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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갈매책방 북적북적(제2화) - 인문학 독서모임, 두 번째

  • 작성일 2020-02-01
  • 조회수 1,212

[책방곡곡]

 

 

 

구리 갈매책방 북적북적(제2화)

인문학 독서모임, 두 번째

- 『산 자들』, 장강명, 민음사, 2019

 

 

진행 : 김채현
참여 : 금정은, 김점열, 김명일, 권영도, 강산옥

 

 

 

 

    인문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다양한 현실과 세상을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합니다. 또한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공감하는 길로 인도하기도 하지요. 지치고 힘들 때, 위로와 용기가 필요할 때, 자아를 확장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을 때 인문학은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둘러보라고, 더불어 살아가기, 공생하기에 대해 지속적으로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인문학을 통해 삶을 좀 더 깊이 있게 성찰하고 다듬어 나가는 힘이 길러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사회자 : 이번에 함께 읽게 된 『산 자들』이란 소설은 취업, 해고, 구조조정, 자영업, 재건축 등의 문제를 통해 이 나라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단함과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우리 역시 '산 자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기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이나 총평을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김점열 :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문장은 다소 건조하지만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현실을 기자답게 팩트를 살려 그려낸 것이 좋았어요.

 

권영도 : 제가 이 모임이 아닌 다른 독서모임에서 처음 시작을 이 작가님의 『한국이 싫어서』로 했어요. 이 책 역시 분열이라는 주제로 제게 와 닿았고. 한국의 현실을 잘 짚어낸 것 같아요.

 

김점열 : 아쉬운 점은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에요. 균형 감각이 갖춰줘 있긴 한데,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작가가 다소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사회자 :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까요? 장강명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보여지는데요.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독자들이 문제의식을 느끼게 하는 스타일이죠. 그리고 「현수동 빵집 삼국지」에서 함께 공생을 제안하는 부분이 대안이 되지 않을까요? 프랜차이즈 빵집 한편에서 또 다른 빵을 함께 구워내는 것이죠.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나요?

 

김명일 : 저도 이 작가의 책은 처음인데요. 르포 형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연작소설이다 보니 하나하나가 커다란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것 같고요.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읽다 보니 알게 되더라구요. 오랜만에 사실주의 작가를 만난 느낌이었고,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데에 이 소설의 의의가 있지 않나 싶어요.

 

김점열 : 제가 봤을 때는 이 책은 암묵적인 진보가 아닌가 싶어요.

 

김명일 : 저는 꼭 어느 한쪽으로 나누기보다는 굉장히 신선한 작가라고 봤어요.

 

강산옥 : 저는 일반적인 직장생활을 한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대기발령이 실제로 있었다고 생각하니 참 안타깝고, 그런 상황을 겪는 동료를 보거나 직접 겪는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또 제가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보니 「현수동 빵집 삼국지」가 제일 크게 와 닿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의 수는 줄어가는데 학원들은 늘어나는 상황이 비슷했거든요.

 

김명일 :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가 사실 살아가는 3원칙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잘라야 하고, 싸워야 하고, 버텨야 하는 우리 현실에 대해 날카롭게 바라보는 것 같아요. 우리는 정규직과 고용주의 시선을 강요받지 않나요? 제가 있는 직장에도 파견직이 있는데 그들이 나가면서 죄다 "우리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면서 나가요. 이 소설은 그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들어요. 그게 문학의 기능이 아닌가 싶어요. 마치 '을의 반격'이랄까.

 

권영도 : 저는 오히려 약자의 입장만이 아니라, 강자의 입장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게 되더라구요. 「공장 밖에서」를 보면 말 그대로 공장 밖에서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산 자들'이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현수막을 걸었는데 그 구호를 보고 사장은 비겁한 소리를 한다고 여기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저는 그 고용주의 입장도 이해가 되더라는 거죠. 회사가 이익이 나지 않은데 왜 보너스를 줘야 하지? 이런 의문도 들었어요.

 

사회자 : 고용주가 아닌 입장에서 고용주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텐데요.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다니 이 소설이 큰 역할을 한 셈이네요. 그렇다면 고용주의 입장인 김점열님은 이 부분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 같아요. (웃음)

 

김점열 : 아르바이트 직원의 행동은 참 보기가 안 좋던데요. 너무 뒤통수를 치지 않았나요?

