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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대담 4회 : 추천 ― <젊은 작가들이 사랑하는 선배들의 시 ‧ 소설> 특집

  • 작성일 2019-02-01
  • 조회수 3,149

[청년 작가 간사들의 익명대담]

 

 

익명대담 4회 : 추천
― <젊은 작가들이 사랑하는 선배들의 시 ‧ 소설> 특집

 

 

ㅇ 기획 : 《문장 웹진》 청년 작가 간사(김남숙 소설가, 양안다 시인)

 

 

 


 

 

 

    김남숙과 양안다는 두 달에 걸쳐 익명대담을 세 차례 진행했다. 이번에는 좀 다른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자 익명대담 대신 젊은 작가가 사랑하는 선배 작가의 작품집을 선정하는 것으로 '익명추천'을 진행했다. 《문장 웹진》 12월호에는 '2018 올해의 시 ‧ 소설'이라는 기획이 있었는데, 기획에 선정된 작품들은 주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반대로 이번 익명추천은 젊은 작가의 입장에서 진행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작품집을 선정하는 범주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나왔지만, 김남숙과 양안다는 '1999년 이전에 발간된 작품집'을 기준으로 삼아 설문을 진행했다.
    1999년은 2019년 현재로부터 20년 전이며,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었으며, 노스트라다무스가 세계멸망을 예언한 해이자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음모론으로 공포감이 조성된 해, 그리고 대한민국 전역에 인터넷이 보급된 해였다.
    그러나 1999년은 그저 1999년이다. 김남숙과 양안다는 현시대의 독자들에게 익숙한 작품집을 위주로 설문하는 것보다 1999년 이전에 발간된 작품집을 설문하여 소개하는 편이 더 유의미하다 생각했다.

 

    고맙게도 현재 문단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열 명의 시인과 열 명의 소설가가 익명추천에 응해 주었다. 저마다의 다양한 추천 이유와 방식 그리고 귀여운 오브제로 익명추천에 흔쾌히 참여한 작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젊은 작가가 사랑하는 선배들의 시집>

 

 

 

◆ 시인 '가방'의 추천 — 『아무도 없어요』, 박서원, 열음사, 1990

 

 

1. 시집 선정 이유
박서원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아무도 없어요』를 좋아합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단숨에 읽어버린 시집입니다.
강렬하면서 슬퍼요. 그래서 오래 남고요.

 

2. 시집에서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엄마, 애비 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3. 선배 시인에게 하고 싶은 말
왜 이 세상의 이야기는 전부 끝내야만 하는지.

 

 

◆ 시인 '돼지인형'의 추천 —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이수명, 세계사, 1998

 

 

1. 시집 선정 이유
일전에, 친구의 추천 때문에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을 읽게 되었다. 친구는 말했다. "내가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는데, 굉장히 흥미로워. 터무니없는 곳에 '빨강'을 마구 끼워 넣거든." 재미있겠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친구가 한 말은 꽤 의미심장하다. '빨강'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에 '빨강'을 넣는 것. '빨강'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리지 않는 곳에 '빨강'을 붙여 보는 용기. 그것은 시의 본질이기도 하다. '빨강'을 황당한 곳에 붙여 보는 흥미로운 부딪힘을 좋아할 수 있게 된 건, 이수명 시인의 시집들 덕분이기도 하다. 시를 좋아하게 되었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니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가 놓여 있다.

 

2. 시집에서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그가 비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비옷을 입은 무리들이 그를 겁냈다"
「신문 배달원」 중

 

3. 선배 시인에게 하고 싶은 말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태국에 있습니다. 숙소에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호텔 냉장고는 이상한 놈이에요. 호텔 키를 제거하면 방의 전기가 모두 나가는데, 냉장고만 홀로 빛나요. 스탠드도 꺼지고 화장실 불도 꺼지는데 말이에요. 냉장고의 물과 맥주가 시원해요. 전기 없이 나는 빛은 어디서 오는 거지요?

 

 

◆ 시인 '하차벨'의 추천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1980

 

 

1. 시집 선정 이유
질문을 받았을 때 번뜩 떠오른 시집은 김기택 시인의 『소』였다. 왜냐하면 이 시집을 읽고 있었을 때 울던 내 모습이 선연히 떠오르는데, 보통은 그런 일이 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집은 2005년에 나왔으므로 다음으로 떠올린 시집은 이성복 시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였다. 대학생 때 나는 자주 이 시집을 여러 공간에 갖고 다니면서 읽었다. 그 리듬이 숨 막히면서도 황홀했다고 적고 싶어졌다.

