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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기

  • 작성일 2021-11-01
  • 조회수 1,579

[창작 - 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어떤 경기



배시현





등장인물



이보현, 강승주


두 인물 모두 30대 초반 이상의 연령으로, 구체적인 나이와 성별은 무관하다.



시간은 달이 갓 뜨기 시작해 아직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은 초저녁, 장소는 잡초가 곳곳으로 우거져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곳이라는 게 바로 눈에 들어오는 근린공원이다.


어슴푸레한 조명 속에서,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있는 승주 들어와 공원 주변을 둘러본다.
태도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롭고 편안해 보이지만, 눈빛은 수상하리만큼 형형하다.
중간 중간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모습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도 하다.
그러던 중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자 승주, 공원을 나선다.

잠시 뒤 보현이 스마트폰을 보며 공원 안에 들어선다.
이미 여러 번 둘러본 SNS 피드를 또 한 번 새로고침하며 걷던 보현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다.


보현깜짝아.


보현은 다시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하며 걸음을 옮긴다,


보현뭐 재밌는 일 없나.


보현의 맞은편으로 승주 들어온다.
보현을 발견한 승주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가 인사한다.


승주안녕하세요!


보현(무심코 흘긋 고개를 들었다가 승주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자) ……저요?


승주네, 안녕하세요!


보현네…… 안녕하세요.


보현은 승주를 인사성 좋은 주민 정도로 생각하며 지나친다. 여전히 시선은 스마트폰에 박혀 있다.
보현을 빤히 지켜보던 승주는 보현이 완전히 나가기 전에 보현을 불러 멈춰 세운다.


승주손님.


보현(뒤돌아보며) 저요?


승주네, 손님.


보현(이상한 사람인가 싶어) 저 손님 아닌데요? 무슨 손님을 찾으시는 건지…….


승주아니시긴요, 이보현 손님 맞으시잖아요.


보현네? (경계하며) ……누구세요? 누구신데 절 아세요?


승주저 모르세요? 우리 나름 인연 깊은 사인데.


보현……누구신데요?


승주제 머리스타일이 작년이랑 달라서 그런가? 저 강승주예요.


보현(기억하려 애쓰며) 혹시 저랑 친구……?


승주와, 정말 저 누군지 모르시나 보네. 진짜 섭섭하다. 저는 손님 처음 본 날 머리스타일부터 옷 색까지 다 기억하는데.


보현(경계하며) 누구세요?


승주가 대답하지 않고 자신만 쳐다보자, 보현은 찝찝함에 그냥 지나치려 한다.


승주동북산로 37 에이빌라 203호 이보현 손님.


보현(뒤돌아서며) 뭐야? 누구세요 진짜? 누구신데 제 개인정보를.


승주시골집 강승주요.


보현시골집? 그게 뭐…… (기억이 나) 잠깐, 설마?


보현이 기억을 되짚는 사이 승주는 스마트폰에서 보현이 올린 글을 찾아 읽는다.


승주‘포장 주문하러 간 가게에서 진상 취급당해 기분 더럽네요.
’저희 어머니가 지금 많이 아프십니다.
그래서 한동안 아무것도 제대로 드시질 못하다가 어제 갑자기 닭곰탕이 드시고 싶다고 하시더라구요.
기쁜 마음으로 k동에 있는 전문점에 닭곰탕을 주문했습니다.
새로 담근 깍두기도 밑반찬으로 꺼내 놓고서 음식 나올 시간 맞춰 갔는데 제 닭곰탕이 없었습니다.
주인이 주문 받은 걸 까먹었다고 하네요. 그럼 상식적으로 사과가 먼저 아닌가요? 그런데 가게 주인은 ‘어떡하죠? 다음에 먹으면 안 될까요?’ 이러더라구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차타고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사과부터 하셔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니까 죄송하다고 대충 한 번 말하고선 왔다갔다 든 기름 값 쳐서 환불해 줄 테니까 가라고 하더라구요.
누가 지금 돈 때문에 이래요? 집에서 닭곰탕 기다리는 저희 어머니는요? 화가 나서 따졌더니 주인은 환불해 드린다고 했는데 더 이상 뭘 어쩌라는 거냐며 지금 바쁘니까 할 말 있으면 점심시간 끝나고 와서 하라고 절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k동 닭곰탕 전문점에서는 화도 가게 주인 시간 맞춰서 내야 하는지 몰랐네요.


