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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인도고전무용 ‘오디시(Odissi)’ 무용수, 금빛나를 만나다

  • 작성일 2012-07-18
  • 조회수 962

 

   [인터뷰이 소개]


   금빛나?

   서강대 불문학·종교학·철학 전공, 한국인 최초 인도고전무용 ‘오디시(Odissi)’ 무용수. 종교에 대해 두루 학식을 쌓아오던 그녀는 어느 날 인도 영화 속 춤에 매료돼 무작정 인도로 떠나 그 춤을 교육받는다. 춤의 이름은 인도고전무용 ‘오디시’다. 그녀는 오디시 거장 구루 겅가더러 쁘러단의 제자로서 춤을 배운다. 5년 동안의 노력 후 2010년 2월 인도에서 오디시 무용수로 정식 데뷔했다. 국내에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2011~2012 차세대예술인력지원 부문에 선발됐다. 인도를 비롯한 해외를 오가며, 공연과 교육으로 오디시를 선보이고 있다.

 

 

일시 : 2012년 6월 2일 오후 1시 ~ 3시

장소 : 대학로 예술가의 집 1층 카페 ‘슬로우 가든’

 

 

   “내가 누구인가를 찾다보면, 저절로 자기 스토리도 생기고 도전도 하게 된다.”

   (금빛나)

 

   이름만큼이나 빛난다. 지금껏 보여준 결단력과 적극성이 뜨겁다.

   20대 후반 돌연 인도로 떠나 인도 춤을 익힌 무용수 금빛나. 한국 최초 인도고전무용수로 자신만의 유일한 색채를 지니게 됐다. 그녀는 어떤 사연으로 타국의 춤에 매료돼 인도에서 자아를 찾게 됐을까?

   삶의 진로를 정해 인도로 불쑥 떠난다는 것, 결정내리기 쉽지 않은 행로로 보이지만 그녀 안에서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금빛나 씨는 정작 ‘나나 너나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물음,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인도라면 인도에서, 국내라면 국내에서,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다 보면 자신의 인생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특이할 필요도 없다. “특이함을 위한 특이함은 기간이 굉장히 짧다”는 게 그녀의 조언이다. 훗날 인도에 대한 사랑이 부풀어 오르면, 아마도 그녀의 얼굴과 책이 머릿속에 겹칠 것 같다.

   7월 초 인도로 떠난 금빛나 씨는 내년 3월에야 한국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 이전, 8개월 안에 이 글을 읽고 그녀가 있는 인도에 다다른다면, 더 가슴 두근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용기를 불러 넣어줄 때, 그녀는 그냥 ‘이렇게 해봐’ 정도가 아니라, 직접 보여주고 인도하는 게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여긴다.

   지금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몰라 극심한 고민 속에 있는 글틴이라면 그녀가 사는 동네, 인도 오리사주로 향해 금빛나 씨를 만나보자. 그녀의 책 ‘달비잠’을 가방에 넣고 가는 건 필수다. 어떻게든 인도 오리사주에 도달하면 된다.

   하지만 가는 방법, 그녀를 만나는 방법은 스스로 찾는 게 미션이다!

   금빛나 씨와의 만남을 비롯해 모든 게 아마 다 그럴 것이다. 가슴 뛰는 인생은 찾아가는 과정에 놓여 있다.

 


   O 두려움은 없다. 일단 자신을 ‘아는’ 게 중요!

  

   최근 자아찾기 에세이 ‘달비잠’을 발간한 인도고전무용수 금빛나 씨. 그녀는 20대 후반 무작정 홀로 인도로 떠난다. 어느 날 문득 우연히 ‘무언가’에 흠뻑 빠진 까닭이다. 불쑥 같지만, 아마도 이전의 선택들이 겹겹이 쌓였던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 무언가란 ‘춤’이었다. 어릴 적부터 춤을 춰왔던 것도 아니고, 무용 공연을 보러 다니던 것도 아니었다. 철학과 종교에 심취해 지내던 20대 어느 날 인도 영화 ‘카마수트라’(인도 오리사 출신의 미국 감독, 미라 나이르의 1996년 작품) 속의 춤을 보고 반해버렸다. 그 순간이 금 씨가 30대에 인도에서 한국인 최초로 인도고전무용 ‘오디시’ 전문 무용수로 데뷔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 6월, 다시 인도행을 앞둔 그녀를 글틴에게 들려줄 조언을 얻고자 만났다.

