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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기회

  • 작성일 2012-10-02
  • 조회수 1,652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을 둘러본다. 정적이 흐른다. 이제 저 붉은 깃발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면 운명이 결정된다. 앞으로 내게 남아 있는 생(生)이!

   나는 주문을 외우듯 기억해야 할 사항들을 작게 웅얼거린다.

   “카트는 50개…… 카트는 50개…… 카트는 50개…… 카트는 50개……”

   승리의 주문을 외우며 카트들을 노려본다. 열 개씩, 다섯 줄이다. 내 눈은 운동장의 카트들과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을 빠르게 스캔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정중앙! 양 옆으로 멀찍이 서 있는 녀석들보다 내가 더 빨리 카트를 잡을 수 있다! 역시 시작이 절반이다!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사회자가 움켜쥔 붉은 깃발을 노려본다.

   자, 어서 시작해!

   빨리 깃발을 흔들라구!

   나는 좀 더 빨리 달려 나가려고 무릎을 굽힌다. 몸의 중심을 앞으로 이동한 채 숨죽인다.

   “출발!”

   붉은 깃발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뛴다. 수많은 아이들이 뛴다. 나는 질 수 없다. 수많은 아이들이 나를 밀치고 뛴다. 나는 수많은 아이들의 어깨를 밀치고 뛴다. 누군가 넘어진다. 누군가 비명을 내지른다. 누군가 운동장 바닥에 나뒹군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는 카트를 잡았다!!!

   저기 봉황 두 마리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곳에서, 누구나 다 우러러보는 VIP석에서 아빠, 엄마가 지금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카트의 손잡이를 꽉 움켜쥔다. 내가 뛰어가야 할 곳을 노려본다. 그런데 카트를 잡지 못한 녀석들은 아직도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중에는 다른 녀석이 밀고 가는 카트에 치여 넘어진 녀석들도 있다. 넘어진 녀석들은 울상을 한 채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낙오된 녀석들. 경쟁에서 뒤처진 녀석들. 이런 녀석들은 늘 똑같다. 투지가 없다. 패배와 실패를 고분고분 받아들인다.

   쳇, 한심한 녀석들!

   나는 홱 몸을 돌려 2차 미션이 시작되는 곳으로 달려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녀석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 분명하다. 녀석은 내 카트를 뺏으려고 달려오는 거다.

   “카트는 50개…… 카트는 50개…… 카트는 50개…… 카트는 50개……”

   나는 승리의 주문을 외친다. 승리의 주문을 외치며 녀석을 향해 카트를 밀고 돌진한다. 내 것을 빼앗으려고 오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든 내게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이 녀석도 내게는 성난 황소일 뿐이다. 나는 성난 황소를 향해 돌진한다. 카트를 밀고 돌진한다. 성난 황소는 내가 민 카트에 배를 맞고 뒹군다. 녀석이 몸을 추스르기 전에 끝장을 봐야한다. 나는 넘어져 뒹구는 녀석의 손등 위로 카트를 밀고 지나간다. 녀석의 입에서 굉장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대로 앞을 향해 뛰어간다.

   와! 와!

   사방에서 함성이 들려온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계단을 가득 메운 사람들, 지금 앞으로 남은 생(生)을 걸고 전력을 다해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들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소리치고 있다. 그러나 카트를 잡지 못한 50명의 아이들의 부모들은 일어나 소리치는 대신 비탄의 한숨을 내쉬고 있으리라.

   “모두 집중! 두 번째 미션이다! 5분 안에 카트에 물건을 담아라! 어떤 물건이든 상관없다! 제한 시간은 5분! 단, 2만 원에 가장 근접한 금액의 물건을 담아온 사람이 1등이다!”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나는 운동장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진열대를 향해 달려 나간다.

   “이건 내가 먼저 집었다구!”

   방부제 섞인 햄이 잔뜩 놓여 있는 진열대 앞에서 두 명의 남학생이 싸우고 있다. 나는 빠르게 녀석들을 스치고 지나가 녀석들이 놓고 다투는 햄이 든 캔을 집어 카트에 담는다. 녀석들은 내가 햄이 든 캔을 가져간 줄도 모르고 계속 싸우고 있다.

   멍청한 녀석들!

   나는 다시 승리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이미 획득한 카트는 빼고 남아 있는 미션만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제한 시간 5분! 2만 원! 제한 시간 5분! 2만 원! 제한 시간 5분! 2만 원!”

   햄이 든 캔 옆으로 스모그 햄과 비엔나 햄과 떡볶이 떡과 고추장과 색종이와 스케치북과 딱풀 따위가 쌓여 간다.

