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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사랑을 남겼네

  • 작성일 2011-03-26
  • 조회수 1,594

 

[청소년 테마소설]

1. 관계와 소통_첫번째

 

 

호랑이는 사랑을 남겼네

 

김종광

 

 

 

 



《삼국유사》에 나오는 호랑이 이야기 〈김현(金現)의 감호(感虎)〉를 번역하면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쯤 되겠다.

알고 보니 익숙한 이야기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까지 부모님들의 강요 덕에 참으로 많은 책을 읽었다. 출판사마다 어린 애들에게 팔아먹기 위한 전래설화 어린이책시리즈를 펴냈다. 그 시리즈 중에서, 〈호랑이 처녀의 (슬픈) 사랑〉 혹은 〈호랑이를 사랑한 김현〉 등이 바로 삼국유사의 〈김현의 감호〉를 현대적으로 윤색한 것이다.

통일신라 원성왕 시대였다. 신라에는 해마다 2월이 되면 한 일주일간 흥륜사 전탑을 돌며 복을 비는 풍속이 있었다. 김현이란 청소년이 밤이 깊어도 혼자 쉬지 않고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남들 다 갔는데 혼자서 왜?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혹시 청소년의 목적이 여자였다면 기회는 즉시 왔다. 그때 한 처녀도 염불을 외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 마음이 움직여 눈을 주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를 청소년 없으리라. 이 설화는 두 주인공의 나이를 밝히고 있지 않다. 하지만 정황으로 보아 우리 또래가 확실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팔청춘 때의 남녀가 한밤중에 단 둘이 있다가 눈 맞는 일은 흔하다. 우리들 중에도 눈 맞아서 사귀는 애들 많다. 학교를 다니는지 연애를 하러 다니는 건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연애에 중독된 애들도 있다. 우리 학교 교칙은 엄혹하다. 이성끼리 데이트하는 걸 들키면 반성문 써야 한다. 스킨십하다가 걸리면 정학을 각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쌍이 연애를 하고 있다. 학교 교칙과 선생님, 부모님들의 각별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대체 통일신라가 언제 적인가. 천 년 전이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팔청춘에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꼰대들이 막는다고 막아질 사랑이 아니다.

돌기를 마치자 김현은 구석진 곳으로 처녀를 데리고 가서 정을 통했다.

‘정을 통했다’를 ‘섹스했다’로 해석한 아이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끼약! 어머나! 오호호!……

‘정을 통했다’를 ‘연애했다’ 혹은 ‘찐한 스킨십을 했다’ 정도로 해석한 아이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을 통했다’가 뭔 말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다른 애들이 웃으니 따라 웃었다. 우리는 누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거나 웃음을 터트릴 준비가 돼 있었다.

진짜 초고속은 옛날에 있었군. 마음 움직이고 눈 맞추자마자 바로 구석진 데로 달려가 정을 통했다니! 이보다 초고속일 수는 없다.

우리들은 정을 통하기 진짜 어렵다. 어디 가서 통하느냔 말이다. 통일신라시대에 경주라면 지금 시대의 서울이다. 서울에서 정을 통할 만한 구석진 데가 어디 있는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곳은 불량배나 노숙자들이 점거하고 있다. 설령 우리가 구석진 데를 선점했더라도 “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뭐하는 게야!” 한 마디 하면 비켜나야 한다.

돈이 있다면 모텔 같은 데를 노려볼 수도 있지만, 어른들의 검열을 무사히 뚫으려면 착실한 준비가 필요할 터이다. 일단 사복으로 갈아입어야 하고, 나이 들어보이게 위장도 해야 하고. 도저히 《삼국유사》에 나오는 스피드한 ‘정 통하기’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어째, 묘하다. 천 년 전에는 이팔청춘의 정 통하기가 아무렇지 않게 가능한데, 최첨단 현대에는 이팔청춘의 정 통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많은 아이들이 벌써 첫경험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어디서 해봤는지 궁금하다.

하여간 선생님은 ‘정을 통했다’라는 구절로 인한 우리들의 흥분을 진정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써야만 했다. 선생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래서 고전문학은 가르치기가 힘들어요.”