   금빛나 씨에 대한 얘기를 지인들에게 건너듣거나 혹은 책만 읽었는데도 단번에 ‘아! 금빛나 씨구나!’ 하고 바로 알아볼 수 있다. 화려한 색상의 사리(인도 의상)라든가 팔찌, 귀고리 등의 장식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는 당당함과 자신만만함이 확연히 드러나는 아우라를 지녔다.

 

   Q. 책 출간 때문에 국내 일정이 미뤄졌다고 하는데요. 또 인도로 가시나요?

   A. 그렇죠. 8개월 정도 있어요. 내년 2월까지 있다가, 3월 1일에 국내로 다시 들어올 거예요. 사업이 진행 중이라 정산보고 그런 걸 하지 않을까 싶어요. (금빛나 씨는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1~2012 차세대예술인력지원 부문에 선정돼 국내 무대에서 오디시를 선보였다.)

 

   Q. 책 ‘달비잠’은 언제부터 쓰셨어요?

   A. ‘달비잠’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데는 2년 걸렸어요. 최초로 쓰기 시작한 지는 5년 됐고요. 맨 처음에는 생활비를 벌려고 쓰기 시작했어요. 예전에 해인사에 갔는데 거기서 ‘월간 해인’이라는 얇은 잡지가 나오더라고요. 거기에 연재를 하고 싶어서 한 네 편을 열심히 써서 스님들에게 보여드렸더니, 친불교적으로 써야 하는 종교지라서 제 글은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그래서 한참 놔두고 있다가 2년 전에 다시 책 출간을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썼어요.

   ('달비잠’에는 금빛나 씨가 겪은 청춘 에피소드가 시적인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종교와 문화에 거리를 둔 독자라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문정희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짐짓 모른 척하며 살아가는 존재와 자아에 대한 탐구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달비잠을 권했다. 함민복 시인은 “젊은 춤꾼의 초상을 읽으며, 금빛나를 만나며 마음에 달빛 가득한 오솔길 하나가 생겼다. 그 오솔길 위에서, 나는 나의 지나간 청춘을 만나 실컷, 울어보고도 싶어졌다. 달빛에 젖은 눈물길을 구부려, 나를 찾아 떠나고 싶은 나에게 팔찌로 채워주고도 싶어졌다”고 느낌을 전했다.)

 

   Q. 학교를 졸업하신 지는 꽤 되셨죠?

   A. 네. 제가 96학번인데요. 학부제가 시작되던 때였어요. 외국어문 계열로 들어가서 대학을 오래 다녔어요. 6년 반 정도? 요즘은 그 정도면 오래 휴학한 게 아닌데 그땐 보통은 4년, 휴학하거나 어학연수 다녀오면 5년 반 정도였으니까요. 할 수 있는 기간의 휴학을 다했어요. 주변 친구들을 휴학하게 만들기도 했고요. ‘그렇게 다닌다고, 한 학기 빨리 간다고 잘 사는 거 아니야’ 그러면서, 어디 보내거나 가게 만들었죠. (웃음)

 

   Q. 어디로 보내셨어요?

   A. 홍콩도 가고 다른 곳도 가고, 외국 여행 다니게 하고요. 아니면 공부하고 싶은 거 더 해보게 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라고 하면 ‘정말 잘할 수 있어’ 라고 부추겼죠.

 

   Q. 요새 학생들은 취업준비나 다른 것들에 쫓기느라 하고 싶은 걸 많이 못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A. 너무 안됐어요. 그럼 그 친구들은 언제 놀까 그랬더니 제 친구 대답이 ‘다 노는 방법이 개발됐어’ 하더라고요. 영어 학원에 가거나 카페에서 다른 거 하면서 논다고 하는 거예요. 노는 게 우리랑 다르대요.

