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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월평] 욕심 없는 글

  • 작성일 2013-03-15
  • 조회수 587

 

욕심 없는 글

 

김미정(문학평론가)

 

 

 

 

 

   글에 대한 욕심이 클수록 멋진 표현, 언어들을 구사하고 싶은 욕구도 커질 것입니다. 글 쓰는 많은 이들의 공통된 욕구이자 조심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전봇대 사진사」는 그런 욕심을 절제하고 최대한 자기만의 생각과 언어를 소박하고 꾸밈없는 문장 속에 녹인 것이 장점입니다.
   사실 ‘전봇대’라는 사물에 ‘사진사’라는 인격을 부여한 것 자체는 사실 큰 기교는 아닙니다. 그런데, 평소에 내 입장(혹은 인간의 입장에서) 지나치는 일상들이 특정 사물의 시점에서 재구성될 때의 세계는 신선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전봇대’라는 사물만의 시점뿐 아니라, 글쓴이인 ‘나’와 일정 정도 교감을 나누는 사물이라는 점이 글 속에서 표현되어 있어서, 기계적인 의인화로 읽히지 않은 점도 좋았습니다.
   또한 글에서 표현하는 ‘사진사’가 단지 세계를 포착하고 묘사하는 역할이 아니라, 어떤 시간적인 흐름과 그 변화들을 기억하고 반추케 하는 기록자, 저장소의 역할도 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느 나이대건 사람에게는 추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고, 변화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기 마련이겠지요. 또한 이 세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것이 있는 반면, 동시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존재합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사실이지만, 이런 당연하고 사소한 것을 일상 속에서 깨닫기란 쉽지 않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이 보여주는 주제(에 해당할 내용)도 울림을 주는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소 요설적인 부분이 눈에 띕니다. 작은 에피소드들이 생생한 느낌과 구체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전체 구성상 좀 더 압축적으로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장난감에 예술을 더하다」는 간결하고 정돈된 세련된 문장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짧은 글이지만 전체의 구도 속에서 각각의 요소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각 단락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잘 훈련된 글로 보였습니다.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열정’입니다. 〈마이클라우 아트토이전〉이라는 한 작가의 전시회에서 글쓴이가 발견한 것이 ‘열정’이고, 또한 글이 평면적인 관람기가 되지 않도록 인용한 고사가 ‘유기와 제갈공명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구성은, 글쓴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두 개의 텍스트가 잘 공명하고 있는지가 우선 관건일 것입니다.
   수사가 배제되어 단정한 글은 그 자체가 장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독자들은 그런 이유 때문에 그 글이 일관되게 단정하고 이물감 없이 읽혀지기를 기대합니다. 즉, 글 전체가 잘 짜인 것을 기대하는 독자 입장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이 한두 곳 눈에 띌 때면 그것이 단점으로 두드러지기도 하는 것이 함정인 것 같습니다. 가령, 글쓴이는 이 글 도입부의 고사(故事)를 통해 열정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원했겠지만, 실상 글 속에서는 제갈공명과 유기가 가졌던 ‘열정’의 차이가 썩 분별되어 읽히지 않습니다. ‘제갈공명이 만든 흙닭은 열정이 담겨져 있지만, 유기가 만든 흙닭은 열정이 담겨져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의 흙닭은 실패한 것이다.’ 이런 흐름이 잘 읽히지 않습니다. 즉, 〈마이클라우 아트토이전〉에서 느낀 ‘열정’의 소중함이 도입부의 고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입부를 신선하게 하는 데에 고사는 유효했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뒷받침하기에는 조금 미흡했다는 것이지요.
   또한 글쓴이는, 전시회에서 만난 예술작품에서 ‘거리문화의 가치’와 ‘젊음에 대한 예찬’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작가의 ‘열정’과 좀 더 긴밀한 관련을 갖고 서술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광대의 광대일기」에서 화자의 실제 내면은 아주 격정적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격정은 여러 장치들을 통해 절제되어 있습니다. 제목과 설정(광대, 광대일기)이 암시하고 있듯 말이지요.
   시 속에서 ‘나’는 두 번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를 봅니다. 여느 ‘거울’이 그러하듯, 이 시 속의 거울 역시 광대 가면 너머의 나를 드러내줄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 제시되지 않고 거울 바깥의 상황들(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지는 과일들, 수돗물 냄새, 말라비틀어진 꽃)을 통해 환유적으로 지시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시에서 ‘거울 속의 나’는 ‘진짜 나’가 아닌 것처럼 묘사됩니다. 6연 4행에서 괄호 속에 놓인 어구가 이미 거울 속의 나조차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주지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시에서 진짜 진정성 있는 ‘나’라고 단언되지 않습니다. 화자가 처음부터 아예 ‘나’의 페르소나로 ‘광대’를 내세운 것도 그런 이유이겠지요. 즉 이 시는 통상적인 (서정)시에 기대되는 진정성 있는 ‘나’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성 있는 나’에 대한 실험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의 성공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시’라는 장르의 속성상 그런 것입니다. 이 시는 이렇게 끝납니다. “어딘가 가운데 끼어있다는 느낌 속에서,/ 아주 약간 난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 사실 이 “끼어있다는 느낌 속에서” “난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이 형식 실험의 끝일 것입니다.즉, 이것이 어디까지나 ‘광대’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광대의 가면 너머의 ‘나’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아이러니.
   제가 이 시 자체의 독해보다도 형식 실험적 요소에 관심을 둔 것은, 이 시가 우리의 선배들이 해온 형식 실험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이 아쉽지만, 영향에의 불안과 그 흔적을 지우는 작업, 어렵지만 작가들이 필연적으로 거쳐간 작업일 것입니다.

 

   각각의 형식(장르)과 내용이 잘 어우러진, 또한 글쓴이만의 개성과 정돈된 필체가 두루 조화를 이룬 글을 쓰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정말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건 계속 써보세요. 써가는 과정이 거듭될수록 조금씩 스스로의 글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고 조탁할 수 있는 감식안도 생기지 않을까요. 정진과 건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글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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