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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현실 그 너머를 꿈꾸고 그린다

  • 작성일 2008-05-09
  • 조회수 664



 



전창운 선생님의 그림





<그림 그리는 사람을 ‘더 가까이서’ 만나 이야기한다는 것은, 나에게 이전처럼 그의 나이를 ‘전혀’ 물을 수 없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저 그림 그리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붓으로 또 다른 세계를 낳는 일일 것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화가의 손가락 끝에 묻은 엷은 초록색 얼룩을 몇 개 찾아낸 일은 우연이었지만 우연만도 아닌 것이 환한 오후에 그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는 시간은 아주 조금, 그의 일면을 알 수 있었던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는 이야기 중간 중간 아이처럼 웃었다.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우는 듯도 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화실과 이어진 마당에 돋아난 이름 모를 새싹들까지 웃게 만들었다. 이 봄에 내가 만난 또 다른 생명인 그림이 화실에 그득했다. 이 봄에 피는 사과나무 같은 존재로 그는 그렇게 오후 내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화법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저 너머에 있는 ‘희망’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는 수염이 하얀, 그리고 머리카락이 배꽃 동산처럼 하얀 예술가였다. 나는 그의 화실로 뛰엄뛰엄 걸어가면서 그가 이전에 썼던 ‘소낭구를 그리다’라는 산문을 떠올려보았다. 그는 화가이고 시인이었다. 나는 이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났다.>


 

“소낭구를 그리다”


 소낭구는 솔잎을 그려도 소낭구 같지 않고, 전체를 그려도 그리려는 소낭구에는 미치지 못 할 것 같아, 밑둥을 한아름 껴안아 보고 싶은 마음으로 몸통 기둥만 그린다. 소낭구는 껍질만 보고도 믿음직하다. 그 속엔 세월과 밝은 햇살이 숨어 있다. 뒷산 앞내의 삶터에 우리의 조상과 께 살아온 소낭구의 껍질에서 말이다.

 마음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이 그림이라면 그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을 갖고 있는 사람일까. 그는 내게 있어 하나의 그리움의 대상인 그림 그 자체이며, 일인칭의 소낭구이며, 소낭구 중 깊은 산, 이를테면 정선이나 설악 등에서 볼 수 있는 소낭구의 밑둥이다. 그렇다.   그는 나무 중에서도 사철 늘 변함없는 소낭구이고, 소낭구 중에서도 아주 연조가 높은 그런 지혜로운 나이테를 지닌 소낭구이며, 내가 끌어안고 싶은 소낭구의 밑둥처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맑은 공기가 있어 좋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에선 맑은 냄새가 난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복잡한 생활 속에서 그는 그림으로 한 가닥 숨통을 열어준다. 만약 그가 없다면 우리는 이 질식할 것만 같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만큼 그의 소낭구 그림들은 매우 특이하다. 그 그림들이 어떻게 해서 탄생되었는가. 나는 감히 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그것은 그가 걸어서 사물에서 다가감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에게 다가가 만나보고 만져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나서 그는 비로소 그림을 그린다. 

 이것은 일종의 몸짓언어의 화풍일는지도 모른다. 몸짓언어의 화풍, 그렇다. 나는 참으로 옳은 말을 한마디 한 것 같다. 그의 치열한 정신을 그렇게밖에는 달리 부를 수 있는 말을 나는 아직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자연그림이 이것을 아주 잘 나타내 주기 때문인데, 그의 자연그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언젠가 인류를 적으로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그림이 소낭구 밑둥처럼 믿음직스럽고 우리에겐 산소와 같다는 말이다.


- 전창운 화백의 산문.『풍경도둑놈 전창운, 人門畵門』중에서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런저런 일로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특히 그림 그리는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하네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야기를 위해 잠시 붓을 놓았을 뿐입니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문학’과 ‘그림’ 사이의 ‘관계’가 렇지 않을까 싶어요. 이 둘의 관계를 아름다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이 둘의 사이에서 ‘사랑’ 같은 것을 느끼지요.

 오늘의 대화는 많은 청소년들이 관심을 갖는 지면에 소개된다고 하니,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네요. 음식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 청소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였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네들이 모두 건강해서 아름다운 이 세상의 주역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요. 먼 길을 걸어가는 예술가로서 주고 싶은 마음이 많아요.

 저는 오랫동안 교직 생활을 했어요. 그래서 젊은 친구들, 한 사춘기의 아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가까이서 많이 보았지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말로’ 아이들도 데이트도 좀 하고 뭐 이래야 하는데, 도회 생활에서는 많이 힘들죠. 이런 사정은 시골아이들도 마찬가지죠. 시골도 점차 도시화되어가는 상황이니까요.

 한국에서는 대문을 나서면 모든 게 돈이죠. 또 유혹이 끊이질 않고요. 그 유혹은 돈하고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지요. 옛날 제가 살았던 시대에는 연인과 함께 길을 걷는다 하면, 그 길은 논둑길이고 인근 나무숲길이고 개울가 근처였지요. 헌데 요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게 없어졌어요. 흐르는 물가라고 해서 찾아가 보면 이미 공장 폐수로 오염된 경우가 많아요. 또 숲이라고 해서 들어가려고 하면 입장료를 내야 하고요. 아무튼 그들에게도 은밀하고 다정한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장소가 없어졌어요. 아무튼 요즘의 청소년들은 이런 데서부터 많은 제약을 받지 않나 싶어요. 물론 데이트할 주머니 사정도 힘들고요.

 겉으로 보면 우리 청소년 문화는 화려하게 치장된 듯싶어요. 실상은 한 없이 쓸쓸하죠. 청소년 문화는 짙은 화장을 하고 현대적인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에요. 그리고 내면은 궁핍하고, 서글프고, 섭섭하. 이게 현실 것 같아요. 또 이런 모습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이 아닌가 싶어서 안타까워요. 이러한 때 그들에게 어떤 예술적인, 그림 그리는 이로서의 생각을 덧대어준다는 것은 중요한 것 같요. 궁핍한 마음의 그들에게 감히 어떻게 접근해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제 마음 깊은 곳에 걱정은 있지만요. 이런 마음은 삶의 길을 먼저 는 이들에게 무거운 짐이 아닌가 싶어요.



선생님의 근황은 어떠신지요? 하루일과를 간략히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침밥 먹고 이곳 화실에 도착해 그림을 그리죠. 그러다가 어두워지면 집에 가는 일이 다예요. 하루라도 그림을 안 그리면 몸이 떨려요. 추워서 떨리는 게 아니라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몸이 떨리죠. 해가 길지 않은 것처럼, 나이를 좀 먹
내게 남은 날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주일 내내 그림 그조차 월화는 마치 ‘한 마디’처럼 훌쩍 지나가는 같아요. 그리고 나머지 수목금토일 KTX를 탄 것처럼 빨리 흘러요. 또 가끔은 일상사의 이런저런 일도 봐야 하는 때가 있.

