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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계류와 표류 제1회

  • 작성일 2014-02-15
  • 조회수 444



계류와 표류(제1회)


안보윤



형이 달리 생각하는 게 있을 수도 있잖니.
할머니가 한 번 가서 봐요, 우리 형이 얼마나 멍청한 얼굴로 앉아 있는지. 오리 농장에서의 형은 저렇지 않았어요. 엄청 똑똑하고 부지런해서 사람들이 다 감탄할 정도였다고요. 이곳에서의 형은 옆구리가 뚫린 쌀 포대 같아요. 구멍으로 줄줄 새어나가는 게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형의 시간들이라면, 나는 그걸 어떻게 주워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 생각에 너희는, 잘못 날아왔구나.



1


빌어먹을 꼬맹이라고 욕해도 돼요. 처음 만났을 때처럼요.
넌 아직 아무것도 안 부쉈잖니. 내 수레를 뒤집지도 않았고.
종이를 찢거나 물을 뿌리지도 않았죠. 아직은요.
물을 뿌리는 건 곤란해. 무게를 속인다고 고물상 노인네가 길길이 날뛰거든. 전에 젖은 신문 뭉치를 고물 사이에 끼워 넣었다 발각된 사람이 있었는데 어림잡아 한 달은 욕을 먹으며 다녔단다. 결국 그만뒀지만.
욕을 많이 먹어서요?
아니. 복권이 맞아서.
복권 당첨자는 불행해진다던데. 인터넷에서 봤어요. 당첨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불행한 끝을 맞이한대요. 돈을 전부 날리고 지하도에서 살다 죽기도 하고 친척이나 가족에게 살해당하기도 하던걸요. 편의점 아저씨가 아는 사람은 로또 2등에 당첨된 다음 달 강원도에서 시체로 발견됐대요. 편의점 아저씨는 그 사람이 인생에 남은 행운을 모조리 끌어다 쓴 탓에 불행해진 거라고 했어요. 한 그릇씩 매일매일 오십 년 동안 먹어야 할 밥을 한 끼에 몰아먹으니 죽을 수밖에, 라고요. 고물상 그 사람도 틀림없이 불행해질 거예요.
지금까지도 불행했을 텐데.
더 불행해지겠죠.
더 불행해질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는지 모르겠구나. 손에 든 건 뭐니?
라이터요. 이건 라이터 기름이래요. 형 방에서 훔쳐왔어요.
왜 그런 걸? 네 나이 또래 애들이라면 돈이나 담배를 훔치는 게 맞는 거 아니니?
그게 맞는 건 아니죠. 할머닌 옛날에 교감선생님이었다면서 도덕관념이 희박하네요. 하긴, 할머니랑 만나게 된 것도 그것 때문이었지만요. 할머니가 내 상자를 훔쳐가지 않았다면 형이 할머니 수레를 부술 일도 없었을 텐데요.
그건 훔친 게 아니라, 집 앞에 내놨기에 버린 건가 싶어 챙겼을 뿐이래도.
그렇게 비싼 상자를 버리려고 내놓는 사람은 없어요. 게다가 그림이 가득 든 상자였잖아요. 물감이 덕지덕지 발렸으니 무게 하난 끝내줬겠죠. 고물상에 갖다 팔았음 만 원은 받았을지 몰라요.
고물상 노인네가 워낙 고약해서 말이다. 그만큼 갖다 줬어도 오천 원밖에 안 냈을걸.
끔찍하네요.
끔찍하지.
……거기 쓰인 물감 값만 해도 얼만데. 유화물감은 비싸서 요만한 튜브 하나에 만 원은 하거든요. 게다가 난 물감 두껍게 바르는 걸 좋아해서 1호짜리 그림에도 물감 한 통이 다 들어가요. 예전에 무슨 미대 교순가 하는 사람이 내 그림을 보고 그랬어요. 이 그림들엔 약간의 재능과 감각은 있지만 무게가 없다고. 오래 눈여겨볼 만한 그림은 절대 아니라고요. 뭘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내 그림이 얼마나 무거운데. 전엔 거실 벽에 걸어 놨던 그림이 뚝 떨어진 적도 있어요. 한밤중이었는데 얼마나 큰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는지 집에만 오면 방에서 꿈쩍도 안 하는 형이 다 튀어나올 정도였다니까요. 나중에 보니까 그림 걸어 놨던 못이 다 휘었더라고요.
굉장한 무게로구나.
돈 덩어리죠, 이래저래.
그보다 넌 학교 안 다니니? 지금 시간이면 네 친구들은 학교에 있을 텐데. 아직 세 시밖에 안 됐잖니.
할머니 눈엔 내가 몇 살로 보여요?
