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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제 겨우 열여섯

  • 작성일 2012-09-22
  • 조회수 828

 

   청소년 테마소설

   세상 속으로_제2회

 

 

우린 이제 겨우 열여섯

 

구경미

 

 

 

 

 

1

 


  

   이른 아침부터 집 안이 시끌벅적했다. 말소리 웃음소리 발소리, 그리고 싱크대 바닥을 때리는 물소리. 오늘도야? 잠에서 깨자마자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꼭꼭 닫아건 방문을 넘어 이불 속까지 파고들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안에는 군침이 돌고 배 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잠에서 깨자마자 느껴야 하는 식욕이라니,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엄마의 계모임 회원들이었다. 아줌마들은 벌써 몇 주째 일요일 아침마다 우리 집으로 몰려와 김밥을 쌌다. 이게 다 아버지가 없는 탓이었다. 낚시가 취미인 아버지는 토요일 오전에 집을 나가 일요일 저녁에야 돌아왔다.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만 모이는 이유였다. 그런데, 웬 김밥? 그게 무슨 소풍이라도 되는 줄 아나. 나는 이불 속에서 투덜거렸다. 그나마 김밥이 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어떤 아줌마는 과일을, 어떤 아줌마는 (김밥이 있는데도!) 밥과 반찬과 간식거리를, 또 어떤 아줌마는 떡까지 해 오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아파트 출입문이나 막으러 가면서 저 많은 음식들이 왜 필요한 거지? 게다가 몇 시간 뒤면 시퍼렇게 핏대 세우고 싸울 거면서 지금의 저 흥겨운 분위기는 또 뭔가. 마치 어디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 가기라도 하는 것 같잖아.

   처음엔 이렇지 않았다. 집을 나서는 엄마의 표정엔 비장미마저 감돌았었다. 물론 아줌마들이 우리 집으로 모이는 일도 없었고 김밥을 싸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 입주를 막는 거야? 내가 물었을 때 엄마가 진지한 얼굴로 설명해 주었다.

   “건설 회사가 잘못했으니까. 분양가를 턱없이 높게 책정했어. 전철역 생긴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우리가 피해 본 만큼 돌려받으려는 것뿐이야.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단결이 중요해. 아무도 입주를 못하게 해서 본때를 보여주려는 거야.”

   몇 년 전 엄마는 계모임을 하던 회원들과 함께 새로 짓는 아파트에 분양 신청을 했었다. 누구는 당첨되고 누구는 떨어졌다. 그땐 당첨된 사람들끼리 축하파티까지 하더니 이제는 시위 동지로 변해 매일 새 아파트로 몰려가 출입문을 지키고 일요일 아침마다 김밥을 만들었다.

   “그래도…… 이사를 못하게 하는 건 잘못 아닌가?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은 어떡해?”

   “3년을 기다렸는데 몇 달을 못 기다리니? 다 같이 좋자고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어.”

   엄마는 단호했다.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즈음 엄마는 새 아파트에 신경 쓰느라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잠도 제대로 못 자 늘 얼굴이 푸석했고, 눈 밑엔 주름이 몇 개나 더 생겼다. 그랬는데, 지금은 마치 잔칫집에라도 가는 듯, 소풍이라도 가는 듯 일요일 아침마다 법석을 떨었다. 새로 생긴 소일거리를 은근히 즐기는 게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뭐 내 입장에선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갑자기 바빠진 덕분에 내겐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까. 오늘 뭐 하니? 엄마가 물을 때마다 독서실, 혹은 학원, 하면 그걸로 끝이었으니까. 예전처럼 확인 따위는 없었다.

   바깥이 조용해질 때까지 침대에 누워 기다렸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줌마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제발 좀 빨리들 가세요, 속으로 빌었다. 마침내 아홉 시가 되자 현관으로 몰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내 방문을 두드리더니 말했다.

   “밥 차려 놨으니까 얼른 일어나서 먹고 공부해. 그럼 난 나간다.”