 

   Q. 쓸데없이 노는 시간이 줄어들었어요. 놀아도 그걸 꼭 결과물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강박을 느끼는 것처럼 보여요. 시간이 촉박하니 타인과 교류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막을 친하고 해야 하나? 그게 일부러라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죠.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확실히 예전과 다른 게 옆에서 느껴져요.

   A. 저랑 제 선배랑 모교에 갔는데 사촌 동생들이 다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전화를 했는데 둘 다 번개를 거절당했어요. 도서관에서 안 나오는 거예요. 선배가 날 보더니 ‘너도 거절당했냐?’ 그러는 거예요. 당장에 스터디해야 되고 모임 해야 되고 그런 게 있더라고요.

   제가 학교 다닐 땐 FA 제도와 지정좌석제가 있었어요. 강의실 들어갈 때마다 지정좌석에 앉는데, 6번 이상 빠지면 F예요. 지금은 개인정보 보호법으로 공개 안할 텐데, 예전엔 FA 경고, FA 확정 몇 학번 누구인지 명단을 붙였어요. 저는 그걸 되게 좋아해서 여러 번 명단에 올라갔어요. 다른 수업에서 만난 사람도 이름 때문에 저인지 금세 알고요. 학사경고 2번이나 받고 휴학도 했어요.

 

   Q. 아마 갈수록 금빛나 씨 같은 사람은 안 나올 것 같아요. 몇 십 년에 한 번, 몇 년에 한 번, 갈수록 희박해질 인간 유형이랄까? 인생에서 남과 다른 기회나 시간을 좀처럼 주지 않는 거죠.

   A. 춘향전 뒤집어 만든 영화가 뭐죠? 아 ! 방자전? 그거 보셨어요? 그 영화 보시면 좋은 대사가 하나 나오는데요. 류승범 대사인데 ‘이제는 너의 스토리를 가져라’ 그래요. 맨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그 대사만 남는 거예요.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토익 950점으로 다 똑같고, 자기 스토리는 없고 천편일률적인 모습이 많은데, 내 인생 얘기를 해서 다른 이들이 들을 만한 걸 쌓는 게 도리어 성공일 수 있어요.


   Q.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A. 자기 주관을 가지고 확 나가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남들이 이거래’ 그래서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해서 자기 스토리를 만드는 거죠.

   책에도 자기만의 스토리를 만들라고 계속 썼지만,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어야 해요. 다른 분들도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지내겠죠? 저는 선택에 있어서 결론이 난 거거든요.

   전 스무 살 생일을 프랑스에서 혼자 맞았어요. 프랑스에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님(파티마는 포르투갈 산타렝 주 빌라노바데오렘 지역 이름으로, 1917년 어린 목동 세 명이 성모 마리아를 본 마을이다)이라고 있어요. 성모님이 나타난 곳이에요. 혼자서 성모님을 만나러 간다고 갔어요. 며칠 동안 하루 종일 기도만 하다가 돌아왔죠. 그때 무서워서 혼자 잠도 못 잤어요. 호텔에 간 게 처음이라 불도 다 켜놓고 무서워서 덜덜덜 떨면서 잤어요. 그런데 혼자 여행가는 건 꼭 필요해요.

 

   Q. 그러면 금빛나 씨는 친구나 가족,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이 있었어요? 성격이 어릴 때부터 모험심이 강하다거나 도발적이었나요?

   A. 사실 특이하기 위해서 특이한 건 오래 안 가요. 제 친구들 중에 특이했던 친구가 어느 날 만나보면 특이하지 않아서, 깜짝 놀란 적도 있어요. ‘너 왜 이러냐?’ 그랬더니 ‘머리는 어딘가에 맘은 인도에 몸은 여기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얘길 들어보면 예전에는 특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특이함을 위한 특이함은 오래 못 가요.

