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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곡곡] 공주시 데시그램북스(제1회)

  • 작성일 2022-05-01
  • 조회수 1,040

[책방곡곡]

 

 

 

공주시 데시그램북스(제1회)

 

 

사회/원고 정리 : 멧새
참여 : 윤여름, 왕버섯, R.SSAM, 커피적인평화
책 : 백민석, 『해피, 아포칼립스!』(아르테, 2019)

 

 

 

 

백민석 작가의 『해피, 아포칼립스!』를 읽다

 

멧새 :
모두 반갑습니다. 『해피, 아포칼립스!』 재밌게 읽으셨나요? 책 제목부터 살펴보죠. ‘아포칼립스’라는 낱말 뒤에 느낌표를 찍었는데요. 왜 그런지 기억하시나요?

 

윤여름 :
네. 책 뒤 「작가노트」에 느낌표를 찍은 이유가 나와요.

 

멧새 :
네, 좀 허탈한 대답을 작가 본인이 하는데 ‘힘 떨어져서’라고 해요. 백민석 작가도 쉰 살이 넘어서 의미를 강조하려고, 좀 힘 있게 보이려고 찍었다고 말합니다.

 

왕버섯 :
저도 나이 먹어 가면서 용기가 점점 사라져요. 글을 쓰려고 앉았을 때 다리가 후들거려서 문장이 안 나와요.

 

멧새 :
이 작품의 구상은 2017년에 했고…….

 

윤여름 :
2018년에 5개월간 썼다고 했어요.

 

멧새 :
네, 그렇다고 합니다. 혹 백민석 작가의 다른 작품은 읽어 보셨는지요?

 

왕버섯ㆍR.SSAMㆍ커피적인평화 :
작가 이름도 처음 들어 봤어요.

 

윤여름 :
저는 예전에 백민석 작가의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을 재밌게 봤습니다.

 

멧새 :
백민석 작가는 1995년, 25살 때 등단했어요. 등단작은 단편 「내가 사랑한 캔디」였고, 지면은 《문학과 사회》입니다. 나중에 같은 제목의 장편으로 출간되었죠. 그 후에 백민석 작가는 90년대 말, 신세대 문학의 선두주자였어요. 거의 매년 작품집과 장편소설이 나왔죠. 95년, 96년, 97년, 그리고 2003년까지 거의 매년 한 권씩 계속 출간했고, 주로 장편을 많이 썼죠. 그러다가 2003년부터 뚝 끊겨서 2013년에 다시 나타나거든요. 공백 기간 동안 과연 뭘 했을까는 잘 모르지만, 우리 나름대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싶고요. 지금 이 『해피 아포칼립스!』가 2019년에 출간되어서 문학나눔 선정도서가 되었고, 오늘 이렇게 우리 모임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여튼 소설은 어떠셨나요? 한꺼번에 얘기하기는 어려우니까, 제일 인상적이었던 점부터 얘기해 볼까요? 아니면, 다 읽고 든 생각도 좋고요.

 

왕버섯 :
사실은 인상적인 부분이 없고요.

 

윤여름 :
악플로 시작하는 건가요? (웃음)

 

왕버섯 :
아, 그게 아니고요. 왜 없다고 했냐면, 너무 수박 겉핥기식으로 쓴 작품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거죠. 강하게 든 생각은, 표면적인 이유가 없고 그 안에 차이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어요. 읽을 땐 너무 잘 읽히긴 했어요. 하지만 텍스트 안에 속 테스트가 있어야 되고, 여러 문장 안에 다른 의미도 많이 숨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서 최진영 작가의 『해가 지는 곳』과 비교가 너무 많이 됐어요. 물론 이분은 프로 작가지만 아마추어 작가들이 어떤 장면에 영감을 받아서 작품을 쓰면 이렇게 나오잖아요. 내가 생각한 게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차용할 때 말이죠. 그래서 그냥 이게 왜, 읽으면서 너무 오래 쉬신 게 아닌가 했어요. 문장이 진짜 힘이 안 되더라구요, 제 생각에는. 그리고 여기서 뭐 자살전망대라든지, 작가가 얘기하고 싶었던 여러 가지 굵직굵직한 사회 문제들을 너무 표면적인 것만 다루었다고 봐요. 너무 표면적이라서 그냥 옆집 아저씨도 알 수 있을 만한 그런 사고, 그 정도여서 뭔가를 느끼거나 인상적인 부분은 찾을 수가 없었어요.