   드디어 가는구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쁜 건 이 몸도 마찬가지라고. 오늘은 반 친구들과 함께 레코드 가게 주인아저씨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윤후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형사 아저씨들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지, 꼼꼼하게 조사하기는커녕 윤후에게 사실대로 말하라고 윽박지르기만 했다. 윤후가 아니라는데 뭘 자꾸 자백하라는 건가. 왜 윤후 말을 믿지 않는가.

   일주일 전이었다.

   “너지?”

   레코드 가게 주인아저씨가 윤후를 다그쳤다. 대걸레로 바닥 청소를 하던 윤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CD 훔쳐간 범인, 너 맞잖아.”

   윤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저씨가 말했다.

   “순순히 자백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네가 아니라고 잡아떼니 어쩔 수 없다. 경찰서로 가는 수밖에.”

   아저씨는 정말 윤후를 끌고 경찰서로 갔다. 윤후는 두 시간쯤 조사를 받은 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날 학교로 연락이 왔고, 선생님들은 물론 아이들도 다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은 윤후를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어떤 아이들은 너 도둑질 했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는 윤후의 반응을 살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윤후의 얼굴이 벌게졌다. 아이들이 웃었다. 작은 악마들 같았다. 윤후는 매일 수업이 끝나면 경찰서로 가 조사를 받았다.

   레코드 가게 주인아저씨의 주장은 이랬다.

   윤후가 오고 난 얼마 뒤부터 CD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틀 혹은 사흘 간격을 두고 다섯 장 내지 열 장씩. CCTV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윤후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윤후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아저씨는 CCTV를 더 늘렸다. 사이즈는 더 작게, 장소는 더 은밀하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저씨와 윤후뿐이었다. 며칠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CD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CCTV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 매장 곳곳에 ‘은밀하게’ 설치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서로 윤후를 끌고 간 아저씨가 말했다.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CD만 돌려받고 용서해 준다. 네 나이에 감사해라.”

   그러나 아저씨의 주장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다. 증거는 없고 의견만 있을 뿐이었다. CCTV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게 왜 윤후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이유가 되는가. 형사들은 왜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지 않는가. 지적은커녕 은근히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편협하고 책임감 없는 어른들이 똘똘 뭉쳐 열여섯 살짜리 아이 하나를 지옥으로 떠밀고 있었다.

2


   약속시간에서 30분이 지났지만 다은이는 오지 않았다. 벌써 열한 시였다. 소희는 안절부절못했다.

   “엄마한테 들키면 죽어.”

   소희가 말했다. 소희는 두 시까지 학원에 가야 했다. 다시 다은이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집으로 해 봐.”

   연호가 말했다.

   “집 전화번호 모르는데…….”

   아이들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할 말이 없었다. 싫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끌어 모아 놓고서는 집 전화번호도 알아 놓지 않았으니.

   “그냥 우리끼리 가자.”

   연호가 재촉했다. 학원에 가야 하는 건 연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모두 같은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학원에서는 오늘 중간고사 대비 예상문제 풀이를 하겠다며 한 명도 빠지지 말라고 했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오늘만큼은 결석하면 안 되는 날인 것이다. 시간이 빠듯했다. 어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머릿수라도 많아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레코드 가게로 향했다.

   “그런데 은성이 너, 혹시 윤후 좋아하냐? 왜 이렇게 극성이야?”

   앞서 가던 연호가 불쑥 돌아보더니 물었다.

   “엉뚱한 상상하지 마. 반 친구 일이니까 나서는 것뿐이야.”

   “윤후가 아니라 나였어도?”

   “당연하지.”

   그러나 그건 반쯤은 사실이고 반쯤은 아니었다. 연호가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물론 돕기야 했겠지만 지금처럼 발 벗고 나서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내성적이고 조용하기만 한 윤후. 덩치도 작고 키도 작아 중학교 3학년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윤후.