 저는 내 호흡으로 살면서 내 신앙을 존중해서 드나들듯 이곳 화실을 찾아요. 그리고 그림은 내 영혼에 대한 어떤 ‘만짐’이라고 생각해요. 그 ‘만짐의 장난감’이 나의 그림이기도 하죠. 이 생각으로 지금 ‘그림 그리는 일’을 많이 해야겠다 생각하죠. 저의 일과는 이래요. 그림과 함께 이곳에 머물고 있죠.



 선생님은 글도 많이 쓰시는 화가로 알고 있습니다. ‘글과 그림’ 의 경계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시는지요?


=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를 했지요. “낙원에는 화가도 없고 시인도 없다”고. 이 말의 뜻은 낙원에는 일체의 고통이 없다는 일 거예요. 이 말은 다시 현실 속에 있는 여러 가지 그늘지고 고통 지워진 것이 예술이라는, 즉 산고(産苦)를 통해서 태어나는 것이 예술이라는 뜻일 거예요. 그런데 천상, 낙원, 파라다이스에는 고이 없으니까 예술이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죠. 어쨌든 우리의 마음은 미래를 향 사는데 현실은 대단히 곤고한 삶의 연속이라는 것이죠. 그 생활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하는 일은 어찌 보면 쉬어 가는 여울 같기도 하죠. 그러나 저는 예술이 현실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이유는, 예술의 ‘예(藝)’라는 글자 하나만 잘 살펴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싶어요. ‘藝’자 안에 들어있는 ‘埶’는 ‘나무를 심는다’는 뜻이죠. 그리고 그 위에 있는 ‘풀 초(艹)’와 ‘운(云)’자가 더해져 ‘김을 맨다’라는 뜻이니, 결국 ‘藝’는 ‘나무를 심고 가꾼다’는 말이죠. 저는 이러한 풀이가 ‘예술’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예술은, 즉 나무를 심고 갖고 가꾼다는 것, 결국 생명에 관심을 두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또 그 생명을 찬미하고 찬가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얼마 전까지도 IMF의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힘든 생활 속에 있었죠. 사실 지금의 경제 상황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죠. 그때나 지금이나 어려운 건 마찬가지죠. 마치 어두운 터널 속에 있는 것 같은 상황일 거예요. 이런 상황은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다가 가랑이가 쭉 째진 격’이죠. 그래서 우리의 현실이 더 어려워진 것 같아요. 이렇게 밥 먹고 살기도 힘든 때에 예술이 뭔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죠. 그러나 저는 이렇게 어려운 때, 어렵고 실의에 빠져 심지어는 드러누워 걷기조차 힘든 때 그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것(저는 이것을 ‘가까운 일으킴’이라고 부르고 싶어요)을 주어 그들이 기를 갖고 다시 일어나 뛰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생명에 관심을 둔 예술의 힘이고 역할이 아닐생각해요.

 어려울 때 읽은 짤막한 시구 하나가 힘든 이에게 큰 힘을 주고, 한 편의 그림이 희망과 용기를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죠. 어려울 때 예술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려울 때야말로 예술의 힘이 발동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생활의 어려움이 더할수록 예술에 종사하는 분들은 더 좋은 그림을 그리고 더 좋은 글을 써서, 그들 생활의 일면을 보여주어 힘든 이들에게 좋은 영양소랄까, 힘이 되는 좋은 음식제공해야 해요. 저는 그림 그리는 이로서 분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과 글이라는 두 장르 사이에 경계가 있다면, 이 경계를 오가는 재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글과 그림을 함께 좋아하시는 선생님은 두 장르 사이에서 어떤 마음인지요?


= 그림 그리는 이로서 느끼는 것인데, 그림은 시와 비교할 때 특히 산출되는(작품화) 면에서 똑같지 않나 싶어요. 조금 넓 이해하자면 비단 시와 그림 아니라 모든 예술이 다 똑같지 않나 생각해요. 생산 과정을 살펴보면 그림 다른 예술과 분리될 수 없죠. 시 역시 마찬가지예요. 이들 장르는 어떤 사물에 대한 관심이관찰로부터 시작하죠. 그 다음에는 관심과 관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작품을 위해서 관찰 대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끄집어내죠. 다시 말해 대상에 ‘감동’이라는 에너지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변화’를 주게 되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시도 그림처럼 작품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예술을 하겠다는 이들은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사용하여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선)을 잘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음식을 먹을 때나 담소할 때, 술을 먹을 때도 상황을 잘 살피고 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조용히 자기 것으로 가져려고 노력하는 간화선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같은 맥락에서 성문적(聲聞的: 석가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불제자를 이르는 말) 자세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죠. 좋은 글을 쓰려고 하는 이는 자연의 소리인 바람소리, 새소리, 미물 풀벌레들이 나누는 소리까지 자연이 내는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해요. 그 소리는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어도 좋고 절규라도 좋아요. 자연에서 나오는 갖가지 소리를 유심히 들으려는 ‘관심’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와 같은 소리에 대한 관심을 모두 묶어 ‘오디오(audio)’라 표현하면 좋겠네요.

 우리가 음악의 총체적인 시스템을 오디오라고 할 때, 오디오란 라틴어의 아우디오(audire)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에요. 아우디오란 ‘듣는다’라는 뜻이죠. 그런데 그것 ‘누가’ 듣느냐가 중요하겠죠. 즉, 그것은 ‘내가’ 듣는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아우디오죠. 내가 나의 소리로부터 벗어나 내가 아닌 다른 대상, 즉 인간과 만물의 소리를 쫓아가 유심히 듣는 관심과 관찰로부터 생산적인 마음이 일어나죠.

 여기서 말하는 ‘오디오’는 매우 중요한 요소예요. 특히 청소년들 중에 앞으로 예술 창작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삶의 자세죠. 저는 이처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권하고 싶어요. 예술가가 되려면 무엇보다 잘 들어야 해요. 그런 사람이 ‘관심자’ 혹은 ‘관찰자’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자기 이야기만 하려고 해요. 시간이 많으니까요.

 저는 또 이들이 마음의 현미경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해요. 도자기를 굽는 도공이 온도계가 아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오디오를 가진 것처럼 말이죠. 가마 앞에 앉은 도공은 온도계가 없답니다.  다만 불의 색깔 열기 그릇이 구워졌을나타나는 표정과 냄새, 소리를 감지하는 눈, 코, 입이 도공에게는 온도계처럼 작용한답니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마음의 눈, 코, 입’이라는 새로운 온도계를 갖고 있어야 해요.

