혔지'라는 생각까지 들거든요. 신춘문예의 경우에는 보통 한 편이 당선되니까, 그걸 보고 납득이 안 되면 '다른 투고작들이 좋았나' 하는 생각도 하고요.

 

남숙 : 최근 당선작 중에 '이게 왜 뽑혔지' 했던 시가 있나요? (일동 웃음)

 

클립 : 당사자가 너무······ 상처 받지 않을까요? (웃음)

 

남숙 : 비누 씨는 어떠세요?

 

비누 : 저요? 저는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웃음)

 

안다 : 되게 좋은 마인드라고 생각해요. 앞에서 클립 씨가 취향 차이를 언급하셨는데, 제가 어느 대담에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문학이 자유롭다는 말을 많이들 하시잖아요. 그런데 제가 습작할 때를 생각하면 '문학은 이래서 안 되고, 이건 시가 아니야'라고 하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그럼 문학은 자유롭지 않은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또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등단 여부를 떠나서 '시를 쓰는 사람은 모두 시인이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을 시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어떤 경우에는 등단을 했더라도 성과를 내놓아야 시인으로 인정하기도 하고요. 누군가에게 내 시가 어떻게 읽힐지, 그리고 취향의 차이를 어떻게 인정해야 할지 고민을 하는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각자 자신의 오브제를 가져온 클립 씨와 비누 씨

각자 자신의 오브제를 가져온 클립 씨와 비누 씨


 

 

독립 문예지와 시집 투고

 

안다 : 비누 씨는 독립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독립 문예지에 투고하는 분들도 보면 투고했다가 떨어지는 분들이 막 분노를 쏟아내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일동 웃음) 그래서 독립 문예지 투고와 같은 경우에도 등단제도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요즘은 비등단자의 작품을 시집 형태로 투고 받는 곳도 종종 보이잖아요. 두 분은 독립 문예지 투고와 시집 투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클립 :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이 수많은 작품 중에 뽑히는 거잖아요? 독립 문예지에 투고하는 것도 여러 작품 중에서 뽑히는 거고요. 문이 넓어졌을 뿐이지 본질 자체는 같다고 생각해요. 사실 모든 작품을 실을 수는 없고······. 문이 넓어지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데에 긍정적이에요.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추는 것이 등단이라면, 편집자의 취향에 맞추는 것이 작품 투고라는 점에서는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걸 또 어떻게 고쳐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이라는 소위 'SNS 시'를 쓰는 사람이 있었잖아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저는 그 사람이 되게 잘 쓴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하는 건 재기 넘치는 짧은 글인데, 시인 중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없다고 생각해요. ○○○의 영역이니까요. 그걸 시로 볼 수 있느냐, 하면 저는 시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 시를 투고하면 통과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 물으면 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남숙 : 결국에는 문학이나 문단 자체가 테두리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테두리 안으로 입장할 수 있는 문이 넓어진다 해도,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거죠. 예를 들면 아까 말씀하신 ○○○의 시가 시냐 아니냐의 문제는 사실 문단이라는 테두리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비누 : 저는 등단제도나 그 외 투고와 지면에 실리기까지의 방식들이 원리 자체는 어쩔 수 없이 비슷하고, 그것에 한계도 있다고 생각하긴 해요. 그런데 이건 노력이잖아요.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없을까' 하는 궁리들, 안간힘을 쓰는 그런 게 더 많이 필요하고······ 문학 안에서 조금 더 나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자세는 호의적으로 응원을 하고 있거든요. 이번에 노-북이라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이 프로젝트는 익명으로 시를 투고 받아서 전시를 해요. 그다음에 전시 공간에서 사람들이 읽고 마음에 드는 시를 가져가면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시집을 만들어주는 프로젝트예요. 사람들은 자신이 고른 시들이 시집으로 묶이면서 작가가 누구인지 알게 되거든요.

 

클립 : 그러면 여러 사람들의 시로 묶이는 거예요?

 

비누 : 네. 저도 다녀왔는데······. 그 기획이 되게 신선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식으로 노력하는 방법들이 좋아요. 이름에 기대어 읽는다거나 브랜드를 붙이게 되는 상황을 저해해 보자, 흩뜨려 보자, 하는 노력들이 중요한 것 같아요.