열다섯? 열여섯?
스무 살이에요.
열일곱 살이구나.
……난 학교 안 다녀도 돼요.
그런 결정은 네가 하는 게 아냐. 학교 안 가고 달리 할 것도 없잖니? 열일곱 살짜리에겐 하루가 너무 길 텐데 말이다.
할머니 나이쯤 되면 하루가 짧은가요?
짧지. 턱없이 짧아.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수레를 끌고 동네 한 구획만 돌아도 벌써 해가 중천이지. 내 걸음으론 도무지 시간을 따라잡을 수가 없단다. 파지를 줍는 것처럼 시간도 주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런 곳에 맥없이 버리고 있는 네 시간들도 포함해서.
내 시간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쓸모없는 걸 주워다 파는 게 내 일이란다.
이상해요. 남들이 버린 걸 가지고 뭘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게 왜 할머니한테 돈이 되는지도 모르겠고요.
이런 건 그냥 순환일 뿐이야. 사람이 자라고 늙고 죽어 거름이 되는 것처럼 쓰레기들 역시 마찬가지란다. 이사철이라 그런지 고물들이 많이 나왔구나. 네가 도와주는 덕분에 난 일이 수월해 좋다만, 너 정말 안 가 봐도 되겠니?
도와주는 거 아녜요.
그럼?
하루가 너무 길어서 아무 데나 다니는 것뿐이에요.
아무 데나 다니는 것치곤 굉장히 일관성 있구나.
……수레 부순 일 때문에 죄송하기도 하고요.
그건 맘에 담아두지 않아도 된다니까. 네 말마따나 내가 상자를 훔치려고 해서 생긴 일 아니니. 수레는 벌써 다 고쳤고, 이것 봐라, 바퀴도 하나 문제없이 굴러다니지. 오히려 밑판이 더 단단해져서 무거운 것도 실을 수 있게 됐단다. 예전엔 의자만 실어도 밑이 빠졌거든. 지금은 아마 장롱도 실을 수 있을 거야.
훔친 거 아니라면서요. 수레도 수레지만 할머니 허리가…… 그때 형이 할머니를 발로 걷어찼잖아요. 난 형이 그렇게 날뛰는 거 처음 봤어요. 상자만 내리면 될 일인데 수레를 전부 깨부수고 그것도 모자라서 할머니를……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했어야 하는데. 고모부가 뭐라고 거짓말했는지 몰라도 우리 집 돈 많아요. 할머니 치료비랑 배상금 같은 거 다 챙겨줄 만큼 부자예요.
네 고모부는 별 얘기 안 했다. 너희가 시골에서 올라와 힘들게 살고 있단 말밖에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할머니가 속았다고요.
그런 줄은 몰랐구나.
할머닌,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세상을 잘 모르나 봐요.
잘 알았다면 지금처럼 파지 줍는 노인네가 됐겠니? 속았다면 그것도 팔자겠지. 아무려나 수레든 내 허리든 다 괜찮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우리 형,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녜요.
그래, 그래.
……사실은 되게 나쁜 사람일지도 몰라요.
나 때문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거 없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으로 극명하게 갈린다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수월하겠니. 살기 어렵고 난해한 건 사람마다 그 안에 든 게 많아서겠지. 내 안에도 네 안에도,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이 모두 들어있단다. 사람들 마음엔 손바닥만한 접시저울이 있어서 말이다, 그게 오른쪽으로 기울면 선인이 되고 왼쪽으로 기울면 악인이 되거든.
전 열일곱 살이라니까요.
그게 뭐?
지금 그 말은, 일곱 살짜리한테나 통하는 말이라고요. 유치하게 접시저울이 뭐람.
일곱 살짜리도 아는 걸 네가 모르는 것 같아 하는 말이야.
……그럼 할머니 왼쪽 접시엔 뭐가 담겨 있는데요?
글쎄다.