 

2. 시집에서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세월에 대하여」

 

 

◆ 시인 '풍경'의 추천 — 『죽지 않는 도시』, 이형기, 고려원, 1994

 

 

    1. 시집 선정 이유 죽고 싶지만 죽어지지 않았다. 지나가는 이마다 어떻게 미치지 않고 살아 있냐고 물었다. 도시의 가학성과 부조리는 나라는 작은 세계 안에 너무나 득실거리던, 익숙한 잔인성이었다. 이 시는 나에게 너무 잔인했고 나는 이 시가 매일 미웠다. 살아 있는 게 너무 비참하고 치욕스러웠던, 분노와 혐오의 시기에, 나는 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했으므로 나는 이 시가 송곳처럼 박혀 매일 불편했다.

 

    밖에서인지 안에서인지, 가혹함은 그것조차 분간치 못하게 했고 매일 죽기를 간절히 바랐음에도 매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는 나의 고군분투를 볼 때마다 경멸스러웠다. 프랙탈로 보면 나는 나라는 도시 안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입자에 불과할 테지, 형체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어쨌거나 살아야겠지, 몸은 점점 성장하고 세계는 나를 움직이게 만들고 나는 그런 나를 죽이지 못하지, 죽이면서도 난 살아 있겠지, 내가 이 몸을 빌려, 이 세계를 잠시 왔다가 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가 스스로 마칠 수 없는 것이겠지, 제발 나를 죽여 줘.

 

    그렇게 20대를 보냈고, 나는 죽지 않는 도시에서 죽은 것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죽음이 선택이 될 때 우리는 오히려 살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래서, 나의 도시는 죽지 않아야 한다. 언제든지 죽어야 하지만 언제든지 되살아나야 한다. 반드시.

 

2. 시집에서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죽지 않는 도시」 이형기

 

이 도시의 시민들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어제 분명히 죽었는데도
오늘은 또 거뜬히 살아나서
조간을 펼쳐든 스트랄드브라그씨의 아침 식탁
그것은 위대한 생명공학의 승리
인공합성의 디엔에이 주사 한 대가
시민들의 영생불사를 확실하게 보장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머리가 깨어진 채
오토바이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는 젊은 폭주족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서
수술한 배를 그냥 덮어버린 노인이
내기 장기를 두다가 싸운다
아무도 죽지 않기 때문에
장사를 망치고 죽을 지경인 장의사 주인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 파리를 날린다
1년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는 계산은
전설이 되어버린 도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누구도 제 나이를 아는 사람은 없다
젊어도 늙고
늙어도 늙고
태어날 때부터 이미 폭삭 늙어서
온통 노욕과 고집불통만 칡넝쿨처럼 칭칭
무성하게 뻗어난 도시
실연한 백발의 노처녀가 드디어 목을 맨다
그러나 결코 죽을 수는 없는
차가운 디엔에이의 위력
스스로 개발한 첨단의 생명공학이
죽음에의 길마저 차단해 버린 문명의 막바지에서
시민들의 소망은 하나밖에 없다
아 죽고 싶다

 

3. 선배 시인에게 하고 싶은 말
당신의 자아와 세계의 화해, 그 회귀 앞에 무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숱한 허무 속에서 문명을 비판하고 스스로 소멸하고 또다시 생성하는 당신의 시선에 경의를 표합니다. 모순은 언제나 모를 때 알길 바라고 알 때 모르길 바라는 불편한 것이겠지만 덜어내기보다 부스러지면서 뚜벅뚜벅 걸어가고자 합니다. 야성과 순수를 쥐고, 단지 따뜻한 마음으로. 응원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 시인 '해녀와 소라'의 추천 — 『북치는 소년』, 김종삼, 민음사, 1979

 

 

1. 시집 선정 이유
누구라도 읽었으면 좋겠다. 김종삼은 아름답다.

 

2. 시집에서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물통」

 

3. 선배 시인에게 하고 싶은 말
거기서는 무엇을 듣고 계시나요.

 

 

◆ 시인 '팥빙수'의 추천 — 『폭력과 광기의 나날』, 이승하, 세계사, 1993

 

 

1. 시집 선정 이유
「10대」라는 시의 책 끝을 접어 둔 것은 내가 십대 때의 일. 그 시의 첫 구절은 "눅눅한 지하실 방에서 테레비를 보고 있었지", 그즈음 나는 친구들과 학교 뒤편에서,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어두컴컴한 카페에서 노닥거렸다. 모두 잘 될 거라고 부풀어 있었는데, 불행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왔고 피할 수 없었다.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니 나이가 들었다. 우리는 얼마나 변했을까, 변하지 않았을까.