 

클립 : 안다 씨가 아까 말한 거랑 이어서 경험적인 걸 말하자면, 취향 차이에 대해 말했잖아요. 저는 투고하면서 좌절을 많이 겪었던 것 같아요. '이런 건 시가 아니지' 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내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들을 들으니까요. 나중에 돌아보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시'라는 것에 나를 구겨 넣고 있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경험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졌거든요. 내가 줏대가 없어서 그런가. (웃음)

 

안다 : 환경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합평도 그룹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다르잖아요. 어떤 데에서는 눈에 독을 품고 뜯는 경우도 있고요. 정말 많은 비난을 받다 보면 사람이 위축될 수밖에 없죠. 말씀에 공감하는 게 하나의 집단에서 말하는 '시'에 나를 구겨 넣는 듯한······ 그게 되게 폭력적이죠. 넓게 보자면 소위 '등단작 스타일'이라거나 '어디어디 스타일'에 맞춰 쓰는 경우도 있고요. 저 역시 '신춘문예는 이런 느낌으로 써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쓴 적이 있었거든요.

 

클립 : 심사하시는 분들은 그런 게 없다고도 하는데······.

 

안다 : 심사위원이 자주 안 바뀌잖아요. 그분들도 분명 취향이 존재하는데, 그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신의 취향을 뽑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분들이 자기 취향만 뽑으니까 그게 '어디어디 스타일'로 굳어지는 것 같아요. 사실 '어디어디 스타일'이 아니라 심사위원의 스타일인 것 같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투고자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 있는 면이라고 생각해요.

 

남숙 : 투고를 하면서 좌절을 많이 겪으셨다고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대담을 준비하면서 신인상 시 부문 심사평을 찾아봤거든요. '이번 심사는 시시했다'라는 뉘앙스의 심사평도 보였고요. 그런 태도도 투고자 입장에선 상처가 될 수가 있으니까요.

 

클립 : 습작생 입장에서 쓸 수 있는 시가 있고, 습작생이 쓸 수 없는 시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시는 그 시를 습작생이 썼기 때문에 용납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번에 ○○○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보면서 시에 많은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미지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읽으면 좋잖아요. 하지만 그런 시를 습작생이 투고를 해서 냈다면 제 생각에는······. (웃음)

 

안다 : 등단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시를 써야 한다'라는 건 느낌보다는 쓰면 안 되는 시가 있다는 느낌이 강한 것 같아요. 제가 ○○○ 시인을 되게 좋아하는데, 제가 등단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을 때 ○○○ 시인의 시처럼 쓰면 안 될 것 같거든요. 발표는 할 수 있는데······ 등단작으로는 어려울 거 같아요. 너무 낯설게 쓰면 안 되는 느낌도 있고요. 너무 낯설면 신인으로 뽑기에 신뢰가 안 갈 수도 있고······.

 

클립 : 아, 그리고 저는 제가 언급한 ○○○ 시인을 되게 좋아한다는 말을······. (일동 웃음)

 

안다 : 익명 처리할 거니까 괜찮아요.

 

남숙 : 심사평에서 '이 사람의 세계가 보였다' 이런 말도 하잖아요. 그런데 투고하는 정도로 그걸 보여주기에 너무 지면이 부족하지 않나요? 마찬가지로 등단한 사람도 사실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지면도 적잖아요? 나 자신을 한 번에 보여주기에는 부족해요. 물리적으로 부족한 면이 너무 많아요. 이건 등단 여부를 떠나서 보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글을 계속해서 쓴다는 것

 

남숙 : 등단할 때 힘들었던 경험에 대해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더불어서 등단을 하고 나면 앞으로 글을 쓸 때의 어려움이 어떻게 예상되는지에 대해서도 말해 주면 좋고요.