   “2만 원! 2만 원!”

   나는 주문을 외치며 진열대들을 빠르게 훑어본다. 가능한 한 2만 원에 가까운 금액으로 장을 보려고 애쓴다. 그리고 하나 더! 카트에 담은 식품이나 물건들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함께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생(生)은 언제나 똑같았다.

   1단계 미션을 끝내면 2단계의 미션이 제시되었다. 2단계의 미션을 끝내면 반드시 3단계의 미션이 제시되었다. 지금 내가 내 남은 생(生)을 걸고 임하는 이 테스트 역시 마지막 한 사람의 승자만이 남을 때까지 몇 번이고 계속해서 미션은 제시되리라.

   “10! 9! 8!……”

   운동장을 둘러싼 계단에서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부모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먼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혹여 자신의 아이가 5분 안에 결승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까, 걱정이 된 부모 중의 한 사람이 실수인 듯 외치기 시작했으리라. 이제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외침은 운동장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정도다. 내 자식이 승자가 되기를 염원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하다.

   “5! 4! 3! 2! 1!”

   나는 제한시간 안에 결승선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 간신히.

   휴우─ 카트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누군가 자신의 카트로 내 카트를 들이받는다.

   다른 자리도 많은데 대체 뭐야?

   눈을 치켜뜨고 보았더니, 그 녀석이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녀석. 내 카트를 빼앗으려고 나를 향해 돌진해 왔던 녀석. 내가 민 카트에 배를 맞고 운동장 바닥에 나가떨어졌던 녀석. 그러나 녀석은…… 카트를 밀고 와 내 옆에 서 있다.

   나는 내 카트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녀석을 노려본다. 녀석도 카트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나를 노려본다. 카트 손잡이를 움켜쥔 녀석의 손등이 퍼렇다. 녀석의 눈빛만큼이나.

   나를 노려보는 녀석의 눈빛, 성난 황소의 눈빛, 아니 한 번 해보자는 눈빛, 아니 절대로 질 수 없다는 눈빛……이 낯익다.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다. 나를 소름 돋게 하는 눈빛…… 그 앞에만 서면 늘 주눅이 들어 버리는 눈빛…… 아빠의 눈빛!

   나도 모르게 VIP석에 앉아 있는 아빠를 쳐다본다. 멀어서 아빠의 눈빛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빠가 쓰고 있는 은회색의 안경은 언제나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다. 그 차가운 반짝거림이 나를 숨 막히게 한다.

   정말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라면?

   아빠라면 그럴지도. 아빠라면 ‘어쩌면’이 아니라 ‘확실히’ 그럴 수 있다. 카트 손잡이를 움켜쥔 손이 덜덜 떨린다. 휴우- 크게 숨을 내쉰다. 그러나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아빠, 엄마 옆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는 순간, 희박한 가능성은 확신으로 변한다.

   그래, 아빠라면 자식을 바꿀 수 있는 이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역시 친자식을 버리고 아빠를 선택했으니까. 아빠, 엄마 역시 얼마든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좀 더 현명한 선택이니까!

   언제부터 이런 법이 시행되어 왔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계속 이어져 내려온 법이었고, 이 법을 지켰기에 우리나라는 강대국이 되었다. 이제 막 17세 생일을 맞은 청소년들은 고등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딱 한 번,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나라에서 시행하는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정부는 아이큐 테스트에서부터 언어 능력, 수리 능력, 과제 집착력까지, 아이들이 가진 모든 능력을 테스트한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17세 생일을 맞은 아이들은 100명씩 이 운동장에 모여 테스트를 받아야만 한다. 테스트는 삼 일에 걸쳐 진행된다. 겨우 삼 일 동안의 테스트이지만 개개인의 성격이며 승부욕, 능력들까지 모두 판가름할 수 있는 테스트이다. 삼일 동안의 점수를 합하면 순위가 결정된다. 1등부터 100등까지.

   함께 테스트를 받은 100명의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지켜본 부모들. 아이들의 순위가 매겨지면 부모들은 자녀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계층의 부모들이 먼저 자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 물론 자신의 자녀를 선택해도 좋다. 그러나 자신의 자녀를 선택하지 않고 더 우수한 아이를 선택해도 좋다. 이 순간의 선택으로 부모자식 관계가 성립되면 죽을 때까지 바꿀 수 없다. 설령 친부모라 해도.