   올해 초였다. 친구랑 약속이 있어 시내에 나갔다가 우연히 윤후를 보았다. 포장마차였고, 윤후가 커다란 주걱으로 떡볶이를 휘젓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밖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너 거기서 뭐 하니?”

   다가가며 물었다. 윤후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러나 곧 얼굴까지 빨개져서는 내 눈을 피했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니네 포장마차야?”

   내가 묻자 윤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내 눈은 쳐다보지 못했다. 그때 윤후랑 똑같이 생긴, 30년 후쯤의 윤후라고 생각하면 딱 맞을 것 같은 남자가 다가오더니 윤후에게서 주걱을 받아들었다. 윤후 아버지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윤후가 소개하기 전에 얼른 내 이름을 말하며 인사했다. 윤후 아버지가 환하게 웃었다.

   “은성이라, 예쁜 이름이구나. 떡볶이 좀 먹을래?”

   벌써 접시를 꺼내 드는 윤후 아버지를 향해 손까지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곧 친구를 만날 거라고, 친구 만나면 배터지게 먹을 거니까 미리 배 채우면 안 된다고. 내 말이 웃겼는지 윤후 아버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좀 더 교양 있게 사양할 걸, 후회가 밀려들었다.

   “난…… 가 봐야 하는데.”

   내 눈치를 보며 윤후가 말했다.

   “어딜?”

   “아르바이트 하러.”

   “아, 그렇구나.”

   아르바이트 하러 가야 하는데 나 때문에 못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윤후 아버지에게 인사를 한 뒤 먼저 자리를 떴다. 몇 개의 포장마차를 지나고 길모퉁이를 도는 순간 나는 멈춰 섰다. 문득 윤후 아버지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가무잡잡하게 수염 난 얼굴이며 웃음 머금은 표정이 낯설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걸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어디서 봤지?

   내가 윤후 아버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해 낸 것은 친구를 만나고,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그것도 모자라 책을 읽고, 게임을 하고, 마침내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형광등을 끄는 순간 그 일이 떠올랐다. 아! 마트에서 나를 도와 줬던 그 아저씨구나!

   한 달 전쯤인가, 엄마 심부름으로 마트에 갔다가 진열대에 잘못 부딪치는 바람에 사과며 오렌지 같은 과일들을 떨어뜨렸었다. 퍽, 하는 소리에 판매원이 냉큼 달려오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얼른 사과했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떨어뜨린 과일은 내가 다 사야 한다고 했다. 퍽, 소리가 나긴 했지만 깨지거나 터지진 않았고, 멍이 조금 들긴 했지만 못 팔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겐 그 과일들을 살 돈이 없었다. 거듭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판매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을 부르라고 했다. 겁에 질린 내가 대꾸도 못하고 불안에 떨며 서 있을 때였다. 한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바닥에 떨어진 과일들을 줍기 시작했다. 판매원과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아저씨가 말했다.

   “이만큼은 제가 살게요. 그리고 이것들은 흠 하나 없이 멀쩡한데요.”

   그러더니 상처 입지 않은 과일들은 다시 진열대에 올려놓았다. 판매원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아저씨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아저씨를 따라 밖으로 나온 내가 고맙다고 하자 아저씨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마침 집에 과일이 떨어졌거든.”

   내가 뭐라고 대꾸해야 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아저씨는 두 손 가득 과일 봉지를 들고는 절룩절룩 멀어져 갔다. 그 아저씨가 바로 윤후 아버지였다.

3


   “윤후는 절대 아니에요.”

   레코드 가게 주인아저씨는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컴퓨터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윤후가 이곳에서 일한다는 걸 안 뒤로 시내에 나올 때마다 들렀었다. 딱 한 번이지만 아저씨가 코코아까지 타준 적도 있었다. 공짜 음악만 듣는 게 미안해서 가끔은 용돈을 털어 CD를 사기도 했다. 내가 다시 말했다.

   “어떤 바보가 자기가 일하는 곳에서 물건을 훔치겠어요.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제일 먼저 의심받을 게 뻔한데.”