 

2. 시집에서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10대」. "벌레처럼 누이는 비명도 못 지르고/ 벌레처럼 내도 죽은 시늉을 했었네/ 화가 풀릴 때까지 매를 거두지 않는 아부지/ 영문도 모른 채 맞을 때는 전쟁이라도 나기를 빌었었지/ <아부지를 용서하는 신이 있다면/ 내는 그 신을 용서해야 될꺼까>"

 

3. 선배 시인에게 하고 싶은 말
2000년 6월 10일에 발행한 4쇄본 면지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에게
2011. 11. 25.
이승하 선생이.
○○아, 꼭 시단에서 만나자.

 

◆ 시인 '장갑'의 추천

    — 『서울에서 보낸 3주일』, 장정일, 청하, 1988
    — 『무인도를 위하여』, 신대철, 문학과지성사, 1977
    — 『10년 동안의 빈 의자』, 송찬호, 문학과지성사, 1994
    —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박상순, 세계사, 1996
    —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이수명, 세계사, 1998

 

 

◎『서울에서 보낸 3주일』, 장정일, 청하(1988)

 

    한 달에 두세 번 아버지를 찾아뵙는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으레 그렇듯, 일 이야기 빼고는 분분한 가족 이야기를 한다. 그마저 바닥나면 각각 침대에 누워서 책상에 팔을 괴고 앉아서 TV를 본다. 아버지는 정처 없이 채널을 돌린다. 정처가 없다는 말.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이며 그 반을 가르는 경계는 그 정처 없음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 정도의 차이다.
    화면은 <UFC중계>에 멈춘다. 아는 파이터냐? 아뇨. 헌트랑 슐츠는 요새 안 보이네. 넌 누구 좋아해? 음, 바다 하리? 누구더라, 후. 어휴, 담배 좀 줄이세요. 짜식이, 잔소리 마. 40년 가까이 피웠는데 아무 이상 없다. 오히려 끊으면 아프지. 어련하시겠어요. 다음은 <CGV>. 이 채널은 로봇대전만 주구장창 틀어재끼네. 트랜스포머잖아요. 아버지 옛날에 비디오로 녹화까지 해두시고는. 그걸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거냐? 예. 그래? 음. 아버지는 뭔 재미로 살아요? 자식 키우는 재미는 진즉 졸업하셨고. 누가 졸업시켜 줬냐. 그러게요.

 

※ 추천 시 :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새타령」, 「실비아 플라스에게 빠진 여자」

 

 

◎『무인도를 위하여』, 신대철, 문학과지성사(1977)

 

    아버지와 나의 종착 채널은 언제나 <내셔널지오그래픽> 아니면 <나는 자연인이다> 등의 다큐 장르다. 장르에 따라 침묵의 질감이 달라진다. 어느새 침묵이 부드럽다. 늦저녁의 피로감이 모든 경계를 유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동소리. 아버지는 코를 골며 잠들었다. 불을 끄고 TV 볼륨을 낮춘다. 고동소리. 나는 바닥에 팔을 괴고 누워 아버지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가로등 빛이 블라인드 사이로 비스듬하게 떨어져 내려 연기에 얼룩무늬를 달아 준다. 고동소리.
    '피가 차가워진다. 나는 잠든 아버지의 꿈속으로 아버지를 들여놓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나를 단 한 번 연민이게 하는 "나를 새벽으로 알고 떠나는 사람은 누굴까요" 우울하게 펴오르는 이 새벽말도 꿈속에 퍼렇게 비치어 넣고, 나는 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춥다, 누구나 살아서 살지 않는 시간, 도시의 별이란 별은 지하로 전부 흐르고 있는 시간*

 

※ 추천 시 : 「아무도 살지 않는 땅2」, 「강물이 될 때까지」, 「다시 무인도를 위하여」(위에서 변주)*

 

 

◎『10년 동안의 빈 의자』, 송찬호, 문학과지성사(1994)

 

    행갈이 많이 했으면 다 詩겠거니, 문제의 정답은 자연예찬 아니면 현실에 대한 저항과 아픔이겠거니 생각하던 초등학교 시절. 이 글, 이 시는 좀 다르다고 이상하다고 생각한 시를 읽었던 기억.
    그리고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성적 맞춰 떠밀려간 대학 시절. 그마저도 이과는 싫다고 바득바득 우겨서 자율전공학부. 당시 필수 교양 과목이었던 작문 시간에 과제 때문에 얇은 책을 교보문고를 기웃거렸다. 시집을 펼쳤을 때, 어린 시절 그 생경한 거리감이 어떤 순진한 기쁨으로 물들던 기억이 있는 시집이다.