편의점 아저씨랑 우리 고모부가 하는 얘길 들었어요. 할머니는 예전에 되게 유명한 사립 중학교 교감선생님이었다면서요. 할머니 외사촌이 교장이고, 할머니 오빠가 재단이사장…… 그 반대였던가? 아무튼요. 고모부는 할머니더러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가족경영인 학교에서 쫓겨날 이유가 대체 뭐겠냐고요. 어지간한 사고를 치지 않고서야 지금처럼 혼자 거지같이 살 리 없다고.
……사람들은 남의 얘길 너무 쉽게 하는구나.
할머니가 변명을 하지 않으니까요. 할머닌 동네 사람 누구하고도 친하지 않잖아요. 그런 얘기도 하던데요. 할머니가 학교에 있는 동안 어마어마한 돈을 횡령했다고요. 독거노인 돌보미 서비스를 극구 사양한 것도 집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 돈다발 때문이래요. 작년인가 할머니 집에 도둑이 들어서 돈 상자 하나를 훔쳐갔는데 찔리는 게 있어서 경찰에 신고도 못 했대요, 정말인가요?
집에 돈다발이 여기저기 널려있다면 내가 왜 파지를 줍지?
위장이죠.
재미있구나. 아, 거기 있는 건 가져오면 안 돼. 해물탕집 상자를 걷어가는 사람은 따로 있단다.
그럼 저쪽에 있는 전기밥솥은 실어도 돼요?
그래, 그래.
……사실 횡령이나 돈다발 얘기 같은 건 안 믿었어요.
……
고모부는, 할머니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했어요. 길바닥에 드러누웠음 어쩔 뻔했냐고, 강짜부리며 병원에 누웠음 천만 원은 족히 깨졌을 거라면서요. 이전에 유모차를 밀고 가던 할머니가 차에 치이는 걸 본 적 있어요. 저쪽 유료주차장 앞 도로는 엄청 복잡하잖아요, 택시랑 버스가 수시로 들락거리고. 그땐 이사 온 지 한 달도 안 됐을 땐데 버스가 색깔별로 있는 게 신기해서 자주 나가 구경했거든요. 유모차 할머니는 도로를 걷고 있었어요. 버스를 추월한 검은 승합차가 뒤늦게 할머니를 발견했는지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흔들다가 유모차를 들이받았어요. 사람들이 막 비명을 질렀는데 유모차에서 튀어나온 건 아기가 아니라 검은 비닐봉지 뭉치들이랑 깡통 같은 거였어요. 찌그러진 토마토케첩 깡통이랑 참치 캔, 뭐 그런 것들요. 할머니는 바닥에 누워 꼼짝도 안 했어요. 주차장에서 나온 고모부가 그걸 보더니 저 늙은이 계 탔구만, 하고 말했어요. 할머니가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크게 다친 게 분명한데도 고모부는 전부 다 쇼라고, 길바닥 인생들은 저런 식으로 돈을 번다며 욕했어요. 그때 기울어진 건 누구의 저울이었을까요?
누구의 것도 아니었을 거다. 그건 사고였잖니.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면 기울어진 건 내 저울인 게 분명해요. 나는 할머니가 걱정됐지만 구급차를 부르거나 할머니를 돕진 않았어요. 함부로 말하는 고모부가 미웠지만 그게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않았어요.
저울이 기우는 건 흔한 일이야. 아주 사소한 실수 때문에,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기울기도 한단다. 내 왼쪽 접시는…… 그래, 내 접시는 원망 때문에 기울어졌지. 열등감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 게 쌓여도 저울이 기우나요?
어떻게 쌓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뭐에 대한 원망인데요? 누구에 대한 열등감이에요?
넌 가끔 굉장히 멍청해 보이고, 가끔은 아주 영리해 보인단다. 어떤 게 네 진짜 모습이니?
내 안에도 이것저것 쌓인 게 많아서요. 왼쪽으로 기울면 바보가 되고, 오른쪽으로 기울면 천재가 되는 모양이에요.
못됐구나.
뭐, 그런 거죠.