 

사회자 : 저도 약간 비슷한 느낌이 들긴 했어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도 이런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겠구나 싶어요. 「알바생 자르기」 편에서는 알바생이 가엾게 느껴지다가도 나중에는 알바생이 약간 괘씸(?)하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약간 복잡 미묘한 심정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알바생이라는 한 캐릭터에게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반감이 생기기도 해서 사실 당혹스러웠어요. 회사에 충성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최대한 성실함을 어필해서 정규직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일 텐데, 그저 잠시 거쳐 가는 임시 정거장 같은 느낌으로 일을 하는 태도나 적당히 받은 만큼만 일하려는 알바생의 자세가 썩 이뻐 보이지는 않았어요. 싹싹함이나 눈치, 센스 이런 게 사회생활에서는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알바생이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구요.
그런데 막상 회사에서 알바생을 자르기로 결정하자, 오히려 상황은 역전이 되는 거죠. 어리숙하게만 느껴졌던 알바생이 결코 만만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잖아요. 취업난이 심각해지고 비정규직만 늘어 가는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참 안타까워요.

 

권영도 : 맞아요. 약자인 줄 알았는데 약자가 아니었다는 느낌이 든 적이 있어요. 겉으로 봐서는 약자인 것 같은데, 사실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거죠. 철거민 문제도 그렇고.

 

김명일 : 「대기발령」을 보면서 우리는 약자이면서 강자라고 느꼈어요. 약자는 약자끼리 연대해야 한다고 봐요. 교류와 소통과 콜라보가 중요한데 그게 사실 잘 안 되죠. 우리는 경쟁의 논리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이에요.

 

 

사회자 :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는 단순한 프레임으로 보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한 것 같아요.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그만큼 중요하니까요.

 

김명일 : 우리가 돈과 권력 중심의 현실에서 암묵적으로 그런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틀을 깨야 한다는 거죠. 이 소설은 그런 문제제기를 했다고 봐요.

 

강산옥 : 대기발령 겪어 보셨다고 하셨는데, 어떠셨어요?

 

김명일 : 굉장히 가혹하죠. 부장이 말단 여직원 자리로 좌천됐는데 3개월을 버티다 결국 나갔어요. 후배들이 아무도 말도 안 시킨 게 너무 속상해서 나갈 때 막 울더라구요. 후배들이 지지해 주고 그럴 줄 알았는데 말이죠.

 

강산옥 : 그래서 요즘 펭수가 뜨는 거예요. 사장한테도 할 말 다 하거든요.

 

김명일 : 『산 자들』 보면서 제목이 비슷해서 그런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1990년대 소설이 떠올랐어요. 치열한 사회운동의 한편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가져야 하는 죄의식에 대한 얘긴데요. 『산 자들』을 보면서 주제의식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정은 : 저는 『알바생 자르기』에서 갑과 을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됐어요. 얼마 전에 기간제 근로자 2명이 나갔어요. 6개월 이상 근무하면 실업급여가 나오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받는 급여와 실업급여를 받는 것에 대한 간극이 별로 크지 않거든요. 힘들게 일하기보다는 실업급여를 택하는 거죠. 계약 기간을 연장해 주려고 했는데도 나가더라구요. 계층 간의 문제, 세대 간의 문제가 너무 크게 와 닿았어요. 우리 사회가 걱정됐고요. 90년대생들이 저는 적응이 안 돼요. 이런 부분들에 대해 이 소설은 다양한 문제의식을 우리 앞에 내놓고 있는 것 같아요. 소설이라기보다는 마치 사례집을 읽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회자 : 네. 사실적이라 그런 것 같아요.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장강명이라는 작가를 팟캐스트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방송도 재미있게 듣고 있어요. 저는 장강명 작가가 이런 스타일의 소설을 계속 썼으면 좋겠어요.
오늘 장강명 작가님의 『산 자들』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천착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구요. 많은 얘기들이 오갔던 아주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장강명 작가님의 더 좋은 소설들 기대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채현

사회자 / 김채현

독서로 자기경영 중인 15년차 워킹맘

 

김점열

참여자 / 금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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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열

참여자 / 김점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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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 / 강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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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일

참여자 / 김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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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웹진 202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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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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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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