 

※ 추천 시 : 「꽃」, 「구두」 그리고 「얼음의 문장」 연작.

 

 

◎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박상순, 세계사(1996),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이수명, 세계사(1998)

 

    나는 가난하지만 멋진 친구들이 많다(양 손가락 다 접고 엄지발가락 꼼지락거릴 정도면 많은 거 아닌가). 이제는 멋지지만 가난하다고 해야 하나. 친구들은 관심 분야가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그러니까 삐죽삐죽 다르다. 그 분야에서 나름의 멋진 장소들을 데려갈 정도의 수준은 된다. 그런데 나는 뭐 하나 내세울 장소가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장소에 가서 시집을 추천해 달라는, 지난하지만 멋진 요청이 있다. 아주 가끔이지만.
    야, 너무 많아서 어려워. 기준을 딱 말해. 음, 그럼 고전. 그래, 클래식. 한국 현대시의 고전이라는 게 있을 거 아냐. 그럼 우선 김춘수, 이상, 김수영, 김구용······. 야야, 너무 거슬러 갔잖아. 이육사, 한용운, 윤동주, 백석도 말하지 왜. 내가 뭘? 얘는 한자어 못 읽어. 나도 잘 못 읽어. 검색하면 다 나와! 그냥 딱 느낌 오게, 어? 알아먹을 수는 있는데 알수록 알아먹을 수 없는 거 있잖아 왜. 그런 걸로 추천해 줘. 음, 뭔 헛소린지 모르겠지만, 우선 정현종, 오규원, 허수경, 이성복, 김혜순, 황지우, 최승호, 최승자, 기형도······. 아, 그냥 네가 최근에 읽었는데 좋았던 시집들 말해 봐. 클래식인데 너무 클래시컬 아닌, 그런 거 있잖아 왜! 아, 글쎄 그래도 많다니까!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당시 문학과지성R시리즈 복간 기획 소식을 접하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시집들이다.
    쓰다 보니 추천하고 싶은 시집이 너무 많아서 넘쳤다. 미안합니다.

 

 

◎ 선배 시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 :

 

시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시들 때문에 살아서
살아서 죽고 싶어졌어요.

 

 

 

◆ 시인 '꽃개'의 추천 — 『즐거운 일기(日記)』, 최승자, 문학과지성사, 1984

 

 

1. 꽃개 say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부분

 

2. 선정 이유
너를 위해 죽는다는 말은 나를 위해 죽겠다는 말이다. 자폭으로 멋지게 끝장내는 사랑이 나는 늘 후지다고 생각했다. 살아서, 사랑이 소멸하는 그날까지도 살아서, 지키는 것. "다만 무참히 꺾여지"더라도 사랑의 종말을 지켜보는 것. 최승자를 오래 붙들고 놓지 못했던 날들이 가슴속에 아직 있다.

 

3. 선배 시인에게 하고 싶은 말
당신이 아프거나 아프지 않기 위해 그렸던 많은 시들이 이름 없는 아픔들의 이름이 되기도 했을 겁니다.

 

 

◆ 시인 '수국'의 추천 — 『낡은 집』, 이용악, 미래사, 1991

 

 

1. 시집 선정 이유
두 가지가 분명하다. 사르르 읽힌다는 것과 사르르 녹은 액체가 무겁다는 것.

 

2. 시집에서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시 「너는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 속
'너는 세상 누구의 곁에도 있지 않다'라는 구절

 

3. 선배 시인에게 한 마디 세상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습니다. 동그라미, 네모, 세모. 이용악 시인의 시를 읽으면 세상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 시인 '손등'의 추천 — 『6은 나무 7은 돌고래』, 박상순, 민음사, 1993

 

 

1. 시집 선정 이유

 

아름다운

 

 

하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부끄럽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부분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들이 앞서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선배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그러했다. 마치 네가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을 이야기해 봐 같은. 나를 괴롭고 어렵게 만드는 질문 같았다.