 

멧새 :
그래도 눈을 씻고서라도 찾아본다면?

 

왕버섯 :
뒤에 좀비들이 이 집을 침략하는 이 부분이 되게 영화적이었어요. 그다음에 영화 〈기생충〉 생각도 났고, 영화적인 문법으로 쓰인 것 같아서 앞부분과 더 안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여기 처음 시작할 때, ‘최’와 ‘혜주’가 나눈 대사에서 “사람들이 이때쯤 되면 달에 갈 거라고 생각하잖아.” 하면서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야기로 시작하잖아요. 그러면 소재가, 적어도 첫 문장에 나오는 그 소재로 뒤를 이어 가야 한다고 보는데, 뜬금없이 늑대인간이랑 좀비가 나오는 게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저는 맨 처음 읽었을 때, 그럼 뒤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도시 같은 게 나오면서 태양이 소멸하거나, 그래서 또는 사람들이 눈물로 모아서 식수를 만든다거나 이런 거 있잖아요. 예를 들면, 그런 미래 세계에 대한 게 나올 줄 알았는데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인용할 때는 너무 책임감 없이 인용한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우주가 나올 줄 알았는데, 갑자기 늑대인간과 좀비가 나오니까 전혀 소재가 붙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상입니다.

 

R.SSAM :
저는 그냥 재밌게 읽었는데……. 줄거리를 봤을 때 자살전망대가 나오는 게 인상 깊었고요. 인간성이 좀 결여된 부분? 그래서 자기들끼리 모여 살면서 이렇게 인간성이 결여된 모습이 부각된 부분이 또 인상 깊었어요. 그리고 은희가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잖아요. 그 학생주임 선생님한테 대들 때까지 말이죠. 그래서 이후에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됐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최’가 죽을 때? 그 부분도 참 인상 깊었어요.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멧새 :
마지막 대목은 이해되시나요?

 

R.SSAM :
‘은’이 죽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죽이라고 한 게 이 부자들이 자기들의 그런 추악한 모습이 ‘최’의 카메라에 찍혀서 그런 건지? 그게 궁금해서 여쭤보고 싶었어요. 왜 갑자기 죽이라고 했을까요.

 

멧새 :
적어 놨다가 계속 다시 얘기해보죠. 다른 분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윤여름 :
저는 이 시간과 공간 배치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요. 여기 숫자가 몇 개 나오잖아요? 일단 ‘만 가족 타운’부터 보자면, 왜 ‘만’일까? 왜 이 ‘만’이 한자로 쓰인 것도 아니고, 10000 도 아니고, 왜 ‘만’ 가족일까? 생각을 혹시 해보신 분이 있으면 너무 궁금하고요. 그러면서 백 가족이 들어갈 거다, 약간 이렇게 해서 그냥 단순히 좀 약간 가득 찬 느낌의 숫자를 넣고 싶었던 것 같아요. 완벽한 숫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으니까, 만땅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로 쓴 것일 수도 있고요. 그다음에 여기서 사진을 찍어 주고 자꾸 시간을 적어 줄 때, 시간이 연도처럼 느껴졌거든요. 2022년이라는 줄 알았는데, 20시 02분이었더라고요. 근데 이 사건이 벌어지는 파티가 20시 02분부터 시작해서 새벽 01시 15분에 끝나요. 시간이 얼마 안 되는데, 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까, 사실 너무 대충 짚고 넘어간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진지하게 생각할 구간이 없었고요. 늑대인간이면 늑대인간, 좀비면 좀비면 될 텐데, 하나는 물어뜯고 하나는 또 죽어서 살아 돌아다니고. 그래서 상징성이 부족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둘 중 하나만 해도 임팩트가 있을 텐데 너무 욕심을 많이 낸 스토리다,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고요. 그래도 가장 재밌었던 장면은 ‘최’를 버리고 결혼한 ‘혜주’ 이야긴데요. 나는 가난함 속에서 살고 싶지 않대서 ‘최’를 버렸는데, 막상 남편이 늑대인간에게 물어 뜯겨 죽었을 때 “우리 남편은 서울 때문에 죽은 거야. 서울을 체포할 수는 없잖아.” 저는 그 장면이 제일 재밌었어요. 어쨌든 이 소설은 서울을 비판하는 얘기 같았거든요. 강남 부근을 대놓고 그냥 풍자와 비판? 박지원의 「양반전」처럼 대놓고 비판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디스토피아를 그리려고 했다면 완전 실패 같고요. 그냥 장편이라고 하기에도 사실 너무 짧지 않나요? 이 정도면 중편 아닌가요?

