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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곡곡] 천안 가문비나무아래 (제2회)

  • 작성일 2021-11-01
  • 조회수 975

[책방곡곡]

 

 

 

천안 가문비나무아래(제2회)

 

 

사회 : 박진숙
참여 : 우연주, 이정희, 이영민, 한승연
책 : 정지아, 『자본주의의 적』

 

 

 

 

박진숙 : 얼마 전에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를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읽고 한참을 먹먹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 작품이 포함된 작품집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정지아의 소설집 『자본주의의 적』에는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전체적으로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영민 : 「자본주의의 적」을 과연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습니다. SNS가 발달하다 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쉽게 드러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이렇게 살아’ 하는 식의 이야기가 페이스북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에세이에 가까운 페이스북상의 글과 이 소설의 차이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죠. 형식을 에세이에 가깝게 설정했을 뿐 고도의 소설적 장치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방현남’이라는 사람이 실존인물이라면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 문제와 쓰기의 윤리성 문제 모두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만, 가상인물이라면 핍진성이 매우 높은 소설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방현남의 아이들과 제 아이, 제 조카들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어요. 자폐까지는 아니어도 외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요. 예전에는 그들을 보면서 ‘신인류’라고 생각했는데, 방현남 가족이 가진 생활의 특성들을 자본주의 시스템과 엮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자본주의의 적」, 「검은 방」,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등은 ‘빨치산의 딸’이라는 작가의 정체성이 강하게 투영된 글이었고, 「존재의 증명」은 이 작품들과 결이 확연히 다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문제의식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를 찾는 처연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는 여성의 사회 내에서의 위치 등을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라 젊은이들이 많이 공감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틀란타 힙스터」를 읽으면서는 농촌으로 내려온 서양인에 대해 이런 시각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고, 「아하 달」은 연상되는 SF 작품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정희 :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존재의 증명」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끝까지 존재를 찾지 못한 인물이 오래 인상에 남았습니다.「자본주의의 적」을 읽으면서는 자폐증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흥미롭게 읽었는데 방현남 가족과 같은 삶이 오히려 더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빨치산 이야기가 나와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이야기하는 건가 싶어서 조금 움츠러들었는데, 작품 중간중간에 ‘안기부’, ‘빨치산’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점이 신선했습니다. 처음 생리대 광고를 볼 때의 느낌처럼요. 이제는 이런 말들도 쉽게 언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에서 택이의 삶을 보면서 시골 어른들의 삶을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목로주점』, 『아리랑』의 장면들이 많이 겹치면서 도대체 술이란 것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도 해보았어요. 폭력과 중압감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에서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술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아버지의 상처와 그 상처를 이해하게 된 아들’이라는 서사 구도가 무척 안타까웠어요. 우리 사촌 택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에세이처럼 읽었습니다. 정지아 작가를 처음 만났는데, 이 작가의 작품들을 더 찾아서 읽게 될 것 같습니다.

 

한승연 : 이 작품집에는 어떤 신념이나 사상을 가지고 행동하는 인물도 등장하지만 특별한 신념이나 사상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인물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의 택이, 「자본주의의 적」의 방현남의 삶에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고 작가가 주목하고 싶은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를 찾는 처연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는 결혼과 경력 단절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위 친구들이 떠올라서 많이 와 닿은 작품입니다. “임신은 내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나는 사람이므로 정신도 몸도 컨트롤할 수 있다.”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낙태죄 위헌 판결,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어요. 술술 잘 읽히면서도 생각할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박진숙 :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검은 방」의 경우 아주 시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습니다. 연륜과 깊이가 있는 작가라야 쓸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은 방이라는 한 공간에 99년의 인생과 역사를 녹여내는 힘이 엄청나네요.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라는 작품의 제목은 우리가 타자를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지만,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하려는 노력이 바로 소설가의 임무라는 듯 택이의 삶에 살을 붙이고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에게서 자식으로, 또 그 자식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상흔에 완전히 지배당한 기택의 고통스러운 삶이 기택이의 한쪽 면이라면 다른 편에 있는 기택의 모습도 잘 그려낸 것 같습니다. 기택이는 그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었지만, 기택이가 서술자의 어머니를 보살피는 측면이 있고 기택이가 잡아온 물고기 덕에 서술자의 가족이 살 수 있었잖아요. 사람들 사이의 이어짐이 아주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우연주 :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한 의심을 하면서 읽어 나갔어요. “소설적 구성을 포기하고 이런 방식의 진술을 택할 수밖에 없음을 부디 이해해 주기 바란다”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의 연배에 비해 요즘 세태를 많이 반영하고 있는 듯해서인지 굉장히 감각이 젊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체에서는 연륜과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웃프다’라는 형용사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많았습니다. 쉽게 빠져들지만 생각할 것이 아주 많은 작품들이었어요. 처음 만난 작가님인데 다른 작품들도 찾아서 읽고 싶네요. 「애틀란타 힙스터」나 「존재의 증명」을 읽으면서 이 커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능청스럽게 서술을 한 듯합니다. 벚꽃 날리는 장면 묘사도 아주 시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박진숙 : 다들 재미있게 읽으셨네요. 특별히 인상적으로 다가온 장면이나 문장을 함께 나누도록 하지요.