 이것은 시(문학)에서만 아니라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다시 말해서 ‘관심→ 감동→ 변화’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똑같지요. 이 중 변화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면, 탁자 위의 컵을 보고 그대로 그리는 건 ‘변화’가 아니에요. 또 탁자 위의 컵과 똑같이 빚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단지 이전의 컵과 똑같이 만드는 기술 뿐이죠. 이것은 창작 태도가 아니지요. 창작이라고 할 때는 ‘그것을 보고’, ‘그것이 아닌 것을’ 만들어냈을 때이지요. 창작이라는 것은 새롭다는 말인데, 새롭다는 말은 이전에 있었던 것과 다르다는 말이에요. 전 있었다면 다르게 만들어야죠.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따스한 봄날이 우리 가까이 와 있을 때 이 봄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을까, 작년 봄과 재작년 봄이 아닌 금년 봄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는 일과 같아요. 만물이 소생하는 봄처럼 나의 생활 새롭게 하라는 의미로 봄이 온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죠. 이렇게 봄을 비로소 자기의 봄으로 가지려고 했을 때, 생활에 활력이 생기작품에도 소득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부활절 그저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념자는 행사가 아니라, 작년의 부활절과 달리 금년 부활절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는 일이지요. 그 의미는 새롭게 태어나라, 새롭게 살라는 뜻이 아닌가 싶어요.    이처럼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삶을 준비하는 이들은 ‘변화’라는 생활의 태도를 기본적으로 가졌으면 좋겠요. 물론 이러한 삶의 태도는 글과 그림을 하겠다는 젊은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선생님 그림의 주요 테마는 무엇인가요?


= 제 그림에는 노동하는 여인의 모습이 많이 나오죠. ‘노동하는 여인’은 사실 제 어머니요. 크게 비유해서 노동하는 여인이지요. 저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아요. (잠시 침묵) 예전에는 어머니의 음성이 울타리를 벗어난 일이 없었죠.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우선이었고 어머니의 음성은 작게만 들리던 그런 시절이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마저 돌아가시고 나니까 오히려 어머님 음성이 매일 크게 들려왔지요. 어머님에 대한 생각은 큰 돌로 눌러놔도 튕겨져 나왔지요.

 내 어머니는 어땠을까? 여러 날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했어요. 이 문제는 곧 내 어머니이자 우리 모두의 어머니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제 세대의 어머니들은 시집와 수줍어 신랑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죠. 그렇게 한평생 수줍어하며 ‘일하는 여성’으로 살다 돌아가셨지요. 그러니까 얼굴 없는 여인으로 와서, 얼굴 없는 여인으로 사시다가, 밤낮 수건 뒤집어쓰고 일하시다가, 얼굴 없는 여인으로 영영 ‘되돌아 앉은’ 여인들이었지요.

 저는 옛 여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천변풍경’을 함께 떠올리죠. 하루치 빨랫감을 가슴에 품고 개울가에 가서 맑은 물에 빨래하는 모습을 떠올리지요. 당시의 어머니들은 옷가지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빨면서 가족에 대한 사랑을 점검해 보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한 따스한 어머니의 마음이 ‘세탁’에 있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의 세탁하고는 많이 달랐죠.

 천변풍경의 마음이 이런 것 같아요. 깨끗이 빤 옷가지를 말려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 또 빨래하면서 집에서 못 다한 얘기들을 빨래터에 모인 아낙네들끼리 했죠. 집에서 있었던 섭섭한 얘기도 풀고 말이죠. 정보도 교환했겠죠. 어머니들은 ‘문물(文物)’이 아니라 ‘문문(文文)’을 서로 교환했던 것이죠. 이것은 천변풍경 속에서뿐만 아니라 들일을 하면서도 그랬을 테죠. 김을 매거나 씨를 뿌리면서도 아낙네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줄지어 앉아 수군수군 얘기하면서, ‘노동하는 어머니들’의 마음을 서로 헤아려주고 위로하였죠. 요즘 말로 그들이 모인 공간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졌던 것이죠.

 이렇듯 노동하는 여인들이 우리 어머니들이에요. 그래서 제 그림의 화제로 어머니들을 자주 그렸죠. 그리고 그들 제 그림의 화제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네요. 그들은 모두가 훌륭한 시인이며 소설가며 또 수필가라고 생각해요. 또 그들이 만들어내는 가느다란 몸짓 언어, 그것 모두가 다 그림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화가와 시인이 따로 존재하지 않다고 요.

 샘가를 지나던 사람이 목이 말라 아낙네에게 “거, 물 좀 먹읍시다.” 했을 때, 우리네 어머니들은 바가지에 그저 물만 퍼서 내민 게 아니었지요. 그들은 바가지에 한 잎의 잎사귀를 띄웠죠. 이것은 멋있는 행위였을 뿐 아니라 나그네에게 여유로움까지 준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여유로움을 갖춘 사람이 시인이지 않을까요? 피곤한 사람, 목마른 사람에게 여유로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여유로움을 주는 이가 바로 시인이거든요. 사람의 마음을 좀 느슨하게 해주고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고 화가의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이런 의미로 보자면 먼 옛날, ‘노동하는’ ‘얼굴 없는’ 어머니들의 모습 자체가 시인이고 화가임이 분명해요. 그래서 작품에서 노동하는 여인의 모습을 자주 떠올리지요.




 

 

 이와 같은 ‘노동하는 여인’이라는 선생님의 주요 테마가 선생님의 그림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생명’에 대한 관심이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예술은 동물이나 식물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인간의 삶 속에 있고, 살아 있는 인간에게 어떻게 하면 즐거운 양식이 될까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예술의 근본 취지이자 목적이라고 한다면, 저도 똑같이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관심이 있죠. 그러한 관심에 저에게도 밀착되어 있는 것이지요. ‘노동하는 여인’은 ‘나’의 어머니일 수 있고 ‘우리들’의 어머니 수 있요.

 저는 그동안 야외 스케치를 많이 다녔어요. 남들은 단순히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나간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저는 살아 있는 생명을 가장 가까이서 만나 그들과 ‘관계’를 맺으러 나가는 예요. 그래서 제 그림에는 실경을 사실적으로 본뜬 그림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왜 야외로 나가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어떤 때는 이런 질문에 답하기가 싫어서 햇볕 쬐러 나간다거나 바람 쐬러 나간다, 물하고 같이 놀려고 나간다, 두엄 냄새 맡으러 나간다, 새소리 들으러 나간다 하는 말로 둘러대지요.