 

클립 : 제가 아껴 둔 시가 있었어요. 스물세 살 때 그 시를 쓰면서 스스로 알았어요. 앞으로 이런 시를 못 쓸 것 같다고. 그 시는 한 번도 투고 안 했어요. 투고하는 게 그 시에 미안한 감정도 들고······. 그 시를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등단하려는 마음도 있었거든요. 잘 썼다기보다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시예요. 대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니까 좌절감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졸업할 때 그 시를 표제시로 해서 투고를 했어요. 소식은 없었어요. 그때 그 시한테 되게 미안한 감정도 들고······. 올해 들어서 안 건데 그 시가 최종심에 들었었더라고요. 심사평을 보니까 표제시를 제외한 시들은 말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마음이 아팠어요. 그 시를 같이 낸 것도 미안한데, 내가 부족해서 그 시가 떨어진 거니까······.

 

남숙 : 그럼 그 시를 투고할 때가 몇 살이었어요?

 

클립 : 스물여섯 살에 투고했었어요.

 

남숙 : 와······ 마음 아프다. 3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거네요.

 

안다 : 비누 씨 얘기도 들어 볼까요.

 

비누 : 저는 막······ 엄청 좌절감 느끼고 그런 적은 없는데······. 저는 만약 등단을 하고 나면 수상 소감을 좀 다르게 쓰고 싶었거든요. 남들이 쓰는 방식이 너무 싫은 거예요. 대개 선생님들이나 심사위원 선생님들 감사하다는 그런 거요. 그것도 이제는 매뉴얼화가 되어 있잖아요. 그리고 내 글쓰기를 심사위원이 구원해 줬다는 그런 내용이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당선자들이 그렇게 쓰는 것도 '감사하다고 써야 앞으로 평탄하겠지?'라는 일종의 눈치가 보여서잖아요. 그래서 이해하긴 하지만, 매뉴얼화 되는 수상 소감이나 굳어져 가는 제도에 대한 불만 같은 걸 멋있게, 고착화되어 있는 수상 소감 틀에서 벗어나는 글로 적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안 되니까······ (웃음) 언젠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숙 : 비누 씨가 수상 소감을 어떻게 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수상 소감으로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라는 걸 알게 될 날이 오면 좋겠어요.

 

안다 : 만약 이 대담을 기억하는 분이 그 수상 소감을 읽으면 '아, 이 사람이 비누 씨구나'. (일동 웃음)

 

클립 : 저는 비누 씨한테 궁금한 게 있어요. 비등단을 자처하는 것이 가시밭길이고 힘든 일이잖아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지' 싶더라고요.

 

비누 : 저도 등단을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고, 당연히 등단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시기가 있었어요. 그 시기에 저는······ 계속 기다렸어요. 누가 내 시를 봐주고, 알아봐 주고······. 등단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그렇잖아요? 저도 그러고 있다가 등단에 대한 혼란이 오는 와중에 독립 문예지에 발표를 하게 되고, 친구들끼리 함께 시집을 묶어 보니까 기다리는 느낌이 싹 사라지더라고요. '아, 이제는 내가 쓰기만 하면 되는구나',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그냥 세상에 보여주면 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기다리는 느낌과 압박이 사라지니까 오히려 작품에 집중할 수 있고······ 그게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사실 가장 힘든 건 돈인 거 같아요. 저도 정말 가끔가다 신인상 투고를 하는 이유가 보통 상금이 500만 원이잖아요. 독립 문예지에 발표하고 받을 수 있는 고료와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등단을 한다고 해서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는 건 아니란 사실도 알지만 아무래도 비등단자의 경우 그것보다 더욱 열악할 수밖에 없어서 고민이 될 때도 있어요. 독립 문예지에 투고해서 발표하다 보니까 독립 문예지에서 청탁도 받았었어요. 청탁은 내가 뭘 써도 내주겠다는 뜻이잖아요. 청탁을 처음 받으니까 이제 내가 쓰레기 같은 걸 써도 지면에 실린다는 게······. (웃음) 등단자였으면 등단이라는 걸로 증명을 한 건데, 내가 비등단자인 상태로 발표를 하게 되면 그 발표작으로만 증명을 해야 하니까 더 노력하려 해요. 그래서 등단을 하게 되면 좀 더 안일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게 되고요.