 

이영민 : 「자본주의의 적」에서 현남의 아이들이 새 운동화에 낯을 익히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무튼 바비큐 파티가 끝나고 우리는 설거지를 하고 남편은 『자본론』을 읽고 아이들은 내가 선물한 나이키 운동화를 들여다본다. 몇 시간이고. 그러나 신지는 않는다. 새 메이커 운동화를 신발장에 고이 모셔둔 채 오며 가며 낯을 익힌다. 그사이 이미 작아진 것은 물론 구멍 나 비가 새는, 인터넷으로 산 싸구려 신발을 계속 신을 것이다. 이미 그 정도는 알고 두 치수 큰 걸로 샀다. – 「자본주의의 적」, 37쪽

 
사물에도 낯을 익혀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아요. 사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사물에 대해서도 낯가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요. 그 마음을 알기에 두 치수 큰 걸로 구입하는 서술자의 마음도요.
자본주의 사회는 누구나 자신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는 사람들만 살아남잖아요. 예전에는 그래서 내가 참 살기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자본주의에 적응하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런데 저 같은 어른뿐만 아니라 어린 친구들 중에도 이렇게 낯가림하는 친구들이 있더군요. 제 조카도 방현남의 아이들과 비슷합니다.현남은 내향의 극단인데, 다행스러운 건 현남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받아들이는 점입니다.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고통스러울 텐데 말이죠. 무심한 듯 “나는 그냥 살 건데……”라고 이야기를 하기까지 현남 나름대로 넘어온 시간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사물에 낯을 익히는 태도는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비를 많이 하지 않게 되니까요.

 

박진숙 : 예전에 자본주의의 적은 사회주의였지만, 현재의 자본주의의 적은 현남처럼 사는 삶, 어떻게 보면 현대 산업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적인 삶이라고도 볼 수 있겠어요.

 

이영민 : 그런데 현남의 삶의 태도는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기질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는 점에서 좀 다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 수도 없고. 서술자도 현남에게 영향은 받겠지만 그렇게 살지는 않잖아요. 각자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지금의 사회는 각자가 가진 별들을 무화하고 무시하면서 어떤 전형화된 삶의 방식을 모두 따르고 있다는 것이죠.

 

박진숙 :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전형화된 삶의 방식이 이 작품집 곳곳에 묘사되고 풍자되고 있네요.

 

이정희 : 저도 인상 깊은 장면과 문장들이 아주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이 부분이 아주 깊이 와 닿았습니다.
 

    남편이 나지막이 노래를 부른다. 천왕봉 아래 폭설 퍼붓던 그 밤처럼. 죽어도 좋았던 청춘의 시기를 거쳐, 이제 늙은 그들은 어찌 됐든 살아야 한다. 자신들이 세상으로 불러낸 단 한 생명을 위해. 점점 처연해지는 노랫가락이 무거운 눈송이에 묻힌다. – 「검은 방」, 87~88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사상보다 강렬한 부모됨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모두 청춘의 시기를 지나왔고 그 청춘을 모두 바칠 무언가에 대한 열정이 있기도 했지만 살아갈수록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그저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경우의 대부분은 자식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어요. 점점 처연해지는 노랫가락이 눈송이에 묻힌다, 라고 쓰고 있는데, 그 노랫가락이 빨치산으로서 부르던 노래잖아요. “총을 들어라 출정이다”라는 결의에 찬 노랫소리가 눈송이에 묻힌다니. 눈송이에 젖고 눈송이에 묻히기가 쉽지 않을 텐데…… 노래에 담긴 한 사람의 인생과 시간과 고통이 다 묻히는 듯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 부분.