   내가 생각하고 따라가는 게 특이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걸 따라가는 게 특이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죠. 원하지 않아도 특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물론 꼭 특이할 필요도, 꼭 도발적일 필요도 없어요. 예를 들어 현모양처를 좋아하면 현모양처를 하면 되는 거예요.

 

   Q. 이전에 금빛나 씨의 인생이 확 변했다고 느낀 지점이 있었나요?

   A. 저는 종교학을 들으면서 인생이 확 변했어요. 너무 놀란 거예요. 스물두세 살 때였어요. 그런 시기에 인생을 돌아보면서 자기 분석을 많이 하잖아요? 자기 점검을 하다가 내가 너무 힘들 때 에너지를 어디서 얻고 있는 건지 생각해봤는데, 저는 그게 종교였거든요. 자기 전에 밤에 항상 기도하는 거였죠. 천주교 신자라 중심에 있던 게 카톨릭이었어요.

   중고등학생 때 일본에서 살았는데, 신학을 되게 배우고 싶었어요. 내 중심에 있는 게 종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보자 했는데 제겐 종교학이 외국 같은 거였죠. 신학을 안 해도 될 정도로 종교학이 종교가 된 거예요. 유대교, 기독교, 불교, 상징체계, 기도체계, 제사체계 …… 이래저래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종횡으로 훑었더니 세계를 다 돌아다니며 세계여행을 하는 것 같았어요.

   철학도 같이 들었어요. 동양철학, 서양철학 개괄적으로 훑었는데요.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나와 세계가 어떻게 이어져있나,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가, 역사를 쭉 훑으니까 알겠는 거죠. 옛날에는 ‘난 나야’ 그랬는데 난 내가 아니었어요. 역사 속의 한 사람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걸 보기 시작하니까, 눈이 확 떠지더라고요.

   처음에 불문학을 시작할 때도 문학에 크게 관심 없었거든요. 불문학에서 불, 그러니까 프랑스만 본 거예요.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문학도 보이고, 역사, 사회가 전반적으로 눈이 다 뜨이더라고요. 그러면서 바뀐 것 같아요.

 

   Q.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게 된 거네요.

   A. 네. ‘우와!’ 뭐 그렇게 느끼는 게 생기기까지는 자기 관찰, 점검이 필요해요. 뭘 가장 좋아하는지 알아야죠. 좋아하는 게 없다는 걸 아는 거랑 모르는 거는 달라요.

   제가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것도 두 가지 이유였어요. 하나는 종교적 이유고 하나는 문화적 이유예요. 고등학생 때 프랑스에 가서 너무 놀란 게 있는데, 바로 간접조명이었어요. 우리나라 집에 가면 형광등이 있는데 프랑스는 간접조명이더라고요. 잘 안 보이는데 스탠드 켜놓으면 되고 그런 게 예술인 거예요. 또 하나는 프랑스 성당이었어요. 저희는 집안 종교가 카톨릭이니까, 3박 4일이나 2박 3일 어딜 놀러가도 일요일에 성당에 갔어요. 여행가면 성당을 찾아다녔거든요. 그런데 프랑스에 가보니 곳곳이 성당인데,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운 거예요. 10대 때 프랑스 갔다 오면서 종교성과 예술성을 선택했나봐요.

 

   Q. 그럼 인도는 어떻게 매료됐나요?

   A. 책에도 썼지만 인도는 항상 그냥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서는 놀랄 게 하나도 없고 되게 자연스러웠어요. 떠날 때도 ‘아! 또 올 거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인도인의 종교성, 예술성이 저를 잡아줬어요. 인도에 대한 거라기보다는 저 자신에 대한 게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인도는 언젠가 달라질 수도 있죠.

   신기한 게 한국에 있다가 가끔씩 인도 음악이 들려온다든가 그러면 환희가 느껴져요. ‘역시 나는 인도구나. 인도가 나를 부르는구나’ 그러는 거예요. 인도 음식을 안 먹고 인도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제가 달라요.