 

멧새 :
그렇네요. 중편 정도의 구성과 길이죠. 그러다 보니 구성도 헐거운 것 같고요. 왕버섯 님이나 윤여름 님 말처럼 조금 거칠어 보이고 필요한 게 많이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윤여름 :
네, 많이 빠진 것 같아요.

 

멧새 :
좀 더 깊은 얘기는 이따 해보기로 하고요. 커피적인평화 님?

 

커피적인평화 :
이 책을 읽었는데요. 요즘 학교 다니면서 읽는 책이 너무 어려워서요. 그거 읽다가 이거 읽으니까, 두 책의 온도 차가 너무 심한 거예요. 너무 스케치하듯이 쓰신 듯해서 아쉬운 부분이 너무 많았어요. 물론 저도 자살전망대는 인상 깊기는 했어요. 눈에 들어와서 ‘이런 건 이럴 수 있어’, 그러면서 ‘너는 이렇게 안 할 수 있을 것 같니’ 하고 물어 보고, ‘너 똑바로 살고 있니’라고 물어 보는 것 같기는 한데요. 그걸 너무 두루뭉술하게 표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재를 좀 더 확장했다면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이 담기지 않았을까요? 왜냐면 좀비도 독특하다고 생각했고, 늑대인간도 그랬지만, 결국 ‘좀비나 늑대인간이나 결국 자본주의다’, ‘우리의 종말은 거기서 올 것이다’, ‘종말은 빈부의 격차와 부의 차이에서 올 것이다’라고 아주 확실하게 말해 주시는데, 이걸 말하기 위해서 앞부분이 너무 장황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일 마지막 부분의 두 챕터만 저는 좋게 봤거든요. 앞부분은 좀 아쉬웠어요. 아쉬운 부분이 좀 있었어요.

 

사진과 문장에 대하여

 

왕버섯 :
사실 ‘안티 강남’과 같은 담론이 이미 오래된 게 되었고, 지금의 20대나 30대 주류한테는 여전히 강남은 꿈의 도시이고, 자본주의는 너무나 편리하고 아름다운 이상향이기만 하죠. 자살 소재 역시 드라마 〈학교〉가 나올 때인 97, 98년도에 크게 이슈화되었을 뿐, 지금은 ‘자살’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요. 문학이나 드라마에서 ‘자살’을 안 쓴 지 오래되지 않았나요?

 

멧새 :
2019년 영화 〈기생충〉 이후, 빈부 격차 문제를 이렇게 소설, 드라마, 영화로 끌어들여서 주제로 부각시킨 작품들, 그리고 근미래로 설정해서 디스토피아로 그린 작품들이 굉장히 많이 나온 것 같아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 역시 『해피, 아포칼립스!』와 느낌이 비슷하죠.

 

왕버섯 :
〈기생충〉에서 비가 와서 하수구가 넘치는 씬 있잖아요? 빈부 문제를 매우 세련되게 풀더라고요. ‘만 가족 타운하우스’의 모델이 된 타워팰리스 역시 지금 시점에서는 제일 비싼 곳 아니고, 제일 비싼 곳은 한남동에 다 몰려 있죠.

 

멧새 :
2022년의 실제 현실로 보면 이미 낡은 얘기가 되었네요. 그런데 백민석 작가는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작품을 계속 씁니다. 이 작품에도 ‘디스토피아’라는 낱말이 붙었고요.

 

윤여름 :
그런데 이 작품만 보면, ‘디스토피아’라고 하기에는 장소도 좁고 시간도 짧아요. 그리고 ‘해피’를 붙인 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역설적인 표현과 같아요.

 

멧새 :
맞아요. ‘최’와 ‘혜주’와 ‘은’의 관계는 역시 조세희의 「궤도회전」에 나오는 윤호와 경애의 관계와 닮아 보였어요. 읽으면서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생각났죠.

 

윤여름 :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게, 이 소설을 오늘 현실에 대한 풍자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최’가 너무 만 가족 타운하우스에서 살고 싶은 게 느껴졌어요. 그곳에 자신이 못 가서 괴로워하거든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부류고, 어떻게 이런 자본주의가 있을 수 있어 하면서 그걸 비판하고 꼬집는 얘기는 아닌 거 같아요.