    취향이란 그런 것이다. 취향은 돈이 결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품격이 취향을 결정한다. 아니, 전제와 결론이 바뀌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다. 취향이 사람의 품격을 결정한다. 취향이 곧 사람의 본질인 것이다. 기억은 사라져도 취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게 그였다. 토고 소파가 잠을 불렀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혼란스럽고 고단한 하루였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이 집의 공간을 채운 것들이 곧 그였다. – 「존재의 증명」, 242~243쪽

 
“사람의 품격이 취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취향이 사람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이며, 취향은 곧 그 사람의 본질이다”라는 표현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취향의 위상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비판적인 의도로 썼겠지만 일정 정도 사실이기도 해서 이 부분을 쓰면서 좀 씁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 집을 채우고 있는 것들, 장난감과 책들이 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취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가 싶기도 했고요. 어떤 경우는 ‘고기 빼고 다 좋아해’처럼 자신의 취향을 싫어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취향을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의문도 들었고요. 그만큼 현대인들은 자신의 본질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요. 한편으로는 공간으로 내가 설명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정돈하고 덜어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 주위를 보면 자신의 소유물 등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그것에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박진숙 : 「존재의 증명」을 비롯해서 제목들이 무척 거대합니다. 제목들만 보면 ‘존재’, ‘자본주의’, ‘계급’, ‘인식의 한계’ 등 거대한 담론을 다룬 것 같지만 정작 펼쳐 보면 아주 소소한 이야기들이에요. 그런데 그 소소한 이야기들을 곱씹으면 결국 거대한 담론에 부딪게 되고요. 전복인 듯도 하고 반어적인 기법을 쓰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상관없었다”라는 표층적인 표현 이면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날선 비판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영민 : 그런 면에서 「존재의 증명」은 「기억의 방」과 대척점에 놓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검은 방」의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죠.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기억이 명징합니다. 자신의 취향이 담긴 수많은 소유물들을 볼 수 있지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존재의 증명」 주인공과 상반되지요. 취향이라는 것은 명확하게 자본주의와 엮여 있습니다. 취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가 있어야 가능하잖아요. 저는 그런 면에서 취향과 존재의 관계 설정에 대해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외우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사물들을 통해 자기를 증명한다는 것이 측은하게도 여겨졌고요. 그건 결코 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정희 : 저도 그 부분을 읽으며 뭐야, 이렇게 자존감이 없다니……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작품 전체가 반어를 통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어요. 작품 중간에 보면 이런 부분이 나와요.

   그는 약간의 두려움에 떨면서 코트의 양쪽 주머니를 뒤졌다. 손 안에 쏙 들어온 것은 아이폰7이었다. 이건 약간 의외였다. 아이폰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아이폰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특별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밝혀낸 자신의 취향이라면 아이폰은 아닐 것 같았다. 단순하고 튀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의 소유자가 아이폰이라니. 어쩌면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긴 했다. 사진이라면 역시 아이폰이었다. 이런 앱등이 같은 발언이라니! – 「존재의 증명」, 244~245쪽

 
자신을 검열하는 리스트가 있다는 점이 재밌었어요. 난 그래도 지키는 건 있어, 하는 어떤 기준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읽지 않아도 일단 구매부터 하는 제 모습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면을 알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인터뷰(변혁, 2000)」라는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애인이 죽은 후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던 인물이 인터뷰어의 카메라 앞에서 처음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이름과 나이밖에는 자신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 있을까? 내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이런 사람 아닌데, 라고는 할 수 있지만 무엇이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종종 남편에게 ‘당신은 나의 20퍼센트밖에 몰라’라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나머지 80퍼센트는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저에게 질문하는 소설이었어요. ‘너는 너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하고 설명할 거야?’라는. 존재란 무엇인가, 나는 결국 누구인가…… 이런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 불교적인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일 텐데요…….