김현은 처녀를 졸졸 따라갔다. 처녀가 사양하고 거절했으나,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처녀는 하룻밤 사랑으로 그칠 작정이었나 보다. 요새 말로 ‘원나잇스탠드’다. 그런데 ‘쿨’하지 못한 김현이 기어이 쫒아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를 했다. 남자애들은 거의 안 봤지만 여자애들은 거의 다 봤다. 그거 안 보면 여학생이 아니라는 분위기였다. 그 드라마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는 네 계층이 있다. 사회지도층, 중산층, 서민, 소외된 이웃. 여기서 사회지도층은 재수 없으니 사회세도층으로 바꾸자.

우리는 역사에서 ‘세도정치’를 배웠다. 유력한 가문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세습하고 나아가 정치까지 제 마음대로 주물렀다는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금도 극소수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다. 그러니 사회지도층보다는 사회세도층이 더 어울린다.

김현은 사회세도층 혹은 중산층의 자제인 듯하다. 처녀는 확실히 소외된 이웃이다. 처녀와 김현의 이야기를,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이렇겠다. 사회세도층 남자와 소외된 이웃 여성이 첫눈에 반했고 내친 김에 원나잇스탠드를 했다. 그런데 사회세도층 남자는 계속 만나보자고 진상을 떤다. 반면에 소외된 이웃 여성은 쿨하게 끝내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 반 아이들은 절반가량이 서민이다. 30%는 소외된 이웃이다. 15%가 중산층이다. 사회세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녀석은 두 명뿐이다. 풍족하지 못한 부모를 둔 아들딸이 대부분이어서 돈 많은 부모를 둔 녀석들이 왕따를 당하고 있다.

한 초가집에 들어가니 늙은 할미가 처녀에게 물었다.

“함께 온 이가 누구냐?”

‘처녀는 사실대로 말했다’라고 한 번역본도 있고, ‘여인은 그 사정을 말하였다’고 한 번역본도 있다. ‘사실대로’든 ‘사정’이든, 한 방에 눈 맞아서 자고 왔는데 남자 녀석이 쿨하지 못하게 계속 쫒아왔다고 있는 그대로 말했단 것일까?

그렇다면 처녀는 너무나도 솔직하다. 엄마였다면 그토록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을 터이다. 다리몽둥이 부러지지 않겠는가. 할머니 앞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친할머니가 아닐 수도 있다.

노파가 말하기를, “비록 좋은 일이기는 하나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 어쩌겠느냐? 몰래 숨겨 주어라. 네 오빠들이 악행을 저지를까 염려된다.”

뭐가 좋은 일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얼마 후 호랑이 세 마리가 나타나 으르렁댔다.

“집에서 비린내가 난다. 요깃거리가 있으니 참 좋구나!”

김현은 벌써 숨은 모양이다. 고전문학은 빨라서 좋다. 어디로 어떻게 숨었다는 친절한 설명이 없다.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르지만 김현은 엄청 무서울 터이다. 처녀를 의심할 수도 있다. 이 년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꼬였구나! 나를 잡아먹으려고 유혹했구나. 하늘님, 한 번만 살려주시면 다시는 함부로 여자를 탐하지 않을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간절히 빌었을 터이다.

늙은 할미와 처녀가 꾸짖었다.

“너희 코가 잘못 됐지. 무슨 미친 소리냐?”

김현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처녀가 호랑이였다는 걸 알게 된 아이들 중 몇몇이 성질을 냈다. “리얼리티가 없어요!” “우리나라 옛 이야기는 판타지성이 엄청 강하다.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보다 더 환상적인 이야기가 많다.” “아무리 판타지라지만 호랑이가 사람이랑 사랑을 하다니요.”

