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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적 소비자에서 문학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독자들의 증가와 그 대응 방안에 대하여

  • 작성일 2020-01-08
  • 조회수 1,699

[특별기고]

 

 

수동적 소비자에서 문학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독자들의 증가와 그 대응 방안에 대하여

 

 

이설야

 

 

 

    최근 몇 년간 문학장에는 '표절(2015)'과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2016) 등 중대한 사건들이 있었다. 이 사건들 이후로 문학장 중심에 있던 대형 출판사나 문단권력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었고, 비평의 위기와 함께 비평의 종말론까지 대두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문단 안팎의 누적된 문제들이 하나씩 표출되었고,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문단권력 재편에 대한 움직임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수동적 소비자에서 문학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독자들이 증가하였고, 작가들은 SNS 환경에 맞게 자유로운 방식과 독립된 형식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표출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발전, 독립 서점과 독립 출판의 성장, 취향이 같은 사람들이 모인 유료 커뮤니티의 등장 등은 새로운 문학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프로슈머로서의 새로운 독자를 잉태시켰다. 이와 관련한 몇 가지 연관성들에 주목하면서, 수동적 소비자에서 문학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독자들의 증가와 그 대응 방안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독립 잡지와 독립 서점

 

    문예지의 쇠퇴와 새로운 독자들의 증가는 문학 매체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을 가능케 한 동인이 되었다. 비평 없는 잡지를 표방하면서 등장한 출판사 은행나무의 『악스트』(2015년 5월 26일 창간호)와 2015년 11월 『세계문학』 폐간 이후 비평가 없이 편집자가 주도하여 만든 민음사의 『릿터』(2016년 8월 1일 창간호)는 새로운 감각과 파격적인 편집으로 젊은 독자층에게 호응을 얻었다. 이와 함께 독립 잡지의 등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들이 만든 독립 잡지인 『더 멀리』(2015년 4월 30일)와 『후장사실주의』를 위시하여,'페미니스트-퀴어 독립 문예지' 『소녀문학』, '평화롭고 게으른 문예공동체'를 표방한 『베개』, '키친테이블라이팅 계간 문예지' 『영향력』, 그리고 『젤리와 만년필』, 『자정작용』, 『시인보호구역』 등이 꾸준히 출간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 텀블벅을 통해 후원을 받거나, 개인이 직접 비용을 마련하여 잡지를 제작한 후, 독립 서점에 위탁 판매한다.
    이 독립 잡지들의 특징은 등단과 비등단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립 잡지를 운영하거나 참여하는 주체들은 등단 여부를 떠나서 작가가 되기도 하고, 독자로 남기도 한다. 스스로 만든 지면이므로 기존의 문단 질서로부터도 자유롭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서 2년마다 발간하는 '한국서점편람 2018'에 따르면 2017년 전국에 서점은 2,050곳(문구 비중이 10% 미만인 순수 서점은 1,536곳)이라고 한다. 여기에 독립 서점 300여 곳을 합하면 2,350곳이다. 독립 서점은 동네서점(동네책방)이나 작은서점으로 명칭을 혼용해서 쓰기도 한다.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책방넷)는 2018년 결성되었다. 동네서점 지도에 등록된 동네서점은 2019년 9월 말 총 626곳(160곳 개업, 37곳 폐업)이다. 독립 서점은 주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사회·문화과학서점, 어린이서점, 그림책서점, 예술서점, 독립 출판물 서점, 해외출판물 서점, 만화서점, 퀴어서점, 전시가 있는 서점, 술이 있는 서점, 여행서점 등 전문적으로 세분화하여 운영한다. 북스테이, 카페, 빈티지 잡화점, 복합문화공간, 출판사, 디자인 스튜디오를 겸업하기도 한다. 이 소규모 서점들은 책 큐레이션, 책 처방 프로그램, 독립 출판 강좌, 문예창작교실, 올빼미 독서 모임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여 독자와 작가들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독립 서점들은 주로 오래된 골목 주택가나 건물들을 임대하여 자신의 취향에 맞게 꾸리는데, 최근 독서문화를 주도하며 중요한 지역문화의 거점이 되고 있다.
    가장 성공적인 독립 서점은 유희경 시인이 운영하는 위트앤시니컬이다. 김이듬 시인의 '책방이듬', 유진목 시인과 손문상 시사만화가 부부가 운영하는 '손목서가', 부산 이민하 시인의 '낭독서점', 대구 정훈교 시인의 '시인보호구역' 등은 중요한 지역 서점들이다. 인천에는 인천 책을 주로 판매하는 '인천 서점'과 협동조합 형태의 복합문화공간 '마샘', 그리고 배다리 헌책방 골목 입구에 있는 독립 서점 '나비날다'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독립 서점은 주로 20∼30대의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책방 주인은 부수적으로 문화기획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문화 거점, 문화 플랫폼으로 지역에 뿌리를 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2. 문학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독자들과 작가들의 변신

 

    수동적 소비자에서 능동적 생산자로 문학장에 참여하는 독자들이 늘고 있다. 2017년 봄에 신인상을 폐지하고 이듬해 종간한 『21세기 문학』이나 등단/비등단의 경계를 없앤 독립 잡지와 독립 출판물 그리고 등단 없이 시집을 출간하는 작은 출판사들의 개성적인 시인선은 문단의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했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독립 출판물을 내고 작가가 되기도 한다.
    SNS라는 공간에서 독자는 단순하게 미디어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웹툰이나 웹소설의 경우 실시간으로 의견을 달아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작가의 창작 과정에 영향을 준다. 독자와 작가는 SNS를 통해서 언제든지 쌍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다. 즉 수용자(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독자와 작가의 위치는 서로 바뀌거나 섞이기도 한다.