 

고민하다 보면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선배 시인이 있어? 부터 내가 사랑하지 않는 선배 시인이 있어? 까지 시간을 두면 계속해서 바뀌는 생각들이 이어졌다. 시를 쓰는 나를 내 스스로가 사랑하는 만큼, 시를 쓰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은 미완된 생각이다.

 

시를 쓸 때마다 느끼는 막연한 기운이 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성질의 것은 아니니 마음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외려 밖에서 나를 조여 오는 것에 가까우니 기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꼭 시가 아니더라도 어떤 글을 쓰게 되면 나는 꼭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 든다. 동시에 아름답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비단 완성된 글뿐만이 아니라 그 상황까지도 아름다웠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이 또한 아름다운 것에 대해 내가 잘 알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다.

 

 

『6은 나무 7은 돌고래』를 다시 꺼내어 읽는다

 

이 시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많은 형태로 등장한다. 그것은 문장을 벗어나면서 충돌하고,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문장에서 문장 밖으로, 시에서 시 밖으로, 다시 시 밖에서 시 안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행복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빚어내는 어떤 슬픔들을 나는 보았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읽게 되었다. 겨울 밤 눈이 내리거나, 해변에서 해가 떠오르거나, 물이 가득한 계곡에 나무들이 비추는 것을 바라보는 같은. 그런 마음.

 

마찬가지로 그런 마음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시는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 부분적으로 맞을 수 있지만 나를 설명하는 것과는 조금의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 시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6은 나무 7은 돌고래』는 나를 먼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누군가 등에 손을 대어놓으면, 천천히 온기가 퍼진다. 그 온기를 잊지 않으려 했다.

 

책상을 반으로 나눈 뒤, 그 위에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을 구분해 올려놓는다고 가정할 때 그것들은 서로 얼마든지 자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고 있다.

 

한밤에 커튼을 젖혀 밖을 바라보면 밤 속에도 한낮이 남아 있는 것같이

 

우리는 어둠에 익숙해져야 한다.

 

 

2. 시집에서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눈 덮인 추억의 의자

 

박상순

 

별 하나가 떨어지고
나는 의자에 앉아 편지를 쓴다
별 떨어진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떨어진 별을 주워
냉동실에 넣을 때
내 귓속으로 흐르던
사람의 소리

 

내가 냉동실 문을 닫고 노크를 하면
똑/똑
냉동실 안에서도 노크를 하고
똑/똑
내 귓속으로 흐르던
비명의 소리

 

얼어붙은 냉장고를 철공소에 버리고
똑/똑/똑·돌아오던
내 추억의 발소리를
눈 덮인 창밖에서 다시 들으며
편지를 쓴다

 

- 6은 나무 7은 돌고래

 

 

3. 선배 시인에게 하고 싶은 말
몰래 많이 배웠습니다.

 

 

 

<젊은 작가가 사랑하는 선배들의 소설>

 

 

 

◆ 소설가 '로봇병'의 추천 — 『검은 이야기 사슬』, 정영문, 문학과지성사, 1998

 

 

1. 선정이유
이 책은 짧은 형식의 소설들을 묶은 책이다. 독특한 이미지로 만들어진 소설적 상황들이 낯선 상상력을 제공한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책들과는 분명하게 다른 지점이 있어 당시 재미있게 읽었다. 한국 문학의 일춘몽 같은 책이다.

 

2.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장의사」

 

3. 선배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 :
작년에 신작을 내셨는데 얼른 다른 신작도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 소설가 '얼음틀'의 추천 — 『미궁에 대한 추측』, 이승우, 문학과지성사, 1994

 

 

1. 책 선정 이유
   고민이 많았습니다. 독서량이 부족하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제가 읽은 작품집들은 2000년대 이후의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새삼 자기반성을 하며 꺼내든 카드는 역시나 이승우 작가입니다. 개인의 존재론적 비극을 강박적인 윤리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세심하고 끈질긴 문장으로써 그려내는 탁월한 소설가입니다. 비교적 초기의 작품 군에서는 작가 본인의 자의식을 조심스러운 듯 대담하게 전면에 내세웠는데요, 대표작 중 하나인 장편소설 『생의 이면』처럼 종교적 테마를 작품 안에 녹여낸 스타일이 특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작품집 『미궁에 대한 추측』은 개인에 관한 천착이라는 기존의 주제의식에서 벗어나 군상과 사회, 시스템을 통찰하고 신화와 우화로써 그려내는 쪽으로 옮겨가는 지점에 위치합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작가가 열렬히 쥐고 있던 무엇을 손에서 놓고 새로운 대상에게 시선을 옮기는 찰나가 생생하게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상상력이란, 이를테면 다이달로스가 그의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만들어 달고 미궁을 빠져나왔다고 하는 그 밀랍의 날개와 같은 것이다. 이 책이 부디 독자들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 주기를. 그리하여 미궁과 같은 이 세상을 빠져나가 시실리의 풍요롭고 자유로운 하늘로 날아갈 수 있게 되기를······" (표제작 「미궁에 대한 추측」 중)