보현(어이없어서) 저기요, 사장님. 지금 그 글 때문에 온 거예요? 이미 일 년이나 지난 일인데? 그리고 사장님이 글 내려 달라고 해서 이틀인가 지나서 바로 내려드렸잖아요.


승주(추억 이야기를 하듯 즐거워하며) 맞아요! 기억하시는구나! 그때 저한테 자필 사과문 받았다고 인증한 다음에 글 지우셨잖아요.
그 사과문 진짜 열심히 세 장 꽉꽉 채워 썼는데. 사실 맨 첫 장만 올리셔서 좀 서운했어요.


보현아니, 그래서 절 왜 찾아왔냐구요. 사장님 일부러 여기서 저 기다린 거 맞죠? 내가 퇴근할 때마다 이 공원 지나다니는 거 알고?


승주기회를 드리려구요.


보현기회? 무슨 기회요?


승주손님, 혹시 그때 제가 빌면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요?


보현(일부러 퉁명스레) 아뇨, 안 나는데요.


승주괜찮아요, 지금 또 말하면 되죠. 그때 제가 제발 글 지워 달라고 빌면서 뭐라고 했냐면요.
제가 이 가게를 친동생이랑 같이하고 있는데, 어제 동생이 배달 나갔다가 접촉사고가 크게 나 입원한 상태다.
그래서 밤새 병원에 있다가 혼자 주방 일이며 홀 손님, 배달 손님 감당하다 보니 정신도 없고, 여유도 없어서 실수한 것 같다.
제 딴에는 모두 죄송해서 드린 말씀이었는데 불쾌하셨다니 정말 죄송하다. 이렇게 말했어요.


보현그런데요? 뭐 어쩌라구요.


승주(감탄하며) 와! 손님 진짜 일 년 전이랑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보현저기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똑바로 하세요. 왜 계속 빙빙 돌리면서.


승주(듣지 않으며) 그때도 이랬어요. 정신이 있건 없건 그건 사장님 사정이라고.
손님이 거기까지 알 필요 있냐고.
그거 다 핑계고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니까 뒤늦게 사연 팔면서 감정적 호소하지 말라고.
그런데요, 그러는 손님은 왜 글에다가 병든 어머니 사연 팔았어요?


보현뭐래 진짜, 저기요. 여기 왜 왔냐구요. 뭐 하자고 온 거냐구요.
본인 말만 하지 말고 물어본 말에 대답부터 하시라구요!
지금 이거 경찰에 신고해도 문제없는 상황인 거 알고는 계시죠?


승주말했잖아요, 기회를 드리러 왔다고.


보현기회요? 내가 내로남불한 게 기분 나쁘니까 이제라도 사과할 기회를 주겠다, 뭐 이런 거예요?
진짜 웃기는 사람 아니야, 내가 사과 안 하면요? 뭐 어쩔 건데요?


승주(웃으며) 손님 뭘 오해하신 모양인데, 저 사과 받으러 찾아온 거 아니에요.
내로남불이라뇨, 손님이 뭐 틀린 말 했나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손님도 감정에 호소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보현진짜 뭐라는 거야, 됐구요. 그냥 신고할게요.


보현이 112에 전화하려는 사이 승주는 여상스러운 얼굴로 크로스백에서 권총을 꺼내 장전한다.
총을 본 보현은 실소가 터져 신고 전화를 하려던 손을 내린다.


보현이 사람 진짜 웃기는 사람이네, 지금 뭐 하려고 총 꺼내신 거예요? 협박하려고?


승주딱히 협박용은 아니고, 손님이 너무 제 이야기에 집중 안 하시는 것 같아서요.


보현사장님이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네.
설마 제가 그걸 진짜 총이라고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여기 미국 아니에요.