 사실은 이런 모든 것들이 내 그림의 자양분이 되기 때문에 나가는 것이지요. 그들과 같이 놀면서 좀 전에 말한 대로 ‘오디오’하려고 야외로 나가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시각적으로만 내 그림을 보고, “선생님은 똑같이 안 그리는데 뭐 하러 야외로 나옵니까?” 하고 묻죠. 그럼 저는 또 다시 햇볕 쬐러 나왔다고 대답하죠. 실경 그대로 뜰 것 같으면 사진을 찍으면 되지 뭣 하러 야외로 나와서 그리겠어요.


 저는 제 자신이 ‘생명의 파수꾼’이라고 생각해요. 생명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그것이 곧 인간 사랑일 수 있고, 만물에 대한 사랑일 수 있고, 그것은 결국 흙을 사랑하는 마음과 결부는 일이라고요. 흙 모든 존재로부터 밟히는 존재죠. 또 모든 것을 수용하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생명을 발아시키는 존재이지요. 흙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돼요. 그래서 제가 들녘의 풀 한포기에 관심을 갖고 야외로 나갔다는 얘기는 풀 한 포기뿐만 아니라 풀포기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또는 풀을 흔드는 바람소리, 풀이 설 수 있게 해주는 흙 모두에게 관심 갖고 놀려고 나가는 것이지요. 단지 풀 하나만을 묘사하기 위해 야외로 나선 것은 절대 아니요.



하나의 그림이 무에서 유로 태어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려진 그림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림이라는 것은 쉬운 말로 ‘자기적 그리움’이라고도 얘기할 있을 거예요. 다시 말하면 자신의 그리움을 표현한 게 그림이죠. 그리움, 이것은 너무 중요한 얘기라고 생각해요. 그리움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각일 거예요. 이 생각 안에는 중요한 것들이 또 많지요. 창조주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인간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지요. 그 많은 선물 중 희망이라는 선물도 주었지요. 내일이라는 선물 주었고요. 다음 칸이라는 선물도B 소망이라는 선물도 주었지요. 그리고 그리움도 선물로 주었지요.

 ‘생각’ 안에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가 들어있요. 신이 인간에게 희망을 안 줬다면 우리는 살아 이유가 없었을 거예요. 내일이라든가 다음 달이라든가 내 년이라는 것, 특히 일주일이라는 단위를 7일이라는 날짜로 끊어준 것, 한 달을 30일로 끊어준 것, 일 년을 열두 달 365일이라는 날짜로 끊어준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에요. 인간에게 ‘내일’이라는 희망을 갖게 했는데, 일주일이 100일이라든가 500일라면 너무 가혹하죠. 일 년을 1000일로 끊어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철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의 마음은 지금 물건을 못 팔았지만 다음 칸에 가면 많이 팔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어요. 우리 인간에게 희망과 소망이라는 선물을 줬으니 그림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그리움을 그리는 것이지요. 이는 곧 자신의 생각을 풀어헤쳐놓은 것이지요. 누군가는 어떤 것을 보고 그리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림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거라고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고 해요. 맞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이 그림이지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볼 수 는 것을 그린다고 해도 좋고요.

 ‘있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에펠탑은 분명히 파리에 있지요. 헌데 지금 이 자리에서는 에펠탑은 안 보이죠. 또 숭례문도 지금 이 화실에선 보이지 않죠. 불에 타 버렸어도 잔해는 일부 남았는데 지금 여기서는 숭례문이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숭례문은 분명히 있어요.

 세상에 ‘있다’고 하는 것만 다 보이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 눈에 보이는 별 뒤에도 ‘가려진 별’이 수없이 있죠.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요. ‘희망’이라는 눈길, ‘소망’이라는 눈길, ‘마음’의 눈길로 보면, 부산에 있는 애인도 눈 감으면 내 코앞에 벌써 와 있지요. 오히려 생각하면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상상해서 보는 ‘마음의 눈길’로 보자면 수없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렇게 해서 본 것을 화폭에 담는 사람이 화가입니다. 이것은 시인도 똑같지 않나 싶어요.

 젊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의 눈길로 산다면 부자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의 생각, 자기의 그리움을 풀어쳐놓은 것, 자기의 생각을 용해시켜놓은 것이 그림이라고 한다면 생각 속에는 과거를 회상해서 풀어놓은 추억 기억도 있겠지요.

 그리고 그리움은 과거의 그리움과 내일을 희망하는 그리움으로 나눌 수가 있을 거예요. 저는 이 중에서 ‘내일을 희망하는 그리움’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우리 청소년들은 이런 생각을 놓치지 말아야 해요. 또 ‘내일을 희망하는 그리움’을 갖고 있는 청소년들 가운데 건강한 화가와 시인이 많이 나올 것 같아요. 창조주가 준 이 ‘희망이라는 보약’을 잘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급변하는 시대, 도시화되어가는 이 시대에는 ‘내일을 위한 희망’이라는 걸 놓치면 안 돼요. 희망이라는 걸 꼭 잡아야 해요. 어찌 보면 ‘희망’이라는 걸 막연하게만 생각하는데 이걸 ‘의지’라는 막대기에 꽉 붙들어 놓으세요. ‘생각’과 ‘희망’을 꼭 안고 산다면 예학도(藝學徒)도로서 훌륭한 길을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선생님의 경우는 선생님이 ‘그리고 있는(대상, 세계)’ 그림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요.


= 매화나무가 필요하다면 매화나무를 심으면 돼요. 개나리가 필요하면 개나리를 심으면 되고, 사과나무를 필요로 한다면 사과나무 묘목을 심으면 돼요. 그리고 그 나무에 있는 꽃향기라든가 열매 같은 것들에 대한 관심, 이를테면 냄새, 맛, 이런 것들을 원한다면 내 손으로 심고 가꿔 열매를 수확해서, 냄새를 맡고 맛야만 진정으로 ‘내 것’이 돼요.

 다시 말해서 내 그림은 사과나무가 아니에요. 사과나무나 개나리가 그림이 될 수 없듯이 내 그림은 사과나무가 아니에요. 그 사과나무가 아니에요. 내 작품 속에 있는 내 마음의 사과나무지요. 그래서 내 마음대로 열매 맺게 하고, 내 마음대로 향기를 낼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은 진정으로 내가 맛보아서 좋을 수 있는 것, 그 맛을 남에게 선보였을 때 그들도 모두 진정으로 나와 함께 즐거운 맛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아가 그런 마음속의 사과나무를 기르는 것, 즉 재배하는 것이지요.

 마음의 사과나무를 재배하는 것이 제 그림이에요. 마치 시인이 시어를 골라내고 자기가  먹어봐서 틀림없다고 느꼈을 때, 세상 사람들에게 즐겁게 던져주는 유익한 음식물처럼 내 그림도 내 캔버스 안에서 만들어서 남에게 즐겁게 던져주는 것이죠. 내 캔버스 안에서 내 사과나무를 심어가는 것이 제 그림이요. 저는 그렇게 저의 그림과 마주 앉아 있지요. 