 

3. 선배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
   선배, 라고 부르기보다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선생님의 작품은 저의 정전이었고 그로부터 문학으로 인한 개인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팬으로서, 선생님이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소설가 '반지'의 추천 — 『새』, 오정희, 문학과지성사, 1996

 

 

선정 이유 &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아주 먼 옛날의 별빛을 이제야 우리가 보는 것처럼 모든 있었던 것, 지나간 자취는 아주 훗날에라도 아름다운 결과 무늬로,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부드럽고 둥글게 닳아지는 돌들, 지난해의 나뭇잎, 그 위에 애벌레가 기어간 희미한 자국, 꽃 지는 나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그 외로움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바람은 나무에 사무치고 노래는 마음에 사무치는 것이라고.

 

 

◆ 소설가 '햄스'의 추천 — 『내가 사랑한 캔디』, 백민석, 김영사, 1996

 

 

선정 이유 & 유독 좋아하는 작품 구절 & 선배에게 전하는 말
    처음 읽었을 때 너무 좋았기 때문에 다시는 손에 들 수 없는 글이 있어요. 저에게는 백민석 선배님의 「내가 사랑한 캔디」가 그래요. 십 년이 넘도록 여전히 한 번의 다음을 읽지 않았고 그래서 제가 지금부터 드릴 말들은 제 눈과 손가락에 십 년간의 보정처리작업을 거친 결과일지 모른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네요. 기억력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고, 소개를 드리려고 다시 읽을 수는 없었어요. 읽지 않은 십여 년의 시간을 배신하긴 어려웠으니까요. 이해해 주세요. 열심히 보정한 프로필 사진은 소중하잖아요.
    대신 확실한 기억 한 가지를 말씀드릴게요. 이 소설을 쓰신 선배님을 술자리에서 뵈었던 일이죠. 직접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어요. 이 미터쯤 되는 거리에서 바라본 선배님은 같은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계셨어요.
    "나 f(x) 알아!"
    함수였을까요, 가수였을까요? 뒤이은 이야기에 의하면 펄시스터즈와 은방울자매는 훌륭한 그룹이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테이블의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했어요.
    "칫, 그게 어쨌다는 거야?"
    칫, 하는 건 소설 속 '나'가 사랑한 캔디의 말버릇이에요. 캔디는 '나'에 의하면 커다랗고 물기로 촉촉한 눈망울을 가진, 부드럽게 흰 긴 속눈썹의 아이였어요. 섹스가 끝나고서 "남자끼리 이러는 건 이상한 것 같아."라는 말을 들으면 "칫, 그래서 뭐!"라고 말하는 아이이기도 했죠. f(x)가 함수여도 가수여도 상관없었던 아이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야?"라고 말하던 캔디는 "f(x)는 함수야. 모든 x는 반드시 그와 짝을 이루는 y값이 있지."라는 식으로 말하는 아이가 돼요. 그 테이블의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면 또 어땠을까요.
    아이돌 걸그룹 f(x)는 좌충우돌 사고뭉치였던 팀원 한 사람의 탈퇴 이후 그룹의 노선을 바꾸었어요.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던 가사와 비트를 남발하는 대신 본격적으로 일렉트로닉 뮤직 그룹을 표방하기 시작했죠. 4인조가 된 후 첫 앨범이었던 <4 Walls>로 f(x)는 2015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댄스 & 일렉트로닉 앨범 부문 후보에 올랐어요. "아이돌의 한계를 한 걸음 넘어선 영리한 선택이고 성과이다."라는 평가와 함께였죠. 네 개의 벽으로 자신들을 구획한 어느 아이돌 걸그룹의 유년기는 그렇게 끝났어요.
    저의 상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테이블의 대화는 또 다른 선배님의 농담으로 마무리되고 있었죠. "우륵 알아요, 우륵? 가야금으로 활동했었는데?" 우륵은 남자인 데다, 아이돌도 아니잖아요. 저는 웃음이 터져서 더는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어요. 애초에 말을 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말이에요. 잠시 후, 저는 마침내 이렇게 소리 질렀어요. 미안해요. 이건 거짓말이에요. 사실은 소설 속에서 이렇게 소리 질렀던 '나'를 떠올렸어요.
    "캔디가 죽었어요!" "캔디가 죽었단 말이에요, 방금!"
    뮤지션이 되면, 아이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사실 인간은 누구나 죽어요. 누구나 그래요. 좌충우돌 사고뭉치 같은 양자역학적인 시절을 버리고 함수적인 인간이 되죠. 모든 x는 반드시 그와 짝을 이루는 y값이 있다. 남자와도 기꺼이 사랑했던 시절은 사라지는 거예요. 모든 x는 반드시 y에 하나만 대응한다. 이제는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 친구를 만들죠. 그럼 '나'의, 당신의, 우리의, 저의 양자역학적이었던 시절은 어디에 있을까요. 열심히 보정한 프로필 사진의 원본처럼, 휴지통 속 파일 무더기에 섞여 있을까요.
    제가 이 소설을 다시 집어들 수 없었던 건, 어쩌면 저의 그 시절을 다시 만나기가 ······여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에는 무엇이 들어가야 알맞은 걸까요. 저는 모르겠지만, 캔디라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소설이 끝날 즈음의 캔디라면.
    "그게 무엇인지 알 만한 사람이 하나 더 있긴 하지. 내 첫사랑. 하지만 걔 역시,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으려 할걸. 그래. 이제 끝이야." (*)