승주안 믿을 것 같긴 했어요. 저라도 그럴 것 같아서.


승주는 하늘 위로 총을 쏜다. 강한 총성음이 들려온다.
보현은 총소리에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한다.


승주손님 말처럼 미국이 아니라 일반 총은 못 구했고, 사제로 구했어요.


승주가 다가가자 보현은 놀라 달아나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걸음이 꼬여 넘어지고야 만다.


승주(보현에게 다가가며) 아이구, 아프게 넘어지셨네.


보현(벌벌 떨며) 저, 저기요, 왜, 왜 이러세요? 저한테 왜, 왜 그러세요…….


승주저희 가게 망했어요 손님.


보현죄송해요, 사장님 제가 잘못했어요.


승주손님이 뭐가 죄송해요, 그때 저한테 말씀하셨잖아요.
손님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썼을 뿐이니 그걸로 피해가 생기면 다 자업자득 아니겠냐고.


보현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그때는 제가 철이 없어서…….


승주갑자기 곤란하게 왜 이러시지, 손님 저 사과 받으러 온 거 아니라니까요.


보현그럼 뭐, 뭘, 도, 돈 필요하세요?


승주(듣지 않으며) 손님. 손님이 인터넷에 저희 가게 글을 올려 둔 게 정확히 사흘하고 7시간이었죠?
그러고 나서 분명히 삭제했는데, 왜 얘는 아직까지 구천을 떠돌아다닐까요?
분명히 지웠는데, 왜 아직도 인터넷에 좀비처럼 등장하는 걸까요?


보현그, 그건, 다른, 다른 사람들이 스크랩해 가서…….
사장님 제, 제가 인터넷 장의사 고용해서 그 글들 다 지워 달라고 할게요! 오늘 당장 말할게요!


승주됐어요, 이미 가게 망했는데. 천 개쯤 더 떠돌아다녀도 아무 상관없어요.
사람들이 글 퍼가는 게 손님 탓도 아니고.


도통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승주의 반응에 보현은 본인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최대한 숨죽인 채 승주의 눈치를 살핀다.


승주지난 1년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봤어요.
정말 그날 내가 가게를 망하게 만들 정도의 잘못을 저질렀나.
단지 말투가 불친절했을 뿐인데 손님 알기를 좆같이 아는 집은 참교육 가야 한다.
여기 어디냐 좌표 찍어라, 이런 댓글들을 보고 있으니 처음엔 억울해 죽겠더라구요.
전 정말 하늘에 맹세코 손님을 진상이라고 생각한 적 없거든요.
그렇다면 우리 가게를 궁극적으로 망하게 한 건 손님일까?


승주의 총부리 보현 쪽을 향한다.


승주한동안은 그런 것 같더라구요. 왜냐면 내가 손님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거든요.


보현……사장님, 제가, 제가 정말.


승주아픈 어머니 얘기는 왜 쓴 거예요? 어머니 멀쩡하게 본가에 잘 계시던데.


보현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승주아니에요, 저 지금은 가게 망한 거 손님 탓이라고 생각 안 해요.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내가 생각한 이유랑 같은가 해서.
말해 봐요, 이유가 뭐예요?


보현……그래야 더, 상황이 자극적으로……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승주손님도 감정에 호소하려고 했던 거죠? 심판관들 마음을 움직여야 하니까.


보현……심판관들이요?


승주네. 우리를 지켜보는 심판관들이요.


보현(심기를 거슬릴까 봐 조심스레) ……그게 누군데요?


승주손님. 어렸을 때 잘못해서 어른들한테 맞아 본 적 있죠?


도통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물음에 보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도망칠 방법이 없을지 궁리한다.
승주의 총부리는 여전히 보현을 향해 있다.


승주전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이었던 윤리 선생님한테 엄청 맞았어요.
지각해서도 맞고, 성적 떨어져서도 맞고, 숙제 안 해 와서도 맞고.
그런데 그분은 꼭 때릴 때마다 몇 대 맞을 거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전 그럼 만날 3대에서 5대 사이를 얘기했는데,
어느 날 우리 반 실장이 그러는 거예요. 몇 대 맞아야 하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냐고.