   아저씨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네가 잘못 아는 거야. 범인은 언제나 내 가까이 있는 법이다. 나를 가장 잘 알고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야.”

   “그래도 윤후는 아니에요. 증거도 없잖아요.”

   “눈빛. 그 애의 흔들리는 눈빛. 그걸로 충분하다.”

   “저는 안 충분해요. 눈빛은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못 돼요.”

   “두고 보면 알겠지.”

   “아저씨 좋은 사람이잖아요. 윤후가 얼마나 억울할지 생각해 보세요.”

   “이건 다른 문제다.”

   “윤후가 아니라는데 왜 믿지 못하는 거예요? 윤후가 아니라잖아요.”

   “그 애 아버지가 찾아왔었다. 포장마차 팔고 전세금을 빼서라도 돈을 마련할 테니 합의해 달라고 빌더라. 다 자기가 못난 탓이니 이쯤에서 용서해 달라고. 그 애 아버지도 윤후 짓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다. 다만 아들을 지키기 위해 덮자는 것뿐.”

   “그래서 그 돈을 받으실 건가요?”

   “생각 중이다.”

   “혹시 처음부터 돈이 목적이었어요?”

   “천만에. 하지만 잘못을 하면 대가를 치른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야 두 번 실수하지 않는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나쁘지만 그러고도 반성하지 않는 건 더 나쁜 짓이다.”

   “지금 윤후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기나 하세요? 학교에 소문 다 나서 선생님은 윤후를 범죄자 취급하고 아이들은 벌레 보듯 해요. 매일 수업 끝나면 경찰서로 불려가요. 형사들은 윤후만 보면 윽박질러요. 경찰서 안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어린놈이 벌써부터 이런 곳에 드나든다고 윤후 머리를 쥐어박아요. 아들이 이런 취급을 당하는데 어떤 아버지가 가만히 있겠어요. 윤후 짓이라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라구요! 윤후를 그 지옥에서 꺼내기 위해서라구요!”

   말을 하다 보니 점점 가슴속에 분노가 차올랐다. 나는 레코드 가게를 뛰쳐나왔다. 소희와 연호의 당황한 눈빛을 본 듯했지만 그대로 달렸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세상이 왜 이딴 식인가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서 어른이 되어서 레코드 가게 주인아저씨와 형사들을 혼내주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 말에 귀 기울이도록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윤후와 윤후 아버지의 얼굴이 차례로 눈앞을 스쳐갔다. 포장마차를 판다면 아저씨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다리가 불편한 아저씨를 받아 주는 곳이 있을까. 전세금을 뺀다면 두 사람은 어디서 살까.


   학원으로 갈 마음은 나지 않았다. 가봤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게 뻔했다. 학교 근처 공원으로 갔다. 외로웠다. 가슴속에 분노는 차오르고 마음은 답답한데, 그러면서 또 외롭기까지 했다. 공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들의 미소가 내 외로움을 콕콕 찔렀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윤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후를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윤후는 신발 끝으로 땅바닥을 톡톡, 찍으며 서 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벤치에 앉았다. 레코드 가게 주인을 만나고 왔다고 해도 대꾸가 없었다. 풀 죽은 얼굴로 땅만 내려다보았다. 나도 이렇게 답답한데 윤후는 오죽할까.

   “그 아저씨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완전 잘못 봤어. 너를 범인으로 몬 게 돈 때문이었어. 세상에, 그것도 모르고! 어쩌면 도난 사건도 그 사람이 꾸민 짓일지 몰라. 내일 경찰서에 가서 다 말할 거야. 벼룩의 간을 내먹는다는 말이 그냥 속담인 줄 알았더니 그 주인을 두고 하는 말이었어. 완전 사기꾼이야.”

   그래도 윤후는 대꾸가 없었다. 얼마나 호되게 당했으면 이렇게 주눅이 들었을까. 마음이 아팠다.