 

 

◆ 소설가 '한 마리의 낙타를 위해 피리를 연주하는 사람이 새겨진 작은 수첩'의 추천 — 『한없이 낮은 숨결』, 이인성, 문학과지성사, 1999

 

 

1. 선정 이유
이 책의 한가운데에는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이 있다. 일말의 깜박임도, 흔들림도, 빛의 반사도 없이 정면의 읽는 자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새카만 눈. 그 눈은 동시에 쓰는 자 자신을 끈질기게, 거의 혹독하게 응시한다. 그 눈과 한번 마주쳤다면 지금까지 썼던 것처럼 쓸 수 없다. 최소한 지금까지 읽은 것처럼 읽을 수 없다.

 

2.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 사막의 모래알들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모래틈이 있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쓰지 못하다」 중에서)

 

 

◆ 소설가 '사슴'의 추천 —『서 있는 여자』, 박완서, 학원사, 1985

 

 

1. 선정 이유
    박완서 선생님의 캐릭터 중 이 작품에 나오는 연지를 가장 좋아한다. 연지는 약혼남 철민에게 "남녀평등한 결혼"을 약속받고자 하고, 철민은 연지가 그럴 때마다 "무슨 신경성의 일시적인 병쯤으로 생각"하며 "차차 나아질 것"이라 낙관한다. 둘의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은 예정된 일일 텐데, 1982년 《주부생활》에 소설이 연재될 당시 독자들은 '그래도 젊은 부부가 마음 맞춰 잘살게 해달라' 극성스레 요구했다 한다. 지금으로선 1970년대적 페미니스트인 연지나 그녀를 그린 작가의 관점이 다소 보수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여성 문제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이중성을 낱낱이 까발리는 박완서 선생님 특유의 말발이 여전히 통쾌하다. 적잖은 순간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에 조소하게 되기도 한다. 말 돌리는 철민을 보자.

 

2.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앞으로 결혼생활에 있어서 자기와 나는 절대적으로 동등하기, 알았지?"
    "넌 왜 그 소리를 할 때마다 절대적이란,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엄숙한 말을 쓰니?"
    철민이 피곤한 듯 타이르듯 말했다.
    (······)
    "자긴 내 남녀평등론의 열렬한 지지자였잖아? 이제 와 딴소리하면 어떡해?"
    "딴소린? 그 문제는 조만간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피차 노력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해."
    철민은 마치 한 번 체한 적이 있는 음식을 강제로 먹을 때처럼 참담한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 소설가 '향수'의 추천 —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배수아, 고려원, 1993

 

 

1. 선정 이유
한국 소설에 누구보다 먼저 21세기적 인물-화자를 데려온 작품. 배수아는 어째서 20년도 훨씬 이전에 지금을 살았을까? 어쩌면 '지금'도 아닐 미래를 이미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2.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늙고 초라하여져서 먼지투성이 국도에서 사과를 팔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을 뿐이야. 그것도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저녁이 되어 아무도 이 푸른 사과를 사러오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확실하여질 때까지, 내가 영원히 가지 못할 먼 데로 나 있는 길을 바라보면서 손으로 짠 두꺼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아주 어두워질 때까지 그렇게 있을 것 같은."