   2002년쯤이었어요. 인도 영화 ‘카마수트라’를 봤는데, 그 영화가 제 인생을 아예 바꿔버렸어요. 춤 전체가 저를 바꿨죠. (금빛나 씨는 영화에서 잠시 나오는 춤에 반한다. 3년 후 그 춤이 인도고전무용 ‘오디시’라는 것을 알게 되고 주저 없이 춤을 배우러 인도로 떠난다.)

 

   Q.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금빛나 씨가 어릴 때부터 취미로라도 춤을 춰온 분인지 궁금할 텐데요.

   A. 원래 춤을 춘 건 아니에요. 저는 현대 무용이나 발레를 봐도 감흥이 별로 없었어요. 그나마 느낌이 왔던 게 한국무용이에요. 그런데 너무 비싸서 안 배웠어요. 스트레칭은 맨날 했어요. 제가 정말 유연했거든요. 그건 좀 다행이었어요. (금빛나 씨는 인도 현지인들이 극찬한 유연성을 지녔다.)

 

   Q. 굉장히 자유로운 성격이실 것 같은데, 인도 춤이 본인과 잘 맞았나요? 상충하는 부분은 없으셨나요?

   A. 사람들이 절 보면 낭만주의자, 박애주의자일 것 같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사실 저는 고전주의자예요. 형식을 굉장히 따지죠. 제가 하는 오디시가 고전무용이에요. 형식에 꽉 짜여 있고 다만 그 안에서 자유스러운 거예요. 창작하는 걸 허용하지 않아요.

   인도 전통춤 까탁은 개방이 많이 돼 있어서 서양 문화와 접촉이 됐는데 오디시는 시골 쪽에 있고 접촉이 많이 안 됐어요. 퓨전 창작을 하면 큰일 나요. 시민들이 삿대질 하고 난리 나죠.

   배울 때도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했던 적도 많아요. 그런데 ‘나한테 맞는 걸까’ 고민할 때마다 절 잡아줬던 선생님이 계세요. 항상 칭찬을 해주셨죠. ‘너는 어쩔 수 없어. 너는 여기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오디시랑 잘 맞아. 오디시 매력을 알았으니 떠날 수 없어’ 그러셨어요.

 

   Q. 인도로 떠나기 이전, 다른 걸 준비하진 않으셨나요?

   A. 막 방황하고 있을 때 스튜어디스가 될까 생각도 해봤어요. 어머니가 제가 여행하는 거 좋아하고 상냥하니까 스튜어디스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권해주셨거든요. 스튜어디스 학원에 3개월 등록했는데, 1개월 다니다 때려쳤어요. 너무 아니더라고요. 면접을 보는데 제가 감 자체가 없었어요. 면접관이 ‘뭐가 되고 싶냐?’ (격식 갖춰서) 물으면 ‘아! 저는요.’ (발랄한 모습)하면서 대답했거든요.

   그때가 2004년이었어요. 돈이 없어서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안 되겠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인도로 가야겠는 거예요. 그땐 스튜어디스 학원에 돈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비행기 표를 카드로 긁고 인도에 갔다 왔어요. 아예 살기 전에 한 번 더 갔죠. 춤 배우러 스승님 찾으러, 살 집 찾겠다고 작정하고 갔어요. 돈은 차차 갚아 나갔습니다. (웃음)

 

   Q. 두렵진 않았나요?

   A. 그런 걸 생각해볼 수 없었어요. (인도영화 속 춤 이름, 오디시) 알고 나선 바로 일주일 만에 정리하고 간 거예요. 갈구하다가 이름을 알게 되니까 두려운 게 아니라 너무 신나는 거예요. 거기 가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그것도 자신 있었어요. ‘뭐,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똑같지’ 그랬죠.

   스리랑카에서 만난 친구에게 ‘나 할 수 있겠어?’ 물어본 적이 있는데요. 희망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는데, 그 친구가 ‘네가 정말 원하면, If you really want’라고 얘기해줬어요. ‘정말 원하면 할 수 있어’라고 했어요. 바로 그 ‘really’가 들리더라고요. 내가 얼마나 정말 원하는 걸까 그게 중요했어요. 다시 생각했어요. 내가 진짜 원하는 건가 어느 정도 원하는 건가 생각해봤는데, 진짜 원하더라고요.