 

이영민 : 인공지능이 첨단화된 미래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를 구별하는 지점은 기억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억조차 조작되고 이식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존재의 증명」에서 본질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그 취향 역시 조작이 가능하다면 과연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네가 먹는 것이 너다”, “네가 입는 게 너다”, “네가 꾸며 놓은 것이 너다”…… 라고들 말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그런 이야기들 속에 배제된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생각해요. ‘먹는 것’, ‘입는 것’, ‘꾸밀 것’ 등등을 구매할 수 있어야 가능하니까요. 현대사회에서 취향은 돈이 있어야 가능하잖아요. 이 작품집 몇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커피에 대한 취향도 그렇고요. 오랜 시간과 돈을 들여 다양하게 먹어 봐야 가능한 취향이잖아요.

 

이정희 : 이야기 나누면서 이 작품집을 ‘자본주의’라는 관점으로 다시 읽어 보고 해석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읽을 때 ‘존재’를 중심으로 에세이 읽듯이 읽었다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중심으로 다시 읽고 싶네요.

 

박진숙 : 작품 곳곳에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도 이 작품집을 자본주의적 삶이라는 관점으로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욕망은 자본주의의 존재 기반이니까요.

 

승연 : 저는 「애틀랜타 힙스터」의 한 부분이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미경의 말이 기관단총의 총알처럼 모두의 심장에 박힌다. 여기 있는 이방인들 중 누구도 미경의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심지어 윤도. 스텔라 역시 아버지 말처럼 전공을 살려 공무원이 되었다면 K읍까지 와서 까페의 단골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턴 채용공고를 보고 몇 번이나 지원했지만 번번이 떨어졌고, 은행 대출을 갚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주류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한국행을 택한 것은 영원히 주류의 삶에 합류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으로부터의 도피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스텔라는 간혹 떠오르는 그런 생각을, 미래에 대한 불안을, 뜨개질을 하며 애써 잊었다. 미경의 말이 심장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애써 잊었던 절망과 불안이 스멀스멀 새나오기 시작한다. – 「애틀랜타 힙스터」, 154~155쪽

 

 
친구들과 가끔씩 나누던 이야기와 일치합니다. 같은 고등학교에서 비슷한 성적대였다 하더라도 부모의 재력에 따라 갈 수 있는 대학이 다르기도 하고 그러면서 점점 달라지는 삶의 양상을 목격하게 되니까요. 집안 사정에 따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를 택하고,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주류에서 밀려난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평범한 삶이라고 이야기들 하지만 평범한 삶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주류에서 밀려나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직장을 옮겨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4포 세대, 5포 세대 등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점점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지는 20대의 삶이 잘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부분도 인상적이었는데요.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한다. 씨를 뿌린 건 지원이지만 임신은 내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굳이 지원과 상의할 필요는 없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 아직 나는 결혼 생각이 없다. 아이도 낳을 생각이 없다. 고양이 녀석은 동물이라 어쩔 수 없이 임신을 하고 새끼를 낳았다. 그리고 고작 두 달도 되지 않아 모성을 버리고 저 자신으로 돌아갔다. 나는 사람이다. 사람이므로 정신도 몸도 컨트롤할 수 있다. 그게 동물과 사람의 차이다. – 「엄마를 찾는 처연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 185쪽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부분이었습니다. 낙태가 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는 대부분 ‘태아도 생명’이라는 것인데, 태아의 생명권과 충돌하는 여성의 건강은 종종 간과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앞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비롯한 여성주도권을 어떻게 더 넓혀 나갈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들을 어떻게 여성의 권리로 가져올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박진숙 : 저도 읽으면서 멈춘 곳들이 아주 많았는데, 한 부분만 이야기하자면 이 장면입니다.
 