 

 

◆ 소설가 '시계'의 추천 — 『낯선 시간 속으로』, 이인성, 문학과지성사, 1984

 

 

선정 이유 &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탑승대 옆 벽시계의 커다란 분침이 뚝 일 분을 건너뛰어 네 시 사십 분을 가리킬 때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는 또 뜻 모를 조바심을 느꼈다." 분절된 시간이 존재 또한 점멸케 할 때, 나는 내게 주어진 시련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거듭 읽는다. 쓰고 지우고 번복하고 길항하는 동안에만 지속되는 실존의 서사를. 기다린다. 기어이 한 권의 책이라는 물리적 완결성을 초과해 버리는 지독한 악몽의 문장을.

 

 

◆ 소설가 '말'의 추천 — 『모순』, 양귀자, 살림, 1998

 

 

선정 이유 &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양귀자의 『모순』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생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내가 무얼 쓴다면 이런 걸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엔 그보다 의사나 변호사가 더 되고 싶었다. 마음먹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어차피 안 될 거 꿈이라도 크게 가질걸. 선산에 온천이 터지기를 바라던 짝꿍을 놀렸던 게 괜히 미안해진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그러니까 내가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한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더라. 살다 보니까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실은 진작에 알았던 것들도 매번 새로 알게 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슷하게 『모순』은 두 번 세 번 읽어도 매번 새로 읽는 기분이 든다.

 

 

◆ 소설가 '더 놀고 싶다'의 추천 — 『드래곤라자』, 이영도, 황금가지, 1998

 

 

1. 책 선정 이유
    새 학기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국어책을 펼쳐 소설 지문들을 찾아 읽곤 했다. 지문들은 대개 중략으로 끝났다. 사전에서 중략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며, 중략이라는 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없다는 뜻이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90년대에 도서대여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고, pc통신에서 연재되었던 소설들은 단행본이 되어 꽂혔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략되지 않을 정도로 긴 이야기들을 만났다. 밤을 새우며 읽고 등교 후엔 내내 잠만 잘 정도로 푹 빠져들었고(처음으로 엄마에게 책으로 맞았다.) 나도 그런 이야기들을 따라서 글을 써보았고, 친구들에게 연재분(?)을 전송하기도 했다. (현재는 그 메일 계정이 삭제되어 다행이다. 아. 친구들의 계정도 함께 삭제되지 않았다면 아직 안심할 순 없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 시절에 좋아했던 책들을 다시 읽어 본 적이 있었다. 더 이상 그 이야기들이 재밌지 않아서 슬펐고, 나의 유년을 망치지 않기 위해 다시는 그 시절의 책들을 읽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읽을 때마다 나의 시간과 함께 성장하는 책도 있었다. 이제는 깊은 우울에 빠질 때면 꼭 이 책을 한 번씩 펼쳐본다. 등교해서 잠만 자던 때처럼 밤을 새우며 10권을 읽고 나면, 어느새 우울의 시기는 지나 있다. 나는 그나마 기억할 만한 과거로 잠시 타임슬립 하게 된다.

 

2. 유독 좋아하는 작품이나 구절
    "인간은 단수가 아니다."

 

3. (선정한) 선배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
    앞으로도 저의 과거를 잘 부탁드립니다.

 

 

 

 

 

 

 

 

 

 

 

 

 

 

 

대담 기획, 원고 구성 및 정리 / 김남숙(소설가)

2015년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현재 《문장 웹진》 청년 작가 간사.

 

대담 기획, 원고 구성 및 정리 / 양안다(시인)

1992년 충남 천안 출생.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창작동인 '뿔'로 활동 중. 시집 『작은 미래의 책』,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현재 《문장 웹진》 청년 작가 간사.

 

참여 시인 및 소설가 / 김복희, 문보영, 안태운, 이린아, 이설빈, 이소호, 이원하, 이희형, 최지인, 최현우, 김봉곤, 김효나, 민병훈, 송지현, 임국영, 임현, 우다영, 원재운, 정지향, 천희란. (가나다 순)

 

   《문장웹진 2019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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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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