보현그래서 선생님은 뭐라셨는데요?


승주맞을 짓을 한 놈이 더 잘 알지 않겠냐구요.
그래서 실장이 한 대라고 했는데, 와 그 한 대를 평소의 다섯 배 정도 풀스윙으로 때리더라구요.
한 대나 다섯 대나 통증 강도로만 보면 비슷비슷할 것 같은 느낌?
저렇게 마음대로 강도 조절해서 때릴 거면 몇 대 맞을지는 왜 물어보는 거야 싶더라구요.


보현그러게요…… 나쁜 선생님이셨네…….


승주더 웃기는 건요, 원래 윤리는 누가 복도에서 뛰든 말든 별로 신경 안 썼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본인이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복도에서 뛰는 애 한 명을 잡아내서 막 윽박지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몇 대 맞을 거냐고 묻는 걸 보는데…….
아니 씨발 평소에는 0대 맞을 짓이었다가 자기 기분 따라 존나 처맞을 짓 되네 싶은 거예요.


보현진짜 나쁘고 못된 선생님이셨네요.


승주이렇게 생각하면 맞을 짓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않아요?
보편타당한 기준을 어길 때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기준 위에 감정이 있어요.
그럼 결국 맞을 짓이라는 건 상대를 때리고 싶은 마음을 잘 포장해 놓은 것 아닌가?
그러면서 꼭 상대를 위해 하는 행동인 것마냥 굴고. 안 그래요?


보현맞아요, 다분히 수직적이죠…….


승주역시 손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셨군요!
그래요, 그러니까 인터넷에 거짓말 사연을 쓴 거겠죠.
사람들 감정을 움직이려고! 그래야 명분이 손님 쪽에 서니까!


보현명분이요?


승주정당하게 감정을 배설할 수 있는 명분이요! 나를 향한 분노를 즐길 수 있는 명분!
그래야 사람들이 신나게 이 스포츠를 즐길 테니까!


보현그게, 다 무슨, 이야기인지 저는, 잘…….


승주손님 아직도 모르겠어요? 우린 콜로세움 안에서 경기를 한 거예요. 아주 재미있는 경기!
누가 더 욕먹을 만한 놈인지, 누가 더 비난받을 만한 놈인지!
그래서 전 손님이 거짓말한 거? 이제 화 안 나요. 손님은 그냥 가진 무기를 강화했을 뿐이니까.
반성문 편집해서 올린 거? 그것도 그럴 수 있죠.
세상 어떤 검투사가 적이 방패를 떨어뜨렸다고 그걸 주워주겠어요.
그런 짓을 했다간 심판관들이 둘 다 죽였을걸?


보현(승주의 감정이 격해지는 게 눈에 보이자 반쯤 울먹이며) 사장님, 아니 선생님, 일단…….
일단 그 총은 옆으로 치워 놓고 이야기하시면 안 될까요? 저한테 화나신 게 아니시라면서요.


승주우리 가게가 망한 이유는 내가 그만큼의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손님한테 졌기 때문이에요. 그렇죠?


보현(다급히) 네, 네, 맞는 말씀이세요.
저도 글 올릴 때 가게가 망할 거라고는 정말 전혀 상상 못 했어요.
진짜로 그 정도의 잘못을 저지르신 것도 아니구요.
그냥 저는 소소하게 같이 욕이나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못난 마음이었을 뿐인데.


승주사람들이 일을 키웠죠?


보현네! 멋대로 막 다른 사이트에 퍼 나르고, 저는 상호명까지는 말 안 했는데 자기들이 마음대로 가게 좌표 찍고, 불매한다고 하고, 또 글 지웠는데도 원본 지킴이 하면서 계속 내용 재생산하고!


승주재밌으니까! 그러니까 경기판을 더 키우는 거지. 그 사람들은 우리한테 관심 없어요.
그냥 우리가 어떻게 싸우는지, 재밌게 보기만 하면 그뿐이거든.


보현맞아요, 사람들이 나빠요, 사람들이.