나는 아주 오래 살았지만 그리 현명하게 살진 못한 것 같다. 교장 자리에 있던 사람은 내 오빠였어. 어릴 때부터 잘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랑 연년생이었는데도 고등학교 입학할 즈음엔 벌써 성인으로 보였지. 뭔가…… 그래, 뭔가가 이미 완성된 것 같았어. 또래보다 덩치가 훨씬 작았는데도 풍기는 아우라라든가 그런 게 아주 뚜렷했어. 나는 오빠보다 항상 못나서, 죽기 살기로 노력해봐야 오빠와 겨우 비슷해질 뿐이었단다. 세상엔 참 미묘한 것들이 많아. 무엇이 더 좋다 나쁘다 가늠할 수 없는 부분들인데도 이상하게 열등감이 느껴지지 뭐니. 나는 무엇을 해도 꼬리 같았어. 일 년 늦게 태어난 게 그렇게 억울한 일인지 미처 몰랐다. 사실은 능력의 차이였지만.
할머닌 오빠가 미웠어요?
그랬던 것 같다. 밉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 오빠의 잘못은 한 번뿐이었는데 내겐 그게 영원히 지속될 악의 근원처럼 보였어. 잘못을 조용히 수습할 여러 가지 방안을 나는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단다. 집안사람들은 물론 세상사람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어, 성인의 가면을 쓴 오빠가 실제 얼마나 어리석고 추악한지. 피해자를 위해서라고, 정의를 위해서라고 떠들어댔지만 사실 그건 내 열망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내가 잘난 사람인 걸 보여주기 위해 그 사람을 바닥으로 처박고 싶었던 거지.
알 것 같긴 한데요,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 그래. 학교를 그만둔 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단 소리란다. 집에 쌓인 돈다발이 없단 소리고, 어리석게 늙어버렸단 소리지. 내 접시들엔 이제 후회만 실려 있겠구나.
저거 수레에 실어도 돼요?
안 돼, 저런 건 주인이 있을 수도 있어.
길바닥에 버려져 있는 건데 왜요? 어디 묶여 있는 것도 아니고, 안장이며 손잡이에 녹슨 것 보세요. 바퀴도 다 터졌고. 누가 봐도 고물 자전거잖아요, 갖다 팔면 몇 만 원은 줄 텐데.
그래도 안 돼.
우리가 그냥 가면 다른 사람이 집어 가버릴 거예요.
할 수 없지.
……바보 같아요.
그래도 할 수 없다.
이렇게 고지식하니까 파지 줍는 늙은이가 됐죠. 집에 돈다발도 없다면서요. 할머니 오빠 얘기도 그래요. 잘난 사람한테 열등감 느끼는 게 어때서요?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사람들이 연예인한테 사생활이 어땠네, 얼굴을 갈아엎었네, 악플을 다는 건 다 열등감 때문이라고요. 그 사람들만큼 예쁘고 잘나지 않았으니까 기분이 풀릴 때까지 욕하는 거죠.
설명된다고 해서 그 행동이 옳은 게 되는 건 아니란다.
……내 그림도 그랬어요. 평론가가 내 그림에 대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독특한 구도라고 칭찬하면 사람들은 득달같이 그럼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구도라며 비난했어요. 자유분방한 색감이라고 칭찬하면 색 조합도 모르는 애송이가 제멋대로 휘둘러놨다고, 재료값이 아깝다고 욕했죠. 나는 이쪽에선 천재라 불리고 저쪽에선 백치에 망나니라고 불렸어요. 열등감 때문이 아니라면 그 사람들의 맹렬한 악의를 뭐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네 그림이 그렇게 질시당할 만큼 유명하니?
내 그림은 비싸요.
그럼 그때 상자에 담겨 있던 것들이 전부, 네 그림이었어?
아마도요.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구나. 이래서야 수레가 부서진 것쯤은 원망할 수도 없겠다.
그건 아니에요. 고작 오천 원짜리였는걸요.
폐지 값일 때나 그렇지.
그러니까요. 그건 전부 다 폐지였어요. 무게도 색감도 영혼도 없는 쓰레기죠. 그 사람들 말이 맞아요. 난 뭘 모르는 새끼 원숭이에 불과해요.





《글틴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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