 

멧새 :
한편, 이 소설에서 ‘최’가 스냅 사진을 찍는 이유가 나오지 않네요. 그것만 들어갔어도 의미망이 풍성해졌을 법한데, 왜 그 얘기를 끝까지 안 보여줬을까요? ‘최’는 ‘사진’에 무언가 건 사람이잖아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나왔더라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그런 언급 없이 끝나버렸어요.

 

윤여름 :
예를 들어, 나중에 여기를 탈출하면서 발견된 ‘최’의 사진을 봤더니, 그 사진에 찍힌 사람들이 정상인이 아니라, 좀비거나 늑대인간으로 찍혀 있다고 한다면 더 재밌지 않을까요?

 

멧새 :
소설 속 사진은 작가 본인이 찍은 거죠. 쿠바의 하바나와 같은 곳에서 본인이 찍은 건데요. 그런데 소설에서 타운하우스 파티의 상류층들 이야기를 하면서 배치된 사진을 보면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아요. 외국 학생들 모습이나 히스패닉 계열의 가난한 유럽인으로 보이는 사람들 말이죠. 이들의 초상권 침해보다 문제는 이들을 계층적으로 또 인종적으로 차별하는 시선이 아닌가 싶었어요. 사진에 찍힌 이들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거니까요. 만약에 실제 맥락을 달리 생각하면, 이들이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고 하루 즐겁게 놀다가 작가의 카메라에 찍힌 거라면? 소설 앞뒤에 실린 사진들이 본문의 글과 빈틈없이 연결되는 사진은 아닌 것 같아요. 이 점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소설에서 사진의 기능이랄까 하는 것 말이죠.

 

윤여름 :
만약 이 사진을 뺐다면 풍자적 요소가 덜했을 거예요. 사진 때문에 더 비판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고 저는 생각했거든요. 거기서 오는 아이러니가 있죠. ‘민이가 둥글게 몸을 말고 잔다’는 것과 100쪽의 사진이 너무 안 맞잖아요. 작가가 일부러 괴리감을 줬다고 생각해요. 반면, 79쪽 사진은 완전히 인상 깊었어요. 글과 사진이 딱 맞았거든요.

 

멧새 :
사진과 글이 어긋나 보이는 것도 있고, 적절해 보이는 것도 있네요. 그렇게 한 데에 작가의 숨은 의도가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전반적으로 소설이 좀 거칠게 느껴지고 구성도 성기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그래서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이 역설적으로 가능해진 면도 있고요. 나아가 이 소설의 장점은 문장에 있다고 생각해요. 속도감 있는 단문 덕분에 잘 읽히고 이해가 어렵지 않았거든요. 어떤가요?

 

윤여름 :
네. 수식어 없이 속도감 있게 읽혔어요. ‘난쏘공’과 그런 점에서도 닮았네요.

 

왕버섯 :
근데 단문의 매력이 살아나려면 소재랑 문장이 착 붙어서 한 몸이 되어야죠. 소재가 나갈 때 문장도 한 발짝씩 나가는 거죠. 물론 이 소설의 문장은 짧고 잘 읽히는데, 기차의 창밖으로 풍경이 휙휙 지나가는 거 같아요.

 

멧새 :
조세희의 ‘난쏘공’은 단문인데, 앞 문장과 뒤 문장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러요. 시적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은 딱딱한데 문장 사이에 어떤 깊은 느낌이 있어서 이 소설은 산문인데 왜 시적인 느낌이 날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백민석의 이 소설이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럼 작가는 이 작품에서 미학적인 성취는 부차적인 것으로 두고 사회적 발언을 우선적인 것으로 두었기 때문일까요?.

 

커피적인평화 :
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이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적인 것과 산문적인, 또는 비소설적인 것을 섞은 것 같다고 느꼈어요. 작가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토해 내서 소설의 느낌보다는 에세이 느낌이 훨씬 많았어요. 읽을수록 그랬어요. 처음에는 인물이 등장하고 소설 형식에 따라 서사가 있긴 한데 뒤로 갈수록 리스크와 부와 아포칼립스 등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발언을 앞세우고 있다고 느낀 거죠. 그래서 소설 뒷부분에서 의미들이 명확하게 확 다가온 거 같고요. 앞부분은 상대적으로 모호했던 게 소설 형식이어서 그런 거 같아요.