    방 밖으로 나가기 어려워지면서 그녀의 시간은 이 검은 방에 갇혔다. 검은 방에서는 시간이 제 맘대로 흘러 죽은 자들이 살아 있고 함께 있을 수 없는 자들이 함께 있다. 직선으로 살아온 시간을 실타래처럼 엉켜놓은 것이 어둠인지 그녀 자신인지 알 수 없다. 검은 방에는 그녀의 구십구년이 안개처럼 고여 있다. 그녀의 숨결에 따라 어떤 기억은 물안개로 피어오르고 어떤 기억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피어오르는 것은 묵은 기억들이다. 새로운 것들은 좀처럼 검은 방 안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날이 갈수록 검은 방의 기억들은 봄꽃처럼 찬란하게 피어난다. 그녀는, 살아 있는 그녀는, 오직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다. (중략)
후딱 나오랑게.
성미 급한 남편이 다그친다. 막 몸을 일으킨 침대 위, 몸 따라 일어나지 못한 그녀의 마음 한자락 희끄무레 놓여 있다. 그 마음, 두꺼운 블라인드 너머, 딸의 방으로 이어진다. 생생하게 살아 있던 아흔아홉해의 기억들이 꿈이었던 듯 사라지고, 그녀는 우두커니, 저 따라나서지 않은 제 마음, 들여다본다. 그 마음, 치매 걸린 동생의 요분질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그 마음, 거두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검은 방, 구십구년의 기억 속에 다시 갇힌다.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기억들, 뒤엉켜 뛰논다. – 「검은 방」, 104~105쪽

 
이영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이 검은 방은 주인공의 존재 자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기억들이고요. 모든 색을 결합한 것이 검은색이듯 모든 기억을 품고 있는 공간이 검은색의 방입니다. 우주 공간 같기도 하고요. 묵은 기억부터 길어 올리면서 모든 시간이 엉키는 장면은 흡사 임종을 앞두고 삶의 장면 장면들을 주마등처럼 지켜보고 있는 모습 같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끝나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을 따라가지 못하는 그 마음은 건너편 방, 즉 딸 때문인데, 그 마음이 치매 걸린 동생의 요분질과 다를 바 없다는, 즉 동생의 성욕과 살고자 하는 욕망이 결국 같은 것이라는 작가의 통찰이 놀라웠습니다.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와 기억의 중첩과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 시간과 삶을 가능하게 하는 욕망 등을 한 편의 시적인 영상으로 형상화해 놓은 듯합니다.

 

우연주 : 저는 「자본주의의 적」에 나오는 한 문장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는데요.
 

   빨치산의 딸도 샤넬을 드는데 나는 왜 안 돼!–「자본주의의 적」, 38쪽

 
   빨치산의 딸도 샤넬을 드는데 나는 왜 안 되느냐는 항변에는 어떤 이에게는 어떤 소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 그리고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아요. 나는 명품이 좋다, 다만 살 돈이 없을 뿐, 이라는 생각이죠. 그럼에도 탈북자가 에어팟을 끼고 있거나 식비 지원받는 아이가 치즈돈가스를 먹으면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빨치산의 딸이나 탈북자나 식비 지원자는 소비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소비 행위가 누구에게나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 같기도 하고요.
하이힐을 신고 싶고 샤넬을 들고 싶은 욕망과 탈코르셋 운동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나의 취향이나 나의 욕망과 이념 혹은 가치의 갈등이요. 임종진 사진가가 5·18 희생자들에게 사진 교육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슬픔에 갇히지 않으면 좋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삶이 어떤 이념이나 가치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박진숙 : 인상적인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어도 이 작품의 주제의식들이 아주 묵직하고 우리의 삶을 다시 성찰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품과 관련하여 함께 얘기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을 더 나누어 주시지요.

 

이영민 : 한승연 님께서 「엄마를 찾는 처연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의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했던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해 이야기를 좀 더 나누어 보고 싶어요. 강제 불임수술이 이루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은 여아살해가 가장 심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국가의 필요에 의해 태아를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데, 결정권은 정확하게 임신한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기르는 전 과정에 여성의 노고와 헌신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과정에서 다른 존재들이 결정권을 행사해 왔던 것이 우리의 역사죠.

 

박진숙 : 「검은 방」에서 딸아이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 날선 사상마저 딸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랫목에 있는 갱엿처럼 흐물흐물해졌다, 라고 쓰고 있잖아요. 사상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일 텐데, 이것을 송두리째 녹여버릴 수 있는 것이 아이의 출생인 것이죠.