 

안다 : 되게 멋진 말이네요. 비등단자가 아니라면 생각해 볼 수 없는 부분인 거 같아요. 생각해 보니까 미등단자는 기다리는 입장이잖아요. 비누 씨는 쓰레기 같은 걸 내도 괜찮겠다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사실 내가 쓰고 싶은 걸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남숙 : 작품이라는 건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하고, 그러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잖아요. 내가 쓰고 싶은 걸 정말 마음대로 쓰는 게 힘든 것 같아요. 객관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로 마음대로 썼다가 이후에 찾는 사람이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안다 : 제가 최근에 쓰고 싶은 시들을 마음대로 썼거든요. 그런데 청탁이 줄었어요. (웃음)

 

남숙 : 안 오진 않네? (웃음)

 

안다 : 안 오지는 않았어요. 우린 조금 더 용기를 내도 될 것 같아요.

 

남숙 : 저는 소설을 쓰잖아요. 자기가 쓰고 싶은 걸 썼다가 실패했을 때 시와 소설의 입장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소설은 지면이 없다 보니까 기회가 너무 적어요. 한 번 실패를 하게 되면 사라질 수도 있고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어지거든요. 그래서 쓰고 싶은 걸 쓴다는 느낌보다는 기존에 보여줬던 것을 꾸준히 보여주는 게 중요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어요.

 

안다 : 김남숙 소설가 말대로 시는 조금 여유가 있는 것 같아요. 지면이 많고, 신인이면 주목을 해주니까 다른 지면에서 열심히 하면 되는데······. 소설은 지면이 부족하다 보니까 한 번 삐끗하면 그 사람에 대한 기회가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해요.

 

남숙 : 생각해 보면 1년에 등단한 시인과 소설가가 엄청 많거든요. 그런데 지면에서 볼 수 있는 건 이미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요. 작가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자생력을 가져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그렇게 되기 힘들 때도 많고요. 이런 부분에서 독립 문예지가 긍정적인 방향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와 같은 독립 문예지는 비등단자뿐만 아니라 등단자에게도 지면을 준다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비누 : 섞였으면 좋겠어요. 대형 출판사에서도 독립 출판물을 보고, 작품이 좋으면 청탁을 한다거나 지원을 한다거나······ 기성 작가들도 독립 출판물 모임이나 시도에 동참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뒤섞여 가면서 개선되었으면 좋겠어요. 등단자와 비등단자가 극명하게 나뉘어 있는 상태로는 이런 문제들을 해소해 나가는 데 무리가 있을 것 같아요.

 

클립 : 메이저 문예지가 등단제를 투고제로 바꾼다고 해도 유명한 작가들 위주로 잡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안다 : 슬슬 마무리를 지을까요. 향후 계획을 들려주세요.

 

클립 : 저는 시를 계속 쓸 거고요. 올해 들어서 눈치를 안 보기로 했어요. 투고해서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눈치를 보니까 갈피를 못 잡고 시가 망가지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나중에 등단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나중에도 안 되면 죽어야죠, 뭐. (웃음)

 

안다 : 죽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웃음) 비누 씨 향후 계획도 들어 볼까요?

 

비누 : 계획은 없고요. 그냥······.

 

남숙 : 놀고 싶습니다? (웃음)

 

비누 : 네. (웃음) 놀고 싶습니다.

 

 

 

 

 

 

 

 

 

 

◆ 대담 참여자 소개

 

양안다 (시인)

1992년 충남 천안 출생.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창작동인 '뿔'로 활동 중. 시집 『작은 미래의 책』,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현재 《문장 웹진》 청년 작가 간사.

 

김남숙 (소설가)

2015년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현재 《문장 웹진》 청년 작가 간사.

 

비누 (비등단자)

비어 있는 친구 집에 가듯이 시를 씁니다. 궁리를 합니다.

 

클립 (미등단자)

크기만을 가졌으나 당신들에 의해 방향을 가진다
나는 조금 휘어 있지만 감사하다
그렇게 되돌아오려는 힘으로 붙잡는 것이 있다

 

 

   《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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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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