 

윤여름 :
사진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 볼게요. 사진이라면 연상할 수 있는 단어가, 기자 또는 고발을 생각할 수 있죠. 근데 이 소설에서 ‘최’는 스내퍼(Snapper)예요. 스내퍼는 일상적인 장면을 찍는 사진사죠. 어떤 사회성이나 예술성으로 차려진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제가 계속 생각했던 건 ‘만 가족 타운하우스’의 일상과 같이 노멀한 장면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찍은 사진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는 그렇게 찍은 사진의 의미가 반드시 나왔어야 한다고 봐요. 그 시간의 의미까지도 알려주었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디스토피아 문학의 소재들

 

멧새 :
작품 안의 시간 배경을 얘기해 볼까요? ‘은’하고 남편하고 결혼한 게 2031년이죠. 그럼 타운하우스의 파티는 2032년이나 33년쯤 되는 셈이죠. 올해가 2022년이니까 앞으로 10년, 11년 후의 서울 그리고 강남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얘긴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윤여름 :
일단은 2031년이 되면 스내퍼는 없을 거 같은데요? 직업 선정이 좀 맞지 않는 거 같아요. AI가 이미 있어서, 그때쯤이면 스내퍼 없이도 일상을 기록할 거 같아요.

 

왕버섯 :
2031년이면 얼론 머스크의 테슬라 같은 기업에서 동네에 하나씩 스페이스 센터를 설립했다고 나오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아요. 그곳에서 달이나 화성에 있는 우주 센터로 가는 장면도 연출할 수 있겠죠.

 

커피적인평화 :
1950년대에 쓴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비교하면 좀 더 실제로 구현 가능한 미래 환경들이 제시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왕버섯 :
디스토피아 문학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소설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재들을 생각해 봤어요. 자살이나 자본주의 또는 타워팰리스 말고도 많죠. 요즘에 이미 유행하는 것 가운데 호텔형 공동주택인 ‘트리마제’의 룸투어 유튜브 영상이 매우 인기예요. 그런 현상이라든가 비트코인 문제를 담는 소설, 그리고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유튜버가 된 사회라든가 아이들의 문해력 저하, A4용지 반 정도의 글도 쓰지 못하는 일부 20대 등도 소재가 될 수 있어요.

 

윤여름 :
저는 이 양극화 사회가 너무 싫어요. 편가르기 하고, 서로 혐오하는…… 정말 혐오의 시대죠. 그걸 극복하는 글쓰기를 하고 싶어요. ‘극혐’이라는 낱말에 대해서, 그리고 이 소설의 ‘최’처럼 양극단의 지점에 있는 상류사회에 대한 동경 같은 것도 다뤄 볼 수 있죠.

 

커피적인평화 :
그러네요. 겉으로는 매일 ‘강남’을 비판하면서도 속으로는 강남에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이중성 같은…….

 

R.SSAM :
요즘은 그런 것도 있잖아요. ‘가난을 훔친다’는 말이요. 그러니까 요즘의 중산층이 자신들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 가난한 사람들은 화나는 거죠. ‘가난까지 훔친다’. 예를 들어, 비례대표 나오는 젊은 청년들이 ‘자기는 정말 가난하다’고 말하고, 부자들이 ‘자기는 무주택자다’, ‘월세 산다’고 하고, ‘나도 청약 당첨되고 싶다’, 이런 말을 연예인들이 방송 나와서 마구 하니까, 가난도 훔치는 세상이라고 말해요. 공공임대아파트에 가면 외제차가 그렇게 많대요. 무슨 지분을 부모님을 99로 해놓고 자기는 1로 해서 들어가 사는 거죠. 디스커버리 입고, BMW 타고요. 그런 이들을 위해 만든 아파트가 아닌데 말이에요.

 

커피적인평화 :
그렇게 하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하게 사는 거고, 있는 사람들은 계속 더 많이 가지려고 하죠.

 

멧새 :
빈부 격차 중심의 사회 양극화 문제가 디스토피아 문학의 고정 주제인 셈이네요. 다만 문학에서 빈부 격차 문제를 다루면서 체험사례나 자료 조사한 내용을 옮기면 사회 현실의 심각성을 다시 환기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방안에 대해서 독자와 함께 깊이 고민할 수 있는 장은 열 수 없을 것 같아요. 깊은 고심에서 우러난 통찰들이 작품 곳곳에 배어 있어야죠. 그걸 독자들이 맛보고 느끼고 읽을 수 있게 할 때 작가와 독자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일어난다고 봅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죠.