선생님이 설명해보려고 애썼다. “아무리 호랑이와 사람이라지만 사랑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 호랑이와 사람이 소통하고 나아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사회세도층과 소외된 이웃이 소통하는 일보다 쉬운 일일 수 있다. 좌파와 우파가, 진보와 보수가 소통하지 못해서 늘 시끄러운 우리나라를 보아라. 좌파와 우파의 소통, 진보와 보수의 소통보다, 호랑이와 사람의 소통이 훨씬 쉬워 보인다. 호랑이를 애완동물로 바꿔 생각해보라. 사람과는 소통하지 못하지만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식구처럼 아끼는 이들이 있다……”

호랑이와 사람이 사랑했다는 거 가지고 리얼리티가 없다고 시비 건 아이들은, 공부하기 참 힘들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사실성을 완전히 무시한다.

이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너희들이 즐겨 생명을 해함이 너무도 많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을 징계하겠노라.”

세 호랑이는 하늘 소리에 놀라 쑥덕거렸다.

도대체 하늘에서 소리를 외친 이는 누구란 말인가? 우리가 잘 아는 하늘님? 하늘님이 아닐지라도, 호랑이 한 마리는 쉽게 죽일 능력을 가진 분인 모양이다.

아니, 한 마리만 겨우 죽일 수 있는 분이실 수도 있다.

이 초가집에는 총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살고 있다. 만약 하늘에서 외친 그분이 진정 화가 나서 징계하기로 했다면 다섯 전부 징계해야 한다. 그런데 하늘님은 수컷 호랑이들만 가지고 시비다. 노파 호랑이와 처녀 호랑이는 생명을 해함이 없었던 것일까. 풀만 먹고 살았을까?

암컷 호랑이를 제외한다고 해도, 하늘님의 능력이라면 수컷 호랑이 세 마리를 한꺼번에 징계해야 한다. 왜 한 마리만 징계한단 말인가? 셋을 한꺼번에 상대할 능력이 없었던 거라고 슬쩍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삼형제를 몰살시킬 수 있는 자였다면, 호랑이들은 살려달라고 그저 싹싹 빌었을 테다. 하지만 하늘에서 외친 자는 삼형제가 힘을 합한다면 물리칠 수 있는 자였다. 삼형제 중 하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하늘에서 외친 자와 붙기로 결의를 모으느라 쑥덕거렸던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외친 자도 이상한 분이기는 하다. 하필이면 이제 와서 징계한단 말인가? 호랑이들이 생명을 즐겨 해하는 것을 이때까지 왜 그냥 놔두었단 말인가. 당신의 직무 유기 때문에 호랑이 삼형제에게 목숨을 잃은 생명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단 말인가. 주인공 김현을 구하기 위해 문득 나타셨다는 것은 알겠지만, 참 느닷없는 등장이시다.

그러자 처녀가 말했다.

“세 분 오빠들은 멀리 피해 가셔서 스스로를 경계하신다면 제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오빠 호랑이들은 모두 기뻐하며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치며 달아나버렸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대신 죽겠다는 여동생도 어이가 없지만, 그걸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오빠들도 황당하다. 여동생에게 아주 미안해하며 슬픈 낯꼴로 도망가도 화날 텐데, 꼬리까지 쳐가며 도망가 버리다니! 아무리 호랑이라지만 욕 나온다.

우리들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호랑이를 향해 비방댓말을 날렸다. 비겁하고 나쁜 놈들!

호랑이 설화에서 심술궂고 흉악하고 포악하고 잔인한 호랑이는 많지만, 비겁하고 치사한 놈들은 이 삼형제가 유일하다. 호랑이의 명예를 진흙탕에 떨어뜨린 놈들이다. 하지만 현실에도 이런 오빠들 있다!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부모님이나 여동생에게 덤터기 씌우는 녀석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하늘에서 외친 분이다. 여동생이 오빠들을 구하겠다고 나서거나 말거나, 그 분은 삼형제 중에 한 마리를 징계해야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정황으로 보아 그 분은 대타를 허용했다. 정말 웃기는 그분이시다. 현대사회에도 이런 바보 같은 분들 많으시다. 누군가 정말로 나쁜 놈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한 처지에 놓였다.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어줄 만한 권력을 가졌으나 그 권력자들은 모르는 척하고 불쌍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오빠들을 대신하여 죄를 뒤집어쓰기로 한 처녀는, 호랑이밥이 될 뻔했다가 살아난 김현에게 설명한다.