   “아저씨한테 절대 포장마차 팔지 말라고 해. 전세금도 빼지 말고.”

   윤후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 올려 지더니 내 얼굴에서 멈췄다. 두 눈 가득 물음표가 떠 있었다.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 레코드 가게 주인이 그러더라. 아저씨가 찾아왔었다고. 포장마차 팔고 전세금 빼서라도 돈 마련할 테니 합의하자고 그러셨대. 섭섭해할 필요 없어. 난 아저씨 마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널 의심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시는 거야. 아들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억울하게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데 어떤 아버지가 가만히 있겠어. 그러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윤후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힘들다는 거 알지만 네가 조금만 더 참아. 합의하면 지는 거야. 빤히 알면서도 사기꾼한테 당하는 거라고. 어쩌면 너 말고도 피해자가 더 있을지 몰라. 그걸 조사해야 해. 형사한테 다 말할 거야. 우리 엄마 계모임 회원들이 딱 하루만 아파트 말고 경찰서로 같이 가주면 좋은데. 그 아줌마들 목소리 큰 거 하나는 완전 알아주거든. 엄마한테 한번 부탁해 봐야겠다.”

   말을 하다 말고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옆을 돌아보았다. 윤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물으려는데 윤후의 무릎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너 울어? 물으려는데 윤후의 메마른 등이 점점 더 격렬하게 흔들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윤후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내 말에 감동 먹었나? 싶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울음이 너무 서러워 보였다. 그럼 아버지한테 감동 먹었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도 여전히 울음은 너무 길고 서러워 보였다. 어린 새의 헐떡임 같은 윤후의 울음 때문에 내 마음까지 먹먹해졌다. 차라리 소리 내어 울면 시원하기라도 할 텐데.

   가늘고 질기게 이어지던 윤후의 흐느낌이 마침내 잦아들었다. 윤후가 무슨 말이든 먼저 꺼내기를 바라며 조용히 기다렸다. 소희와 연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지만 확인만 하고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이대로 어딘가로 가버렸으면 싶었다. 5월의 햇살이 자꾸만,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 보는 게 어때, 속삭였다. 어느덧 윤후는 완전히 울음을 그치고 말간 얼굴로 돌아왔다. 주위의 새 소리가 청명하게 들렸다.

   “작년 겨울이었어.”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힘겹게 윤후가 입을 열었다.

   “아빠한테 갔다가, 사람들이 막 아빠한테 소리치는 걸 봤어. 구청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했어. 그 사람들이 아빠한테 불법 노점이니까 철거해야 한다고 협박했어. 아빠는……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하고…… 그 사람들은 안 된다고 그러고…… 아빠는 계속 사정하고…… 죄인처럼…… 굽실굽실…… 그 사람들이 비웃는데도…… 접시랑 젓가락 같은 걸 막 던지는데도…… 한 번만 봐달라고…… 다른 데로 옮기겠다고…… 내가 보고 있는데도……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

   “그렇게 살아왔던 거야, 아빠는. 나 때문에. 나 하나 키우겠다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용돈이 적다고, 새 컴퓨터 안 사준다고 불평만 했었어. 포장마차가 불법이라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어. 길거리에 널린 게 포장마차니까 당연히 해도 되는 건 줄 알았어. 그래서 아빠가 한자리에 오래 안 있고 여기저기 옮겨 다녔구나, 15년을 함께 살았는데 그 이유를 그날에야 알았던 거야. 바보같이. 의지할 사람이라곤 이 세상에 아빠하고 나 단둘뿐인데도 난 아빠한테 전혀 관심이 없었어.”

   “…….”