 

   Q. 금빛나 씨 오디시 공연을 직접 본 국내 관객들 반응은 어땠나요?

   A. 신기해하고 좋아하죠. 오디시 배우는 프랑스 친구가 ‘오디시 이즈 파워풀’이라고, 힘이 세다고 그러는데, 저도 공감해요. 잘 전달하려고 하죠.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설명을 하고 춤을 추면 다들 되게 재미있다고 해요. 저는 춤보다는 먼저 인문학에 끌린 경우예요. 인문학이 답을 주는 건 아니고 질문을 준다고 하잖아요. 작품이 무궁무진하니까 공연만 하면 너무 바닥이 날 테니 공부도 해야죠.

   우리나라에 있을 때 오디시 워크샵을 해볼까 해요. 오래 하는 것 말고 딱 3개월만요. 저는 대부분 인도에 있으면서 일 년 중 반은 우리나라나 해외에 무용하러 다닌다거나 그럴 거예요. 인도에는 항상 있어야 해요. 사람이 보이진 않지만 기운도 그렇고 에너지도 그렇고 인도에 젖어 있지 않으면 그게 좀 달라요.


   Q. 지금 걸친 의상이나 액세서리는 항상 하고 다니시는 거죠?

   A. 네. 제가 워낙 장신구를 좋아해요. 거의 100개 차고 다니고 싶은데(웃음) 안 하면 안 돼요. 비어 있는 느낌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사리 입고 목걸이 안 하면 안 돼요. 뭐라도 해야 돼요. 비어 있으면 안 좋아요. 정신하고 관계된 거예요. 아기들도 다 해요. 은 벨트, 은 발찌를 채워주죠. 사리 색깔은 튀는 걸 좋아해요. 우중충한 색을 입고 나가면 어머니가 밝게 입으라고 하세요. 후배들 결혼하면 사리 입고 가는데, 언젠가 한번은 한 톤 다운된 거를 골라 입었어요. 회색이나 하늘색이요. 그런데 어머니가 분홍색 입고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만일 우리나라에서 제가 결혼하게 된다면 양복 중에서 검은 색, 흰 색 입은 사람은 출입금지 하고, 파티복으로 입고 오라고 할래요.

 

   Q. 부모님이 개방적이세요? 어떤가요?

   A. 대학시절에 종교를 테마로 이스라엘, 터키 등을 여행하려고 과외를 해서 돈을 모았던 적이 있어요. ‘여자 혼자서 가면 부모님이 냅두냐?’ 이런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부모님이 허락을 하는가 안 하는가를 생각해야 돼?’ 그랬어요. 주변에서 너무 그러니까, 하루는 여쭤보기로 했어요. 어느 날 낮에 아버지와 저만 집에 있더라고요.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계셨어요. 제가 가서 사실 이런 거를 하고 싶어서 계획적으로 얼마만큼 모았고 언제부터 언제까지 갈 거다 말씀 드렸어요. 무슨 대답을 하실까 했는데, 아버지께서 대뜸 ‘알았어. 난 네가 정말 부럽다.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 이렇게 하는 사람이 부럽다.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하셨어요. 항상 그렇게 아버지께서 그런 거를 충동해줬어요. 오히려 부추김을 해주셨어요. 그런데 성문화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하세요. 오디시계에도 게이 선생님이 많이 계시거든요. 미국에 계신 게이 선생님에게 가겠다고 그랬다가 못 가게 하셨죠.