승주어쨌든 경기 이긴 거 축하해요. 깔끔하게 인정할게요.


승주는 총부리를 보현에게서 거둔다. 보현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보현네, 네, 정말 감사합…… 아니, 감사할 건 아닌데 (사이) 저, 그럼 기회를 주기 위해 오셨단 말은?


승주아. 새 경기를 시작해 볼까 해서요.


보현……네?


승주는 총을 물끄러미 보더니 자신의 턱밑에 가져다 댄다.


보현사장님! 뭐 하시는 거예요!


승주원래 그냥 혼자 시작할까 했다가, 그러면 너무 재미없는 경기가 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미리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려 왔어요.


보현무, 무슨 경기, 무슨 대비요?


승주제가 여기 오기 전에 예약 게시글을 하나 걸어 놓고 왔어요.
음, 아마 지금으로부터 한…… 네 시간쯤 뒤에 올라갈 것 같은데. 제 유서예요.


보현유서라니, 그게 지금 무슨, 사장님! 잠깐, 잠깐만요!


승주무슨 내용을 썼을지는 대충 짐작가시죠?
제 얘기에 손님이 거짓말한 증거랑, 약간의 신상 정도.
뭐, 이 정도만 있어도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어때요, 사람들 진짜 재밌어하겠죠?


보현(덜덜 떨며)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진짜 다 잘못했어요.


보현은 급하게 무릎을 꿇고 싹싹 빌기 시작한다.


보현거짓말로 상황 부풀려서 죄송합니다, 사과문으로 괜히 갑질한 것도 죄송하고, 또 사장님 사정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일부러 어그로 끈 것도 죄송하고, 또…….


승주왜 이러세요, 저한테 사과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그 경기는 이미 끝난 경기잖아요.


보현죄송합니다! 제가 무조건 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저 내년에 결혼도 해야 하고.


승주(말을 끊으며) 손님. 그건 저 말고 심판관들한테 말하세요.
상대편에 무기를 막 노출시키시면 안 되죠.


승주는 방아쇠를 장전한 뒤 제 턱밑으로 다시 겨눈다.


승주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보현사장님, 사장님!


승주하나.


보현제 전 재산 다 드릴게요! 대출을 받아서라도 필요하신 돈 다 해드릴게요!


승주둘.


보현사장님! 동생분도 생각하셔야죠!


승주셋.


보현으아악!


총성음이 크게 울린다. 보현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린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사이
승주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보현은 고개를 돌려 멀쩡하게 서 있는 승주를 본다.


보현……사장님?


한참 동안 배가 아플 정도로 크게 웃던 승주는 상황파악이 덜 끝나 벙쪄 있는 보현을 보며 총을 흔든다.


승주나더러 여기 미국 아니라면서요. 영화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면서요. 안 속는다며?
손님, 저처럼 평범하게 장사하는 사람이 무슨 수로 진짜 총을 구해요?


보현아, 아니, 아까, 아까 그 총소리는…….


승주공포탄.


보현그, 그럼, 그 유서 얘기는.


승주는 가방에서 전단지 몇 장을 꺼내 보현에게 건넨다.


승주손님. 저 곧 신장개업해요.
이 근처니까 와서 그때 못 먹은 닭곰탕 꼭 먹고 가요. 알았죠?
앞으로 인터넷이든 어디든 배설은 작작 하시구요. 당할 짓 계속 하면 또 당하니까.


승주 퇴장한다.
홀로 남은 보현은 잠시 멍하니 정신을 못 차리다가,
전단지를 보고서야 자신이 놀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현은 헛웃음을 연거푸 터트리다가 객석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보현재밌냐? 이게 재밌어? 이게 재밌냐고!


사람들을 향해 씩씩거리던 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부리나케 공원을 나선다. 암전.


-막-













배시현
작가소개 / 배시현

극작가·연출가. 극단 〈좋은 친구들〉 소속/TBN 광주 교통방송 작가. 2019 국립극단 희곡우체통 선정 낭독 공연 〈별을 위하여〉(극작) 등.


《문장웹진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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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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