 

    지식콘텐츠 구독 서비스 퍼블리는 자기 계발 욕구가 강한 직장인들이 주로 이용한다. 월 이용료는 2만 1900원으로 현재 6,200명의 유료 멤버십 회원이 정기구독 중이라고 한다. 이외에 브런치에서의 활동이나, 글 연재 등을 기반으로 책을 출간하고 작가로 변신하는 사람들도 있다.
    SNS 활동은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비대면의 가상공간에 지친 사람들은 오프라인 밖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독서 모임, 글쓰기 모임, 독립 출판 모임 등 소규모 활동을 하면서 독서공동체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전국의 자발적인 독서 모임으로는 남원의 북클럽, 전주의 북새통, 홍동의 할머니 독서 모임, 부천의 언니북, 보령의 책익는 마을, 청주의 강강술래, 김해 행복한 책읽기 공무원 모임, 원주 그림책연구회, 시흥의 상록독서회, 청주 북클럽 체홉 등이 있다. 최근 동네의 독립 서점들을 중심으로 더욱 다양한 방식의 독서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다.
    2015년부터 취향과 관심사에 따라 모이는 '커뮤니티 스타트업'이 많이 등장한다. 이들 대부분은 유료 커뮤니티이다. 대표적인 소셜 살롱은 '트레바리'이다. 2015년에 80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트레바리'는 2019년 12월 기준 6,000여 명의 회원으로 늘었고, 약 360개의 모임을 운영 중이라고 한다. 기본 패키지(19만 원)가 4개월에 4권의 책을 읽어야 하고 독후감도 의무로 써야 하지만 폭발적으로 회원 수가 늘고 있다. 이들이 모인 가장 큰 이유는 독서토론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이다. '문토'와 '취향관'도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는 유료 커뮤니티이다. 이외에도 인문예술공유지(地)라고 명명한 '문래당'과 장르문학 마니아들이 모인 '안전가옥',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를 직접 경험하는 'Be my B' 등은 모두 공간을 중심으로 취향을 공유하는'소셜 살롱'들이다.
    새로운 형태의 문화현상은 더 이상 수동적인 소비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학장에 참여하는 독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독서문화를 주도하는 독립 서점, 유료 커뮤니티 등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조화로운 공존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모임들을 통해서 성장한 독자들은 스스로 작품을 출판하면서 작가들이 되기도 한다. 문단의 경계에서 해방된 독자들의 문학장 진입은 문학 지형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최근 작가들은 문학장 밖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독자와 직접 소통한다. 독자와 만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성공한 사례는 『일간이슬아』이다. 연재 노동자로 스스로를 규정한 이슬아의 연재 1일 구독료는 500원이다. 이와 함께 시인 문보영이 운영하는 V로그와 '일기 딜리버리'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이랑 작가의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 안대근 작가의 '매일메일근', 김동진 작가의 '1인분 영화' 등 이메일 구독 시스템들은 젊은 독자층을 겨냥해 매체를 잘 활용한 사례이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커미션'이라 칭하며 자신들이 그린 그림이나 쓴 글을 파는 경우도 있다. 이는 청소년들 스스로 예술을 노동이나 직업으로 인식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예술을 하나의 놀이나 경제 활동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들은 이메일 구독 시스템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거나, 독립 서점 등에서 독자와 직접 만나서 소통하고 자신의 작품을 홍보한다. 이는 문학장과 독서시장의 변화에 맞선 작가들의 생존법이기도 하다.

 

 

    3. 새로운 생산과 소비의 공유지, 공유경제 플랫폼을 상상하며

 

    위에서 언급한 문학장의 변화 속에서 독자들의 수동적인 참여는,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을 요구한다.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한 다양한 모색과 실험이 필요하다.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공유경제 플랫폼'은 독자와 독자, 작가와 독자를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접속하여 원하는 작가의 작품을 만나고, 리뷰를 쓰고, 소통하는 창구 역할을 해야 한다. 생산과 소비가 직·간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으로,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합적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개별 작가의 아카이브이면서 동시에 한국 문학 아카이브의 역할도 축적해 나가는, 거대한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셜 살롱인 트레바리, 문토, 취향관이나 기존의 텀블벅 등 다양한 활동 주체들에게서도 아이디어를 찾고 서로 연동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독자들이 작가들에게 청탁 혹은 주문 제작 요청을 하거나 책을 내주는 방식, 리뷰를 쓰고 소비하는 다양한 형태의 생산 공유지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작가와 독자는 자유롭게 쌍방향으로 소통해야 한다. 전국의 독서 모임을 연결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문학 활동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하고, 다른 플랫폼이나 장르 간의 협업으로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경제적이고 거대한 플랫폼을 만들어 가야 한다. 새로운 영토에서 다채롭고 낯선 얼굴로 도래할 문학을 기대하며.

 

 

 

 

 

 

 

 

 

 

 

 

 

 

 

 

 

 

정훈교

작가소개 / 이설야

2011년 내일을여는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인하대 국문과 박사 과정 수료. 시집『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가 있음. 제1회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수상. 계간 《작가들》 전 편집주간.

 

   《문장웹진 202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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