 색에 대한 선생님의 다채로운 경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주로 어떤 색을 사용하시는지요?


= 그림에서는 색과 형태가 따로 있을 수가 없어요. 앞 얘기대로 하자면, 저는 자연을 그대로 그린다고 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나의 모든 생각이, 전혀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것에서 뚝딱하고 나온 것이냐 하면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색 또한 선험한 것들의 영향을 받는다고 봐야 할 거예요. 그것은 생활 중에, 여행 중에 또는 어느 현장의 경험에, 또 남의 것을 본 것들 중에, 또 자연적인 것, 인공적인 것 그리고 책에서 본 것, 책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나만의 것, 이런 모든 것들이 ‘모여서’ 내 것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겪은 것이지요.

 제 그림에는 원색적인 색깔이 많아요. 그래서 얼핏 보면 강렬해 보이고 평면적이기도 하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말하길 시간을 두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단히 평화스럽다고 해요. 이것은 그림을 그리는 이로서 제 자신만의 마술이 아닌가 싶어요. 이것은 색만 가지고 얘기하기는 힘들지요. 그림의 화제(畵題)하고도 관련이 있지요. 색이란 단지 어떤 형태를 메우는 색깔에서만 아니라 어떤 화제를 다루냐에 따라서, 거기에 부합되는 색하고의 관계에 따라서 이야기를 해야 해요. 앞서 얘기했듯 저는 자연을 그대로 모사하지 않고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해요. 제가 사용하는 색 자연을 모사하지 않고 추상화하려고 하고 또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색이라고 보면 될 거예요. 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색이죠.  



선생님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 혹은 사람의 형상은 어떤 존재로 그려지나요?


= 흔히 하나의 화면에 인물만 들어와 있는 그림을 인물화라고 하는데요, 저는 이런 인물화만 그려본 적은 거의 없어요. 들녘에서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채로 일하는 여인, 또는 그 여인들이 머리에 뭔가를 무겁게 이고 걸어가는 그림을 그렸죠. 그런데 이 그림 속의 걸음은 ‘마음의 희망’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걸음이지요. 단지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수고로운 자로 그치지 않고, 좀 더 나은 곳을 향한다는 그런 의미의 그림이죠.


 인간은 길 위에 있는 존재이고 그 길을 따라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죠. 따라서 희망이라는 건 저 멀리, 김용택 시인이 말한 것처럼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는 것이죠. ‘그리운 것들은’ 저 멀리 있어요. 이것은 시인뿐만 아니라 화가에게도 그렇고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그럴 거예요.

 예술가들은 앞에 있는 전경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경 너머에 있는 후경에 있을 것만 같은 어떤 환상을 거머쥐려고 해요. 그것이야말로 자기 기다림의 그 무엇이죠. 그쪽을 향해 려고 하는 이는, 보이는 길도 좋고 보이지 않는 길도 좋아요, 다만 길을 통해서 려고 할 뿐이죠. 그 길은 남이 만들어 놓은 길일 수도 있고, 또 자기가 만들어가는 길일 수도 있지요. 그저 그 길을 따라서 걷는 거예요. 그 길은 인간, 생존, 생명, 행복의 길이 아닌가 싶어요. 한 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살아있다고 볼 수 없겠죠. 살아있다면 변화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맥락이죠. 우리는 변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또 변화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이것이 제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이고 ‘사람의 형상’이죠.



 선생님은 언제부터 화가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생각하셨는지요?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데 어떤 계기가 있었을 법한데 그림에 대한 열정은 언제 왔는지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계속 그림을 그렸을 뿐이지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3년 때에 결정했죠. 그 시절은 1950년 6.25 직후였는데,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죠. 가난의 평준화 시대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그 시대에 처음으로 환쟁이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했을 때 허락할 부모는 없었죠. 그림을 그리겠다고 한 후에는 굉장한 어려움이 있어요. 그런데도 당시 부모님은 정히 네가 그림을 그리겠다면 ‘그래라’ 하고 허락해 주셨죠. 화가로 성장한 지금 제 모습을 아버지가 보았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거예요. 아버지께서, 말하자면 ‘결재’를 해주셨기에 오늘까지 제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아버지께서 큰 용단을 내린 덕분이죠. 아마도 시대를 앞질러 보신 분이 아닌가 싶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일이 가장 복되다는 말이 있죠. 그러나 좋아서 선택한 이 일이 이렇게 첩첩산중일 줄은 몰랐어요. 청소년들도 자신이 선택한 일일지라도 때론 정말 어렵다는 걸 알아야 해요. ‘첩(疊)’이라는 글자를 한번 보세요. 밭전(田) 자가 세 개가 붙어 있어요. 그리고 그 아래 ‘의(宜)’ 자가 참 복잡하고도 흉악하지요. 또 그것이 겹겹이니 참 힘든 일이죠. 그곳에 샘물이니 파라다이스니 무릉도원이 있다고 믿는 일이야말로 정말 고되고 힘든 일이죠. 보통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가난, 상대적 빈곤, 물질적인 어려움을 어느 정도 참고 견뎌낼 수 있느냐 하는 결심이죠. 한 길가는 이의 마음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겠냐 하는 마음, 그 마음의 재충전이 많이 필요하죠. 예술가의 길은 이런 고민을 너무 많이 하게 하죠. 거의 매일매일 해야 해요. 이렇게 하면 현실이 보이고 저렇게 하면 저쪽의 이상이 있으니, 이쪽저쪽으로 목 돌리기가 참으로 고달픈 일이죠.



지난 시절 선생님께 영향을 준 이들은 누구였나요? 젊은 시절 좋아했던 화가는 누구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미술 선생님이셨어요. 그래서 담임선생님 심부름을 하다 보니 어느덧 미술실 출입이 가능했고, 또 선생님이 그리는 그림을 자주 접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 시절의 미술선생님은 일반 선생님하고 달라보였어요. 어린 시절에는 뭐가 어떻게 다른지 잘 몰랐지요. 그 모습이 화가의 모습이었을 텐데 말이죠. 그 다음에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미술 선생님이 새로 오셔서 제가 미술대학에 갈 수 있도록 열심히 응원해 주셨죠. 생각해 보니 지금의 저는 혼자 된 것이 아니에요. 그 분들의 염력으로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같아요. 이 외에도 여러 분들의 도움이 있었죠.