 

이영민 : 그렇게 중요한 문제이기에 국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연주 : 생각이 없고, 잘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얘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정희 : 종교나 감정에 호소하게 되면 태아가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또 재산의 개념에서는 태아와 사람을 엄밀히 구분한다는 점이 참 모순입니다. 태아 상태에서 아기 상태가 되면 ‘아기’라고 말하는 순간 정서적 반응을 동반하게 됩니다. 감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성을 강요하거나 공감하기를 바라게 되면 강압적인 폭력이 되는 것 같아요. ‘낙태’라는 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태아를 떨어뜨린다, 붙어 있는 것이 정상임에도 불구하고’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어서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언어가 생각을 규정하는 면이 많기에 임신중단이라는 표현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한승연 : 「임신일기」라는 웹툰을 보면 임신이 가진 숭고함과 위대함의 측면에 집중되어 있는 학교 교육에서 알려주지 않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략된 이야기, 결론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기에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박진숙 : 사실 출산은 자본주의 체제 유지와 깊게 관련되어 있잖아요. 농경사회에서 출산이 노동력을 만드는 과정이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자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젊은 어머니들이 임신, 출산, 육아를 하는 과정을 보면 수많은 취향이 개입되고 있다는 걸 많이 목격하게 되는데, 그 취향이라는 것이 엄청난 소비에 기반한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존재의 증명」에 나오는 수많은 고가의 상품들이 육아용품 시장에도 넘쳐납니다. 아이들이 태어나 줘야 출산과 육아 관련 산업이 유지되고 아이들이 소비자들로 안착하게 되어 자본주의 사회를 받쳐 주게 되므로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임신에 대한 미화 역시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임신/비임신을 정상/비정상의 구도로 여기게 하는 것이죠.

 

이정희 : 소비를 통한 취향 형성과 자신의 존재 증명이라는 삶의 양식 반대편에 방현남 가족의 삶이 있잖아요. 방현남 가족의 삶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방현남의 남편이 『자본론』을 읽고 또 읽는다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자본론』을 읽으면서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이상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 책을 반복해서 읽는다는 것 역시 자본주의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까요?

 

한승연 : 그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박진숙 : 이정희 님의 문제의식을 함께 나누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존재의 증명은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질문이요. 나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야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라는 단편의 중요한 화두이기도 합니다.

 

이영민 : 요즘 제가 강의하고 있는 ‘가족과 공동체’와 관련한 내용과 연결해서 생각이 되는데, 우리 모두는 가족에 대해 특히 엄마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족을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생각하는데, 가족 구성원과 공유하는 기억이 단절될 때 그 존재에 대한 인식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라는 제목은 ‘우리는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택의 마음도 검은 허공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우연주 : 자신의 존재를 알고 증명하기도 어렵지만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아들을 기르고 있는데, 훌륭한 육아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아이가 성인이 되는 시점부터는 더더욱 알기 어려워지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영민 : 저는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것이 허상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상호의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지 않으면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요. 돌봄은 종종 간섭으로 오해되기도 하는데,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서 새로운 형태의 관계맺음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거리를 두면서도 ‘정지아’가 노모를 모시는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돌봐주고 있죠. ‘박사님’이지만 정지아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이웃의 돌봄 속에서 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돌보는 모습은 작가가 제시하는 삶의 방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황폐화된 자본주의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서로 돌봄과 연대에 있다는.

 

박진숙 :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와 취향, 존재와 기억, 역사의 상흔과 고통,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모성, 인간의 관계맺음과 돌봄과 연대…… 등등 이 시대의 여러 문제들을 고민하게 하는 작품집인 듯합니다. 저희가 함께 읽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영민
참여자 / 이영민

사람의 마음에 집중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활자 중독자, 꿈작업가입니다.

 

우연주
참여자 / 우연주

고민의 길을 열어주는 책을 함께 읽고 나누는, 한량지망생입니다.

 

이정희

참여자 / 이정희

책과 사진 속에 녹아 있는 생각거리를 즐기는, 책 읽는 엄마입니다.

 

한승연

참여자 / 한승연

더 넓은 세상을 상상하는 20대 직장인입니다.

 

 

 

   《문장웹진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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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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