 

우리들의 근미래

 

멧새 :
앞으로 10년 뒤 우리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커피적인평화 :
크게 차이는 없을 것 같아요. 최근 친한 원장님들을 만났어요. 20대 때 처음 뵌 분들인데, 그분들이 20년 전에 그랬어요. ‘앞으론 아이들 가르치는 법이 달라질 거다’, ‘5G 동영상 나오면 대면 수업은 없어진다’, ‘모두 동영상 강의만 할 거다’ 그러셨거든요. 근데 사실 변한 게 별로 없어요. 교육 방식이나 교재도 크게 변하지 않았죠. 핸드폰만 계속 달라질 거 같아요. 10년 뒤라고 해서 못 사는 사람이 잘살거나 잘사는 사람이 못 살거나 온통 바뀌는 시대도 아닐 것 같고요. 그냥 항상 어떻게 이렇게 살지 하면서 지낼 듯해요.

 

윤여름 :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있겠죠? 여러분 만날 시간이 없을 수도. (웃음)

 

R.SSAM :
10년 뒤면 저는 학교에 있겠죠. 똑같을 거 같아요. 다만 이상한 선생님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채찍질하겠습니다. 절대 되고 싶지 않은 어떤 표본의 선생님이 있거든요. 정말 창피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왕버섯 :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요. 나이가 들수록 글 쓸 용기가 점점 사라지는데요. 10년 뒤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어떤 글을 쓸 때, 정말 쓰고 싶어서 쓰는지, 관성으로 그런 건지 이젠 잘 모르겠어요.

 

멧새 :
10년 전, 20년 전만 해도 어떤 목적이 뚜렷하진 않아도 무언가 쓰면서 느끼는 희열, 쾌감이 글 쓰는 이들에게는 분명히 있었고, 곁에는 늘 가족이나 친구들이 지지하고 응원하는 유대 역시 분명히 있었죠. 요즘은 그런 기반들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여타의 관계들이 다 끊어져서 글 쓰는 게 더 외롭고 고독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침해를 많이 당하는 일이 된 것 같아요. 요즘 시대의 글쓰기가 어떤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고서 혼자 쓴다고 하면 더 큰 고립감을 느끼기 쉬운 일이 된 듯해요. 이럴수록 친구나 가족이 글 쓰는 이를 더 잘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기 쉽지 않은 현실이 되었죠. 10년 후에는 글 쓰는 사람들의 지위나 품격이 좀 향상될까요? 그러길 기대할 뿐입니다. 마치기 전에 더 할 얘기는 없나요?

 

윤여름 :
얘기하면서 책을 살펴봤는데요. 소설 마지막에 ‘최’가 카메라에 관해 이런 말을 하네요. “카메라를 벗어버리는 일은 외부 세계의 일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현실의 진면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마주하는 순간, 공포가 엄습해 그의 발밑이 모두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는 몽롱세계가 좋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몽롱세계였기를 바랐다.”(149쪽) 그러니까 카메라가 어쨌든 유일하게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는 도구이고, 작가는 ‘최’에게 스내퍼 역할을 부여해서 ‘만 가족 타운하우스’에 진입시킨 거죠. 카메라로 이들의 삶, 이 사회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것을 요구했는데, 실제 현실은 엉망진창이어서 사진조차 제대로 찍힌 게 없었던 거죠. ‘최’ 역시 이 엉망진창인 몽롱세계에 깃들고 싶었던 마음이었기 때문에 더욱 제대로 된 사진이 안 나왔을 거예요. 어떻든 작가가 사진 찍는 일에 대해서 의미부여를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닌 셈입니다. 앞에 한 이야기들에서 많이 벗어난 건 아니지만, 조금 수정할 필요는 있네요.

 

멧새 :
결국 ‘최’ 스스로 사진 찍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네요. 정리가 됩니다. 긴 시간, 여러분과 함께 이 책에 관해 진지하면서도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애쓰셨습니다. 다음 책은 윤성희 작가의 『날마다 만우절』입니다. 오늘처럼 활발한 대화가 이어지길 기대하며 모임을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

 

 

 

 

 

 

 

 

 

 

 

마리아
멧새 | 책이라면 다 맛보고 싶은 쟁이   
리오
R.SSAM | 일년 내내 즐거운 독서 꿈나무   
베로


왕버섯 | 거친 야생에서 온갖 풍파를 이겨낸 왕버섯   
봉천댁
윤여름 | 나의 계절은 언제나 여름이었다   
파피루스
커피적인평화 | 꽤 다정한 책방지기   

 

 

 

   《문장웹진 202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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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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