 그 당시 공부할 때는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았는데, 그때는 왜 그런 소개를 잘 안했는지 모르겠어요. 서양 사람들 조상 얘기는 참 많이 들었지요. 피카소가 어떻는 얘기들, 아그리파가 어떻다, 비너스가 어떻다고 하는 얘기들도 많았지요. 또 고갱 고흐 비교하는 얘기들도 많았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것들은 그리스 로마의 케케묵은 죽은 영혼에 관한 얘기들이었죠.

 그네들 얘기 중에서 고흐가 귀때기를 잘랐다면 우리에게는 조선시대 최북이라는 자가 있지요. 그는 자신의 눈을 찔렀죠. 당시만 해도 요즘 인기가 많은 이중섭이나 박수근과 같은 이들에 대한 소개를 거의 들을 수 없었어요. 그러고 보니 교육에도 문제가 있었던 듯싶어요.

 미대 들어갈 때는 나도 고흐 고갱처럼 되고 싶었지요. 그때는 고흐, 고갱과 같은 드라마틱한 삶에 취했던같아요. 저는 특히 ‘고갱 아저씨’가 더 멋있어 보였어요. 이런 감상은 미대 다닐 때까지도 있었지요. 나도 원양어선을 타고 먼 바로 나갈 볼까 하는 생각 있었죠. 이런 꿈과 낭만을 가졌던 시절이 저에게도 있었지요. 이런 것들이 나를 그림의 길로 들어오게 고, 지금도 계속 그림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데 잔잔한 영향을 주고 있어요.



선생님은 문인들과도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가깝게 지낸 문인들에 대한 회상을 들려주십시오.


= 그 동안 여러 시인들을 뵈었었죠. 특히 천상병 시인은 옛 명동시절 저한테 200원갔는데 아직도 못 받았어요.(허허) 그 분은 많은 돈이 필요 없는 분이셨어요. 그저 막걸리 값 50원, 100원이 필요했던 분으로 기억요. 그리고 조병화 선생님하고는 가끔 술을 했지요.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집사람이 애를 낳는다고 해서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간 일이 생각나네요. 우리 집 큰 아이는 조병화 선생님하고 술을 마시다가 받은 아이죠. 그 분하고는 술을 참 맛있게 마셨지요. 또 김장호 선생님하고도 술을 참 많이 했죠. 김장호 선생님하고는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기 이틀 전까지도 술을 마셨요. 또 윤강로 시인하고는 보성학교에 같이 있었던 인연으로 참 많이 만났지요. 또 이생진 선생님하고도 가까이 지냈어요. 그 분의 시를 좋아해서 감각적인 시를 참 많이 외웠죠. 또 황금찬 선생님하고도 곧잘 마셨지요. 또 이청준 선생님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로 가까웠는데 최근에는 깊은 병으로 만남이 좀 어려워졌죠. 좀 아쉽네요.

 저는 그 옛날에 《심상》이나 《시문학》,《현대문학》에 삽화를 그리면서 시인들을 많이 만났어요. 지금도 인사하며 지내는 시인들이 많죠. 왜 이런 만남이 자연스러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요. 시인은 우리 환쟁이들하고 같은 기분으로 사는 분들 같아요. 같은 체질이죠. 이들과의 만남이 좋아요. 시인들 그림 그리는 분들을 만나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눈빛들이에요. 대체로 글을 쓰시는 분들은 자신의 말을 좀 줄이지요. 특히 시인들 가운데는 그런 분들이 많은 편이고요. 헌데 그림을 하시는 분들은 자기의 감정을 잘 가두지 못하고 툭툭 쏘아대요. 그래서 그런지 시인들은 그림 그리는 분들을 좋아하죠. 또 한편으로는 외로워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림은 금방 남에게 보이잖아요. 그렇데 글이라는 것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외로운 것 같아요. 시나 소설가는 얼마나 외로울까 생각하죠. 이것은 제가 잡문을 써서 엮은 것을 남한테 줄 때 보는 표정하고, 스케치라도 해서 그림을 건네주게 될 때 는 그네들의 표정에서 차이가 나요. 책보다도 그림을 줄 때의 표정이 더 좋아 보여요. 그림은 금방 가슴에 와 닿잖아요. 저는 문인들 딱할 때가 많아요. 그네들의 작품이 세상에 잘 내던져야 하는데 그 순간까지는 얼마나 쓸쓸할까 싶어요.



 좋아하셨던 혹은 좋아하시는 문학작품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 저는 약자 편인가 봐요. 김동리 선생의 「감자」같은 작품이 생각나네요. 짤막한 단편이지만 아직까지 가슴에 남아있어요. 소설의 줄거리는 슬픈 이야기지요. 감독관에게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처지의 여인과, 그의 운명을 돈 몇 푼으로 가볍게 처리해버리는 이들의 얘기가 나오죠. 쓸쓸하죠. 그리고 일본 작가 나세키의 「풀베개(草抌)」가 기억에 남아요. 이 작품은 제가 다른 이들에게도 권한 적이 있는 작품이지요. 어떻게 화가도 아닌 사람이 화가가 느꼈을 법한 심정을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정말 놀랐죠.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예술하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어요.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자기 노트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꼭꼭 적어놓았던 글들의 모음집이 아닌가 싶어요. 이 글들은 작가 마흔 전에 썼으리라 생각되는데, 젊은 시절에 어떻게 이렇게 전문적인 부분까지 얘기할 수 있을까 싶어요. 참 존경스러운 작가죠. 세키의 글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살기가 어려울 때, 조금 살기가 나은 곳이 없을까. 그런 곳으로 내 마음을 옮겨볼까.” 하는. 요즘 세상하고 똑같아요. 이사를 가도 좋고, 장소를 이동해서, 마음을 이동해서 가본다는 것이죠. 가서 보니까 역시 거기도 살기가 어렵구나 하고 느낄 때 시나 그림이 탄생한다고 했거든요. 곤고한 삶 속에서, 괴로움 속에서 그림이나 시가 나온다는 거예요. 살기 어려울 때, 괴로움이 있을 때, 그 놈을 송두리째 버리는 것이 시고 그림이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참 좋아요.



 글과 그림을 함께 하시는 분으로서, 화가의 화법(話法, 畫法)으로 문학의 열정에 빠진 이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그들이 원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간단하다고 생각해요. 근본을 알면 처방이 쉬워요. 암에 걸려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데, 그것은 암이 아직 어디서 오는 우리가 잘 몰라서 그래요. 우리는 암에 대해 막연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죠. 그래서 아직 처방전을 못 내는 것이죠.

 자신이 원하는 글을 잘 쓰는 방법은 간단해요. 그 틀을 잘 들여다봐야 해요. 앞서 저는 그림은-시도 마찬가지죠-자기의 생각을 화면에 풀어헤쳐놓은 것이다, 용해시켜놓은 것이라고 했죠. 또 자기의 그리움을 풀어헤쳐놓았다는 것은 생각 속에, 또 다른 생각 속에 소망하 희망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희망과 소망은 가만히 뚝딱하고 이뤄지는 것이냐 하면렇지 않죠. 자기의 생각을, 소망을, 희망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고 그 것이 바로 시고, 그림이죠.