“처음엔 당신이 내 집에 오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어요. 이제는 숨김없이 진실을 말씀드릴게요. 내가 당신과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하룻밤을 함께 즐겼으니 부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는 죽어야 합니다. 이왕이면 당신의 칼날에 죽겠어요. 그것이 당신의 은덕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내일 거리로 나가 사람을 심하게 해하면, 임금이 높은 벼슬을 걸고 사냥꾼을 모집할 거예요. 당신은 나를 겁내지 말고 숲속까지 쫓아오세요.”

우리 반 여학생들이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날렸다. 이해할 수 없는 처녀의 희생정신과 보은의지를 성토했다. 너 같은 년 때문에 녀남평등이 안 이뤄지는 거야. 네가 왜 희생을 해? 김현이란 놈이 너에게 무슨 은덕을 베풀었다는 거야? 한 번 자준 게 은덕이라는 거야? 은덕은 네가 베풀었잖아! 이 멍텅구리 년…….

선생님이 이건 다만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설화일 뿐이라는 요지로 상황정리에 나섰다. 그러자 여학생들은 이 따위, 여성이 남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데올로기를 담은 설화가 실려 있는 게 무슨 책이냐며, 《삼국유사》마저도 씹어댔다.

하여간 호랑이 처녀의 말을 듣고 “옳거니, 그래주세요!” 한다면 정말 나쁜 남자일 터이다. 좋은 남자이고 싶은 김현은 말했다.

“호랑이와 사람의 사귐은 떳떳한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이미 잘 즐겼으니 하늘이 준 다행함이다. 내가 어찌 내 사랑의 죽음을 팔아 벼슬을 바라겠느냐?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다.”

여학생들의 분노가 이번엔 김현에게 퍼부어졌다. 나쁜 놈 아니기는 정말 더럽게 나쁜 놈이구만. 실컷 즐겨놓고는 떳떳한 일이 아니라고? 부잣집 놈이 가난한 집 년 사랑해놓고는 떳떳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네.

“나는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목숨입니다. 나, 호랑이가 일찍 죽게 되면 다섯 가지의 이로움이 있습니다. 하늘이 죽으라는 명령에 복종하게 되며, 죽고 싶었던 내 소원을 이루게 되며, 당신께는 높은 벼슬 얻는 경사요, 우리 호랑이 일족에게도 내가 죽어 오빠들이 무사하니 복이요, 우리 호랑이가 죽으면 나라 사람들에게 기쁨입니다.”

가까스로 진정되었던 여학생들의 분노가 대폭발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죽으라니 죽겠다고? 자존심도 없는 년, 배알도 없는 년. 죽고 싶었던 소원을 이뤄? 너만큼 어렵지 않은 년들이 어디 있어. 다들 꾹 참고 미래를 보면서 열심히 사는데 죽는 게 소원이라고?

그러면서 처녀는 덧붙인다.

“다만 나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불경을 읊어주세요!”

그들은 마침내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다음날 과연 사나운 호랑이가 성 안에 들어와 사람을 해함이 너무 심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높은 벼슬을 안겨주겠다는 암호랑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이번엔 선생님이 흥분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설정이다. 주인공 남녀의 사랑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거나 다친다. 주인공 남자가 주인공 여자를 살리겠다고 죽여대는 엑스트라가 부지기수다. 조선시대 도망노비사냥꾼을 주인공으로 하는 『추노』라는 드라마를 했었다. 그 드라마에서 장혁이 사랑한 이다해 때문에 죽은 인물이 그 얼마이던가. 요새는 형제의 우정을 통해서도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장동건과 원빈이 나왔던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에서 두 형제의 사랑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국방군과 인민군이 죽어야 했는가.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 단 한 명을 위하여, 그토록 죽여댄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하여간 호랑이의 작전은 성공했다. 벼슬에 눈이 먼 김현이 활을 들고 나타났다. 설마 벼슬에 눈이 멀어 나타났겠는가. 호랑이가 사람을 더 다칠까봐 걱정돼서 나타났다고 해주자. 김현이 나타나자 호랑이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호랑이는 처녀로 변하여 반가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젯밤 나와 당신이 마음 깊이 정 맺은 일을 잊지 마세요. 오늘 내 발톱에 상처 입은 사람들은 전부 흥륜사의 장(醬)늘 바르고 그 절의 나팔소리를 들으면 이내 나을 거예요.”