   삼십 년 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친아들을 선택하지 않고 아빠를 선택했다. 자신의 아이가 속한 그룹에서 1등을 한 우수한 아이를. 아빠는 가끔 그날을 회상하곤 한다. 만약 그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빠는 지금도 극빈자로 살고 있었을 거라고. 아빠의 친부모는 극빈층이었으니까. 아빠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극빈층의 부모는 자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부모야말로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자녀를 키워야 해! 생각해 봐라!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뛰어난 아이들이 못난 부모 밑에서 고생하다 재능을 꽃피워 보지도 못하고 극빈층으로 전락해 버리는 모습을. 이 나라가 지금처럼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모두 자녀선택권이라는 법이 있기 때문이란다. 뛰어난 아이를 자식으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국이다!”

   어디선가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확신에 찬 그 목소리,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상위 1퍼센트의 부모야말로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자녀를 키워야 한다고 말하던 그 목소리!

   신념에 찬 그 목소리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내젓는다. 머리를 흔들어 젖은 물기를 털어내듯 쓸데없는 불안과 잡념을 털어 버린다.

   “자! 모두 집중! 이제 모두 차례로 줄을 선다. 자기 차례가 오면 계산대 위에 카트에 실은 물건들을 올려놓는다. 2만 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1등이다!”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흔든다. 동시에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계산대 앞으로 가서 줄을 선다. 5분 안에 결승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아이들은 이미 탈락하고 없다.

   어느새 나를 노려보던 녀석은 나를 지나쳐 사회자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 아직 2차 테스트는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녀석은 미리 좋은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는 사실을 저 녀석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서둘러 카트를 밀며 계산대로 뛰어간다. 계산대 위에 아이들이 올려놓은 물건들이 수북하다.

   “일만팔천이백육십 원! 일만칠천삼백칠 원! 일만팔천구백이십 원! 일만이천육백 원! ”

   사회자가 물건 값을 소리칠 때마다 함성과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좀 더 2만 원이라는 금액에 가까운 물건들을 가져온 아이의 입가에는 미소가 흘러넘친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한숨과 울음으로 돌변한다. 자신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은 아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제 곧 내 차례가 돌아온다. 나는 아빠와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녀석의 카트 안의 물건들을 빠르게 훑어본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녀석이 좀 더 2만 원에 가까운 금액으로 장을 봐 온 것만 같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녀석이 이기면 어쩌지?

   앞으로 3차 테스트도 남아 있는데……. 녀석보다 높은 점수를 확보해야만 한다. 앞으로 있을 3차 테스트에서 녀석을 확실히 이기려면 앞서가야만 하는데…….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문다. 순간 움찔하며 VIP석에 앉아 있는 아빠를 본다. 휴우─ 다행히 아빠는 내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보다. 긴장하면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는데, 아빠는 내가 아랫입술을 깨물 때마다 내 손등을 후려친다. 내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약함의 증거라는 것이다. 마음의 불안을 남 앞에 드러내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빠의 가르침이다. 휴우─ 나는 크게 숨을 내쉰다. 아랫입술을 깨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계산대 위에 내 물건들을 올려놓는다!

   “일만구천구백삼십 원!”

   사회자가 내 물건 값을 외친다. 입가에 미소가 퍼진다. 나도 안다. 이렇게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것쯤은. 그래도 쉽게 미소를 거둘 수 없다.

   내가 1등이다!

   나는 보란 듯이 VIP석을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인다. 내가 승리의 V를 하늘 높이 들어올리자 마자 여기저기서 와- 하는 함성이 울려 퍼진다. 나는 보란 듯이 나를 노려보던 녀석을 향해 나의 승리의 V를 들이민다. 녀석이 피식 웃는다.

   곧 녀석의 머리 위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일만구천구백칠십 원!”

   녀석은 나보란 듯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려 승리의 V를 내 앞에 들이민다. 이제 함성은 녀석의 몫이다. 녀석은 나를 누르고 1등을 거머쥔다. 내 입가의 미소는 한숨으로 바뀐다.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한다.

   “집중! 모두 집중! 마지막 미션이다! 이제 15등까지만 저쪽에 마련되어 있는 천막으로 이동한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사람들은 각자 장봐온 물건들을 다시 카트에 싣고 천막으로 이동한다! 1등 12번! 2등 27번! 3등 95번……”

   사회자가 제 번호를 호명하자마자 아이들은 급히 카트에 물건을 주워 담기 시작한다. 천막을 향해 뛰어간다.

   1등 12번! 나를 노려보던 녀석의 번호는 12번!

   나는 나보다 한 발 앞서 뛰어가는 12번의 등짝을 노려본다.

   절대로 질 수 없어!