 시가 일반 언어와 다른 것은 시의 언어는 마음속 언어를 구체적으로 뱉어내놓은 것이라는 거죠. 가만히 있어 생각이 성숙되는 것은 아니에요.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짧든 길든 구체적으로 뱉어놓은 것이죠. 다시 얘기하지만 가만히 성숙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의 생각에 싹이 나야 해요. 싹이 나게 하는 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문(人文)문학성(文學性)이라는 토양이 있어야 해요. 인문의 바탕이 말 그대로 휴먼아트(human art)예요. 즉, 휴먼(human)에 대한 것이죠. 이것은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인간의 내성, 속성과 같은 것들을 알아내는 것이죠. 아무튼 막연한 것 같지만 이것은 인문 분야와 관련이 있죠. 그리고 문학성은 상상이라든가 이상, 환희, 비전 다 품고 있는 분야죠. 그런데 이 둘을 다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장의 체험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자신이 직접 경험하심지어린 것이라도 배우게 되죠. 사람은 실수를 하면서 배우니까요. 그런데 그것은 시간 노력이 필요한 일이에요. 체험이 최상인데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침묵) 독서를 많이 해야 해요. 책이 무엇인가요? 그 속에는 작가의 과거와 현재가 있어요. 현재를 통해서 보는 이상 세계가 책 속에 다 있지요. 예술과 시가 무엇인가요? 상상 세계를 세상에 던지는 이지요. 상상의 ‘원액’이 책 속에 다 있어요. 그것을 꺼내 내 것과 믹싱해서 좋은 음식을 만들어야 하죠.

 청소년들은 누구보다 독서를 많이 해야 해요. 그것을 통해 인문학의 바탕을 넓히고 문학성을 키우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행과 같은 현장 체험을 해야 해요. 어느 책에서 보니 아인슈타인도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이 더 이상 못 가르치겠다고 해서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해요. 그 아이가 15살에는 웬만한 철학서까지 독파한 아이가 되었다는 거예요. 아인슈타인의 천재적인 상상의 힘은 바로 독서라는 토양에서 피어난 것이죠.

 청소년의 힘은 희망 크고 가능성 크다는 점이죠. 또 그게 젊다는 것이고요. 그들은 그들의 희망을 독서의 힘으로 움직여야 해요. 그리고 이 일은 돈이 하나도 안 들어요. 가난하더라도 가능하죠. 마치 돈 안 드는 자동차를 굴리는 것과 같죠.


 선생님이 꼽으시는 좋은 그림은 무엇인가요? 그 그림 속에서 선생님은 무엇을 보고 계신지요?


=청소년들에게 샤갈의 그림을 추천하고 싶요. 샤갈의 그림에서 인간은 하늘에 떠 있지요. 보통사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죠. 샤갈은 그림에서 아주 나지막한 시골 동네를 보여주죠. 하늘에 남녀 꽃다발 들고 공중에 붕 떠 있죠. 샤갈의 그림을 본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죠. “샤갈 선생님, 사람이 하늘에 떠 있네요.” 그러자 샤갈은 한 마디 했지요. “그래서 화가지요.”

                         


 

 

 화가 자신이 희망하는 것, 그리워하는 것, 자유로움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죠. 청소년 시기는 가장 많이 상상하는 시기인데 샤갈의 그림은 청소년들이 지닌 무한한 상상력과 맞닿아 있어요.

 좀 전에도 변화를 얘기했지만 마티스와 관련한 일화예요. 하루는 마티스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마을 사람이 조용히 와서 그림을 살펴보고 있었지요. 마을 사람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마티스는 모델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데 신체의 다른 부위는 다 비슷비슷한데 이상하게 한쪽 팔이 좀 기다란 거예요. 세계적인 예술가도 이런 실수를 하는가 싶었지요. 그래서 그는 결례를 무릅쓰고 물었죠. “마티스 선생님은 세계적인 화가이신데 모델에 비해 그림에서는 한쪽 팔이 좀 길군요.” 그때 마티스는 자신의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얘기했죠. “이 그림은 나의 작품이지 저 모델이 아닙니다.”

 화가 되기 쉽습니다. 하늘에 사람을 띄지요. 작품 만들기 쉬워요. 대상과 똑같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돼요. 꿈 많고 머물러 있기를 싫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이 두 화가를 소개하고 싶네요.


 


 

화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젊은 시절 무엇을 준비하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 좀 전 이야기들도 관련이 는데, 자신의 추억을 소중히 만들면서 사는 인생이 제일 중요한 같아요. 인간은 추억을 되씹어가면서 사는 동물이기도 하죠. 매일매일 날이 바뀌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바뀌죠. 세월이 가는지 인생이 가는지 잘 모르죠. 어떤 이들은 세월은 가만히 있고 인생이 흘러간다고도 하지요. 그러다보니 흘러간 것은 모두 추억이 되죠. 그러고 보면 지난날은 우리가 매일 새롭게 맞이하는 날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그 ‘지난날’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면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남길 수 있는 사람일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예술 창작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해요. 그것이 예술의 씨앗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또 상상의 세계가 예술 창작의 세계라고 한다면 상상 역시 앞으로 수없이 해야 할 것인데, 그것이 어느 날 뚝하고 떨어지듯 저절로 생성되는 게 아니라 현실의 연장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저는 매일 충실하게 사는 것이 자신의 상상을 구체화시키는 일임을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꼭 일러주고 싶네요.



 선생님께서는 그림을 그리시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요? 또 슬럼프 시기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극복하시는지요?


= 왜 그림을 그릴까요. 그저께 잘 그렸다고 생각한 그림도 훗날 보면 싫을 때가 많아요. 그것은 그림은 가만히 있는데 내 마음이 움직여서 그런 예요. 그림은 말없이 그대로 서 있는데 내 마음이 움직 거죠. 움직인 내 마음의 잣대로 과거의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까 어딘가 부끄러운 것 같죠. 그래서 또 다시 새롭게 그리는 거예요. 그저께 그린 그림이 잘 안 돼서 어제께 다시 그렸고, 또 어제 그림보다 오늘 잘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오늘 그리는 것이지요.

 그림 그리는 사람, 예술가는 그렇게 헤매는 사람이고 수고하는 사람이지요. 꼭 이것, 마음에 드는 것, 아름답고 좋은 것도 움직이고 변하는 세상이지요. 해놓고 보면 부끄럽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하고 또 하는 사람, 수고를 영원히 반복는 사람이 예술가지요. 창작자의 태도나 마음은 그런 것 같아요. 좋다, 나쁘다 판단하는 것은 보고 읽는 사람의 이지요. 예술가는 단지 할 뿐이지요. 