 

   Q. 마지막으로 글틴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 부탁해요.

   A. 인도로 오면 제가 다 같이 돌 수는 없지만 제가 사는 곳까지 오면 봐줄 수 있으니 오시라고 말씀드릴게요. 책임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사는 곳까지 찾아오면 돼요. 책에 보면 다 나와 있어요. "질러놓고 보자"라고 말하고 싶어요. 질러놓으면 스스로 하게 돼요. 또 하나 중요한 게 누군가 도와주게 돼 있어요. 다른 사람이 나타나 저를 도와주기 때문에 괜찮아요. 함께 살아가는 사회니까 일단은 지르고 봐야 돼요. ‘정말 하고 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세상을 살면서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걸 파악하지 않아도 돼요. 알랭드 보통이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속물의 기준을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해버리는 것’으로 얘기했더군요. 그럼 속물의 반대말이 뭔지 아세요? 엄마래요. 한 가지 기준으로 보는 게 아닌 거죠. 추상적인 엄마이긴 하지만요.

 

 

   p.s. 금빛나 씨는 현재 다시 인도에 있다. 인도 영화 속 춤에 반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직접 스승을 찾아 배우고 본인이 알리고 사는 전 과정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무용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중심인 종교, 철학, 문학 등을 아우르며 그녀는 계속 배우고 쓰며 인생을 기획 중이다. 어릴 적 철학 선생님이 ‘시를 잘 쓴다. 써보라’고 권한 바람에, 주변의 팬들을 위해 산문보다는 시를 먼저 습작한 이력도 있다. 아마 몇 년 후에는 오디시 공연 외에도 시인 금빛나 씨의 시집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금빛나 씨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는 그녀의 자아에세이집 ‘달비잠’과 홈페이지(www.artbeena.net)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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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5회 나는 광대다 장정희 땡~ 산조 가락이 자진모리의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막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었다. 힘차게 튀어 올랐던 태섭의 손가락이 땡, 소리와 함께 대금 위에서 조용히 잦아들었다. 숨죽일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은 짧았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태섭은 입술에 대고 있던 대금을 내려놓고 심사관들을 향해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방석 옆에 놓여 있던 정악대금을 함께 챙겨든 후 뒷걸음질 치듯 천천히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진행요원이 문틈에 귀를 대고 있다가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번의 수험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 태섭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힐끗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바닥에 주저앉아 삑삑삑 불어대고 있는 대기자들의 연주 소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태섭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바람이 달려들었다. 태섭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대금 연주자들에게 목 디스크는 숙명이라지 않는가. 태섭이 고개를 좌우로 젖히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태섭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비로소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다. 태섭은 습관처럼 입술의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취구가 닿는 아랫입술 언저리는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어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버렸다. 누구든 그 부위에 거무죽죽한 흔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대금 연주자일 것이다. 태섭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끝났어! 해가 기울면서 날은 더욱 쌀쌀해졌지만 아직 눈이 내릴 기색은 없었다. 이제 겨울은 곧 시작될 것이다. 수시 모집은 대학 입시의 첫머리일 뿐 영광과 회한의 경계를 가를 때까지 입시생들의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태섭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자와 콜이 쏟아졌다. ‘물론 시험은 잘 봤겠지? 네가 떨어지면 붙을 놈 누가 있냐?’ ‘빨랑 내려오기나 해. 얼굴 잊어버리겠다.’ ‘오늘 수시 봤던 놈들까지 다 올 거야.’ ‘끝나면 곧장 전화해. 안 하면 죽어!’ 태섭은 휴대폰을 그대로 가방에 던져 넣고는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태섭의 곁을 스쳐갔다. 이곳은 2년 전 캠퍼스 투어로 와 본 이후 두 번째다. 캠퍼스 투어는 태섭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지펴 놓았다. 와 봐야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대학생들이 부러웠다. 목표물을 손안에 얻은 사람만의 여유랄까. 나도 저들처럼 심상한 표정으로 이 캠퍼스를 활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이어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다. 엄마다. 일이 손에 잡히지