   나는 내 앞을 가로 막는 아이라면 누구든 서슴지 않고 카트로 밀어 버린다. 내 카트에 치인 녀석들이 뒤쫓아 온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내 눈은 오직 2차 테스트에서 1등을 거머쥔 12번이라는 번호만을 노려본다. 12번은 벌써 제 번호가 크게 쓰여 있는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나는 서둘러 천막을 휘둘러본다. 12번과 95번 사이에 27번의 천막이 있다.

   천막 안에 작은 조리대와 씽크대가 마련되어 있다. 조리대 위에 스톱워치와 미션이 담긴 종이봉투가 놓여 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봉투를 열어본다.


 

카트에 담아온 물건들로 요리를 만들어라!

제한 시간은 20분!




   좋았어!

   2차 테스트와 3차 테스트가 반드시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내 짐작이 맞아들었다. 나는 카트에 담아온 물건들 중에서 요리 재료로 쓸 수 있는 것들만 골라 빠르게 조리대 위에 올려놓는다. 조리대 위에 햄이 든 캔과 스모그 햄과 비엔나 햄과 떡볶이 떡과 고추장을 늘어놓고 먼저 냄비에 적당량의 물을 붓는다.

   내가 만들 요리는 부대찌개. 이 요리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아빠는 상위 1퍼센트의 부모에게 선택되어 17세 때부터 고급 요리만을 먹으며 살아왔다. 환경 오염 물질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 백 프로의 유기농 채소만을. 그런데도 가끔 극빈층의 부모와 살 때 먹곤 했던 부대찌개를 직접 요리해 먹곤 한다.

   “이것만은 끊을 수가 없다니까!”

   손수 끓인 부대찌개를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곧 아빠의 미소는 화난 얼굴로 바뀐다.

   “평생 이런 것들만 먹고 살았다면 난 벌써 성인병에 걸려 죽고 말았을 거야!”

   그러고는 미션을 해치우듯이 부대찌개를 후다닥 먹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곤 했다. 물론 냄비 밑바닥에 남아 있는 방부제 섞인 햄들을 내려다보며 진저리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째깍째깍째깍째깍─ 스톱워치의 시간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간다. 옆 천막에서 칼질 소리가 들려온다.

   대체 12번은 무슨 요리를 만들고 있는 걸까? 칼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칼로 도마를 내려찍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내 마음도 덩달아 급해진다.

   “앗!”

   방부제 섞인 사각형의 햄이 든 캔의 뚜껑을 따다 손가락을 베였다. 휴지로 닦을 시간조차 없다. 나는 베인 손가락을 입으로 빨며 빠르게 칼질을 해댄다. 큰 덩어리의 사각형 햄을 네모반듯하게 자르고 스모그 햄과 베이컨 햄을 아무렇게나 냄비 속에 붓는다. 마지막으로 떡볶이 떡을 넣고 고추장을 푼다.

   좋았어!

   이제 잘 끓이기만 하는 거야!

   숟가락을 들고 한 입, 국물 맛을 보는데, 천막 밖에서 와-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12번이 있는 천막에서 들려오던 칼질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뭐지? 12번이 벌써 요리를 끝낸 거야?

   나는 불의 세기를 좀 더 강하게 한다. 내가 만든 부대찌개는 어쩐 일인지 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째깍째깍째깍째깍─

   스톱워치의 시간이 제한 시간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내가 만든 부대찌개를 내려다본다. 방부제가 잔뜩 든 햄들……이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어디에선가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평생 이런 것들만 먹고 살았다면 난 벌써 성인병에 걸려 죽고 말았을 거야!”

   1등을 하지 못한다면, 아니 상위 1퍼센트 안에도 들지 못한다면, 어쩌면 아빠는 나를 선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평생 이런 음식들만 먹고 살게 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옆 천막의 12번이 내 방과 내 침대와 내 욕실을 차지할 지도 모른다.

   “아니야! 절대로 지지 않아!”

   나는 이제야 끓기 시작하는 부대찌개를 내려다본다. 냄비 밑바닥에 남아 있는 부대찌개 찌꺼기들을 내려다보던 아빠와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진저리치기 시작한다.

   “동작 그만! 모두 천막 밖으로 나온다! 30초 안에 천막 밖으로 나오지 않는 자는 자동 탈락이다!”

   나는 후다닥 불을 끈다. 아직 찌개는 다 끓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여기서 자동 탈락이라니!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천막 밖으로 달려 나간다.

   “뭐냐 너? 어디 쓰레기통에라도 빠졌다 온 거냐? 어휴, 냄새!”

   등짝에 12번을 단 녀석이 부러 내 옆으로 와서는 코를 킁킁거린다.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 올려 옷에서 무슨 냄새가 나나, 하고 냄새를 맡고 만다. 그랬더니 12번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제 코를 싸쥔다.