              

 
그림에 제목을 붙이는
어떤 원칙이 있나요? 작품의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 궁금합니다.


= 그림의 제목들은 메타포(metaphor, 은유법)와 관련이 있지요. 저는 앞서 희망이 내 마음저 멀리 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지요. 희망은 ‘저 건너편’을 향하고 있어요. 인간에게는 피안지향성(彼岸指向性)이 있답니다. 누군가 내게 저 건너편을 향할 힘을 주셨다는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죠. 저 건너편은 희망이고 그리움이죠. 그림도 이러한 생각으로 시작했으니 그림의 제목 또한 그에 맞는 이름을 가져야겠지요. 그래서 저는 ‘저 너머로 옮겨 간다’라는 의미의 은유적 표현으로 제목을 지으려고 노력하죠. 저는 상계동을 그려놓고 제목을 ‘상계동’이라고 붙이거나 도봉산을 그려놓고 ‘도봉산’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방식을 싫어해요.



이런 그림은 꼭 한번 그려 보겠다 하면서 아직 못 그린 그림이 있는지요?


=구도자(求道者)라고 해도 좋을 듯싶고 수도자의 삶이라고 해도 좋을 듯싶어요. 스님일 수도 있고 신부, 목사, 수녀의 삶일 수도 있는, 그런 삶을 그려보고 싶어요. 사실 저는 모든 사람이 구도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이 들면서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감정들이에요. 사람이 태어나 살면서 느끼는 변화적 삶의 메타포, 이것이 인생이겠지요. 아직 구체화 한 것은 없지만 이와 같은 그림을 흑색과 검은색을 중심으로 그려보고 싶어요. 



그림은 무엇인가요? 이것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림은 자기 생활 감정의 조형적 표현이지요. 자기의 생활 감정에서 나온 언어적 표현이 문학이고요. 음률적 표현이 음악이라고 볼 수 있죠. 여기서 자기의 생활의 ‘자기’로부터 독창성이 나오는 것이지요. 아까 얘기했듯 자기의 추억을 잘 섬기고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거기서 생활 감정 나오고 그 찌꺼기가 예술로 승화되는 것이니까요. 또 자기관리를 잘해야 해요. 얼핏 생각하면 자기 혼자만 잘 관리하면 되는 줄 아는데 그건 아니지요. 나무에 비유자면, 나무에게로 오는 빗방울, 나무에게로 떨어지는 햇볕, 나무에게로 스치는 바람, 나무를 붙잡아주는 흙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하죠. 이것은 나무만의 일이 아니에요. 크게 보면 자기(나무)와 협력하고 있는 우주가 있다는 것까지 알아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나답게 성숙해지려면 남하고의 관계에서도 노력을 많이 해야 해요. 이것은 앞에서 강조한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는 이야기와도 통하죠. 책을 통해서 나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의 도움을 받아야지요.



오랜 시간 정성스런 이야기 감사합니다. 그림 그려야 시간을 많이 빼앗아 정말 죄송해요. (꾸벅)


= 내일 붓을 꼭 붙잡아야 할 것 같네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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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창운 선생님 약력>

 

전창운(全昌雲) 선생님은 1942년 함경남도 신고산에서 태어나 1947년 아버지의 등짐에 올라앉아 월남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대구 피난시절을 제외하고는 지금껏 서울에서 살고 있다. 전쟁 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50년대 초 성남 중․고등학교를 나와 1961년에 서울대 미대에 입학, 서양화를 전공하고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ROCT 3기로 군복무를 마친 뒤 1968년부터 보성고등학교와 이화여고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1980년 가을 파리 등 유럽을 돌고 귀국 후 이화여고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 내 나라 흙을 사랑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야외 스케치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 풍경화가회를 주도하며 ‘일요화가회’와 ‘토요화가회’의 화우들과 주 1~2회, 20년 넘게 산, 강, 들을 찾아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다.


동국대, 성신여대, 덕성여대, 동덕여대, 강원대, 관동대에 출강하였고 1985년부터 서울예술대학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22년간 드로잉 강의를 했다.


그간 열아홉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사진전도 두 번 가졌다.


실크로드의 천산남로와 북로, 파미르 고원과 티베트 고원을 넘고 네팔과 인도를 여행했다.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이슬람 문화권 나라들을 답사했다. 몽골과 소비사막을 걷고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보았다. 화문집 <풍경 도둑놈>과 수필집 <다시 풍경 도둑놈><애기 똥풀이 똥눈다><오늘은 잔치날이었습니다><내 마음의 풍경><화가와 시인><긋고 지우고 긋고 지우고><전창운의 허튼 강의>를 발간했다.

광주비엔날레 특집 ‘흙을 찾는 보헤미안, 화가 전창운’ (MBC TV),

‘실크로드 이슬람 문화를 찾아서’ (동아 TV), ‘평화응접실’ (평화방송 TV)

‘책마을 산책’ (KBS1 라디오), ‘용기백백 희망백배’ (MBC TV)

테마기획 ‘고향’ (KBS2 TV), ‘그곳에 가고 싶다’ (KBS1 TV)

‘열려라 영상시대’ (평화방송 TV), ‘고비사막을 달린다’ 등을 제작 방영하였고,

월간 에세이 《흙사랑 그림사랑》과 《미술신문》에 ‘전창운의 걸으며 생각하며’ 칼럼을 연재했다.

평화방송 ‘TV 노인대학’과 KBS1 TV '당신이 있어서 좋은 세상입니다‘를 진행했다.

현재 상형전과 나무전사람들, 소공동사람들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 후기*

 

  “선생님 작업실은 기차역과 붙어 있지요. 그래서 인터뷰 중간 중간에 멀리서 달려오는 기차소리가 우리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어왔지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잠시 말이 아니라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중요한 말들은 말이 아니라 눈빛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멀리서 온 기차소리가 알려주고 달아났지요. 잘 가라는 말 대신에 ‘눈빛’을 떨어뜨리는 꽃무더기가 그날 선생님 집 주변에 만발하였더군요. 기차가 오고 … 기차가 떠나고 그 사이, 이제 빛을 얻어서, 그림으로 태어나는, 그 얼굴들을 화실에서 몇 개 보았지요. 이렇게 따스한 날에는 보고 싶은 이가 그림 그리는 이와 글을 쓰는 이에게서 더 멀리 가서 숨어버렸으면 더 좋겠네요. 그날은 그 얼굴 하나를 그리고 싶은 날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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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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