역시 처녀는 착했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사랑을 위하여 죽인 사람들을 되살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호랑이처녀는 자기가 다친 사람들을 치료할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참으로 자애로운 호랑이다.

말을 마치고, 처녀는, 아니 호랑이는,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넘어지니 곧 호랑이였다.

아무리 지독한 작가라도 김현이 호랑이를 죽였다라고 쓰지는 못할 터이다. 그렇게 하면 김현이 너무 나쁜 놈이 된다. 따라서 호랑이는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죽는 영화나 드라마의 뻔뻔한 장면이 《삼국유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니!

김현은 숲에서 나와 외쳤다.

“내가 호랑이를 쉽게 잡았다!”

김현이란 놈은 결국 나빴다.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죽도록 만들었다. 제 손에 코 안 묻히고 코를 푼 것이다.

왜 ‘쉽게’ 잡았다고 했을까? 김현은 호랑이를 잡은 일이 없다. 호랑이 스스로 죽었다. 그런데도 쉽게 잡았다니? 이 모두가 김현의 계략이었던 말인가? 호랑이가 스스로 죽도로 유도한 것이. 그러니 저토록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겠지. 김현이 처녀를 사랑하기나 했었던 것일까.

김현은 호랑이가 시킨 대로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했더니 다 나았다.

김현은 절을 짓고 호원사(虎願寺)라 하였다. 항상 호랑이를 위해 불경을 읽었고 호랑이의 저승생활이 편안하기를 빌었다. 김현은 죽을 때 지나간 일의 기이함에 깊이 감동하여 이것을 붓으로 적어 전하였으므로 세상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김현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가 아니라, 김현이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김현은 한국 최초의 판타지 소설을 쓴 것인지도 모른다.

늙은 할미는 왜 더 이상 나오지 않았는가? 늙은 할미도 호랑이 맞나? 하늘에서 외친 분은 삼형제 중에 하나를 죽이겠다고 큰소리쳐 놓고, 왜 아무런 설명 없이 별 잘못 없는 암호랑이의 죽음을 받아들였는가?

물어는 보고 싶지만, 환상과 변신과 불가사의의 파노라마 같은 설화판타지 세계에서 개연성을 따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여간 김현과 하룻밤사랑을 했던 호랑이는 사람과 호랑이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변신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런 훌륭한 호랑이가 기껏 사랑 때문에 죽다니,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죽음은 모두를 숙연하게 한다. 호랑이 처녀 때문에 수업 시간 내내 분노했던 여학생들도 죽음 앞에서는 차마 입을 다물었다.

강독이 끝나고, 자유토론에서 다양한 얘기가 나왔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호랑이 이야기 제목 〈김현(金現)의 감호(感虎)〉는 엉터리다.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는 말도 안 된다. 김현이 호랑이를 등쳐먹은 이야기다. 백 번 양보해도, 호랑이가 김현을 위해 이유 없이 희생한 이야기일 뿐이다. 전래설화 어린이책 시리즈를 펴낸 출판사들도 그래서 〈호랑이 처녀의 (슬픈) 사랑〉으로 바꿔야만 했을 터이다. 하지만 그 제목도 어울리지 않는다. 도저히 소통할 수 없는 관계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의 절대적 희생이 따른다는 관점으로 본다면, 차라리 〈호랑이 처녀의 희생〉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다들 진지한데 우스개랍시고 말하는 녀석도 있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 게 아니라 사랑을 남겼네요.”

 

〈끝〉

 

  

 

 

작가소개 / 김종광(소설가)

 

 

1971년 충남 보령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에 단편 「경찰서여, 안녕」 당선.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2000) 『처음의 아해들』(2010), 청소년소설 『착한 대화』(2009), 장편 『첫경험』(2008) 『군대 이야기』(2010)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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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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