   “그날부터, 우리 가게만 있었어도 그런 수모는 겪지 않았을 텐데, 아빠가 비굴하게 굽실거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 방법이 없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했어. 가게를 가지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이. 내 주머니엔 달랑 5천 원짜리 한 장뿐. 아르바이트 최저 시급 4,580원. 수업 마치고 달려가서 하루 세 시간씩 일한다고 해도 고작 13,740원. 그 돈을 받아서 언제 가게를 내나. 10년쯤 걸리려나. 그땐 이미 아빠는 늙어서 일도 못할 텐데.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어. 어느 날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됐어. 원래 가격보다 싸게 내놓기만 하면 파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걸. 인기 아이돌 그룹 같은 경우엔 멤버들 포토카드를 모으기 위해서라도 애들이 몇 장씩 산다는 걸. 그걸 안 순간 눈이 확 뜨였어.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어. 드디어 아빠를 도울 방법을 찾았던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설마 너…… 너…….”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설마 윤후가.

   “내가 한 짓 맞아. 나쁜 짓이라는 것도 알아. 처음 CD를 훔친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편하게 자 본 날이 없어. 불안하고 두렵고 무섭고. 그만둘까도 생각했어. 사장님이 도둑 잡겠다고 CCTV 더 설치할 때는 정말 그만두려고 했어. 그런데 아빠만 보면 의지가 꺾이는 거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길거리에 서서 일하는 아빠. 또 언제 쫓겨날지 몰라 늘 불안해하는 아빠. 다친 다리가 저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아빠.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아파도 병원엔 절대 안 가는 아빠.”

   “아…… 그랬구나…… 아저씨가…….”

   “형사랑 사장님이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을 때 차마 입이 안 떨어졌어. 아빠한테 부끄럽고 미안해서. 나 참 나쁜 놈이지? 네가 나 돕겠다고 뛰어다니는 걸 보면서도 아무 말도 못했어. 네가 비난하고 욕해도 할 말 없어. 아니, 당연한 거야. 난 비난 받아도 싸.”

   고개 숙인 윤후를 보면서도 아무런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다만, 우린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라고, 누구나 실수는 한다고, 비난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소희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예상문제 보고 싶으면 지금 당장 답장하라는 협박 문자였다. 핸드폰을 아예 꺼버렸다. 지금 예상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윤후의 인생이 걸린 문제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윤후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윤후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나는 강요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제 어떡할 거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일 사장님 만나서 다 말할 거야. 아빠한테서 포장마차를 뺏을 순 없어.”

   “어쩌면…… 용서 안 해 줄 수도 있는데? 감옥에라도 가게 되면 어떡해?”

   “어쩔 수 없잖아.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을 수밖에.”

   담담한 척했지만 윤후의 얼굴은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꽉 움켜쥔 모습이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려왔다. 발끝으로 바닥을 콕콕 찍다가 윤후에게 물었다.

   “같이 가 줄까?”

   “혼자 갈래. 그런데 아빠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난 그냥…… 아빠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아빠만 모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아빠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

   또다시 윤후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대신 한낮의 해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강렬한 빛 때문에 찔끔 눈물이 나왔다. 잠시 잊고 있던 새 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와 엄마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소리들도. 누군가를 부르고, 누군가와 장난치고, 누군가와 얘기하는 소리들. 공원은 그런 소리들로 넘쳐났다. 다들 즐거워 보이는데, 행복해 보이는데, 그런데 윤후의 해피엔딩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윤후의 해피엔딩을 찾을 수 있을까.

   윤후의 떨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작가소개


   구경미(소설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소설을 쓰(고자 하)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가끔 여행을 하고, 더 가끔 사람들을 만나며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학교가 참 많습니다. 예전에 살던 동네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동네마다 다 학교가 많은 건데 제가 사는 동네만 그렇다고 착각하는 건가요. 뭐 어쨌든 재잘재잘 떠들고, 웃고, 얘기하고, 장난치고, 분식집 앞에 몰려서 있는 아이들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중 하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 동네가 아이들의 재잘거림 웃음 대화 장난으로 떠들썩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 소설집 『노는 인간』, 『게으름을 죽여라』, 장편소설 『미안해, 벤자민』, 『라오라오가 좋아』, 『키위새 날다』, 『우리들의 자취 공화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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