   “이게 진짜!”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12번 녀석을 향해 주먹을 날릴 뻔했다. 괜한 신경전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흥분해 버리고 만다. 다행히 내가 주먹을 날리기 전에 먼저 녀석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그 비웃음에 나는 번쩍 정신이 든다.

   어느새 운동장 정중앙에 심사대가 마련되고 아이들이 만든 음식들이 번호표를 달고 천막에서 심사대 위로 옮겨진다. 내가 만든 부대찌개 옆으로 참치김치찌개와 주먹밥과 계란말이 등등의 음식들이 놓인다. 뭐 대부분 엇비슷한 정도의 음식이다. 이 정도면 뭐 그렇게 나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12번 천막 쪽에서 우와─ 감탄사가 들려온다. 진행요원이 12번 천막에서 들고 나온 문제의 요리가 심사대 위에 놓인다.

   대체 뭐지?

   나는 고개를 길게 뺀다. 유리접시 위에 울긋불긋 꽃이 피어 있다. 나는 좀 더 길게 고개를 빼고 문제의 요리를 살핀다. 잡채다. 잘 썰어 먹음직스럽게 볶아낸 당근, 양파, 계란지단이 노릿노릿한 당면을 꽃처럼 덮고 있다.

   세상에, 잡채라니!

   20분 만에 잡채를 만들어 내다니! 그것도 5분 안에 장본 재료들로 잡채를 만들어 내다니!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VIP석에 앉아 있는 아빠를 쳐다본다. 멀어서 아빠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빠의 시선은 내가 아닌 심사대 위에 놓여 있는 잡채에 고정되어 있다. 나는 아빠를 바라본다. 마음속으로 외친다.

   아빠! 제가 만든 음식은 저 잡채가 아니라 부대찌개란 말이에요. 아빠가 이것만은 절대로 끊을 수 없다던 바로 그 부대찌개라구요!

   그러나 내가 아무리 절박하게 외쳐도 아빠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심사가 진행되는 내내 내가 만든 부대찌개라 아니라 12번 녀석이 만든 잡채를 보고 있다.

   “이제 3차 테스트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1등은 12번의 잡채! 2등은 27번의 부대찌개! 3등은……”

   내 귀에는 사회자의 말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12번이 1등이라니! 내가 밀려나다니!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다. 이제 곧 3일 동안 치러진 테스트의 종합 점수가 발표되리라. 보나마나 12번 녀석이 1등이다. 보나마나 나는 2등이 아니면 3등이다. 이제 곧 종합 순위가 발표되고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부모들이 먼저 차례대로 자식을 선택하게 되리라.

   어디선가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뛰어난 아이를 자식으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국이다!”

   신념에 찬 아빠의 목소리. 단호한 아빠의 목소리!

   어쩌면…… 아빠는 내가 아니라 나보다 뛰어난 12번 녀석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발끝에서 시작된 떨림은 어느새 혈관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전해진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12번 녀석을 쳐다본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녀석도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와 같은 눈빛으로. 아빠와 똑같은 눈빛으로.

   아빠는 과연 나를 선택할까?

   만약에 아빠가 자신과 똑같은 눈빛을 가진 저 녀석을 선택한다면? 아니야,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그러나 생각은 어느새 나를 앞질러 달려간다. 내 책상, 내 침대, 내 방을 차지한 녀석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내 자리에 앉아 내 가족에 둘러싸여 밥을 먹고 TV를 보는 녀석의 모습이 현실인 양 생생히 전해진다.

   “학부형들께는 이제 곧 100명의 학생들의 종합순위표가 전해질 것입니다. 상위 1퍼센트의 부모님들에게 먼저 자녀선택의 권리가 주어집니다. 학부형들께서는 종합 순위표의 학생 이름 옆에 체크를 하시고 댁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자, 학생들은 모두 대기실로 집합하세요!”

   머리 위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아이들이 대기실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진행요원들이 광장식 계단 정중앙에 있는 VIP석부터 종합 순위표를 전하고 있다. 아빠가 이제 막 전해 받은 종합 순위표를 든 채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아빠의 시선은 어느새 12번 녀석에게 가 있다.

   아빠는 과연 내 이름 옆에 체크를 할까?

   과연 나를 선택할까?

 


작가소개


이명랑(소설가)


1973년 서울 출생. 1998년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창작집 『입술』, 『어느 휴양지에서』, 장편소설 『삼오식당』, 『나의 이복형제들』, 청소년소설 『구라짱』, 『폴리스맨, 학교로 출동』, 『할머니의 정원』 등을 출간했다. 대산창작기금과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을 받았으며 2012년 현재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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