  • 웹관리자
  • 2012-10-27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 _ 제4회 고양이의 안부를 묻다 이성아 소녀는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소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고, 고양이도 막 목욕을 마친 듯 털이 보송보송했다. 보송보송한 털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 나도 모르게 쓰다듬을 뻔했다. 소녀는 나와 또래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사람들처럼 어색했다. 아파트 하수구 관이 막혔는데, 지금은 밤중이라 공사를 할 수 없으니 아침에 공사할 때까지 물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지구 반대편의 언어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소녀는 나보다는 고양이와 더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영물이야. 공연히 곁을 주면 나중에 해꼬지나 당한다니까.” 아줌마가 내게 하던 말이다. 고양이는 소녀의 품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조차 수모를 당한 듯 명치끝이 짜르르 아려왔다. 나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다. 높은 담을 사뿐히 뛰어올라 얼음사니처럼 우아하게 걸어 다니던 고양이에게 나는 다미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었다가 다미에게 주면 아줌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고양이 밥 주지 말란께. 야가 뭔 똥고집이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이.” 식당 알바는 힘들었다. 처음엔 청소하고 설거지나 하면 된다고 하더니 술손님들이 많으면 서빙에서부터 고기 잘라 주는 일까지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취한 남자들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거나 손이며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땐 온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고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목청이었다. 내 평생 목소리가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고작 17년밖에 안 산 내가 평생이란 말을 쓰긴 좀 그렇지만, 아마 평생을 곱절로 살아도 그렇게 목청이 큰 사람은 만날 것 같지 않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러댔다. 간혹 뭔가 날아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깨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양은냄비나 플라스틱 바가지, 물통이나 양푼, 철판 뒤집개나 슬리퍼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일했다. 수돗물을 세게 틀면 안 되고, 설거지할 때 개수대 밖으로 물이 튀면 미끄러지므로 안 되고, 식탁은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반드시 마른 행주로 닦아야 하고, 기름 묻은 그릇은 오래 두면 안 되고, 안 되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어도, 무표정해도, 큰 소리로 웃어도 아줌마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화낼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이 나온 전기세와 갑자기 오른 임대료, 갑자기 쏟아지는 비, 햇빛이 들이치는 창, 똥 마려운 것처럼 끙끙거리는 개새끼, 시끄러운 오토바이소리, 그리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생선 구잇집 아줌마. 소정은 아줌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 웹관리자
  • 2012-10-16
단 한 번의 기회

청소년 테마소설 성취와 좌절_제4회 단 한 번의 기회 이명랑 자식을 바꿀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빠, 엄마라면? 나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다. 운동장을 둥글게 에워싼 광장식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 대부분 오늘 테스트에 임하는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다. 열심히 자녀들을 응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아빠,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은빛으로 빛나는 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다. 아빠 옆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앉아 계신다. 컥, 숨이 막힌다.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흰 현수막 위에 금빛으로 화려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VIP. 금빛으로 빛나는 VIP라는 글자들 옆으로 봉황 두 마리가 이제 곧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그 활짝 편 날개 옆에 우리 가족은 앉아 있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자식들을 응원하다 말고 어른들은 가끔씩 VIP석을 곁눈질한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VIP석에 앉을 수 있는 거야? 아들아! 봤지? 네 눈에도 저기 VIP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너만이라도 제발 저 자리에 앉아다오! 사람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표들과 느낌표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그 옆에서 아빠, 엄마보다 더 태연하게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바로 내 가족이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일 수 있을까? “자! 전원 출발선 앞으로!” 사회자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올린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많은 아이들이 출발선 앞으로 달려간다. 나도 질세라 뛰어간다. 시작이 절반이다, 라고 아빠는 늘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시작에서부터 뒤처지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달리는 아이들 두, 세 명을 어깨로 밀치며 앞으로 뛰어간다. 누군가 내가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는 빠르게 내 앞을 스치고 달려 나간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큰 녀석이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질 줄 알고! 나는 어금니를 악문다. 간신히 내 어깨를 치고 달려간 녀석보다 한 발 앞서 출발선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정중앙이다. “모두 집중! 첫 번째 미션이다! 참가 인원은 모두 100명, 카트는 50개! 먼저 뛰어가 카트를 잡는 사람만이 장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사회자의 설명이 끝났다. 사회자는 번쩍 들어 올렸던 붉은 깃발을 밑으로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서 있는 아

  • 웹관리자
  •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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